[제 3회 목회자 세미나]
1.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18. 9.
김치현 목사
대구에서 목회자 모임을 시작한지가
3년 반이 되었다. 목사님이 교회의 모든 활동 중에서 목회자 모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주일 말씀은 못하셔도 금요일 목회자 모임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하신다.
몸이 좋지 않아도 어떻게든 컨디션 조절을 해서라도 직접 챙기시는 것을 보면서 목사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으로 알아졌다. 그냥 교회에 와서 말씀 듣고 은혜를 받고 교회를 누리고 사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특히 목회자들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에게 쓰이려고 작정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양육하고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해 온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양이 좀 다르고 성경의 해석과 이해가 좀 다르다고 해서 그런 것을 가치 없게 여기면 안 되는 것이다. 어떤 모양으로든 하나님을 위해서 작정한 사람들이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쓰실 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
생명이 퍼져나감에 있어서 어디서 어떻게 꽃을 피울 지는 우리가 다 모른다. 민들레 홀씨가 날아가는 것을 보면 어디로 날아가서 자리를 잡아 민들레꽃을 피울지 예측을 할 수 없다. 중국에서 한 분이 자기의 생명과 체험을 쏟아내어 놓았는데, 그분이 쓴 글이 한국의 충주에 사는 어떤 분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맡게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무도 모른다. 표면적으로는 어떤 분의 사역이 누구를 통해서 누구를 통해서 이렇게 흘러내려 오지만 사실은 생명은 표면에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씨가 어디에서 떨어져서 어디에서 나는지를 모르듯이 하나님이 하는 일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스라엘 계보에서도 장자권이 있지만 창세기를 보면 실제로 장자들이 상속한 경우가 거의 없다. 이삭도 장자가 아니고, 야곱도 장자가 아니다.
유다도 요셉도 다 장자가 아니다. 장자권이 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모르는 길을 통해서 이렇게 흘러간다. 나는 대구교회에 왔고, 대구교회가 목사님이 거하시는 곳이라서 이렇게 좋은 장소에 자리를 잡았지만 앞으로 어디서 이 생명이 계승되어 나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그릇은 쓰이고 지나가는 것이다.
대구교회도 그릇이니까 꼭 대구교회가 계속해서 중심이 되어야 된다는 법은 없다. 이 중에 누군가가 이 말씀이 자기 인생을 뒤바꿔놓아서 자기 사역지에서 생명의 물줄기가 흐르는 곳이 되게 할 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생각하면서 한분 한분이 너무 귀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는 대구교회 안에서는 잘 하지 않았는데, 이런 정도를 생각하고 각오를 해야지 대구교회도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우리가 표면적으로 자리를 잡았으니까 잘 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면 생명은 언제 날아가 버릴지 모르는 일이다. 중국에 계시는 한분이 한국의 이현래 목사님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전혀 모르는데, 오히려 그 생명의 정신을 더 꽃피우고 더 완성시켰듯이 앞으로도 하나님의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이 다른 것은 다 못하셔도 이 목회자 모임만은 끝까지 소리가 나는 한 생명을 공급하시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번 집회는 라는 책을 교재로 나눌 것이다. 이 책을 처음에 낼 때, 대구교회에 대한 오해를 빼고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대구교회의 귀한 생명의 양식만을 담아서 다른 모든 곳에서 씨가 되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오해를 푸는 대구교회 변론으로 할 것인지 생각을 했는데 아직 오해가 있다면 좋은 것을 주어도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변론으로 책을 썼다.
후에 책을 다시 개정한다면 변론은 빼고 대구교회와 목사님의 경험을 중심으로 모든 사람이 나누어가질 그 양식만으로 써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말씀은 다이제스트 판으로 하는 것이니 책을 읽어서 소화하시고 은혜를 받으시기 바란다. 라는 주제가 첫 장의 주제이다.
