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글픈 부활절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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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31일 부활절 예배 강단에 개그맨 최효종 군이 간증이라는 것을 하고 있다. 이른바 새생명 초청 잔치였는데 좌석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개그맨이 온다면 사람이 몰려들어 차고 넘칠 줄 알았는데 츳!
○…2013년 3월 31일. 서글픈 부활주일.
오늘 비가 올 것이란 예보가 약간 빗나가서 어제 저녁에 미리 다녀가버리고
오늘은 그야말로 멋지도록 눈부시게 밝은 봄날이었다.
그래서 일주일 내내 조바심을 하시던 목사님께서 애타게 드린 기도의 덕분으로 그 예보는 빗나가 주셨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리고 우리는 부활절 대예배를 잃어버렸다.
장엄하고 경건하고 눈부시게 복된 예배로써 부활하신 주님과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올려 드려야 할 예배를 실종당한 것이다.
○…오늘 그것은 예배가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도무지 그 딴 짓거리를 두고 ‘열린 예배’라고 하는지 ‘열난 예배’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열 뻗치게 하는 이벤트’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장꾼을 불러모으기 위한 풍각쟁이들의 놀이 놀음이지 하나님께 영광을 바치기 위한 부활절 대예배일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예배의 모독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예배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가인의 예배를 외면하신 분께서 외면하실 예배일 뿐이다.
○…나로 하여금 오늘의 그 이벤트를 예배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미국에서 딴 신학박사님께서 나의 이런 생각에 대하여 '그야말로 덜 떨어진 전근대적 경건주의자의 퇴영적 의식을 드러낸 것이요, (언필칭 ‘예배 잔치론’자들이 말하는) 참 예배의 의미를 모르고 하는 말' 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신학의 ‘신’의 근처에는 얼씬대기는커녕 덜 떨어진 경건주의자로 남겠다.
나의 이러한 판단에 대하여 막말로 쥐뿔도 모르는 인간이 무식해서 하는 큰소리 라고 몰아붙이고 싶을지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무식을 택하겠다.
오늘의 이벤트를 예배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그 따위 새로운 참 예배의 의미는 결단코 알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태생의 신자는 아니다. 그러나 나의 신앙 연조는 어언 60년을 넘기고 있다.
물론 그 사이, 특히 젊은 시절 몇 달 씩, 또는 몇 해씩 게으름을 피운 적은 있지만 그럴 때도 주님을 사모하고 성경을 아껴 가며 보았으므로 신앙의 길에서 크게 이탈한 적은 없었다고 자부한다.
그러니까 줄잡아도 기억할 수 있는 부활절 예배는 4, 50회는 헤아릴 수 있을 텐데 오늘처럼 웃기는 부활절 예배는 처음 겪는다.
예배를 마치고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참으로 황당하고 어지러운 마음이어서 가슴을 쥐어뜯고도 싶었으나 차마 교회에서 그럴 수가 없었다. 먹고 먹이고, 선물을 나눠주고 하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미친 지랄을 벌일 용기가 없어서 남들처럼 히히덕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오르내렸다.
울고도 싶었지만, 실실 웃어대기만 했으니 치유된 상태였나?
아아, 이것이 치유라면 나는 치유를 거부하련다.
킥킥, 키들키들, 큭큭큭, ㅋㅋㅋ.
그러나 집에 돌아오니 그만 열이 올라 방바닥을 치면서 울며, 오늘 영광의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예배를 드리지 못한 허물을 용서하시라고 회개의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니 후련하고 정말 치유되는 거 같다.
'아아, 목사님 치유되는군요. 감사합니다!'
