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용, 그리고 말

호랑이, 용, 그리고 말                                                                                                                                                               김해곤   우리 때만 해도 부모님들은 자식이 20대 중반만 되면 결혼을 서둘렀다. 당사자의 의사보다는 부모들의 기준에 맞춰 여기저기 연줄을 대고 자식 배필 찾기에 공을 들였다. 그러면서 자식들을 최고의 신랑감, 신부감으로 둔갑시켰다. 하지만 누가 봐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결점 한두 가지씩은 덮지 않았다. 키가 작다거나, 가방끈이 짧다거나, 다리 한쪽이 약간 차이가 난다거나, 직장은 있는데 이름난 회사는 아니라거나 등등.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학교 다닐 때부터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다. 내 아내가 될 사람의 첫 번째 조건은 완전한 여성이어야 했고, 둘째는 나보다 키가 커야 했고, 셋째는 교회에 다녀야 했고 넷째는 내 나이 스물 아홉 안쪽에 나와 결혼할 수 있는 여성이어야 했다. 후손을 생산하는 데 있어서 결점이 없어야 한다는 점과 누가 봐도 내가 작은 치수여서 자식들이라도 키 큰 유전자를 만들어 줘야겠다는 의욕, 나의 신앙 생활이 잘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의지 등이 그 이유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 집안에서 유일하게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결혼 다음 해에 호랑이띠, 2년 뒤에 용띠, 또 그 다음 2년 뒤에 말띠, 이렇게 차질 없이 아들을 출산하는 일이었다. 당시 월남전에 참전 중이었던 맹호, 청룡, 백마부대의 상징처럼 아들 셋을 낳아 용감하고 씩씩한 인재로 키워 내고 싶었다. 참으로 생산적이고 기막히고 장엄하고 애국적이고 거창한 계획이 아니었던가. 막내아들에 대한 홀어머니의 간절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맞선을 보려고 고향에 몇 번 내려간 적도 있었다. 교회에서 주선한 중매에서는 딱지를 맞기도 했고 튕겨 보기도 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지만 혼사 인연은 차원이 달랐다. 하늘이 개입해야 성사가 된다는 것을 결혼하고서나서야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사람과 집은 임자가 따로 있다’라는 결론을 얻었고 그것이 내 개똥철학의 한 바탕이 되었다. 내가 몸 담고 있던 회사의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영등포 극장을 빌려서 했는데 설립자가 재일교포였다. 설립자는 우리나라 동력 모터(motor) 생산의 선구자로서 우리 산업 현장의 실정을 잘 파악하고 있는 분이었다. 회사의 규모나 대외 이미지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창립 기념식에서 나는 사원 대표로 답사를 읽었다. 다행히 내가 읽은 답사가 행사 중에 가장 돋보였다는 평을 받았다. 그런저런 이유로 나는 사내에서 제법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그날, 행사 후에 동료들과 당구장에서 기분좋게 어울렸지만 결혼 적령기의 팔팔한 젊은 마음은 유달리 허전하고 외로웠다. 경비실 연탄 난로를 등지고 몸을 녹이고 있는데 뒤에서 “김주임, 존 처자 만난능교?” 하는 소리가 들렸다.경비실에 근무하고 있던 회장님의 친척으로 평소에 나를 각별히 아껴주던 교회 장로님이었다. “으데예. 아직 없심니더.”회사 내에는 경상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전라도 출신은 나하고 총무과 직원 둘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경상도 말씨를 자주 흉내내곤 했다. “선 한번 볼랑교?”이건 또 무슨 일인가. ‘볼랑교가 뭔가. 봐야지! 장로님이 말씀하시는데 얼른 가 봐야지.’ “갑시다. 내일.” “지금 가요.” “밤 열 신데...” “안돼요. 내일 우리 잔업해야 해요.”당시 우리는 잔업을 밥 먹듯이 하고 있었다.  드디어 1972년 12월 12일 22시! 그녀는 회사 옆 동네 단칸방에서 학교 다니던 동생을 건사하면서 자취하고 있던 충청도 아가씨였다. 뒤로 묶은 긴 머리채, 단정한 옷차림, 60촉짜리 전등불 아래의 그녀는 나보다 더 커 보였고 동그란 얼굴에 퍽 예쁘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게다가 교회에도 열심히 다니면서 주일 학교 교사까지 하고 있었으니...... 얼씨구 덩더쿵! 그러나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뿐 아니라 예쁜 얼굴을 한동안 마주 쳐다볼 수도 없었다. 안집 주인 아들 녀석이 훼방을 놓아 두꺼비집을 내리는 바람에 황급히 튀어나오고 말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으니 그 녀석도 이 사람을 은근히 흠모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다음 날 점심시간에 다시 오겠노라고 약속은 하고 나왔다.심장처럼 지니고 다니던 도시락 가방은 모처럼 팽개치고 점심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숨도 안 쉬고 달려갔다. 사각 전통 밥상에 귀한 광천김까지 올라와 있어 수저와 젓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맛은 또 왜 그리 입에 척척 붙던지...... 보령시 남포면 달산리 경주 최씨, 조선말 참판댁 규수, 김해 김씨에 버금가는 양반집 처자.......외식도 많이 못해 봤고 박봉에 주머니는 얇아서 싸디 싼 중국집만 드나들었다. 키는 첫날만큼 커 보이진 않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영화관은 자주 갔는데 단성사에서 상영하는 쿼바디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를 보면서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부르르 진동하던 그녀의 오른손, 여성의 떨림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꼈던 순간이었다. 눈치 없이 따라 나온 남동생 자리는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 잡아 주었으니 당연한 지혜였으리라.  1973년 4월 12일!, 만난 지 만 4개월 만에 우리는 드디어 서울 정동에 있는 ‘젠센 선교사 기념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가 된 스물아홉 살 총각과 스물여섯 살 처녀가 인생을 살아 오면서 어찌 순탄하기만 했을까마는 지금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믿음 안에서 참고 견디고 바라고 기도하면서 희망과 기대에 찬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계획대로 이듬해 양력 1974년 2월 새벽, 교회 종소리에 맞춰 허니문 베이비인 호랑이띠 큰아들이 태어났고, 1976년 1월엔 용띠 딸이, 1978년 12월엔 말띠 쌍둥이가 태어났다. 뜻하지 않은 하늘의 축복이었다. 나는 이때 여성의 유방이 두 개라는 것에 진정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양 무릎에 한 놈씩 올려놓고 젖을 빨리는 그 환상적인 모습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 폭의 그림이 아닐 수 없었다. 애기 엄마의 고충과 눈물은 구태여 언급하지 않겠다. 그 공을 무슨 표현으로 다 치하할 수 있으리. 큰 형님이 딸 셋에 아들 하나, 둘째 형님이 딸 둘에 아들 하나, 셋째인 내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을 때, 나이도 젊었으니 아들 하나만 더 낳으라는 말씀을 내게 남기시고 어머니는 쌍둥이들이 태어나기 4개월 전에 세상을 등지셨다. 쌍둥이 아들들을 어머니께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서운하다. 그렇지만 그만하면 내 뜻은 다 이루어졌다고 자부할 수 있다. 아들 셋이 군 입대 할 때마다 나는 집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지금은 365일 내내 태극기를 게양한다. 그때의 그 충청도 아가씨, 지금은 둘도 없는 나의 반쪽, 우리의 알뜰한 추억과 더 밝은 미래를 위해 아내와 손을 꼭 맞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