에베소서 1장 23절을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엡1:23).”고 말했다. 나는 대학을 다닐 때 성경을 꽤 많이 보았다. 그러나 신학교에 가서 1년이 지나는 동안에 나의 신앙의 기초를 어디에 두고 서야 될지를 모를 정도로 방황하였다. 그때만 해도 매일 아침 큐티를 하는 습관에 따라서 큐티를 했다. 86년 1월에 에베소서 말씀을 가지고 했다. 두란노 서원에서 나온 생명의 양식이 86년 1월에 에베소서 말씀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내가 처음으로 예수를 모르고, 성경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년 동안 갈등하고 흔들리다 보니까 그런 지경까지 갔다.
특히 에베소서 1장 23절의 이 말씀에 부딪쳐서 내 개념에 없는 교회, “교회는 그의 몸이니”까지는 늘 하던 말이니까 좋은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교회를 내가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분명히 성경을 수없이 읽고 지나갔음에도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또 내가 경험한 교회들 안에서 이것이 이런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인 교회! 하나님의 충만이 나타난 교회가 무엇인가? 그것이 나에게 체증처럼 막혀서 에베소서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하는데, 나는 얼마든지 측량할 수 있었다.
사영리 교리를 전하듯이 나를 위해 죽어주셨고, 그분 안에서 정죄가 없고, 죄사함을 받고, 믿음으로 구속받았다고 내가 기계적으로 읊조릴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내 가슴깊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 이른다는 말씀도 늘 좋아하는 말씀이었는데도 이것이 내 인생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생각하게 되니 에베소서 말씀을 하나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예수를 내가 몰랐다. 가슴이 벅차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는 것이 언어의 유희와 같은 수사학을 쓰고 있나 할 정도로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때 내 마음 속에 바울이 말하는 이 예수를 알기를 원한다는 것이 무심결에 기도가 되었다. 이렇게 모르고 나가면 울리는 꽹과리 밖에 더 되겠는가? 예수천당불신지옥을 외쳐보아야 꽹과리 소리밖에 더 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던 중 문득 1년 반전에 만났던 목사님이 생각이 나게 되었고, 다시 이현래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현래 목사님을 소개해 주신 같은 학교 선생님을 통해서 테이프를 받아와서 듣다가 서울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서울 모임에 처음 나갔을 때, 갈라디아서 끝부분을 하고 에베소서 말씀으로 들어가는 차였다. 목사님 말씀을 듣는 데 나는 여전히 모르겠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개인의 완성이 아니고 교회로서 완성되는 것이다. 교회를 모르면 이 성경은 교회의 산물이니까 교회에서 나온 그리스도의 경험이니까 이 교회를 모르면 성경을 알 수 없고, 예수를 알 수 없다고 말씀 하셨다. 교회로 완성된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거리가 느껴졌다.
내 개인이 변화되고 내 개인이 구원받는 것은 와 닿는 이야기인데, 내가 교회로 완성된다는 말이 내 좋은 일인지 남 좋은 일인지를 모르겠는 것이다. 얼마나 이기적인 본성 속에서 예수를 찾았던가가 드러나는 시간이었다. 나중에 가니까 교회의 구원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를 안식케 하는지 알아지게 되고 에베소서 말씀을 다 들을 쯤에 뭔지는 모르는 평안이 오게 되었다. 나 혼자 완성되려고 할 때는 늘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한 문제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데, 교회로 완성되는 것은 마치 퍼즐 조각이 자기를 다듬을 필요가 없이 적재적소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제 자리만 찾으면 된다.
튀어 나온 부분, 들어간 부분, 모난 부분이 다 있지만 그것은 누군가와 연합되기 위해서 그렇게 되어있다. 퍼즐 조각 하나만 놓고 보면 이것을 완성체라고 누구도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퍼즐 조각이 전체 그림 속에 한 부분으로 들어갔을 때, 그때 인생으로 말하자면 나의 모난 것, 튀어나온 것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고, 하나도 잘못된 것이 없었다고 고백하게 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비로소 안식하게 된다.
에베소서 5장 뒤에 가면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6,27).”고 했다.
