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주차 시연이 끝나고 종강의 허전함을 달래보며 후기작성을 해보았습니다. 각자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엮었습니다.
오름해설사 19기 B조는 마을과 가까우면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고내봉을 시연 오름으로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둘레길이 정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애를 먹기도 했지만 향토문화와 민간신앙 이야기 그리고 아름다운 비경을 품은 고내봉을 조사하면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이란경 님이 포문을 열어주었습니다. 전체 시연 흐름 설명과 함께 “함께해서 행복하다.”라는 구호를 함께 외치고 신나게 시연이 시작되었습니다.
1. 고내봉, 고내팔경 및 시연 순서 소개
안녕하세요. 오름 해설사 19기 B조입니다.
오늘은 '제주의 향토문화와 민간신앙'을 주제로 오름 해설을 할 예정입니다. 과거부터 제주 사람들이 오름을 어떻게 생각하고 함께했는지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애월 고내봉 탐방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오를 오름은 애월읍 고내리에 위치한 고내봉입니다. 높이를 나타내는 표고는 175m 비고는 135m입니다.
고내봉은 여러 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는데, 각 봉우리마다 별칭이 있습니다. 주봉에는 봉수를 설치하여 망을 보았다는 데서 망오름이라는 별칭이 있고, 이외 작은 봉우리에는 진오름· 방에 오름· 넙은 오름· 상뒷 오름 등의 별칭이 있습니다.
오름의 북쪽에는 고내리가, 동쪽에는 하가리, 남쪽에는 상가리가 각각 자리하고 있습니다. 소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습니다.
올레길 15-a코스에 포함되어 있어, 올레길을 지나게 되면 그 길에서 오름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정상에 오르면 키가 자란 소나무에 둘러싸여 아쉽게도 애월 시내를 한눈에 바라보기는 어렵습니다. 중간에 올라가다 있는 쉼터에서 애월 시내를 볼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문인들이 마을을 즐기고 마음을 담아 그것을 글로 표현했는데, 여기 고내리를 표현한 글이 바로 '고내팔경'입니다.
고내 팔경 중에 고내봉 안에서는 볼 수 있는 풍경은 4가지입니다. 고봉일출, 고릉유사, 용악아송, 경배목적입니다. 이 중에서 고릉유사는 터가 남아 있어 오늘 함께 둘러볼 예정입니다. 박나연 선생님께서 자세히 설명해주실 예정입니다.
제주가 섬이라 독특한 민간신앙들이 많은데 제주 설문대할망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고내리에서 만나 볼 이야기는 하르방당 할망당 이야기입니다. 병원이 없던 시절에는 아마도 기도의 힘으로 두려움을 극복했을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박혜임 선생님께서 해주실 예정입니다.
고내봉은 동네의 뒷산이라 곳곳에 무덤이 많이 있습니다. 제주의 사람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지요. 애월 일대의 공동묘지가 이곳에 있습니다.
동네에서 식수로 사용하던 물들의 흔적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요, 그건 김지윤 선생님께서 자세히 설명해주실 예정입니다.