○…애당초 올해는 새문안교회에서 열린다는 부활절 연합새벽예배에 참석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예배에 참석하면 시온찬양대원으로서 2부 대예배를 위한 찬양연습 시작 시각(오전 8시 반)에 맞추기 어려울 지 모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찬양 봉사를 못할망정 연합 새벽예배에 참석 하고, 3부 예배에 참석하려고 내심 작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발목 잡히는 일이 생긴 것이다. 오늘 찬양대가 부른 곡 자체는 중창을 요구하는 데가 없는 데도 지휘자께서 대원 중 노장(老長=노인네+장로님들)들을 불러내어 무대에 줄 세우기를 시킨 것이다. 중창이 아니라 그냥 합창을 하는데 노인네들을 앞에 내세워 앞잡이 부르기를 시켰을 뿐이다.
목청은 돼지 멱따는 형편에 준하지만 늙었다는 죄로 찍혀서 줄 서는데 머릿수를 채우게 된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나로서는 참으로 영광스런 기회였다.
이른바 ‘뽑혀서(?)’ 부활절 대예배의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어딘가 말이다. 하여간에 지휘자님의 의도가 어떠하든 순종해야 할 대원으로서 뭐라고 이유를 붙이지도 못하고 순서에 끼이게 되었으니 부활절 당일 찬양 연습을 무시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새벽 연합예배 참석을 포기하고, 우리 교회 사순절 40일간 새벽예배 마지막 ‘대미 장식’하는 예배에 참석함으로써 고맙게도 귀한 선물까지 받을 수 있었다.
○…아, 이 새벽의 설교여!
여기서부터 이미 나의 울화로 인하여 우울증을 도발하게 했다. 귀중하기 짝이 없는 부활절 새벽 설교에 이 무슨 망발인지 망아지 발인지 해괴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고백이랍시고 털어놓는가?
아, 나중에 이야기하자.
다시는, 다시는, 정말 다시는 이 치유하는 교회의 부활절 날엔 새벽이건 낮이건 저녁이 되건 간에 어떤 예배도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성탄절도 마찬가지다.
낌새를 봐서 성탄절 예배도 오늘 같은 꼬락서니를 보일 듯 싶으면 우리 교회에서 그날 나의 모습을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이 따위 예배에 다시 참석한다면 나는 그날로 비루먹은 똥개의 자식이다. 하긴 그런 날 내가 없다고 찾는 이도 전혀 없겠지만.
○…곳은 시골 장터 한 쪽. 목 좋은 곳에 약국이 있었다.
정상적인 약국은 어디나 그렇지만 그 약국도 늘 유리문을 닫아놓고 있다.
그러니까 닫힌 문이기는 하지만 아예 잠궈 걸어놓은 문이 아니다. 그런 뜻에서 이런 약국을 ‘닫아둔 약국’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약이 필요한 손님이 손수 문을 열고 들어가서 닫고, 약을 지어 받아 들고 다시 열고 나와 닫는다.
통상, 약국의 상품(약품)은 채소 가게처럼, 또는 동네 구멍가게처럼 상품을 문 밖에까지 끌어다 내어놓고 진열하지 않는다. 그 시골 약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소리쳐 손님을 불러들이는 호객행위도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 시골 약국은 정상적(‘전통적’ 또는 ‘구식’)인 보통 교회와 닮았다. 그런데 장날이면 그 시골약국 가까운 곳에서 땅바닥에 약을 늘어놓고 파는 약장수가 나타난다.
이른바 ‘열린 약국’이다. 문이 아예 없으니까 아무나 둘러앉을 수 있다. 그 약들은 대부분 만병통치로서 효험 백퍼센트를 보장한다. 그 약들은 필요한 사람이건 아니건 무조건 장터에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효험이 있는 약이기 때문에 아픈 사람이건 건강한 사람이건 가리지 않고 불러 모아서 알려야 한다. 그래서 그 약장수는 풍각쟁이를 동원한다. 그리고 그 약장수는 말발이 세다. 달변의 장광설, 했던 말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기, 마구 야단스레 웃기며 요설하기, 되는 말 안 되는 말 마구 쏟아내기……. 그리고 딴따라 풍각쟁이가 재롱떨기.
(이것이 열린 약국이라면 정상적 약국은 닫힌 약국이 되나?-잘 모르겠다.)
