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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비담심론 제8권
9. 수다라품(修多羅品)[4], 37각품, 4전도, 5견
[37각품(三十七覺品)의 성품]
【문】세존께서는 삼십칠각품(三十七覺品)을 말씀하셨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성품이 있는가?
【답】
맑은 믿음과 정진과 염과
지혜와 기쁨과 홀가분한 마음과
각품(覺品)에 상응하는 무관심[捨]과
사(思)와 계와 삼마제(三摩提)가 있다.
‘열 가지 일이 있으니, 나머지 각품분(覺品分)은 모두 그 가운데 들어간다’ 했는데,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믿음[信]’이란 신근(信根)과 신력(信力)을 말한다.
‘정진(精進)’이란 정단(正斷)ㆍ정진근(精進根)ㆍ정진력(精進力)ㆍ정진각지(精進覺支)ㆍ정방편(正方便)을 말한다.
‘염(念)’이란 염근(念根)ㆍ염력(念力)ㆍ염각지(念覺支)ㆍ정념(正念)을 말한다.
‘지혜(智慧)’란 염처(念處)ㆍ혜근(慧根)ㆍ혜력(慧力)ㆍ택법각지(擇法覺支)ㆍ정견(正見)을 말한다.
‘기쁨[喜]’이란 희각지(喜覺支)를 말하고,
‘홀가분한 마음89)’이란 의각지(猗覺支)90)를 말한 것이다.
‘무관심[捨]’이란 사각지(捨覺支)를 말하고
‘사(思)’란 정사유(正思惟)를 말한다.
‘계’란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을 말하며,
‘삼마제(三摩提)’란 여의족(如意足)ㆍ정근(定根)ㆍ정력(定力)ㆍ정각지(定覺支)ㆍ정정(正定)을 말한 것이다.
비바사(鞞婆娑)에서는 신업과 구업이 공통되지 않는 까닭에 계(戒)에 두 종류가 있다고 주장해 열 한 가지[十一事]를 말한다.
【문】왜 이 여러 법은 많은 종류로 건립되는가?
【답】
장소와 방편과 자재가 있기 때문이며
근기의 무름과 예리함에 의해서도 그러하니
견도(見道)와 수도(修道)가 있는 까닭에
삼십칠도품을 말하게 된다.
‘장소[處]’라 한 것은 바른 인연을 말한 것이며, 장소가 세워지는 까닭에 염처(念處)를 말하게 된다.
‘방편(方便)’이란 바른 방편인 까닭에 정단(正斷)을 말한다.
‘자재[自在]’란 자재로운 공덕인 까닭에 여의족(如意足)을 말한다.
‘무름[軟]’이란 믿음 등 다섯 가지 법을 말하며, 무르다[軟]는 것은 근기(根機)를 말한 것이다.
‘예리함에 의해서도 그러하다’라고 했는데 이 모든 근기가 만약 증상될 경우 그것을 힘이라 말한다. 그런 까닭에 증상의 뜻을 근(根)이라 말하고 잠재우기 어렵기 때문에 힘이라 말하는 것이다.
[5근(根)]
【문】어떤 것이 근(根)이며 그 순서는 어떻게 되는가?
【답】믿음과 정진과 염(念)과 선정과 지혜이다.
이 근의 순서를 말하자면, 인과를 믿는 것은 능히 모든 선한 법을 닦는 근본이 될 수 있으니 그런 까닭에 먼저 믿음부터 말하는 것이다.
믿고 나서 악을 버리고 선을 닦게 되는 까닭에 정진방편하고,
정진방편하고 나서 마음은 경계에서 염주(念住)하고,
마음이 머물고 나서는 대상에 대해 어지럽지 않게 되고,
어지럽지 않게 되면 관찰을 감능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법에 대해 관찰하고 나서 마음이 안정되고,
마음이 안정되고 나면 이에 따라 바른 염이 머물게 되고,
바른 염이 머물게 되면 올바르게 감능하게 되고,
올바르게 감능하게 되면 업과(業果)를 믿게 된다.
