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운시인 첫시집 다시 피는 꽃 시평
마경덕시인 시평/추천문 이충재시인 평론가/추천사
■정다운시인 첫시집 다시 피는 꽃 마경덕시인 시평
정다운 시집 『다시 피는 꽃』 해설 (2022년 도서출판 홍두깨) / 자연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
마경덕 시인
A4 용지는 평면이지만 그 안에는 ‘썼다가 지운’ 생각이 쌓여있다. 나무의 단면에 여러 개의 ‘나이테’가 있듯이 습작의 시간은 종이의 단면엔 “보이지 않는 층”으로 남는다. 이 추상적 개념은 스스로의 동력으로 글을 써야 하는 ‘시인의 감각’과 일치된다.
장성은 작가는“내게 추상성은 아름다움의 가능성이 응집된 총체다” 라고 하였다. 시인은 순간의 감각을 백지에 활착하기 위해 단편적인 생각을 이어붙이며 ‘추상의 범위’를 확장해나간다. 선택과 결정을 반복하며 종이 한 장에 사라진 풍경을 소환하거나 새로운 인식을 설치해서 평면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그 공간을 차지한 대상이 언어화되어가는 과정을 거쳐 시는 완성된다.
작은 날개로 비행(飛行)을 꿈꾸는 사람들이 시인이 아닐까. ‘시인과 호박벌’은 공통점이 많다. 몸길이가 평균 2.5cm밖에 안 되는 작은 체구를 가진 ‘호박벌’은 1초에 250번 날갯짓을 해서, 하루 평균 200km 이상 되는 먼 거리를 꿀을 모으기 위해 쉴 새 없이 날아다닌다. 뚱뚱한 몸통과 작은 날개를 가진 비행이 어려운 신체구조로 그 먼 거리를 어떻게 날 수 있을까. 자신이 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호박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로지 꿀을 모으려는 일념으로 날아다닌다니, 영락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이나 상황을 불사하는 ‘시인의 모습’이다.
시에 빠진 시인에게는 ‘장애물’은 보이지 않는다. 시가 밥이 되든 말든 밤낮 시에 열중인 시인들, 이때 시는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시인이며 낭송가이며 수필가인 정다운 시인, 여러 문학 단체에 직책도 맡고 있는 것을 보면 문학에 대한 시인의 열정을 짐작하게 된다. 그 넘치는 에너지는 오직 문학에 대한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정다운 시인의 서정적인 시편들은 “자연과 교감하며 내면의 상처를 치유” 한다. 치유의 과정을 거쳐 성찰로 이어지는 그 지점에서 시는 발현한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 타인과의 갈등은 고요한 파장을 일으키며 문제를 제시한다. 이때 발생하는 괴리감은 자연이 주는 편안함과 시인의 긍정적인 힘으로 아물곤 한다. 문제를 앞에 두고 스스로 답을 구하는 정다운 시인은 과장된 몸짓이 없고 인위적인 경계가 없어 단출하다. 그래서 독자에게 쉽게 스민다.
일상에서 벗어나
머무르고 싶었던 시간들
마음의 벽을 깨지 못해
사람들 눈길이 모질게 느껴진다
가혹하고 냉담한 현실
예상치 못한 시련에 부딪혀
무너져 내린다
거리를 헤매며 아는 이를 만나
안부를 묻고 웃어도 보지만
사람 사이 슬픔은 소란에 숨어 살아
허한 가슴은 채울 길 없다
생이란 홀로 아파하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파도를
제 스스로 헤쳐 가는 일이다
― 「대신할 수 없는 길」 전문
자신이 알고 있는 가까운 거리가 뜻밖에 먼 거리일 수도 있다. 농담 같은 언어유희와 소란스러운 ‘웃음의 뒤편’으로 숨어버리는 슬픔들, 무리에서 빠져나와 혼자가 될 때 ‘타인에 대한 의구심’은 본색을 드러낸다. 오랫동안 고여있는 것들, 수시로 출렁이는 것들, 그러나 들켜서는 안 되는 것들이 긴장을 풀고 무방비로 몸 밖으로 노출된다. 자신의 약점이나 속마음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중적 태도는 ‘빛과 그림자’로 나타난다. 전혀 다른 표면과 이면의 양면성은 냉혹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며 방편이다.
