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Philip Yancey는 “하나님, 당신께 실망 했습니다.: 아무도 대놓고 물어보지 않는 세 가지 질문 / Disappointment with God:three questions no one asks aloud.”이라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실망과 의문, 회의가 밀려들 때면 갖게 된다는 질문 세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한 분이신가?, 하나님은 침묵하는 분이신가?, 하나님은 숨어있는 분이신가?”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과연 모든 순간 공평하게 행하십니까? 상황에 딱 맞는 대답을 해주고 계십니까?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고 계십니까?
과연 그렇습니까? 오히려 현실은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실망하는 경우들이 흔하지는 않습니까? 원하면 언제 어디서나 신앙생활과 관련된 서적, 설교, 간증, 방송 등을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마치 물이 넘쳐흐르는 홍수 때 같습니다. 그만큼 많은 정보들이 무차별적으로 공급되고 있습니다. 당연히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부정적인 면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실제로,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영적 상태와는 전혀 상관없이 누구나 무조건 믿기만 하면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일반화一般化합니다.
자신들의 삶에도 기도 응답, 승리, 축복, 형통, 문제 해결, 병 고침, 소원 성취, 입신양명立身揚名, 무병장수, 자손 번영 등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당장 나타나지 않으면 그동안 각종 설교와 성경 공부와 다양한 모임 등을 통해서 배운 그대로 모든 예배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참석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라는 곡기穀氣까지 끊고 금식합니다. 혹 이제까지 순종하지 않았던 것은 없는지 돌아봅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꺼림직 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으면 지극히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회개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성이 부족하다거나 심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는 사기꾼의 그럴듯한 감언이설과 유혹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은 금액을 헌금합니다. 심지어 은행 융자까지 받아서 헌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헌금이라고 하기보다는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투자나 거래라고 하는 편이 더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반드시 내놓은 원금 이상의 무엇인가 곧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있던 바로 그것으로 다시 돌려받아야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이란 노력은 빼놓지 않고 다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극적인 역사는 코빼기도 구경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기울여왔던 지극한 정성과 수고와 노력과 헌신과 투자가 물거품으로 돌아갑니다. 실망과 낙심과 회의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거기다 원하지 않았던 힘겨운 고난이라도 만나게 된다면 마음은 더욱 더 혼란스러워집니다. 마음은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상까지 입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거절감에 사로잡힙니다. 하나님과 교회와 조금만 더 투자해 보라며 독려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에 완전히 매몰埋沒되어 버립니다.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감당하기 어려운 절망과 함께 마음에 담아둘 수 없는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올라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며 돌아섭니다. 지극히 일부의 일이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이 몸답고 있는 교회 안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많을지도 모릅니다. 당연히 하나님에게 깊이 실망한 성도를 찾아보기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일반화하고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우며 또 부정적인 결과까지 초래하게 되는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믿음이 좋은 또 열정적으로 봉사하는 신학생이었습니다. 이혼 직전에 있던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습니다.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는 항상 성경을 읽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결과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동시에 구하던 직장에는 그보다 못하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들어갔습니다. 평생을 약속했던 약혼녀에게는 채였습니다. 건강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우울증은 하루가 다르게 심해졌습니다. 힘겨운 상황에서 허우적거리며 도움을 구했던 하나님은 도무지 당신을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당신에게 자신의 인생 전부를 송두리째 맡겼던 그에게 아예 관심조차 없으신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의 인생은 마치 깨진 유리조각처럼 산산 조각난 반면 대놓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하는 일마다 성공했습니다. 떵떵거리며 잘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처사가 도무지 공평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당하게까지 보였습니다. 그는 또 매번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저절로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아버지이신가? 내가 길에서 넘어져 고꾸라지는 걸 좋다고 바라보는 아버지이신가?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그 사랑과 계획에 대해서 일절 말씀해 주시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존재할 때 비로소 언약이든 뭐든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생각과 판단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존재 여부를 나타내 보여주기는커녕 오히려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으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들 가운데 전부가 아니라 한 가지만이라도 해결해 주신다면 그나마 남아 있는 믿음이라도 지켜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에게는 그렇게 하려는 작은 의지조차도 없어 보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실망과 의문과 회의가 밀려들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오랫동안 지역장으로 묵묵히 봉사하고 있던 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얼굴에는 착할 선善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에 관한한 다른 그 누구보다도 신실했습니다.
열심이었습니다. 순수했습니다. 비록 조금 무뚝뚝해 보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교회 관련된 일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열정적인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특히, 그는 손해를 볼 줄 뻔히 알면서도 하나님의 사람답게 정직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람이 손해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문제는 손을 대는 일마다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여러 해 동안 이어졌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하루하루가 이어졌습니다. 저를 찾아온 성도들은 누구보다 신실한 그에게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냐고 물었지만 대답해 줄 말이 없었습니다.