이것은 역순차제라고 말한다.
【문】어떻게 오근(五根)이 세워지는가?
【답】바탕[地]이 있는 까닭에 세워지는 것이다.
[바탕[地]]
초업지(初業地)는 신수(信修)이니
[수(修)는 마땅히 공훈(功勳)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이른바 믿음으로 초업을 튼튼하게 하니, 아래의 일체의 수(修) 역시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모든 뛰어난 법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견지(見地)는 정진수(精進修)이니, 도를 밝히는 일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박지(薄地)91)를 염수(念修)라고 말하니, 염을 지어 탐ㆍ진ㆍ치를 엷게 하기 때문이다.
이욕지(離欲地)92)를 정수(定修)라고 말하니, 정으로써 근본선을 닦는 까닭이다.
무학지(無學地)93)를 혜수(慧修)라고 말하니, 지혜로써 영원히 무명을 여의기 때문이다.
힘을 설명함도 역시 이와 같다.
[견도(見道), 도지(道支), 8정도]
‘견도(見道)’라고 했는데, 견도란 도지(道支)를 닦는 것을 말한다. 도를 밝히는 수행을 하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른바 바른 견해[正見] 내지는 바른 선정[正定]이 그것이니,
그는 법에 대해서 자상과 공상을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기 때문에 정견이라 말하며,
바른 뜻을 사유하는 까닭에 이를 정사유(正思惟)라 말한다.
삿된 생활[邪命]에 속하지 않는 상태, 곧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행이 소멸되고 거기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에 이를 정어(正語)라 한다.
삿된 생활에 속하지 않는 상태, 곧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악업의 작용이 소멸되고 거기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에 이를 정업(正業)이라 한다.
삿된 삶이 소멸되고 거기에서 벗어나게 되기 때문에 이를 정명(正命)이라 한다.
바른 방편을 능히 감내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정방편(正方便)이라 하고
바른 염을 연하여 잊지 아니하게 되는 까닭에 이를 정념(正念)이라 하며,
바르게 잡아 일심으로 염하는 까닭에 이를 정정(正定)이라 한다.
그 차례는 수다라에서 설명한 내용과 같다.
정견(正見)이라고 했는데, 그 정견은 바로 도(道)이면서 또한 도지(道支)이다. 다른 것은 모두 도지일 뿐 도는 아니다.
정(定)과 같은 것은 선이면서 또한 선지(禪支)이기도 하다.
나머지는 선지일 뿐 선정은 아니다.
설명했듯이 여덟 종류의 선정도 또한 이와 같다.
[수도(修道), 각지(覺支)]
‘수도(修道)’라고 했는데, 수도란 각지(覺支)를 말한 것이다.
수도에 의해 끊는 번뇌종인 아홉 단계의 번뇌는 문득 끊게 되고 극치의 깨달음인 까닭이다. 깨달음의 뜻인 까닭에 각지라 말한 것이다.
저 택법각지(擇法覺支)는 깨달음인 동시에 또한 각지이기도 하다.
나머지는 각지일 뿐 깨달음은 아니다. 그 순서는 수다라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왜 희(喜)ㆍ의(猗)ㆍ사(捨)를 각지라고 내세우고 도지(道支)는 아닌가?
또한 정사유ㆍ정어ㆍ정업ㆍ정명을 도지로 내세우면서 각지는 아닌가?
또한 믿음은 둘 다 아닌가?
【답】깨달음에 수순하기 때문이다. 내지는 연을 알게 되어 늘 기쁨이 생기게 되고, 기쁨이 생기게 되면 늘 깨달음이 생기나니, 즉 모든 일을 쉬게 하고 무관심해지면 늘 깨달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 나아감을 수순하는 것이 아니므로 도지는 아니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 이것이 도의 내용인데 기쁨은 떠나가는 것이 아니고 즐기고 안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홀가분해지고[猗]ㆍ무관심해진다[捨]는 것은 전적으로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도지라고 하지는 않는다.
