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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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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 스크랩 만산 강용
혜명 추천 0 조회 80 13.06.26 05: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성명 : 강용(姜鎔) , 1846년(헌종 12)년 ~ 1934년년
본관 : 진주(晉州)
: 계명(季明)
: 만산(晩山)
출생지 : 봉화(奉化)
출신지 : 봉화(奉化)
분묘지 : 봉화(奉化)
입사경로 : 음관(蔭官)
내관직 : 홍릉 감조관(洪陵監造官)
증직및기타 : 영릉 참봉(英陵參奉),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호랑이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백

강용은 또래들과 어울려 놀 때도 난잡하게 놀지 않았으며 장중한 태도를 견지하였다. 10살 무렵에 외가에 우환이 있어 문병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도중에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호랑이는 뒤에 따라 오는가 싶더니 어느 틈에 앞에 나타나기도 하면서 그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강용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태연히 가던 길을 계속 걸어가니 범이 꼬리를 내리고 사라지고 말았다.
마을 북쪽에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한 채 있었는데 사람들이 무서워하여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는 곳이었다. 귀신이 나타나서 사람을 괴롭힌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강용은 야심한 밤에 홀로 그곳에 가서 소문을 확인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담력에 탄복했다.
벼슬을 멀리하고 초야에 은거하다

강용은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국운마저 기울자 향리인 봉화에 은거하면서 도학에 힘썼다. 1900년에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된 것을 시작으로 몇 가지 벼슬이 제수되었지만 대개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에는 홍릉 감조관(洪陵監造官)에 제수되었고, 품계도 통훈대부로 올랐다. 감역한 공로가 인정되어 다시 통정대부로 승진하고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의소(乙巳擬疏)를 올려 조약에 동조한 오적대신을 참형으로 다스리고, 위협으로 체결한 조약은 성립될 수 없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국운이 기우는 것을 보고난 후, 살던 집에 정와(靖窩)라는 편액을 걸고 은거를 결심하였다. 집 근처에 정자를 지어 태고정(太古亭)이라 하고, 바위를 만취암(晩翠巖)이라 했으며, 연못을 세심소(洗心沼)라 하였다. 대를 망미대(望美臺)라 하고, 집을 칠류헌(七柳軒)이라 명명했다. 이때부터 일체의 바깥일을 단절하고 오직 마음 수양에만 전념하였다. 정와(靖窩)라는 의미도 스스로 수행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깨닫고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이 한을 누가 알리오

일제 치하이던 1934년 여름, 예전과 다름없이 의관을 바로하고 독서를 하거나 빈객을 맞이하던 강용은, 몸에 이상을 느끼고 약을 복용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그는 최후가 다가왔음을 직감하고 시 1수를 읊으며 종자들에게 받아 적게 했다. “어느 때 다시 해를 보리오. 죽음에 이르러 눈물이 얼굴을 덮는구나. 하찮은 존재로 태어나 보답할 길 없구나. 이 한을 알아 줄 이 누가 있으리오.” 그리고는 자리를 바로 하고 편안히 생을 마치니, 음력 7월 20일이었다. 향년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9월 6일 수백 명의 사림들의 애도 속에서 봉화 구읍 뒷산에 묻혔다.

가족이야기

: 강필응(姜必應)
생부 : 강하규(姜夏奎)
: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재홍(權載弘)의 딸
강하규와 안동권씨 사이에서 태어나다

강용은 진주강씨로 시조는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을 지낸 공목공(恭穆公) 강시(姜蓍)이다. 그의 아들이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강회중(姜淮仲)으로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으로 들어가서 절의를 지킨 인물이다. 조선조에 들어서 유명한 벼슬아치들을 많이 배출하면서 명문 가문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증조 강운(姜橒)은 통훈대부로서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지냈으며, 통정대부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그는 문장과 경술로서 칭송을 받았으며 세상에서는 송서(松西) 선생으로 불렸다.
조부 강필응(姜必應)은 가선대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만대(晩對)이다. 부친 강하규(姜夏奎)는 통정대부로서 이조 참의를 지냈다. 그의 호는 백초(白樵)로, 백씨인 한규(漢奎)와 계씨인 진규(晉奎)와 함께 벼슬을 하여, 향리에서 보기 드문 장관을 연출하였다. 모친은 숙부인 안동권씨로 충재 권벌의 후손이며 처사 권재홍(權載弘)의 딸이었다.
만산고택