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씻으려는 노력 가운데 있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가 죽으려고 하고, 내가 깨끗해지려고 하는 노력이었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는 우리를 깨끗케 하는 주체가 우리 자신이 아니고, 주님 자신이라는 것을 알 때 거기서 모든 것이 다 놓아지게 된다. 우리 수고가 다 놓아지게 된다. 당신의 신부로서 교회로서 완성된다는 것이 이런 축복임을 알게 된다.
교회의 구원, 이 생각은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개인 구원이냐? 사회 구원이냐? 이렇게만 생각했지 교회로 완성된다, 새 예루살렘이라는 성으로 완성된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이 교회가 드러나야 사탄의 정체도 드러나게 된다. 교회가 목표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가 목표가 아니면, 왜 선악과가 문제가 되는지도 밝혀지지 않는다. 그냥 먹지 말라고 했으니까 먹지 말아야 된다고 하기 때문에 선악과는 순종하냐, 불순종하냐를 테스트하기 위해서 있는 것으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을 불순종만으로만 설명한다. 하지만 교회로 구원되는 이 자리에 와보면 왜 선악을 아는 열매가, 선악 지식의 나무 열매가 왜 문제가 되는지를 알 수 있다. 교회로 건축되는 데서 그런 문제가 드러나게 된다. 사탄의 방해가 무엇인지, 선악과가 무엇인지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할 때, 그 정체가 드러나게 되어있다.
개인은 갈고 닦아서 성자도 될 수 있고, 새들이 깃드는 사람도 될 수 있고 다 될 수 있다. 사탄이 그것을 막을 필요가 없다. 사탄은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것이지 잘난 개인을 막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 속에서 뛰어난 개인들은 나왔지만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 교회!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라(엡1:23).”고 하는 교회가 이 땅에 나타나고, 이런 교회 안에서 살게 된다는 것은 지고의 복이 아닐 수 없다.
이 교회가 회복되기 위해서 초대교회를 보게 된다. 교회에 나타난 여러 가지 모양들을 보게 된다. 고린도전서 12장 12절을 보면 몸의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고 말했다. 한 몸인데 많은 지체가 있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형태와 모양으로 자리 잡았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 된 시대도 아니고, 교회와 교회 사이에 서로 교통하자면 편지 한 통을 들고 누군가가 찾아가서 한 달씩 가서 겨우 편지 한 통을 전하고 일주일을 유하고 오는 정도였다. 오늘 지금 말씀한 것이 조금 지나면 카톡에 돌아다니는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다.
이런 시대에도 똑같이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이 다 다르다. 한 자리에 앉아 들어도 다 다르다. 사람 귀가 모두 2개가 붙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세히 보면 귀 생김새가 전부 다르게 생겼다. 귓구멍이 다 달라서 들어오는 소리가 다 다르다. 다 다르게 듣는다. 예수님의 열두제자가 다 달랐다.
야고보서와 갈라디아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빌1:8).”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누구에게 한 말이겠는가? 예루살렘 중심으로 있었던 율법주의적인 기독교는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교에 속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유대교인에서 유대교에서 나온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복음을 듣고도 율법을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면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까지 말한 것은 율법주의적인 교회를 두고 말한 것이다. 율법주의적인 교회는 누구의 교회인가? 알고 보면 야고보 교회이다. 야고보서를 보면 정반대로 어떻게 믿음으로 된다는 말이냐 행함이 없는 것은 다 죽은 것이라고 나온다. 초대교회 스펙트럼을 펼쳐보면 극보수에 야고보가 있고, 보수에 베드로가 있고, 조금 진보에 요한이 있고, 그 다음 더 진보에 바울이 있다. 네 사람을 세우면 그렇게 된다.
그 네 사람뿐이겠는가? 열두제자가 있었으니까 더 다양해서 도마 같은 사람은 거의 불교와 흡사한 정도까지 펼쳐지게 된다. 이런 다양한 교회들은 우리가 잘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어떤 대가 밑에서도 이 다양성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아무리 위대한 스승이 제자들을 가르쳐도 그 밑에서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12:12).”는 말씀이 나오게 되었다.
