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만방샘교회 개척이야기 입니다.
조상훈목사님은 이 세대에 예수님이 기뻐하는 교회를 세우고자하는 일념이 있습니다. 돈없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도행전시절처럼 성령님이 역사하는 역동적인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도전을 주리라생각합니다.
최현서교수
만방샘목장교회 개척이야기 를 열면서 (1)
작은 교회는 목장으로 출발하면 건물이 없어도 예산이 없어도 사무실이 없어도 개척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으로 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큰 아파트 평수를 작게 나누어 사용하는 방법이 있듯이 교회가 지나치게 대형화 되어진 교회들은 작게 나누어 흩어지면 목양에 힘쓰며 모이면 대형교회로서의 기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어머니교회가 조절하면서 이젠 대형교회로서 그리고 흩어지면 작은 교회로서 다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교회의 상생이 가능합니다. 그것을 믿으며 만방샘목장교회는 개척되었고 한 걸음씩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요즘은 이곳에 글을 남기기도 힘들만큼 바쁘네요. 모두 건강하시고 서로의 섬기는 교회들을 위하여 도고의 기도로 나아갑시다.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 개교회는 있을 수 없습니다. ^*^
만방샘목장교회 개척이야기 (2)
정말 바쁘게 살면서 이곳에 글을 남기는 것이 아직은 제 삶의 우선순위 밖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직은 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수준의 삶인가 봅니다.
저는 만방샘교회를 개척하면서 저희집 거실에서 시작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그동안 한국교회에 소개하던 목장교회 개척을 시도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가깝거나 부탁드려볼만한 분들을 제외하고(?) 모든 연락을 잠시 중단하고 가정에서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사무실은 집앞에 있는 공공도서관을 사용했습니다. 사례비는 받을 수도 없었고 교회에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어서 아내가 일을 좀 하고 저도 처음에는 직장비슷한(회사 사목으로) 일을 하면서 자비량으로 시작해 보았습니다.
구리에서 그래도 유명해지던 교회 담임하다가 내려왔기에 그 모든것을 내려놓고 지금의 목장교회의 작은 교회 개척을 통한 연합운동이 가능할지를 시험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아 본 것입니다. 그 교회의 기반을 교육에 두었습니다. 그 교육이 새마음드림이라는 교육이었고 12주간을 진행했는데 지금 10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교육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비젼을 나누고 그런 교회를 만들기 원하는 분들이 모여서 지금의 교회로 성장한 것이지요.
참 부족하고 무모하게 시작한 운동이지만 한국교회에 새로운 개척의 문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목장교회 개척이지요. 그런데 작은 교회는 개척만으로 끝나지 않고 서로 연합하여 한 밴드가 되어야 살아남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은 지구촌교회에서 목장사역센터장을 하면서 갖게 된 제 삶의 꿈이며 비젼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예배당을 건축하여 이사한 수지지역 예배당을 임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년이 이번달로 되어집니다. 이제 남은 1년을 이곳에서 지내면서 우리가 가야할 길을 걷고 있습니다. 많은 오해도 받았고 지금도 말하지 못하는 가슴앓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희망은 목장교회에 있고 그 목장교회는 교회로 성장하여 작은 교회들로 건물중심이 아닌 사람중심의 공동체로 자라나서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교회들은 어머니 교회가 되는 모체교회가 함께 아우르며 연합을 해야 합니다.
이 길을 가기위해 우리 만방샘목장교회는 창립되었습니다. 창립된지 이제 2년이 되어갑니다. 저에게 이 길을 가도록 가르쳐 주신 지구촌교회와 책으로 스승되어 주신 많은 선배 목사님들의 가신길을 열심히 따라 가서 꼭 한국교회의 신학교 후배들이 개척의 꿈을 가져보고 작은 교회들도 아름답게 개척과 성장을 연합을 통하여 이루어 가는 그 꿈의 열매를 맛보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한국 모든 교회의 목사님들이 오늘도 힘을 얻으시기를.... 그리고 주님의 사랑되시는 교회들이 세상속에서 승리하시기를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해 봅니다. 샬롬.
만방샘교회 개척과 비젼 3번째 이야기
지구촌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사임하기까지 10년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참 행복했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지구교회와 담임목사님의 많은 사랑도 누렸고요. 지금 섬기는 만방샘목장교회도 늘 섬기는 마음으로 늘 임하고 있고 건강하고 성숙해 지면 더 좋은 리더가 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제 수준에 맞는 만큼만 쓰임받는 것을 이젠 압니다. 늘 저는 허락하신 곳에서 섬기는 자로 있을것입니다
수지선한목자가 쓰던 지금의 예배당 건물로 이사를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고민은 지구촌교회와 거리적으로 가까웠고 지리적으로 같은 수지라는게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이곳이 아닌 다른 지역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가정교회에서 시작된 교회로서는 이사하는 교회건물을 승계해서 이사하기란 불가능했습니다. 6개월이 지나면서 임시로 빌려쓰던 동백 에터미 사무실에서 나와야만 되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에터미 사업자도 아니고 회원도 아닙니다. 이상한 소문이 너무 많이 돌아 다니더군요. ^*^)
구리에서 오시는 성도님들이 5가정(unit) 정도가 되면서 우리는 동백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 갈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용인시 기흥구 일대와 수지 그리고 분당일대를 찾아야 했습니다. 돈이 있는 교회도 아니었기에 참 힘들었고 부자인 성도도 없어서 운신의 폭이 좁았습니다. 그러던중에 몇몇분들이 지금의 이 자리를 찾게되고 2개층을 쓰면서 약간의 노력을 하면 우리가 버틸 수 있다는 계산과 기도속에서 우리는 이곳에 2년 계약을 하고 들어왔습니다. 물론 전제적인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떤 지구촌교회의 양해와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곳의 계약 기간은 2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비젼에 맞게 움직여야 하기에 먼저는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이고 그 다음이 물리적인 것들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예배당 건물이죠.