2. 고내봉의 봉우리들, 마을의 공동묘지 형성과 띠
고내봉은 5개의 봉우리로 된 복합화산체입니다. (원추형. 말굽형) 가장 높은 주봉. 보광사 쪽 방에오름. 마을공동묘지가 형성된 진오름. 너분오름. 상뒷오름으로 불립니다. 화산의 형성바닥을 보시면 화산송이로 되어있는 육성화산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고릉유사터를 가면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으니 그 이야기는 마지막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오름은 제주사람들에게는 생활터전이었습니다. 밭. 논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말.소를 방목하는 곳이기도 하고 묘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주에는 "오름에서 나서 생활하다 오름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산담의 매장문화에서 현대식 납골형태의 화장문화로 변화되어 갑니다. 밀양박씨. 진주강씨 입대 ♡대손이라는 가족묘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묘가 집이나 밭 주변에 있었을 때는 생활공간으로 여겨졌지만 오름에 묘가 우후죽순 생겨난 것은 ‘조상의 음덕을 받으면 후손이 발복(發福)한다’는 풍수지리 때문이다. 1970년대 들어서는 묘지에 따른 농경지 잠식을 막기 위해 마을이나 행정기관에서 공동묘지를 오름에 조성하면서 대규모 묘지로 변했습니다. 공동묘지로 조성되어 '산'자와 '죽은'자의 공간분리가 이루어지며 공포. 두려움의 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그 옆에 보이는 식물 ‘띠’라 불리는 벼과의 백모초라고 합니다. 뿌리줄기로 옆으로 뻗어갑니다. 어린 꽃이삭은 뺄기. 삐비라고도 부르며 시골 어린이들은 꽃이 피기시작전에 어리고 부드러운 꽃이삭을 뽑아서 먹는데 씹어서 먹으면 달치근한 단맛이 나면서 껌대용으로 계속 씹으면서 즐겼습니다. 이 털부분은 불쏘시개로 쓰이고 코피가 날때 솜 대신 틀어막거나 찰과상이나 절상의 환부에 붙이면 지혈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가정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모사(茅沙) 그릇에 백모를 꽂았다. 깨끗한 모래를 잘 씻어 모사 그릇에 담고 그 가운데에 말린 백모의 잎을 작은 다발로 묶어 꽂았다. 모사 그릇에 담긴 모래는 지신(地神)을 상징하고, 백모는 곡신(穀神)을 상징합니다. 약재로도 사용이 되었는데 열을 내리고 혈열(血熱)을 없애며 출혈을 멎게 하고 소변이 잘 나오게 한다. 또한 옛날에는 갈대와 함께 오두막의 외벽이나 띠의 잎으로 볏짚처럼 새끼를 꼬아 엮어서 지붕 등을 만드는 데 이용하여 비가 와도 물이 새지 않고 볏짚으로 만든 초가집 못지 않게 비가 새지 않는다고 합니다.
3. 주변의 오름
정상에서는 뷰가 잘보이지 않아서 한라산뷰라고 써있는 이곳에서 주변경치를 보고가겠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오름들이 제주 서쪽에서 관광객들에게 제일 잘 알려진 오름들이라 할 수있습니다. 한라산 바로 아래 보이는 오름이 어승생악. 은하수를 볼수있는 곳이라 하니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가볼만 할듯합니다. 오른쪽에 노꼬메는 제주의 목축문화를 살펴볼수 있는 상잣담이 있고 다소 가파른 오름이기는 하지만 가을에 가면 예쁜곳입니다. 노꼬메에서의 화산활동으로 터진 용암이 애월읍 납읍리까지 흘러 굳어지고 오랜세월이 흘러 숲을 이루었는데 그곳을 애월곶자왈이라 부릅니다. 납읍초등학교 옆 금산공원으로 지금 곶자왈을 걸을 수있습니다. 제주에는 총 4개 지대와 10개 곶자왈 용암류가 있습니다. 그 오른쪽에 스님의 공양그릇을 엎은 모양과 비슷하다고 이름 붙여진 바리메오름이 그 옆에 있습니다. 그 옆이 억새로 유명한 새별오름이 있는데 고내봉처럼 다섯개의 봉우리를 가진 오름입니다. 금오름. 어도오름은 2개의 봉우리에 봉수대가 있던 오름으로 말굽형분화구를 갖고있습니다. 바로 앞에 보이는 동네는 더럭이라 불리는곳인데 가락이 더럭의 한자표기로 여기초등학교는 그 이름을 살려 더럭초로 명명하였습니다. 고려시대 화전민이 모여살다가 1418년 현촌 고내리에서 분리되어 가락리로 불리는 곳입니다. 1448년 (세종) 윗동네를 상가락. 아랫동네를 아랫더럭. 알더럭. 하가락으로 부르게되었고 1798년 정조에는 상가락이 상가리로 하가락이 하가리로 개칭되었습니다
1136번 도로 (중산간서로)를 중심으로 상가리와 하가리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가리 안에는 연화못이 있습니다.
4. 고내봉수터와 탐라순력도
조선시대 때 이 오름 정상에 고내망이라는 봉수대를 설치했기 때문에 망오름이라고 합니다.