우리가 다르지만 하나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 다양성 때문에 초대교회가 곤란을 겪게 된다. 우리 입장에서는 참 피곤한 일이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 될 수 있는 길이다. 우리가 다 다르다는 것은, 60억 인구가 다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을 나타낼 수 있는, 하나님의 기막힌 작품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와 다르면 피곤하다. 교회 안에서도 간증이 다르면 서로 듣기 싫기도 한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와 같아야 편하니까 획일화 시키려는 사람이 주도권을 쥐면 자꾸 획일화 시키려는 노력이 나오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하시면 다양하게 오곡백과가 열리듯이 펼쳐지는데 사람이 하면 획일화 시킬 수밖에 없다. 초대교회의 이 다양성들이 누군가가 주도권을 잡고 통일시키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객관화되고 표준화되고 교리화되는 길을 가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은 주관적인 경험이다.
이 경험들이 다 다르니까 피곤하여 뭔가 통일이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한다. 그리하여 객관화 시킨 기독교가 승리하게 되었다. 이것은 어떤 종교나 마찬가지로서 널리 퍼지게 하려면 단순화 시키고, 표준화를 시켜야 널리 퍼질 수가 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나오고 소요리 문답이 나왔다. 소요리 문답은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기독교의 핵심 사상을 간결하게 정리해놓은 것이다. 왜 그것이 필요한가? 다음 세대에 전하고 널리 전하고자 하니까 필요했던 것이다.
주관적인 것, 예를 들면 동양의학처럼 자기 혼자 감으로 아는 것은 잘 전파가 되지 않는다. 서양의학처럼 표준화를 시켜놓은 것은 쉽게 전파가 된다. 객관화되고 표준화되고 교리화된 교회가 이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초대교회 때 정통과 이단이라는 프레임이다.
요즘 프레임이론이 선거철에 많이 떠드는데, 어떤 프레임을 덮어씌우면 나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하면할수록 그 프레임에 씌워지게 된다는 이론이다. 기독교는 로마교회가 객관화와 표준화에 성공하면서 정통과 이단의 프레임이 씌워져서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 기독교에는 귀중한 어떤 프레임이 있다.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의 중요한 문제도 있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살았는가 죽었는가에 대한 문제도 있다.
성경에도 없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프레임에 씌워져서 귀중한 가치들이 모두 매몰되게 되었다. 여기서 다른 프레임을 가지고 와야 된다. 생명과 생명의 연합이 교회를 살릴 수 있는 새로운 핵심 가치로 전파해야 된다. 정통과 이단의 논쟁을 한참 하다보니까 이 안에서도 식상하게 되었다.
무엇을 정통이라고 할 것인가? 누가 정통이라고 말할 것인가? 누가 이단이라고 말할 것인가? 대부분 정통과 이단을 말한 것은 정치적인 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역사는 승자가 쓴 것이라고 한다. 이긴 자들이 쓴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이 만년 넘게 살아왔지만 그런 역사들은 백인들이 들어와서 거론도 되지 않는 역사가 되어버렸다. 고고학자들에 의해서나 조금 언급되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흐르는 메인 스트림밖에 모른다. 큰 강물밖에 모른다.
진짜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은 큰 강물을 퍼마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디선가 땅 밑으로 스며들었다가 다시 솟는 골짜기에서 나는 샘물이 언제라도 마실 수 있는 생수가 되는 것처럼 생명도 그러하다. 바울은 다른 프레임으로 말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바울도 사도냐 아니냐,
예수님을 따랐느냐 안 따랐느냐가 중요해서 이런 프레임 속에서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고 무시당했던 사람이다. 그때 바울은 다른 프레임을 제시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말했다. 다른 역사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 그것이 십자가의 말씀인가, 예수를 우리에게 영광스럽게 비추는 말씀인가,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빌립보서 3장 18절에 보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리라(빌3:18).”고 말했다. 단지 괴로워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그 일들 때문에 나는 눈물을 흘리고 괴로워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런 프레임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교회를 보아야 된다. 거기에 십자가가 있는가? 생명이 있는가? 예수와 함께 다시 산 것이 있는가? 이것을 보아야 된다.