계의 경우는 도(道)라는 수레바퀴에서 바퀴통에 해당되는 까닭에 이를 도륜지(道輪支)라 내세우나, 상응하지 않는 까닭에 각지는 아니다.
또한 바른 생각[正思惟]은 바른 견해[正見]를 채찍질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순서에 따라가며, 이는 깨달음이 아닌 까닭에 도지(道支)로 내세우지 각지로 세우지는 않는다.
믿음은 비로소 제도(濟度)를 익히는 일이며, 깨달음과 도는 이미 건넌 상태인 까닭에 모두 내세우지 않는다.
[법과 37도품의 관계]
‘이것을 37도품이라 말한다’라고 했는데,
그것은 이 열 가지 법이 각기 다르고 또 일이 따로 구별되는 까닭에 세존께서는 서른일곱 가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그 초업지(初業地)를 염처(念處)라고 말하니, 몸 등에 대해서 분별해서 닦는 까닭이다.
난법(煖法)을 바른 방편[正方便]이라 말하니, 성인의 지혜의 불이 온기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정법(頂法)을 여의족(如意足)이라 말하니, 정법을 얻으면 공덕이 자재롭기 때문이다.
인법(忍法)을 근(根)이라 말하니, 그것이 앞으로 나아가며 증장하기 때문이다.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을 힘이라 말하니, 그것에 머물면 그 기세를 굴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견도(見道)를 도지(道支)라고 말하니,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수도(修道)를 각지(覺支)라고 말하니, 깨달아 알기 때문이다.
또한 범주가 점차로 증장되기 때문에 먼저 각지를 말하고 다음으로 도지를 말한 것이니, 넷이고 내지 여덟이다.94)
이 여러 각품(覺品)은 다음 게송에서 설명하고 있다.
2선(禪)은 삼십육이며
미래선(未來禪)도 또한 그렇고
3선ㆍ4선과 중간선은
모두가 35이다.
‘2선은 36이다’라고 한 것은 정사유를 제외한다는 것이다. 이 경지에서는 사유가 없기 때문이다.95)
‘미래선도 또한 그렇다’라고 한 것은 미래선에도 또한 서른여섯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희를 제외하니, 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3선과 4선과 중간선은 모두가 35이다’라고 한 것은 제3선ㆍ제4선 및 중간선은 희각지와 정사유를 제외한 35도품만 해당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초선에서는 일체를 말하게 되고
무색정에서는 서른둘이며
최상의 경지에는 스물둘이니
욕계에서도 또한 그렇다.
‘초선에서는 일체를 말한다’라고 한 것은 초선의 경지에서는 37도품을 갖추게 됨을 말한다.
‘무색정에는 서른둘이다’라고 한 것은 세 가지 무색계의 선정에서는 희각지(喜覺支)ㆍ정사유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을 제외한 서른두 가지를 갖춤을 말한 것이다.
‘최상의 경지에는 스물둘이다’라고 했는데,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는 도지(道支)와 각지(覺支)가 없다. 비록 도지는 유루이지만 각지(覺支) 후에 설함은 무루(無漏)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수다라에서 설하기를
“37각품은 오로지 무루(無漏)인 까닭이다”라고 한 것이다.
다시 수다라에서
“부정관(不淨觀)을 닦게 되면 함께 염각지(念覺支)가 갖추어진다”고 설하였다.
그것은 부정관으로 마음을 조정하기 때문이며, 그런 다음에 각지(覺支)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욕계도 또한 그렇다’라 한 것은 욕계에도 역시 스물두 가지를 갖추고 있음을 말한다.
[4식(食)]
【문】4식(食)은 어느 경지에 있는 것이며 어떤 특성이 있는가?
【답】
모든 음식 가운데 단식(摶食)은
욕계이면서 3입(入)이라 말하는데
식식(識食)과 사식(思食)과 촉식(觸食)
이들 식은 유루라고 말한다.