정상의 고내봉 봉수대는 고려 공민왕(1352년) 때 설치되어 동쪽으로는 수산 봉수, 서쪽으로는 어도봉수와 통신했습니다.
고내봉수터는 중앙부에 원형 토축이 있고 주 변에 도량으로 보이는 토단과 경사면인 토단이 무너지지 않도록 석축으로 쌓은 흔적이 확인됩니다.
제주의 방어유적으로 3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구성되어 있고 9진에 속하는애월진성은 1271년 삼별초가 입성한 후 관군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목성(木城)이 있었습니다.
보물 652호인 탐라순력도는 이형상(李衡祥, 1653~1753)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제주도를 동-남-서-북으로 한 달간에 걸쳐 순력(감사가 도내의 각 고을을 순회함)하고 돌아온 후 그간의 여러가지 상황들을 28폭의 그림에 담아낸 총 41면으로 된 도첩(圖帖)입니다.
이 도첩은 300여 년 전 제주의 풍물·문화, 방어 시설, 상품, 지형, 건물 배치 등을 파악할 수 있게 그려진 실용적 목적의 기록화입니다.
김남길은 제주목 소속의 지방 화공으로,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의 명을 받아 실경(實景)을 생생하고 정밀한 기록화로 그리고, 이형상이 설명을 삽입하여 함께 제작한 것입니다.
탐라순력도의 애월조점에는 지금으로 육군 수지부대인 성정군이 245명, 목동인 목자보인 181명, 말 1040 필이 있었다고 합니다.
애월진성이 구축되면서 주민들은 주둔 병력에 의존하고 어업 활동을 하기 위해 포구로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왜적의 침입에 시달리면서도 새로운 삶을 위해 이곳에 정착, 해상 진출과 해안 방어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서쪽으로 이웃한 과오름과 저 멀리 천년 신비의 섬, '비양도'까지 눈에 안기는 풍광입니다
또한 정상에 설치된 한국전파기지국관리(주)에서 운용하는, 고내봉(고내오름) 공용기지국(이동통신중계기)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고내오름의 자연환경을 해치는 것으로 보여서 안타깝지만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요소이기에 지난번 오름의 풍광에 자연스레 자란 나무의 유무의 찬반여론처럼 편리성과 자연환경 두 마리 토끼에 대한 답을 찾기가 어려운 부분인 것 같기도 합니다.
5. 괴양물과 용천수
고내봉에 있는 샘, 물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이곳에 있는 샘은 괴양물이라고 하고 고내리 가장 남쪽 지점과 상가리 하가리의 경계선이 만나는 지점에 있습니다. 만들어진 시기는 조선시대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괴양물 또는 과양물이라고도 불렸고, ‘고양이’라는 단어의 '고' 자의 어원인 '(기이할) 괴(恠)'자와 버드나무 '양(楊)' 자를 써서 괴양물이라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름에 버드나무 '양'자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지금은 없지만 옛날엔 괴양물에 버드나무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괴양물에 차있는 물은 고내봉에 내린 비가 땅속으로 흐른 뒤 모여서 나오는 용천수이며 상가리 주민들이 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연못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윗 쪽의 작은 연못은 식수용으로 사용했고, 큰길에 있는 아래쪽 연못은 우마급수 및 빨래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하가리 사람들은 고내봉 동쪽 기슭에 있는 동지샘을 식수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동지샘이란 이름은 겨울에도 얼지 않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원래 괴양물은 큰 연못이었는데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많이 매립되어 면적이 작아졌고, 2005년에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되어 각종 수생 동식물들이 살고, 이제는 자연생태학습장과 쉼터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양귀비, 부레옥잠, 수련, 큰고랭이(돗자리골, 물돗자리골) 등이 자라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큰 고랭이는 돗자리골 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돗자리를 만들 때 사용하던 재료라고 합니다.