견해가 다른 타인과의 심리적거리는 갈등을 유발하고 불신으로 이어진다. “생이란 홀로 아파하며 /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파도를 / 제 스스로 헤쳐 가는 일이다” 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으로 돌아온다.
내면에 대한 성찰로 귀결되는 「대신할 수 없는 길」 은 냉정한 현실에 대한 무력감과 절반의 체념이 섞여 있다. 나약한 인간의 모습에서 다시 일어설 의지를 보여주는 것은 심미적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정다운 시인은 개인이 속한 사회와 그 관계 안에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동시대의 이면을 잘 포착하고 있다.
공원에 나무들이 마치 죽은 듯 한데
혹한 추위에도 말없이 서 있는 저 나무
한겨울 메마름에
힘겨운 나무 거센 눈보라를 견디고 있다
때가 되면
여린 꽃망울 터뜨리며 피워 낼 그날을 위해
세찬 비바람에도 지지 않고 자신과 싸우고 있다
누구나 시작은 흔들리지만
고통을 속으로 삭이며 온몸으로 피워내는 꽃
해어화 같은 나만의 꽃이다
― 「해어화」 전문
중국 당나라 때에 현종이 아름다운 양귀비를 가리켜 해어화(解語花)라고 하였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것이다. 많은 나무 중에도 ‘말을 알아듣는 나무’가 있다. 시인은 혹한 추위에도 말없이 서 있는 겨울나무 한 그루와 교감하고 있다. 해결하지 못한 질문을 풀어놓을 수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시인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나갈 힘을 얻는다. “때가 되면/여린 꽃망울 터뜨리며 피워 낼 그날을 위해/세찬 비바람에도 지지 않고 자신과 싸우고 있다”고 한다.
눈부신 봄이 올 것을 알고 거센 눈보라를 견디는 그 모습은 시인이 고통을 속으로 삭이며 세상을 살아내는 긍정적인 자세와 유사하다. 정다운 시인은 ‘자연과 인간’이라는 결이 다른 서사를 한 공간에 설치하고 자연친화적인 인식을 유기적으로 이어간다. 삶의 의지가 담긴 「해어화」 는 “나만의 꽃”이 되어 당면한 고통을 위무하며 ‘봄과 꽃’으로 이어진다. 꽃피는 봄은 겨울을 건너온 보상이다. 공감대가 형성된 그 나무는 화자와 동일시되며 ‘수평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해어화」 는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다양한 얼굴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어떤 형태로 공존하는지에 대해 집중한다. 혹독한 겨울의 무게는 ‘봄의 입김’으로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한 점 때도 묻지 않은 맑은 하늘
아침 사소한 일들이 두고두고 새겨지는 날
그지없이 영악한 인간의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거란 생각
갖지 못하는 빈손에 두 눈의 촉수를 돋던
아픔의 한 계절이 지나갑니다
생의 한고비를 넘으면
마음에 스며든 진실이란 빛깔이 보입니다
길을 가다 문득 눈길 잡는 것은
긴 긴 침묵을 깨고 얼음이 풀리는 냇가입니다
마침내 제 밑거름으로
봄의 담장 밑 여린 새싹이 돋아
푸른 생명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삶에 답이 없다지만 어두운 마음이 사라지고
가슴 가득 봄을 타고 자연이 다시 희망을 가져보라
나직이 일깨워 주는 하루입니다
― 「고비 너머 보이는 빛」 전문
지극히 사소한 편린 하나가 가슴을 찌르고 파문으로 번지고 있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대부분은 무심히 스칠만한 작은 것들이다.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인간은 자주 다치고 쉽게 금이 간다. 한 점 때 묻지 않은 하늘을 보며 시인은 영악한 인간의 본성을 생각한다. 한 계절이 지나가고 생의 한고비를 넘으니 무엇이 진실인지 깨닫게 된다. 그때 눈에 띈 것은 얼음이 풀린 냇물이다.
봄이 오는 소리에 자연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봄의 무한한 에너지는 ‘기폭제’가 되어 생기를 불어 넣는다. 삶의 고비에서 만난 대상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봄의 담장 밑 여린 새싹”이다. 제 몸을 밑거름으로 삼고 일어서는 여린 풀포기들의 질긴 무릎들, 그것들이 고비 너머의 빛이었다.