‘모든 음식 가운데 단식(摶食)은 욕계의 삼입이라 말한다’라고 한 것은
단식(摶食)은 곧 욕계 가운데 세 가지 입처(入處)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냄새ㆍ맛ㆍ촉감이 그것이다. 이에 연관된 일은 열세 가지가 있으니, 열한 가지 촉과 냄새와 맛이다.
그 호응하는 바를 따라 혹은 풀ㆍ나무ㆍ뿌리로 혹은 과실 혹은 오곡(五穀)ㆍ즙(汁) 혹은 향기와 온기(溫氣)로써 삼으니, 이와 같은 종류의 촉감을 말한다.
‘식식과 사식과 촉식 이들 식은 유루라고 말한다’라고 한 것은
식(識)과 사(思)와 촉(觸)이 만약 유루일 경우 생(生)의 상속을 지니고 존재를 불러오는 까닭에 이것을 식(食)이라 표현한 것이다.
무루의 촉 등은 비록 여러 근(根)과 4대(大)를 포섭하고 유지하기는 해도 존재를 부르지는 않는다. 존재를 단절한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식(食)이 아니다.
【문】왜 색은 식(食)이 아닌가?
【답】색은 거친 까닭에 식(食)이 아니며, 색을 허무는 까닭에 식이라 표현한다.
색은 궁극적으로 4대ㆍ6근(根)을 거두어들일 수 없는데, 거두어들인다는 뜻 이것이 식(食)의 내용이다.
이 내용은 「택품(擇品)」에서 곧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삼삼매(三三昧)와 행]
【문】삼삼매(三三昧)96)는 삼매마다 몇 가지 행이 전개되는가?
【답】
무원삼매(無願三昧)에 열 가지 행이 있고
두 행은 공정(空定)에 속하며
네 가지 행을 무상삼매(無相三昧)라고 하니
이것을 성스런 행[聖行]이라 한다.
‘무원삼매에 열 가지 행이 있다’라고 한 것은 무원삼매는 열 가지 행으로 전개됨을 말한 것이다.
이른바 무상행(無常行)ㆍ고행(苦行)ㆍ집제의 네 가지 행ㆍ도제(道諦)의 네 가지 행이 그것이다.
‘두 행은 공정에 속한다’라고 한 것은 공삼매(空三昧)가 공행(空行) 및 무아행(無我行)으로 전개됨을 말한 것이다.
‘네 가지 행을 무상삼매라고 하니, 이것을 성스런 행이라 한다’고 한 것은 무상삼매는 멸제(滅諦)에 얽힌 네 가지 행으로 전개됨을 말한 것이다.
삼삼매은 이미 정품(定品)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사전도(四顚倒)]
【문】사전도(四顚倒)는 어떻게 끊으며 어떤 특성이 있는가?
【답】
이른바 저 네 가지 전도는
견도에서 끊음을 알아야 한다.
삼견(三見)의 자성이 불어남을
실상을 본 자는 분별하게 된다.
‘이른바 저 네 가지 전도는 견도에서 끊음을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네 가지 전도는 모두 근본 뿌리를 멀리서 찾지 않는 까닭에 또한 괴로운 곳에서 일으키는 망상인 까닭에 견도에서 끊게 된다.
비바사바제(毘婆沙婆提)97)는 열두 가지 전도가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무상(無常)한 것을 항상한 것으로 보는 전도[無常常倒]에 생각의 전도[想倒]와 견해의 전도[見倒]와 마음의 전도[心倒]로 구별한다.
나머지도 역시 이와 같이 구별한다.98)
그 가운데 여덟 가지 전도는 도를 밝히는 단계에서 끊게 되니,
곧 무상(無常)ㆍ무아(無我)에 대한 여섯 가지와 이 두 가지에는 각각 심도ㆍ상도ㆍ견도가 있기에 여섯이 된다. 고통을 즐거움[樂]이 있다고 보는 견도와 더러운 것을 청정하다고 보는 견도가 그것이다.
네 가지 전도는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의 단계에서 끊게되니, 이른바 고(苦)와 부정(不淨)과 상도(想倒)와 심도(心倒)가 그것이다.