현재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에 소재하고 있는 만산고택(晩山古宅)은 시도민속자료 제121호로 지정되어 있다. 만산고택은 강용이 1871년(고종 15)에 지은 것이다. 가옥 주조는 앞면에 11칸의 긴 행랑채가 있고 가운데에 솟을대문이 있다. 안쪽에 사랑마당, 서쪽에 사랑채와 안채가 口자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왼쪽에 서당을 두고, 오른쪽에 별도의 담장을 돌려서 별당을 배치하였다. 사랑채의 앞면에는 만산(晩山)이라는 대원군(大院君)이 쓴 현판이 걸려 있고, 서당의 ‘한묵청연(翰墨淸緣)’이라는 편액은 영친왕(英親王)이 8세 때 쓴 글이라 전한다.
부인 전주유씨와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강용의 부인은 전주유씨(全州柳氏) 유치호(柳致好)의 딸이었다. 부인은 수정재(壽靜齋) 유정문(柳鼎文)의 손녀로서 법도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 여성의 덕을 가졌고 효성이 깊었다. 강용과 동갑이지만 9년 먼저 죽었다.
강용과 유씨부인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의 이름은 강필(姜泌)이었다. 강필은 6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강교원(姜敎元)·강도원(姜度元)·강승원(姜昇元)·강만원(姜晩元)·강세원(姜世元)·강욱원(姜郁元)이고, 딸은 이명호(李蓂鎬)와 김원재(金元在)에게 시집갔다. 강교원은 참봉을 지냈으며 3남 3녀를 두었다. 강도원은 2남 2녀를 두었으며, 강승원은 2남을 두었다. 사위 이명호는 4남을 두었으며, 김원재는 1남을 두었다.

학문이야기

사숙 : 류치명(柳致明)
학파 : 퇴계 학파
정재 류치명을 사숙하다
강용은 어려서 백부인 현파(玄坡) 강한규(姜漢奎)에게 학문을 배웠다. 총기와 지혜가 뛰어났으므로 현파공은 문호를 기대할 아이라고 하여 기이하게 여겼다. 그는 늦게 태어나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하에 들어가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겨 제문을 지어 추모하였다. 뜻 맞는 동지 몇 명과 함께 맹자를 읽었는데, 이때 의문 나는 점을 정리하고 역서(?棲) 류치유(柳致游)에게 질의하기도 했다.
선친이 청하(靑夏) 군수에 제수되었을 때 강용은 선친을 모시고 당시의 법무대신 이유원(李裕元)을 배알했는데, 이후 강용은 그의 훈계를 마음에 간직하고 잠언을 벽에 붙이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젊어서는 과거공부도 열심히 해서 향시에는 자주 합격했지만, 회시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과거를 포기한 후에는 사서(四書)·『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 등에 전념하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하였으며 세상의 영화를 뜬구름처럼 여기게 되었다.

문집의 주요 내용

강용의 문집인 『정와집(靖窩集)』은 1956년 손자 강교원(姜敎元)이 편집·간행하였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소(疏) 가운데 ?을사의소(乙巳擬疏)?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동의한 오적대신을 참형으로 다스리고 위협으로 체결한 조약을 파기하라는 글이다. 서(書) 가운데 ?귤산이상공유원(橘山李相公裕元)?은 당시 법부대신 이유원(李裕元)에게 보낸 것으로, 외세의 침략을 받고 있는 현금의 상황은 위정자의 잘못에 책임이 크다고 지적하고 특히 대신들은 책임을 통감할 것을 촉구한 글이다.
그밖에 이중원(李仲圓)·김위서(金渭瑞)·김양중(金養仲) 등에게 보낸 편지는 시사(時事)·경전(經典)·상례(喪禮)·성리(性理) 등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담고 있다. 찬(贊) 가운데 ?성학십도(聖學十圖)?는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가 사계에 큰 공헌을 한 것임을 말하고 찬양한 글이다. ?청해배행일록(靑海陪行日錄)?은 아버지 강하규(姜夏奎)가 청해 군수가 되어 부임할 때 따라가면서 노정과 풍물·경치 등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또 ?서시아손(書示兒孫)?은 죽음에 임박하여 자손들에게 남긴 유훈(遺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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