저 역시 왜 그런지 간절한 마음으로 알고 싶지만, 도대체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실망은 물론 의문과 회의까지 밀려드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계속 믿어야 하는가?, 하나님이 과연 계시기는 한 것인가?”라고 반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드러내놓고 털어놓기는 어렵습니다. 탁월한 섭리와 절대주권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不敬이기 때문입니다. 무례를 저지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지역장이라는 위치에서 섬기고 있는 연약한 성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생들은,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떨까요? 하나님께서 공평을 행하시는 장면을 목격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고 말씀해 주시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존재 여부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시기만 한다면 결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으로 무장할 수 있을까요? 존재 자체를 장담하기 어려운 견디기 힘든 환난과 시험 앞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초연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는 고해 같은 인생도 얼마든지 참고 견디며 살아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을까요?
한편, 하나님께서는 성민 이스라엘을 무려 430년 동안이나 노예 생활하던 이집트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넘쳐흐르던 홍해를 열어주셨습니다. 마른 땅 같이 걸어서 건널 수 있도록 역사해주셨습니다. 그들을 보낸 준 것을 후회하며 다시 잡기 위해서 쫓아오고 있던 바로의 손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늘을 울렸던 성민 이스라엘의 탄식과 부르짖음 그대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때 주겠다고 약속했던 가나안 땅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당신이 그들과 친히 함께 하고 계시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이집트로부터 빠져나온 지 한 달 정도가 되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의 수는 장정만 육십만 명가량이었습니다. 미리 준비해서 가지고 나왔던 양식이 거의 떨어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민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건져주셨고, 넘실대고 있던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해주셨고, 마라의 쓴 물을 달게 만들어주셨던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전혀 기억해 내지 못했습니다.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강도는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도무지 그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가증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구동성으로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여호와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를 굽는 가마 곁에 앉아서 떡을 (마음껏) 배불리 먹었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서(끌고 나와서)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출16:3)라고 외쳤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감독관들의 철저한 감시를 받았습니다. 고기를 끓이고, 떡을 굽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극히 적은 양의 고기와 떡 맛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면 몰라도 원하는 만큼 배불리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용도가 다하면 버려지는 도구들 가운데 하나 정도에 불과했던 노예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바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노예로 생활하던 과거의 일을 소환했습니다. 화려하게 미화했습니다. 배불리 먹었었다고 과장했습니다. 노예 생활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했습니다. 비굴한 노예근성을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이집트와 바로의 손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하여 친히 공평을 행하셨던, 사랑하는 당신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던, 사랑하는 당신 백성에게 당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드러내주셨던 여호와에 대한 배은망덕이었습니다.
씻을 수 없는 죄였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성민 이스라엘은 이렇게 오늘 저와 여러분이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는 은혜를 넘치게 받아 누리면서도 믿음 위에 굳게 서지 못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해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출16:4a)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받은 은혜를 까맣게 잊은 채 여전히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고 있던 성민 이스라엘에게 두 가지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먼저, 하늘로부터 양식을 비같이 내리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곧 만나를 비같이 내리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자격이나 조건은 하나도 갖추지 못한 그들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끝없는 자비였습니다. 한없는 긍휼이었습니다. 무궁한 은혜였습니다. 영원한 사랑이었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6-58)라는 증거에 따르면, 만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패역한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오래 참아주시고, 구원을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해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와 열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b, 37:32b)라는 거듭된 증거대로,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거둘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공중을 나는 새와 들판에 피는 이름 없는 풀 한포기도 길러주십니다. 입혀주십니다.
먹여주십니다. 사랑하는 당신 백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때를 따라서 모든 필요를 아낌없이 채워주십니다. 타오르는 불과 유황을 비같이 내려서 인생을 끝장내버려야 마땅한 죄악 된 존재에게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은혜를 넘치도록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 말씀은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출16:4b-5)라고 이어집니다. “율법”은 만나를 거둬드릴 때마다 반드시 지켜야할 법도를 가리킵니다.