행복이란 이토록 낮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신은 삶의 갈피갈피에 행복을 숨겨두었다. 그것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사람이 주인일 것이다. 박형렬 작가는 “우리가 항상 보고 있으면서도 미처 보지 못하는 자연은 어쩌면 고개를 들면 보이는 저 하늘보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대지”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늘 만나는 땅이어서 이를 무심결에 지나친다는 것이다. 시인 역시 늘 만나는 풍경이어서 흘려보낸 적도 있을 것이다. 그 무심한 것들이 어느 순간 가슴에 들어와 특별한 의미가 되고 봄의 이미지는 희망이라는 서사로 재탄생되고 있다
일상에
갇힌 몸은 진부해서
메마르고 무디어질 때
내 안에 내가 없어서
내 몸에 자유를 주고 싶다
하루가 전부인 것처럼
시각 속에 시간이 흘러가듯
가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누구나 아픔을 안고 살기에
홀로 견디며 이겨
걱정도 근심도 씻어내고
슬픔과 화해하고 싶은 날을 찾고 싶다
― 「마음의 비상구」 전문
때로는 마음도 쉴 곳이 필요하다. 일상에 갇힌 몸은 마음도 쉽게 지친다. 몸과 마음은 함께 작동하는 기계처럼 긴밀히 연결되어 ‘작은 기척’에도 즉시 반응한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때는 슬픔과 화해하고 싶은 날이다. “가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한다. 늘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고픈 시인은 낯선 도시에 대해 애틋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정다운 시인은 단편적인 생각들을 나열하고 현실에서 마주치는 한계를 넘어 자유로운 나름의 방식으로 탈출구를 찾아간다. 「마음의 비상구」 는 출구가 없는 현대인들의 근원적인 외로움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개인의 심리 상태를 통해 현시대의 실체와 만연한 사회 풍경, 타인과의 대립, 일상에서 마주치는 갈등을 보여준다. 현대인의 고독이나 좌절, 일상에서 경험한 보편적인 문제는 매 순간 우리 삶을 드나드는 모두의 문제이기도 하다. 「마음의 비상구」 는 냉담한 현실에 노출된 ‘현대인의 고뇌’를 엿볼 수가 있다.
오랜 시간 견디며
더 이상 외롭지 않을 누군가 보고플 땐
내 안의 기억을 꺼내 본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감정이 갖는 천 개의 마음 한 구석
심장을 뛰게 한다
마음에 풍경을 만들고
흘러간 시절 지나간 것들은
그대로가 다 좋은 날이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아쉬운 것은 아쉬운 대로
보고 싶은 것은 보고 싶은 대로
흘러가는 그냥 그대로
― 「바람이 천 개의 기억을 부른다」 전문
정다운 시인은 세상과 동화되기 위해 자신을 ‘성찰하는 내면’을 자주 보여준다. 빠르게 진화하는 사회의 속도에서 벗어나 홀로 사색하고 ‘삶의 정체성’에 골몰한다. 사람과 사람의 밀착된 틈에서 발생한 통증과 표류하던 상처를 어루만지며 자신을 온전히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은 시인의 ‘심리적 프레임’ 안에 내재 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하여 무의식 속에서 부유하던 상처를 자연에서 치유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동안 문명을 앞세워 자연을 무너뜨리는 인간의 욕망은 수없이 자행되었지만 자연은 스스로 복원하는 자정(自淨) 능력이 있다. 자연과 인간이라는 특정한 알레고리는 활력을 주는 삶의 기제로 작용하고 이것은 시인이 자연을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이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허무맹랑한 기표들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탈출구는 천연의 자연뿐이다. 흐르는 것은 흘러가게 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다. 시인은 자연을 만날 때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천 개의 마음이 되고 심장이 뛴다. 시인에게 “문제를 해석할 수 있는 지점”은 자연이 있는 곳이다.