하여간 그런 약국은 어딘가 요즘 열린 예배와 모습이 일맥상통한다. 바로 오늘 치유하는교회의 부활절 겸 새생명 환영 예배가 그 꼴이었다. 열린예배라는 형식의 예배란다. 풍각쟁이를 동원해서 사람을 불러 모아야 하는 것도 그렇고 그 설교 내용도 약장수의 달변 요설 수준이라는 것까지도. 이것이 새로운 진보된 예배라는 데야 할 말이 없다.
(아, 두통이 나려고 한다. 무슨 약이 필요할까? 만병통치약이라야 치유되겠지?)
오늘날 ‘전통적’이든 ‘정상적’이든 ‘덜 떨어진’ 것이든, 이른바 닫힌 약국은 어느 지방에서나 정상적으로 영업이 되고 있지만 ‘아무나 오라’하고 떠들어 대는 만병통치식 ‘열린 약국’은 요즘 눈을 씻고 닦고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열린교회도 오래지 않아 그런 꼴을 맞게 되지 않을까?
○…오늘 찬양연습실에서 주보의 예배 순서를 보고 참 어이가 없었다. 총무 강 집사도 혀를 찼다. 세상에 이런 예배가 다 있나 하고. 그러더니 지휘자와 찬양 순서 대책을 논의했다. 바쁘게 아래층에 다녀오고 했는데도 막상 예배가 진행되면서 찬양단과 찬양대의 역할 분담에 대한 사전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해 찬양단의 전도사가 지휘자에게 몇 차례나 다가와서 의논하고 가곤 했다. 지휘자는 얼마나 기가 찼을까? 이런 예배를 위해서 부활절 특별 찬양을 준비해야 했던 의미가 어디 있었나 싶었을 것이다. 어쨌든 정상적이고도 일상적 순서란 순서는 모두 생략하고 오직 개그맨의 잡담(이건 간증도 아니고 신앙 코미디도 아니었다.
오늘 아침에 겪은 소감, 교회에서 본 것 인상이라니! 뭐 하는 짓인지, 원.)을 늘어놓게 했다. 부활절 대예배에 왜 그런 게 동원돼야 했나 그 말이다. 주님 부활의 찬양보다 새생명 찾는 것이 더 중하다는 솔로몬 왕과 같이 지혜로운 판단에서 부활절은 무시할 수 있었다치자.(그런 신학적 신념이 있다면 말릴 수도 없으니까)
그러나 언필칭 ‘새생명’을 동원하는데 최효종이 얼마나 기여했을까?
사실 최효종을 보고 싶어서 교회에까지 찾아올 만큼 열렬 팬이나 환장한 사람은 개콘을 열공하시는 우리 담임목사 말고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최효종이 누군지 알고 그를 보려고 찾아온 사람이 설사 있었다고 하자.
그랬다면 그는 우리 담임목사님을 모욕하는 게 되는 거 아닌가?
아니, '최효종 보고 싶어 왔지 당신 목사보러 온 게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들 상대로 설교를 하고 예배를 드린다? 참으로 웃기는 일 아닌가?
웃으면 치유가 된다니까 그래서 그랬나?
그러면 다음 주에는 어떻게 할 건가?
효종이 보러 왔던 사람이 효종이도 없는데 계속 출석하겠는가?
오늘 목사님께서는 “효종이보다 내가 더 개그와 만담을 잘 지껄여 웃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한번 본때를 멋지게 보여주시려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만담이나 개코 같은 신소리를 하고서 앞으로도 이런 소리를 듣고 싶은 사람은 마음놓고 등록하시오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만병을 치유하는 웃음거리는 얼마든지 들려드릴 테니!
아아, 하나님 맙소서.
역시 나이는 못 속인다. 내가 지금 점점 사물 판단력이 흐려져 가니 말이다.