용천수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샘, 산물을 근대화 과정에서 학술적인 용어로 바꾸면서 생긴 말입니다. 샘, 산물이라는 말은 산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물을 의미하는데 산물이라는 말은 살아있는 물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문헌에서는 용천수를 ‘천(泉)‘이라 사용되었고 민간에서는 ’~세미‘ 나 ‘~물’이라는 말로 용천수를 불렀습니다.
지하로 이동하던 물이 암반석이나 지층의 틈을 통해 자연스럽게 솟아 나오는 곳을 용천이라고 하고 용천에서 솟아나는 물을 용천수라고 부릅니다. 물이 스스로 지표로 나오면 용천수 그렇지 못하면 지하수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땅속에 있는 얕은 지하수를 인위적으로 파서 사용하는 것을 우물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제주는 현무암 지층이 대부분이라서 우물을 만들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깨끗하고 식수로 사용 가능한 용천수가 나오는 곳을 따라 마을이 발달했습니다. 또한 물이 좋은 곳에 큰 절이 자리를 잡았는데 옛날에는 절의 규모를 밥을 얼마나 짓느냐로 가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내봉에도 많은 절이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옛 제주에는 1025개의 용천수가 있었는데 1970년부터 대대적인 지하수 개발이 시작되어 용천수의 사용이 줄었고 매립되거나 오염되어 현재 남아있는 용천수는 전체 661개인데 제주시가 395개 서귀포시가 266개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제주환경운동연합에서는 제주의 용천수와 관련된 문화들을 문화재로 지정을 해서 관리하자고 2020년에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환경연합 자체적으로 기부금을 모금받아 용천수를 전수 조사하고 용천수 가이드북을 제작하고 있다고 합니다.
용천수는 지하수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천수가 말라가고 오염되면 지하수 또한 말라가고 오염되어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주도의 소중한 자원인 지하수를 지키기 위해서 용천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6. 하르방당과 무속신앙
제주도의 삼다는 다 잘 알고 계시죠?
돌. 바람. 여자
사실 제주 사람에게는 삼다는 삼재였다고 합니다.
돌이 많은 땅에서는 농사가 안되고 바람은 많이 불어 풍랑이 거세지면 고기잡이 나간 배가 조난을 당하여 남자들이 많이 죽어 상대적으로 여자가 많아졌습니다. 돌은 삼재를 이겨내어 살아온 제주민의 삶이 느껴지는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할망이란 여자를 가리키며, 제주에서는 마을 근처에 동굴이 있으면 그것을 할망당으로 모시는 풍습이 있는데 여신(女神) 숭배사상에서 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여신 숭배사상은 제주에 한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도 여신들이 많이 등장하죠. 제주에서도 할망당 그리고 하루방당이 다 존재합니다. 거문덕이할망당, 비양도 할망당, 진안 할망당, 김녕 서문 하루방당 등이 있습니다.
이곳 고내오름에는 커다란 바위가 잡초로 쌓여있고 고내봉 큰신머들 하르방당이란 표지석에는 4개의 신과 다수의 남신 부부별거형으로 정초에 한 번 제를 올립니다.
하루방당이나 할망당은 각각의 사연은 다 다르지만 제주도의 민간신앙에 있어서 돌은 신앙의 성소. 제단, 신성한 공간과 세속적인 공간을 구분하는 울타리, 풍수지리적으로는 마을의 허한 곳을 보강하는 등 중요한 요소로 이용되며, 또한 돌 그 자체가 신체가 되어 신앙의 대상이 된다는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큰신머들 하루방당에 대한 재미있는 설화가 있는데요.
하루는 근처 [당]에 제사를 지내러 가려고 술과 과일 등을 준비하여 놓았는데, 이 집 영감이 제물로 갖다 놓은 술을 보곤 입맛을 다셨고 할머니는 절대로 이 제물에 손을 대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이웃집에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고 합니다.
헌데 할아버지는 속이 출출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꼭 한 잔만 마시자. 마누라가 한 잔 마신 것까지 알아낼 수야 없겠지라고 생각하고 시원스럽게 한 잔 들이켰습니다.
꼭 한잔만 마시려고 했지만 술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한 잔만 더..... 하다 하다 제물로 갖다 놓은 술이니 과일 등 모두 동을 내고 말았습니다.