성경에 생명이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성경 전체의 주제처럼 흐르고 있다. 에덴동산에 생명나무가 있었고, 생명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이 오신 것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고 말했으니까 생명이 주제이다. 마지막 심판도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계20:15).”고 했다.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했으니까 이 생명이라는 것이 주제이다.
내가 다는 모르지만 내가 아는 한 이 ‘생명’이라는 주제를 조직신학의 한 주제로 쓴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대신학자들의 주제로 보아도 신론, 인간론, 구원론, 지혜론, 교회론으로 나가도 생명이라는 주제를 한 주제로 활용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단지 생명의 성령이라는 부수적인 주제로는 있을 정도이다. 이것이 얼마나 에덴동산에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감추어져 있느냐는 것이다.
이 감추어진 것이 회복되지 않고서는 참 교회가 회복될 수 없다. 교회의 사명은 동산에 감추어졌던 이 생명나무를 가지고 오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거스틴(St. Augustine)이 처음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사람들을 구분할 것인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진리라고 생각하고 당연히 여기고 있는 것들 안에는 문화가 너무 많다. 이런 것을 빼고 본질적인 것을 알아서 본질에서는 일치를 보고,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주어야 되고, 그 외 모든 것에는 자비를 베풀어야 된다는 논리가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 구호가 되었다.
본질적인 것은 일치를 봐야 된다. 무엇이 본질인가? 한국에 온 선교사들이문화가 다르니까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그 앞에서 절하는 것을 보고 당장 그들의 관념대로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였다. 한국 사람들의 제사는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의 표시이고 또한 실제적인 효과는 제사를 통해서 형제들이 만나지는 것이다. 부모만 세상을 떠나도 형제들은 남남되기가 십상이다. 제삿날은 모여야 되니까 그날 모여서 우리는 한 아버지 밑에 있다는 것을 되새기는 것이다. 형제를 뜻하는 그리스어 아델포스(Adelpos)라는 단어에서 델포스는 자궁이라는 뜻이다.
한 자궁에서 나왔다는 말이니까 우리가 한 자궁에서 나온 형제라는 것을 되새기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 눈에는 그런 제사풍습이 우상숭배로 보였고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고, 복음의 본질이 들어오는 문을 바늘구멍만큼 좁게 만들었다. 지금에 와서도 그런 것을 우상숭배라고 생각하는 교파도 있다. 카톨릭이나 진보적인 교파에서는 문화를 잘못 이해했다고 한다. 조상을 사랑하는 고유한 미풍양속인데, 그것을 서양 사람들은 머리를 숙여서 절하는 개념이 없으니까 그렇게 오해를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한 예이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것이 알고 보면 문화일 수가 많다. 그런 비본질적인 것을 내려놓지 않으면 만나지지 않을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쓰는 수많은 교파, 3만개가 넘는 교파들이 예수를 구세주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어디서 만날 것인가? 가장 본질적인 것에서 만나야 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어떤 자리에서 참 교회로 회복되고, 어디서 모든 교회들이 만나야 되는가? 이것을 대구교회가 걸어온 길을 통해서 살펴보겠다. 1) 처음 사랑의 회복 첫 번째로, 계시록 2장 4절에서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고 한 말씀이 있다. 대구교회가 오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처음 사랑이 회복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처음이라는 프로토스라는 단어는 시간적으로 처음도 있지만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으뜸인 것, 가장 중요한 것, 질적으로 처음, 내용에서 처음’이라는 의미가 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한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회복해야 된다는 것이다. 교회 회복 가운데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가? 바울의 고백으로 하자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라고 했으니까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는 이것이 가장 으뜸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으뜸으로 회복이 되어야 되는 것이다. 이현래 목사님에게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 사역의 전환과 인생의 큰 전환을 가지고 왔던 것이 워치만니의 라는 책이다. 그 책이 지금은 제목이 으로 다르게 나왔다. 누구나 성경을 읽었을 것인데, 목사님은 그 책의 내용보다도 어떻게 이 사람은 아브라함보다도 아브라함을 더 잘 알고, 이삭보다도 이삭을 더 잘 아는 것 같고, 야곱보다도 야곱을 이렇게 더 잘 알 수가 있는가?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알 수가 없는 것이라는 것이 보여지면서 책 내용이 아니고, 어떤 사람이 비쳐온 것이다. 이것은 결국 사람의 문제이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간다는 것은 일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냐가 먼저이고, 사람 된 만큼 보이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셨다. 똑같이 성경을 읽어도 어린아이에게는 어린아이만큼 보이고, 장성한 사람에게는 장성한 사람만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나서 성경을 애써 연구하려는 노력을 내려놓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성경을 애써서 연구한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애를 쓰건 쓰지 않건 결국 나만큼 보여지는 것이다. 뼈를 깎는 아픔이라는 말을 들어도 자기 안에 그런 경험이 없으면 그 말은 그렇게 들리지 않는다.