낙(樂)과 정(淨)의 견해는 오로지 견제단(見諦斷)이다. 곧, 낙(樂)과 정(淨)은 견도로 끊지만 상(想)과 심(心)은 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전도라는 것은 견의 성품을 지닌 까닭이다.
생각과 마음은 견에 의해 어지러워지는 까닭에 전도를 말하는 것이다.
수(受) 등도 비록 잘못된 견해로 어지럽혀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세간에 얽매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도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만약 ‘수다원(須陀洹)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 어찌하여 번뇌에 물들고 집착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번뇌를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다.
가령 재가자로서 수다원(須陀洹)의 경지를 얻은 자가 아(我)에 대한 전도를 끊는다고 해도 남녀의 결합할 마음이 일어난다면, 이는 법이 아닌 생각에서 남녀의 결합을 일으키는 것과 같으니, 그것도 역시 그렇다.
말하자면 위에서 설한 생각[想]과 마음[心]의 전도가 아님도 역시 이와 같다.
‘삼견(三見)의 자성이 불어남을 실상을 본 자는 분별하게 된다’라고 했는데,
이 네 가지 전도는 세 가지 편견으로써 자성을 삼는다고 해도 세 편견 가운데 일부를 전도라고 설하니, 이는 진실을 보는 자가 건립하는 바이다.
【문】왜 그렇게 되는가?
【답】증상되기 때문이다. 혹은 그의 편견이 증장된 부분에 전도를 건립한 것이다.
이른바 몸에 대한 편견 가운데에는 아견(我見)을 전도라 세우며 아소견(我所見)을 세우지는 않는다.
또 변견(邊見) 가운데서는 상견(常見)을 전도라고 세워도 단견(斷見)을 세우지는 않는다.
견취견(見取見) 가운데서는 낙견(樂見)과 정견(淨見)을 전도라고 세워도 다른 것을 세우지는 않는 것과 같다.
[나쁜 것을 좋다고 헤아리고 열등한 것을 뛰어난 것이라 헤아리는 등 이와 같은 일체는 견취가 되지만, 단지 그 정도가 가볍기 때문에 전도라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
【문】왜 다른 잘못된 견해는 전도라고 세우지 않는가?
【답】세 가지 일 때문에 전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결단을 내리는 일과 망령되게 규정하는 일[妄置]과 오로지 거꾸로만 생각하는 일이다.
[오로지 거꾸로만 생각하는 일이란 정반대를 말하니, 아래의 것을 뒤집어서 위의 것으로 삼는 것과 같다].
이른바 그 사견(邪見) 및 변견(邊見)에 속하는 단견(斷見)은 비록 결단을 내리고 오로지 거꾸로만 생각하는 전도가 된다고 해도 망령되게 규정하는 전도는 아니다. 이러한 견해는 허물어지는 일을 따라 생기는 견해이기 때문이다.
또한 계금취견(戒禁取見)의 경우는 비록 결단을 내리고 망령되게 규정하는 전도가 되기는 해도 오로지 거꾸로 된 견해의 전도는 아니다. 이른바 일부분은 진실한 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비담(阿毘曇)에서는 말하기를
“신견(身見)과 견취견(見取見)은 완전히 전도된 망상이며, 무시(無始) 이래로 오래 익힌 전도 망상이다. 그리고 번뇌를 끊고 난 수다원(須陀洹)과 사다함(斯陀含)도 아직 경계에 물들고 집착한다”라고 하였다.
[5견(見)]
【문】세존께서는 많은 견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어떤 견에 속하는 것인가?
【답】5견(見)에 속한다.
【문】그것은 어떤 것인가?
【답】
진실을 비방하는
이 견은 사견(邪見)이니
실답지 못하게 망령되이 규정하니
이는 두 가지 편견과 잘못된 지(智)이다.