술이 거나하게 오르고 보니 할머니의 잔소리쯤 두려울 것이 없어서, 영감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고 얼마 뒤에 돌아온 할머니는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답니다.
어이가 없던 할머니가 영감님을 흔들어 깨웠지만 입맛만 다실뿐 깨어나지 않았고 할머니는 분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던 거죠.
당에 올릴 제물을 다 먹어 치우다니 벌이 두렵지도 않아요? 라며 바가지만 한 종기나 나라며 할머니가 할아버지께 독한 말을 할 때 영감님은 취한 눈을 게슴츠레하게 치켜뜨고는 제물이야 다시 장만하면 그만이지 벌은 무슨 벌이란 말을 하면서 호통을 쳤지요. 하지만 며칠 후, 진짜 영감님의 엉덩이에 주먹만 한 종기가 난 거죠.
할머니의 빈정거리는 말에 할아버지는 화가 상투 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당장 어디다 분풀이를 할 곳이 없었으므로 식칼을 들고 당으로 올라갔어요. 식칼로 종기를 찌르고 피고름을 제단에다 뿌리고 그 자리에서 배를 가르고 말았죠.
이 소식에 급히 달려온 할머니는 시체를 내려다보면서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합니다. 비통하게 울부짖다가 할머니는 끝내는 고내봉 서쪽 비탈길에 이르러 스스로 목숨을 끊고 이 일을 비통하게 생각한 한 무당이 이런 제의를 했다 합니다.
하르방당과 할망당을 세워 두 분을 모시자고 하고 할아버지는 하르방당으로 할머니는 할망당으로 모셨다고 합니다. 아마 죽은 영혼도 싸울까 싶어 각각 할망당과 하루방당으로 세운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이러한 제주도의 무속신앙은 조선시대와 일제시대때 많은 박해를 받았다고 합니다. 일례로 조선 숙종 때의 이형상 목사는 제주의 많은 신당을 파괴하고 무당들을 모두 귀농시켰다고 합니다. 일제시대때는 미신타파라는 명분으로 공동체 문화를 파괴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주도의 무속신앙은 현재에도 신당이 346개가 남아있을 정도로 많이 살아남아 있습니다.
제주의 해양환경과 화산섬지대, 기후 등의 자연조건하에서 풍요로운 수확과 집단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제주민의 삶 속에는 다양한 신앙행위가 존재할 수 있었고 그러한 신앙심이 제주의 자연인 돌과 만나서 제주만의 특별한 무속신앙을 만든 건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까요?
7. 만물샘
고내봉은 신성한 오름으로 여겨져 그 안에 보광사, 하르방당, 고내당, 고릉유사와 같은 신앙과 관련된 장소가 많이 있습니다. 만물샘은 고내봉의 분화구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샘이고, 만물샘이 있는 분화구 안쪽으로 올라가는 산 중턱을 ‘만물동산’이라 불렀습니다.
만물샘의 모양은 바위가 사방으로 세 뼘 정도 크기로 파여 있고 그 모양이 큰 바가지 모양을 닮았는데 바가지 모양의 샘 안에 담기는 물의 양이 한 말 정도 된다고 해서 말물이라고 부르다가 만물이라고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물맛이 좋아서 ‘맛 물’이라고 부르다가 만물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곳의 물은 누룩돌 사이로 흐르는데, 누룩돌은 사암을 뜻하는 제주말이고 땅 속에 깔린 넓적하고 검누른 빛을 띤 흙의 성질이 많은 돌을 말합니다. 누군가가 이 물이 모이도록 웅덩이를 만들었더니 그 안에 깨끗한 물이 모이고 어떠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되었다고 합니다.
언덕 너머에 있는 보광사에서 이곳의 물을 공양수로 사용할 정도로 신성하고 귀한 샘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정비가 되어있지 않아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었고 수풀이 많이 우거져서 찾아보기도 어려운 상태입니다. 제대로 된 표지판조차 없이 점점 잊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좀 더 잘 보존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장소였습니다.