바늘에 찔린 아픔이 내 경험의 최대한의 경험이었으면 뼈를 깎는 아픔이라는 말을 들어도 나에게는 실제로 바늘에 찔린 아픔으로 연상이 된다. 남자는 해산의 수고라는 말을 아무리 들어도 배탈 났을 때밖에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배가 뒤틀린다고 하니까 식중독 걸렸을 때를 상상하는 것밖에는 안 된다.
우리가 그 사람이 아니면 알 수가 없는 것이 하나님 말씀이다. 그래서 나만큼 보이고 나만큼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전에 목회를 하시고, 또 C.C.C.에서 전도활동을 하고 일에 둘러싸여 있다가 일이 아닌 사람이 보이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보이게 되어 주님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외에 다른 관심이 다 사라지게 되었다. 이것이 처음 사랑이 회복되는 시간이었다. 가장 귀중한 것을 붙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 다른 모든 것이 나아지니, 대구 C.C.C.에 와서 여러 간사들과 또 이전에 나간 간사들이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여러 좋은 충고나 조언을 해주는데, 호의를 가지고 해주는 충고나 조언이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조심하고, 이런 행동을 조심하라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아무 관계가 없게 느껴진 것이다. 그때 고린도전서 2장 15절에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는 말이 무슨 말인지가 알아졌다는 것이다. 조언이나 충고가 무슨 말인지는 다 알겠는데,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해당 사항이 없는 신기한 자리를 경험했다고 이야기한 것을 들었다. 교회는 이런 생명의 결과물이다. 교회를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에게는 일밖에 남지 않지만, 일생 주님의 아름다움을 쫓아서 사는 것 외에 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드러나고,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 거기서 나타나게 된다. 2) 생명 양식의 회복 두 번째는 계시록 2장 7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27).”고 했다. 교회가 회복되려면 생명 양식이 회복되어야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설교를 잘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생명 양식이 회복되어야 된다는 말이다. 한국 개신교는 130년이 넘어갔는데, 지금 교회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상식이 기대하는 수준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 드러나고 있다. 왜 그런가? 중간에 누가 잘못했다거나 이런 저런 문제를 제기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다.
심은 씨가 그렇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느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는 말씀이 나온다. 그런데 성령으로 시작한 일이 어떻게 육체로 마쳐지겠는가? 성령으로 시작한 일은 육체로 마쳐질 수가 없는 것인데,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묻는 물음은 너희의 시작이 육이었기 때문에 육이 나오는 것이라는 말이다. 율법적인 교회를 향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이렇게 살아야지 이렇게 해야지 하는 우리의 의지를 동원하는 것은 사실은 모두 육에서 난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좋은 말씀을 듣고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것은 다시 율법적으로 되는 길이다. 교회가 참으로 바뀌자면 양식이 바뀌어야 된다. 이 양식은 설교를 더 잘해서 양식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바뀐 사람에게서 나오는 양식이 다른 양식이 된다. 교회는 말씀 잔치이다. 말씀으로 즐거워하는 곳이다. 말씀이 풍성히 거하면 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만족도가 매우 높아지게 된다. 참 하나님의 말씀이 흐르고 있으면 행사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교회가 저절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그것이 안 되니까 자꾸 그 공백을 다른 것으로 메우려고 하다 보니까 나중에 가면 다른 프로그램으로 꽉 차서 무엇인지를 모르게 된다. YMCA, YWCA는 Young Men's Christian Association, Young Women's Christian Association이니까 크리스천 모임이다. 그런데 지금 가보면 전부 요가를 하고 헬스를 한다. 다른 프로그램들이 들어와 있다. 거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주에 있는 한인 교회들을 보면 실상은 커뮤니티 센터이다. 한인들이 교회에 가지 않으면 인간관계를 가질 수가 없다. 장사도 할 수가 없고 아무것도 안 된다. 교회를 다니건 안 다니건 적을 두어야 되니까 커뮤니티 센터가 되고, 이런 필요를 목회자가 잘 채워주면 교회가 부흥한다.
