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
(ㅡ제주여행記 ㅡ)
인묵 김형식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은 서귀포에서
1년 살았다
그런데도
그 예술혼은 천년을 살아가고 있다
그 열정
밖에는 전쟁 속 공포와 가난
안에는 꿈꾸는 유토피아의 노래
1.4평 판잣집 골방에서
4식구가 시루 속 콩나물처럼 살면서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랬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랬고, 부산, 제주도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을 전전하면서도 그렸고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그 열정
밖에는 전쟁 속 공포와 가난
안에는 꿈꾸는 유토피아 노래
담뱃갑 은지에 기타를 걸고
게와 고동, 물고기, 아이들, 가족들 손에 손잡고 노란 유채밭 걸어 푸른 바다로 날아오르고 싶은 이른 삼월이 서런 종달새
ㅡㅡㅡㅡ
●.대향(大鄕) 이중섭(李仲燮) LEE JUNGSEOP 1916-1956
이중섭은 1916년 평남 평원군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도화교사 임용권으로부터 미술 지도를 받은 중섭은 1937년 일본 동경문화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문화학원 재학 중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 공모전에 응모해 입선 했으며, 1943년 제7회 미술창작가협회에 출품해 태양상을 수상하고 부상으로 팔레트를 받았다. 그 해 원산으로 귀국했다. 1945년 문화학원 시절 사귀던 야마모토 마사코가 이중섭을 찾아와 결혼을 했다. 일본인 아내에게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948년에 아들 태현 1949년에는 차남 태성(成)이 태어났다.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원산을 떠나 1951년 1월 초순 부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서귀포로 피난 와 약 1년간 거주하면서 <서귀포의 환상> 등 서귀포 시대의 명작을 남겼다. 1952년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부두노동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작품 활동을 하던 중 주변에서 마련해준 선편으로 1953년 일본에 가서 가족들과 극적으로 상봉 했으나 일주일만에 귀국했다.
1955년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어 작품도 적지 않게 팔렸으나 제대로 수금이 되지 않았고, 수중에 들어온 돈은 술값으로 지출돼 가족을 만나러 가려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1956년 거식증 증세가 나타나고, 영양부족과 간장염으로 9월 6일 서대문 적십자병원 무료병동에서 지켜보는 사람 없이 만40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뒀다 이중섭은 '한국의 국민화가', '비운의 천재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야수파적인 강렬한 색감과 힘찬 선모 위주의 독특한 조형은 서구적인 방법을 차용했지만 주제에서는 향토성이 강하게 묻어난다. 이런 이중섭의 예술세계의 기반은 그림으로 생계를 이어가고자 했던 그의 예술가적 삶에 연유한다. 일정한 거처 없이 전국을 떠돌며 외롭게 제작한 그의 작품은 1970년대에 이르러서 새롭게 평가를 받게 된다.
이중섭은 부인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디까지나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모든 것을 전 세계에 올바르고 당당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이라오."
이중섭과 절친했던 시인 구상은 이중섭의 창작열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자집 골방에서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랬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포집 목로판에서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종이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을 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서귀포의 환상(그림)
이중섭이 원산에서 피난길에 나선 것은 1950년 12월 초순, 그때까지 그린 많은 작품들을 같이 피난 가지 못하는 어머님의 손에 쥐어주며 "난줄 알고 잘 보관하시라"
하고는 완성하지 못한 풍경화 한 점을 들고 피난길에 올랐다.부산에서 한 달 정도 어려운 생활을 하던 이중섭 가족이 서귀포에 정착한 곳은 알자리 동산이었다. 마을 반장 송태주와 김순복 부부는 이중섭 가족에게 1.4평 정도의 작은 방을 하나 내주었다. 피난민 배급으로 연명하던 서귀포 피난시절 이중섭 가족은 끼니를 때우기 위해 밭에서 채소를 캐오거나 바닷가로 나가 게를 잡아와 반찬으로 삼았다.
당시 피난 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중섭의 서귀포 시대는 꿈꾸는 이상향처럼 묘사된다. 그 이상향 속에서 가족들이 유쾌하게 묘사되는 것은 전쟁의 가난과
공포를 잊고자 하는 이중섭의 유토피아적 상상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그린 초상화는 모두 4점이다.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이웃 주민 세 사람과 집주인 송태주의 초상화이다. 이중섭은 이웃 주민과 집주인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마당에 쌓아 놓은 땔감 위에 전쟁터에서 사망한 세 사람의 사진을 올려놓고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집주인 송태주에게는 고마움의 표시로 마루에 앉게 한 다음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이중섭의 은지화는 시대를 말할 때, 그리고 이중섭의 삶을 이야기할 때 그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 중 하나다. 은지화는 담뱃갑 속의 은지에 송곳과 같
은 날카로운 것으로 홈이 생기도록 드로잉을 한 일종의 선각화라 할 수있다.
은지의 표면은 물이 스며들지 않기 때문에 송곳 등으로 드로잉을 한 은지 위에 물감을 바르거나 담뱃진을 문지른 후 마르기 전에 닦아내면 파인 선부분에만 색이 입혀져 은지화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음각기법은 한국의 마애불의 선각화 금속공예의 은입사銀入와 고려청자의 상감기법(法) 등에서 발견되는데 은지와 형식적인 유사성을 보인다.이중섭의 은지를 처음 미국에 알린 사람은 아더 맥타가트(Arthur. J. Mctaggartl 였다. 당시 대구미문화원 책임자였던 맥타가트는 이중섭 개인 전시회에서 3점의
은지화를 구입해 뉴욕근대미술관(MoMa)에 기증했다.
맥타가트는 이중섭의 작품에 대해 "오래 전에 잃어버린 전설과 祭儀로서 몽상적인 동양미술의 완전한 일례"라고 묘사했다.
은지화에는 게와 물고기, 아이들, 가족 등 서귀포와 관련이 깊은 소재들이 자주 등
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