8. 고릉유사터
이 곳은 간단하게는 고릉사 절터이면서 스님이 수행을 한 곳입니다.
고릉유사라 함은 휴식공간으로 적당하고 수양을 하기 좋은 곳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한량들이 이곳에 모여 풍류와 호연지기를 길렀다고 합니다. 1930년에 고릉사가 세워졌으나 1948년 4.3사건 때 소실되었고 고내리 사지에서 발견되는 유물을 통해 추정해 볼 때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시대 사이에 창건된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뿐입니다.
이곳에서는 화산성퇴적층을 볼 수 있는데 고내봉이 수성화산이면서 육성화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내봉 응회암은 현무암질 화산쇄설층으로 약 630m가량 노출되어 있습니다. 고온의 마그마가 지하수. 지표수 혹은 해수와 접하는 환경에서 폭발적인 반응으로 분출활동이 일어나 만들어진 수성응회암이 집적되어 화산성 퇴적층을 만들었습니다. 고내봉의 화산체의 형성 및 응회암에 대한 연구가 미비한 실정입니다.
여기까지 19기 B조의 시연 내용을 모두 모아보았습니다.
고릉유사터를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 동선이 힘들었지만 욕심내어 강행하였습니다. 심화반 동기분들 모두 마지막 수업답게 잘 따라와 주셔서 함께 고내봉의 비경을 보고 만족스럽게 시연을 마쳤습니다. 실제 해설 코스로 발전 시킨다면 차로 접근 가능한 곳은 생략하고 간략한 코스로 변경하는 것도 좋겠다는 교수님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고내봉에 간간이 있었던 간이 표지판(만물샘, 고내당 표지)들이 오름해설사 12기 선배님들이 남긴 흔적이라는 이야기를 교수님께 전해드렸습니다. 사명감으로 시연을 준비하신 선배님들의 이야기에 고내봉 시연 내용을 꼭 남겨놓기로 하고 이렇게 긴 마지막 후기를 남깁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 년 동안 19기 여러분들과 행복했습니다~
교수님께서 기본반 때 많이 읊어주시던 시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풀꽃 1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교수님과 술패랭이 꽃
삭제된 댓글 입니다.
오오 소감도 너무 멋지게 작성해주셨네요 ㅜㅜ 감사합니당~~ 저도 벌써 다들 그립네요~
@김지윤 사진을 보니 다시 낙오의 순간도 떠오르고 그립고 그렇습니다 ㅋㅋㅋㅋㅋ 마지막까지 고생 많으셨어요 유종의미를 거두셨습니다 ~~~
@초보오름(박혜임) 작성하면서 다시 그때 생각이 많이 떠올라버렸어요~ 마무리 지으니 후련하네요~ ㅋ
우리의 노력이 한페이지 남겨져 뿌듯하네요.^^
총무님의 활약으로 잘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19기의 소리없는 변방 사계팀이
심화과정에서는 주축세력으로 진화하더니 결국
마지막에 와서는 대미를 장식하는
엄청난 성과를 이뤄냈어요~
전혀 생각지 못한 지역에 도전장을 내었고
합심하여 함께 훌륭히 해내었습니다.
모두에게 박수와 응원을 드립니다.
마무리 후기도 수고하셨어요^^
교수님에게 일년동안 배우면서 오름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배우게 되었어요~ 교수님의 응원과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
그날의 감동이 다시 밀려오네요
오름심화반의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하며 스스로 자랑스러웠던 마지막 시연. 도를 닦는 도인이 튀어나올것 같은 고릉유사의 신비롭고 영험스러운 분위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오네요.
어쩌면 준비가 더 어려웠던 과정이었고, 보여준 모습은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감탄과 놀라움에 우리들 자신이 위대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벌써 2주가 지난 일이네요. 모두들 보고싶어요
마지막 후기 쓰시느라 정말 수고하셨고 고맙습니다
수정하다가 지워져서 다시 작성했어요
처음 댓글도 멋있었는데 더 멋있는 댓글 감사합니다~ ^^ 매주 금요일이 돌아오면 뭔가 허전하네요 ㅜㅜ 다시만날 날을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