그런 요구를 들어주다 보니까 온갖 것이 다 들어와 있는 커뮤니티 센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계18:2).”고 한다. 그 성을 들여다보니까 온갖 악한 영과 개구리와 더러운 것과 새의 영과 온갖 것이 다 뒤섞여 있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음녀라고 했다. 음녀는 무엇인가? 남자가 여럿인 여자이다. 여러 가지가 뒤섞인 것을 음녀로 묘사한 것이다. 교회가 그렇게 되는 것은 한 순간에 그렇게 될 수가 있다.
생명양식이 회복되지 않으면 그 허전함과 그 허탈함을 금방 다른 것으로 무슨 행사를 해야 되고, 무슨 프로그램을 해야 되는 것으로 나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젊은 사람들일수록 다른 욕구들이 많다. 대구교회도 목사님이 하여튼 말씀이 흘러야 된다고 하신다. 우격다짐 같지만 하나님 말씀이 흘러야지 산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 어떻게 말씀이 꿀송이처럼 단 기쁨이 될 수 있는가?
다른 오락이 필요 없게 될 수 있는가? 목사님이 충주에 있을 때, 설교를 잘한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도무지 반응이 없으니 회의가 생긴 것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꿀송이처럼 달다고 했는데 왜 이런가? 왜 사람들이 이 말씀을 달게 받지 않는가? 이렇게 하다가 과연 나에게는 꿀송이처럼 단가 생각하니 그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허탈하여 책방을 들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이현래 목사님의 성경 해석법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다른 점이 있다. 보통 강해설교를 잘하는 목사님들은 성경 텍스트를 그 시대상황과 충실히 이해하여 이것이 오늘날 나의 상황에 어떻게 매치되는가, 내 상황과의 연결점을 잘 찾아서 우리 상황으로 가져오는 강해설교가 잘하는 설교이다.
그런데 이현래 목사님은 정 반대의 방법으로 말씀을 하신다. 다시 말해서 내 안에 있는 경험을 성경 속에서 확인하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라고 하였다. 예수님만 했다고 말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험이 성경 속에서 증거를 받아야 된다. 성경을 연구해서 내 삶에 가지고 오면 나와 성경이 다르다. 지키려는 노력이 되고, 율법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껍데기를 고치는 노력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면할수록 외식이 된다. 필연적으로 외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성경 이해방법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험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두고, 아는 것만 보이게 된다.
내 경험 안에서 보이는 것과 아는 것, 그것만을 말하면 그 말씀이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면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신이 나고, 듣는 사람도 말씀과 말씀 전하는 자가 분리되지 않는다. 우리는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지나서 수많은 스승들을 만났다. 그 스승들이 가르쳐 준 지식은 대부분 그 스승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지식만 배우고 스승은 한 번도 만나지 않고 버리고 살 수 있다. 내가 신학교를 다니면서 목사님을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서 말씀을 들을 때, 당시에는 말씀만 들으려고 했지 여기까지 올 줄 생각을 했겠는가?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혹시라도 그럴까봐 절대 내 간증을 하지 않았다. 내가 목사님을 좋다고 했다가 발목을 잡힐까봐 보따리만 챙겨서 나간다는 생각만 했다.