시간이 남긴 자국들
마음은 떠돌고 반복되는 일상
벗어나고픈 날
생각은 밝았다 흐렸다 빛났다가
어둠에 잠기고 어디든 떠나고 싶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불안한 미래
푸름은 잠시 피었다 진다지만
시들어 감은 가릴 수 없다
몸에서 빠져나가는 온기
깜빡깜빡 신호, 흐려지는 눈
머리칼은 성근 눈으로 쌓이고
아픔은 언젠가는 흔적을 남긴다고
손가락 마디마디 저려온다
― 「불안한 미래」 전문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E.H. Carr)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소통”이라고 했다. 역사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아니라 언제나 재해석되는 것이며 시대적 배경이나 사회적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당시의 역사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전쟁, 기아, 나라 간의 분쟁, 표류하는 난민들, 전 세계를 역습한 펜데믹, 깜박깜박 경고등이 켜진 지구의 환경문제, 등등 현시대는 불안한 미래를 예측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가 짊어진 과제이다.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불안한 미래 / 푸름은 잠시 피었다 진다지만 / 시들어 감은 가릴 수 없다 /몸에서 빠져나가는 온기 / 깜빡깜빡 신호, 흐려지는 눈 / 머리칼은 성근 눈으로 " 에서 유추하듯이 이 모습은 노화를 맞은 인간의 모습이기 전에 우리가 당면한 이 지구의 아픈 모습이다. ‘자연과의 교감’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실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개발이라는 이유로 자연을 훼손하고 당연한듯 받아들인다. 자연을 기록하는 방식은 세상의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다.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은 좋은 아파트나 고급 자동차나 금은보화가 아니다. 무엇보다 인간답게 살아갈 오염되지 않은 환경인 것이다. 우리가 객관성을 담보로 최고라고 여기며 신봉했던 ‘삶의 기호들’이 훗날 어떤 가치를 지닌 역사로 재평가 될까 두렵기만 하다. 「불안한 미래」 는 현시대를 성찰할 수 있는 또 다른 시선을 확보하고 있다.
저무는 하늘을
무심히 올려다본다
간절했던 마음의 욕심은
버리지도 못했다
혼자만의 시간
저마다 치열한 경쟁 속에
암울했던 세월의 습기가
온몸을 적신다
세상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길
천둥으로 와서 번개로 사라진다 해도
가슴에 묻었던 별 하나
하늘에 달아놓고 가야지
― 「하늘에 별을 달다」 전문
정다운 시인은 ‘지속적인 주제’를 가지고 있다. 자연과 나 사이의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며 ‘드러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주시하고 있다. 동일 대상에 대한 상반된 태도가 동시에 존재하는 양가적((兩價的)) 감정은 집착에 대한 결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간절했던 마음의 욕심은/ 버리지도 못했다 / 혼자만의 시간 / 저마다 치열한 경쟁 속에 / 암울했던 세월의 습기가 / 온몸을 적신다”라고 토로하지만 결국 세상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라는 허무한 결말에 이른다. ‘천둥’으로 와서 ‘번개’로 사라진다 해도 가슴에 묻었던 ‘별’ 하나 하늘에 달아놓고 가겠다고 한다. ‘별’ 하나 달기 위해 그토록 치열한 생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일까. 이것은 현실을 향한 의식적 노력으로 보인다. 암울했던 세월의 습기는 온몸으로 체험한 실재적 인식이기에 마지막 결론에 다다를 때까지 치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의 생애를 표현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의미에 대해 우리에게 지속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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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운 시인 첫시집 다시피는 꽃
추천서
시의 향기를 품고 살아가는 삶, 시대를 치유하다.
이충재(시인,문학평론가)
이 시대는 분명 인간(인격)의 자리를 박탈당하는 분노가 내적으로 폭발하는 그 여파가 곳곳에서 이상기류를 드러내 보이고 있음이 틀림없다. 동양권의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서양국민들에게 미덕의 표본으로 읽힌 것이 엊그제 같은데, 그나마 질서가 깨지고 어른과 스승의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문학의 위기를 발설하여 추방당했던 이국(異國) 학자의 울분이 아직 멈추지 않은 듯한 요즘 대한민국의 사정도 만만치 않은 형국이다.