명령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지는 만나를 날마다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둬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순종하면, 6일째 되는 날 거둔 것은 평소의 두 배가 되도록 역사해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이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출20:8-11a)라는, 안식일 계명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순종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어려운 명령입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신비로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것은 성경이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출16:13-14)라고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었었다며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 백성들에게 메추라기와 만나 곧 그들이 바라고 구했었던 바로 그것들을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가운데서 나타났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출16:10b-11)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고 있었던 성민 이스라엘에게 메추라기와 만나를 허락해 주시기 전에 두렵고 떨리는 당신의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성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만나를 거둬들였습니다. 누군가는 보이기에 많이 거둬들였지만 조금도 남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보이기에 적게 거둬들였지만 조금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6일 째 되는 날도 똑같이 거둬들였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틀 치 양식으로 충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하나님 명령에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순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정말 하나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성경은 “모세는 그들에게...다음날을 위해 남겨두지 말라고 당부하였지만 듣지 않은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이튿날 아침...남겨둔 것에서 구더기가 끓고 썩는 냄새가 났다.”(출16:19-20)라고 증거 합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눈으로 보면서도, 비록 모세의 대언을 통해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직접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내일의 삶 특히 의식주 문제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과 걱정과 의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아니 친히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불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고, 경험하고, 느껴도 온전히 믿을 수 없고 따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또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주야로 행군할 수 있도록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가시며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길을 비추어주셨다. 이렇게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않았다.”(출14:21-22)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성민 이스라엘이 장막을 치고 머물러야 하는지와 장막을 거두고 떠나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들 위에 항상 떠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바라보기만 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도록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인도하심이 모호하다고 불평할 사람이 없게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성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들은 “(아모리 족속을 향해서) 올라가지도 말고 싸우지도 마라. 내가 너희 가운데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적들에게 맞아죽으리라.”(신1:42b)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역했습니다. 아모리 족속이 머물고 있던 산악지대로 마구 쳐 올라갔습니다. 결국, 벌떼처럼 달려 나온 그들의 손에 완벽하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공평치 않으셨기 때문도, 침묵하셨기 때문도, 숨어계셨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은 결코 비밀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성막으로 들어가는 모세를 마치 배웅하듯 언제나, 늘, 항상,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 기둥이 성막을 덮는 것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난 이후의 모세의 얼굴은 누구도 감히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빛났습니다. 수건으로 가려야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과 숨바꼭질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부인할 수 없는 온갖 증거들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법전을 통해서 성민 이스라엘이 당신 명령에 순종하면 성읍을 번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사람과 짐승에게 불임이 없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풍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날씨가 좋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를 보장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질병으로부터 완전히 지켜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반면, 성민 이스라엘이 당신의 명령을 떠나서 불순종하면 사방에 폭력과 범죄와 가난이 난무하게 만들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사람과 짐승이 잉태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메뚜기 떼와 각종 해충의 습격을 받아 흉년이 들게 하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폭염과 가뭄, 식물의 잎과 어린 열매 따위에 자낭균류가 기생하여 겉면이 흰 가루를 뿌린 것처럼 되는 백분병白粉病 같은 병충해가 돌게 하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광기와 눈머는 것과 정신병과 열병과 염증에 시달리게 하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나라를 잃고 이방인의 지배까지 받게 하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순종과 불순종에 따르는 결과가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도록 공평의 기준을 정확하게 제시해주셨습니다.
문제는 성민 이스라엘이 꼼짝 말고 있으라는 명령을 받으면 앞으로 나갔습니다. 당장 나가 직접 싸우라는 명령을 받으면 도망쳤습니다. 평화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받으며 싸웠습니다. 싸우라는 명령을 받으면 평화를 선포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구약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얼마나 불순종하는 삶을 즐겼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만에 하나, 하나님께서 공평을 곧이곧대로 행하셨다면, 그들은 현재 역사 속에 남아 있지 말아야합니다. 아니 절대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셔도 불순종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친히 나타내 보여주셔도 불순종했습니다. 마침내,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영원한 죽음과 저주로부터 구원하기 위하여 세상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인간이 고안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조건들을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완벽하게 다 갖추었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부어지는 은혜로 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반드시 하나님을 떠나서 부인하고 대적할 수밖에 없는 더러운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능력으로 악을 짓밟지 않으셨습니다. 사악한 자들을 멸하기 위하여 공의를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완벽한 다스림으로 평화를 가져오지도 않으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당신의 날개 아래로 강제로 모아들이지도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아프고 슬프고 울게 만드는 온갖 참상들로부터 구해내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악이 멋대로 활개 치도록 버려두셨습니다. 성급한 저와 여러분을 너무 답답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참다못해 조금 빨리하면 안 되겠느냐고 외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인간을 선하게 만드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단순히 사탄을 통제하는 선에서 만족하지 않고 아예 쫓아내는 일을 돕는 것에 만족하셨습니다. 차원이 낮은 선을 완성하기 위해서 성급하게 일하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역사 이래 단 한 번도 침묵하지 않고 무수히 많은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선포하셨던 바로 그 방법 곧 성육신, 고난, 죽음이라는 느리고 힘든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공평을 행하셨습니다.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당신의 선하고 아름다운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인류 구원을 간절하게 원하시는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누구도 아니 죽음조차도 끊어놓을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구구절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장 자신을 힘들게 하는 문제를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집중해야하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면, 하나님에게 실망할 수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2023년 8월 12일 토요일 아침, 뉴스를 검색하던 저는 감당하기 힘든 절망에 완전히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미쳐 돌아가고 있다는 표현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을 찾을 수 없는 어두운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다행히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곧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끊임없이 의심받고 거부당하면서도 철저하게 낮아지시는 엄청난 사랑, 스스로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는 기적 같은 사랑, 스스로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을 제한하시는 뜨거운 사랑을 통해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신앙 생활하는 동안 의심이나 회의에 사로잡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 역시 다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믿음위에 견고하게 서 있다면 은혜입니다.
축복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엄청난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리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또 인생에게는 하나님을 받아들이거나 배척할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떠날 사람은 떠나도록 내버려 두고, 의심하는 사람은 의심하도록 내버려 두셨던 이유입니다. 특히,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의심 또는 회의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또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을 때 역시 실상은 하나님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순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 말씀에 집중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허물과 죄로 죽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주신 은혜와 축복을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의심 또는 회의가 밀려올 때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쉬지 않고 밀려드는 의심 또는 회의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실망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주는 복된 삶, 미친 것 같이 돌아가고 있는 세상을 회복하기 위해 여전히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담대히 증거 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