그런데 말씀을 듣다 보니까 이상하게 이 말씀과 사람을 분리할 수가 없었다. 말씀을 좋아하니까 사람이 좋아지고, 내가 이 말씀을 가지고 살자면 이 사람을 버리고 말씀만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덫에 걸린 것이다. 좀 과하게 표현하면 그렇다. 거기서 꿀송이 보다 더 달게 느껴지는 것이 나오게 되었다. 설교를 같은 내용 두 번만 들어도 이미 했던 것이 된다. 어디서 들었던 것이 된다. 남이 한 것을 이야기해도 어디서 들었던 것이 되어서 설교자의 어려움이 많다. 교수들은 1년만 지나면 새 학생이 와서 작년에 썼던 똑같은 노트를 써먹어도 되는데 설교는 계속 같은 사람들이 앉아있으니까 같은 예화도 두 번을 써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어렵다.
이현래 목사님은 했던 이야기를 10번만 더 들으면 100번이 되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 보면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고 했다. 자기 생명이기 때문에 같은 말을 해도 수고롭지 않다. 내가 같은 설교를 두 번 하면 지식이기 때문에 내가 지겨워서 못한다. 그런데 내 생명이라면 두 번 세 번을 해도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듣는 사람에게는 더 유익하고 안전하게 된다. 말씀을 전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말씀 속에서 확인할 때, 그 말씀이 내 자신인 사람으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에베소서 5장에 있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5).”고 했다.
에베소서 5장은 남편이 아내에게 한 말이지만 말씀을 전하는 자가 마찬가지로 자신을 주는 것이 아니면 말씀 듣고 떠날 사람들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나를 먹으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생명 양식의 회복이다. 3) 복된 관계의 회복 세 번째는 복된 관계의 회복이다. 그렇게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주었다면 말씀 받는 사람과 생명의 관계가 된다. 성경 강해를 하고 지나갔으면 나와 아무 관계가 없을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내 자신이었다면 말씀 듣는 자와 나는 생명의 관계가 된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언제든지 보따리 싸서 떠날 수가 있는데, 생명을 주면 생명의 관계가 되기 때문에 거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나오게 되고, 신랑과 신부의 관계가 나오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졌던 그 관계가 교회 안에서 재현될 수가 있다. 그런 관계,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모든 것을 버리고 쫓을 만큼, 밭에 묻힌 보화를 발견하고 좋아했던 것처럼, 그런 관계가 교회 안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지극한 만족을 주게 된다. 이런 관계는 계급에 의해서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니다.
죽는 날까지 우리는 서로 필요로 하는 관계가 된다. 대구교회를 다니다가 떠난 사람들도 꽤 있다. 이런 분들에게서 듣는 이야기가 대구교회를 떠났지만 여기서 가졌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다른 데 가서 이런 관계를 복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최근에 미주에서 온 한 분이 교회를 떠났는데, 우연히 지나가다가 화장실을 가고 싶어서 들렸다가 우리를 만났다. 지금도 자기는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최근에 또 교회로 돌아온 한 형제도 자기의 모든 것을 던져서 사회변화를 위해서 일했지만 나중에 가니까 허탈한 것만 남고, 어디를 가도 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어디서 이런 관계가 나오는가? 자기 자신을 주는 그 생명의 양식 때문에 이런 관계가 나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성령의 열매와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모든 축복은 어느 항목을 보아도 관계의 산물이다. 영원한 영생이라는 것도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성령의 열매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도 닦으면서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 화평, 기쁨이 혼자 나오겠는가? 모두 관계의 산물이다. 이 복된 관계가 회복될 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서 경험되어지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 이의 충만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된다.
[ 기 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이 생명의 양식 가운데로 불러주시고, 우리가 가장 으뜸인 것을 회복하게 해주시고, 복된 관계 안으로 이끌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이 세상에 많은 교회들이 널려 있지만 참으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 이의 충만이 되어있는지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셔서 몸이 되게 하시고, 주님의 몸으로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신 이의 충만이 나타나지는 이 놀라운 경험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교회를 구원 안으로 부르신 것을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