그런데 이 번 첫 시집을 출간하고 있는 정다운 작가의 프로필을 보면,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인문학의 뿌리를 살려내려고 애쓰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행복한 비명을 내지를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다. 시는 본래 인문학의 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인으로 호명되어지기를 즐거워하여 발을 들여 놓기 마련이지만 정작 시에 목숨을 걸 듯 시 사랑에 취해서 가치적, 의미론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드물다. 또한 시인의 인생을 살아간다고 하지만 막상 그들의 일상을 진단, 점검해 보노라면 시적 정신이 희박함은 물론 자기 명예를 위한 요식행위의 일환으로 시를 대하는 것 또한 쉬 발견되곤 한다. 그런가하면 유년 시절 추억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시를 만지작거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모두가 시의 본질을 잘 모르고 대하는 처사인 까닭에 시인들은 물론 많은 독자들이 시를 대하는 미온적 태도로 인하여 시적 감성은 점점 고사 직전에 직면하고야 말았다.
정다운 작가는 그런 시대를 예의주시해 온 것같이. 시 낭송가로, 수필가로 그리고 스토리를 창작하여 독자들을 찾아 나서는 열심을 보인다.
이러한 행보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그 성과가 오늘의 이 시집 『다시 피는 꽃』(홍두깨)에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다운 작가는 다양한 인문학적 행보를 통해서 그 중심에 시 문학을 통한 감성의 꽃을 만개하고자 하는 열정을 보여 왔다고 했듯이 그 꽃이 3월에 이르러 이 한 권의 시집으로 활짝 피어오르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시 낭송가들이 낭송하기에 수월한 시들만을 낭송의 대상으로 삼고, 동시에 표면적 멋에 취해서 일선을 누비는 아쉬움이 짙어 왔고, 그 이면에 시의 본질의 겉멋에 길들여져 있고, 시의 참된 맛에서 멀어진 것 같은 비본적질인 요소로 인해서 시시비비(是是非非)의 판단을 받곤 했는데, 정다운 시인은 그 아쉬움을 이 번 시집을 통해서 불식시키기에 필요충분조건을 모두 갖추었음은 물론 확인시켜 주어서 기분이 좋다.
21세기는 퓨전예술이 각광을 받는 추세다. 그렇기에 정다운 작가의 전 방위적 행보는 틀림없이 빛을 발하기에 족하다.
이 시집이 출간되어 많은 시 낭송 대상자들이나. 잃었던 시 독자들에게 좀 더 친근감 있게 다가설 수 있기를 바란다. 더욱이 바라는 것은 시 낭송가들 사이에서도 시의 본질을 터치하는 이정표적 삶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라 맞이 않는다. 이 시집으로 코로나 19 시종 바이러스의 전이요서인 델타, 오미클론이 인류를 괴롭히고 어지럽히는 때에 독자들을 위로하고 내적 치유의 도구로 귀하게 읽히기를 바란다.
한 사람의 시인이 한 권의 시집을 출간하게 될 때 드린 공은 분명히 한 두 마디로 결론을 낼 수 없듯이 이 한 권의 시집(『다시는 피는 꽃』)에 수록된 매 시편들을 씹어 먹음으로써 그 맛을 톡톡히 드러내는 경험이 한반도 곳곳에서 신음처럼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원 드린다. 끝으로 나탈리 골드버그의 저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통해서 이 시대의 거룩한 망명자임과 동시에 단독자임을 선언하고 희생적 삶을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시인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이 정다운 시인의 시를 대하는 지침이 되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시인의 길에 박수를 보내드린다.
“우리의 지각 능력이나 판단력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각과 판단력은 우리의 의식과 육체를 거쳐서 나온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나는 이것을 ‘퇴비를 섞는 과정’이라고 부른다. 인생이 남긴 쓰레기 더미는 자꾸 쌓여간다. 우리는 그 안에서 특정한 경험들만을 수집하기도 하고, 때로는 버린 것들을 섞어서 새로운 경험으로 삼기도 한다. 우리가 버린 달걀 껍데기, 시금치 이파리, 원두커피 찌꺼기 그리고 낡은 마음의 힘줄들이 삭아 뜨거운 열량을 가진 비옥한 토양으로 변한다.”
비로소 정다운 시인님! 남은 일생 시 창작을 통해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행복의 본질을 발견하시고 더욱 더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2022년 2월 ‘이충재 시 치유연구소’에서
첫댓글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