오늘 나는 최효종과 담임목사님과 누가 개그맨인지 헷갈렸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좀 갈쳐줘유우~. ㅠㅠ
○…새벽기도. 사순절 40일 특새를 마무리하는 날이면서 부활절 새벽 예배였다. 그런데 그 예배 설교에서도 목사님은 여전히 자기 방어적 이야기를 늘어놓았는데 오늘은 더욱 쇼킹한 것이었다. 치유하는 교회 이름에 대한 변명인지 자랑인지를 하고 나서, 치유에는 웃음과 눈물이 특효이고 기본이라는 식으로 설명한 다음 예화랍시고 하시는 말씀이 자기 고백이었다.
○…즉 지난 날, 몇 분 장로님들께서 거듭해서 당신에게 당신의 설교에 대해서 요구한 세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의 첫째가 우스갯소리 하지 말라, 둘째가 강단에서 눈물 흘리지 말라, 셋째가 성경대로만 말하라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요구할 때마다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로님들이 당신을 상대로 고소했었다고 했다. 그래서 한 번은 수난일에 웃기는 것을 삼가겠다는 마음으로 우스갯말을 하지 않고 설교를 했더니 모든 성도들이 자더라면서 웃었다!
○…우리는 예술적 미술작품으로서 누드나 공연물과 음란성 나체 그림이나 사진이나 최음적 동영상을 구별해야 하듯이, 품위 있는 익살과 재치있는 풍자와 [영어 좋아하는 우리 목사님께는 humor & satire라고 해야 알아들으실라나?] 저질의 신소리나 흐튼소리는 당연히 구별돼야 할 것이다. 방송 개그 프로그램에서 보고 들은 것이나, 우스갯소리 모음집 같은 데서 찾아서 그걸 자랑이랍시고 읊어대는 것은 아이들 말을 빈다면 그야말로 썰렁한 신소리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희화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 설교를 들으면서 어이없어 웃는 것을 즐겁게 웃는 줄로 착각하시니 참으로 할 말이 없다.
○…비록 처음 찾아오신 새생명을 상대로 하신 설교라고 하더라도 오늘 ‘말씀’은 해마다 녹음기를 틀 듯이 반복적으로 되풀이하는 설교인데다가 ‘실업자 남편’ 레파토리는 도대체 언제나 안 듣게 될는지 참으로 딱하다. [ -그런데 그 새생명 중에는 이런 날만 ‘교회 방문’하는 ‘방문 전문 짝퉁 새생명’도 흔하다는 사실을 좀 직시하셨으면 좋겠건만] 오늘 예배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하면서 둘러앉은 자리에서 목사님 설교 중에 진실된 것은 바로 실업자 남편 타령 뿐이더라면서 키들키들 큭큭큭 킥킥 ㅋㅋ 거리느라고 밥알이 튀어나오는 소동까지 있었다. 그 덕분에 모처럼 ‘치유’를 누렸는지 모를 일이기는 하다. 그러면서 그 신소리가 설교의 무슨 대목에서 무슨 비유로 했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참으로 딱한 일 아닌가?
설교를 들으면 그 설교 내용의 진수를 알고 은혜가 되어야 하는데 엉뚱한 신소리만 기억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는 모른다니 도대체 설교를 듣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는 거다. 얼마나 딱하셨으면 장로님들이 그러시지 말라고 말리시다가 안되니까 고소까지 하셨겠는가 그 말이다.
○…그러나 점심 식탁에 함께 둘러앉은 이들 중 몇 분 장로님들께서 그 고소한 내용이나 목사님이 장로님들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말이 거짓말이라고 했다. 혼자서 강단에서 일방적으로 멋대로 해대는 말을 당최 반박하거나 변명할 길이 없으니 성도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게 되어 있을 뿐이라 참으로 딱하다는 거 아닌가? 그것도 어떤 경우는 반복해서. 그것도 강단에서 뻔뻔스레 거짓말을 해대다니 어찌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은지!
하기야 치유하는 교회 예배에 진저리를 치시는 하나님께서 아예 목사님의 설교에는 귀도 기울이실 생각도 않으시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불쌍한 것은 바로 그런 짝퉁 목자에게 끌려다니는 우리 어리석은 양떼들 뿐이다!
레 미제라블!(2013.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