‘진실을 비방하는 이 견해는 사견이다’라고 했는데,
만약 잘못된 견해로 진실을 비방하는 이른바 무유(無有)무유란 보시나 지계 등을 비방하는 것이다ㆍ무고(無苦)등의 견해를 사견(邪見)이라 한다.
‘실답지 못하게 망령되이 규정하니 이는 두 가지 편견과 잘못된 지(智)이다’라고 했는데,
실답지 못한 음에 대해 나[我]와 내 것[我‘]을 망령되이 규정하는 것은 신견(身見)이며,
고통을 낙이라고 보고 더러운 것을 청정하다고 망령되이 규정하는 것은 견취견(見取見)이다.
또 만약 나머지 실답지 않은 곳에 대해 실체[士夫]를 망령되이 규정한다면, 이와 같은 견해는 모두 삿된 지혜[邪智]일뿐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인(因)이 아닌데도 인이라 보는 것
이를 계금취견(戒禁取見)이라 하고
가령 수변견(受邊見)에 포섭됨은
단멸(斷滅)과 유상(有常)에 근거한다.
‘인(因)이 아닌데도 인이라고 보는 것 이를 계금취견이라고 한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그 무인(無因)에 대해 원인을 보는 것은 계금취견(戒禁取見)에 속한다는 것이다.
가령 자재천(自在天) 때문에 단식(斷食) 등으로 생천을 구하거나 능히 어떤 특성[性]이나 사부(士夫)를 판별해 해탈의 본질을 얻고자 하는 자와도 같다.특성(性)이란 세간의 특성을 말한다.
이른바 세간의 특성과 정신적 원리의 차이를 아는 자는 해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수변견에 포섭됨은 단멸과 유상에 근거한다’고 한 것은
가령 서로 비슷하게 상속되는 숨겨진[隱覆] 무상행(無常行)에서 항상함을 본다면 이는 상견(常見)이다.
또한 원인과 결과의 몫이 상속됨을 알지 못한 채 끊어짐을 본다면 이것은 단견(斷見)이다.
이 5견(見)을 제외하고 다른 견은 없나니, 그런 까닭에 모든 편견은 오견 속에 포함된다고 하는 것이다.
【문】이들 견은 어떻게 끊는가?
【답】
비방과 망령된 규정과
인견(因見)과 두 변견(邊見),
여기에서 모든 일이 일어나니
혹은 본다면 그것은 끊어진다.
‘비방(誹謗)’이란 사견을 말한다.
가령 고제(苦諦)를 비방한다면 이것은 고제를 밝힘으로써 끊게 된다. 고처(苦處)에서 일어나는 까닭이다.
집제를 밝히는 일 등도 역시 이와 같다.
가령 멸제와 도제로 끊게 되는 견취견과 계금취견과 같이 이처(異處)에서 일어나는 편견은 이처에서 끊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이 있기 때문에 욕계의 상연번뇌(上緣煩惱) 역시 이와 같이 설명되는 것이다.
실답지 못하면서 망령되이 규정한다는 것은 두 가지 편견을 말한다.
그 가운데 신견(身見)은 고처(苦處)에서 일어나는 까닭에 고제를 밝힘으로써 끊게 된다.
견취견의 경우에는 만약 과가 진실이 아님에도 함부로 진실이라고 규정한다면 이는 고제를 밝힘으로써 끊으며,
원인이 되는 곳에서 일어난다면 집제를 밝힘으로써 끊게 된다.
멸제를 밝힘으로써 끊어지는 편견이라면 이는 멸제를 밝힘으로써 끊게 되며,
도제를 밝힘으로써 끊어지는 편견도 또한 이와 같다.
닦아서 끊는 것이 아니니, 결단(決斷)인 까닭이다.
계금취견(戒禁取見)은 인이 아닌 것을 인이라고 보는 것인데,
만약 유루처에서 일어난다면 이는 고제를 밝힘으로써 끊게 되고,
만약 도제(道諦)를 밝힘으로써 끊어지는 편견이라면 이는 도제를 밝힘으로써 끊게 된다.
또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은 고를 보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고제를 밝힘으로써 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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