이곳에 들어와 1년이 되었습니다. 재정집사의 실수로 어려움도 겪었구요 교회의 존폐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된 생각들을 교정해 주시고 더욱 더 만방샘교회의 비젼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누군가를 탓하고 미워하기 보다 이런 작은교회의 개척에 조심해야 하는 부분을 더 많이 보게 하시고 각성시켜 주셨습니다.
독일에서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개신교가 생기지만 그 운동의 정신은 한세대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교회들은 부패했습니다. 그러다가 생겨난 운동이 경건주의 운동이고 그 운동의 정신이 오늘 우리 만방샘교회에 많이 영향을 주었습니다. 조합정신도 확신하게 되었고 오늘날 리디머 교회의 팀켈러 목사님의 정신도 역사에서 미리 만났습니다.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의 오해의 말을 들을때도 있습니다. "옛날의 조목사님이 아니래 좀 변했대". 라는 등의 소리를 들으면 많이 낙심이 오기도 합니다. (내가 볼때는 참 많이 자아가 죽고 옛날보다 훨씬 더 성숙해 진것 같은데...ㅎㅎㅎㅎㅎ)
그때마다 출애굽기를 읽거나 느혜미야서를 묵상하면서 예수님께로 옵니다. 예수님의 가시는 길은 3년을 동거한 제자들도 몰랐으니까요. 제가 구리교회를 사임할때도 이해하지 못하시던 분들이 참 속상한 이상한 소리 많이 하셨지만 2년이 안가서 하나님이 다 신원하시고 사과의 고백을 듣게 하셨었지요.
오직 주님만 보고 나갈 것입니다. 어디까지 제가 가야하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획하신 그 자리까지 가면 저는 저에게 맡겨진 일을 다 한 것이기에 오늘 주님만 보면서 나갑니다.
새로운 길이지만 꼭 길을 만들어 한국교회에서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민사회 교회에 정말 중요한 대안을 만들고 싶습니다. 큰 대형교회들이 더 큰 일을 하며 작은 교회들은 그 큰 교회들안에서 함께 상생하는 이 시스템을 대안으로 내 놓겠습니다. 주님께서 일하여 주실것을 믿습니다.
다음 글 부터는 교회의 출발을 두었던 교육과 그리고 교회의 조직들을 설명해 나가겠습니다. ^*^
만방샘교회 개척과 비젼 4번째 이야기
(개척자금없는데 어떻게 교회 개척을 시작할까?)
요즘 신학교 신대원을 졸업하고 개척해 보고 싶어도 절대 생각조차 하기가 쉽지않다. 왜냐면 전도사님들이 믿음이 없어서도 아니고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다. 그들의 믿음은 사자도 꼼짝못하게 하는 영성과 믿음이 있지만 결국은 돈이 없어서다.
하나님의 나라는 돈으로 만들어 지는게 아니라고 우리 목사들은 목놓아 말하지만 결국 돈이 없어 개척교회가 문을 닫고 또 신대원졸업생들은 돈이 없어 졸업후에 교회개척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해본다. 그러므로 돈을 다스리는 힘과 영성이 중요한데 돈이 있어야 다스려도 볼것 아니겠는가?
만방샘목장교회를 처음개척할때 지었던 이름은 300목장교회였다. 사람들이 무슨 기드온과 300용사냐? 아니면 영화 300명의 스파르타 군인이냐? 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뜻은 300개의 목장교회를 10-12개의 교회가 나누어 협력하는 교회를 꿈꾸는 마음이었다.
처음 만샘교회(구 300목장교회) 개척 전략은 이랬다.
1. 공공도서관을 사무실로 사용한다. 개척을 시작할때 광교집앞에 홍재도서관이 지어졌다. 수원시에서 나에게 개척을 축복하는 선물이었다고 믿는다(^^) 그 좋은 도서관을 너무 잘 사용했다. 날마다 겨울은 따스하고 여름은 시원하게 책보며 설교준비하며 공부하다가 심방 전화가 오면 다녀왔고 미팅이 있으면 도서관 1층 카페에서 만나면 되었다. 사무원이 교회건물을 지킬 이유도 없고 인터넷설치 비용등의 일체의 돈이 들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단, 조심할것은 중년의 남자가 계속 공부하고 있으니 목사인줄 모르고 한 나이 드신분이 다가오셔서 '공인중개사 시험준비하시나요? 모르는게 있는데 같이 공부 하심 어떨까요?'라는 제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ㅎㅎㅎ
2. 예배는 우리집 거실에서 시작했다. 개척을 시작하기 전에 아주 친했던 제자 2가정과 개척준비를 했고 시작하는 단계에 2가정이 합류하여 우리집까지 5가정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가정에서 키타를 치며 예배를 시작했지만 여간 힘들고 어렵지 않았다. 설교준비보다 예배전, 후에 집안청소가 더 힘들었던 것 같다. 특히 아이들이 오기에 깨지고 위험한 물건들은 전부 어디론가 사라지게 하는 마술 능력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가끔 사람도 사라진곤 했다. ㅎㅎ예배한지 두달이 되자 집에서 예배는 힘들어 졌다. 2개월동안 주일예배를 마쳐도 성도들은 집에 가지 않았다. 하루종일 먹고 이야기 하고 놀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들 갔다. 엄청 아쉬워 하면서... 교회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을까?
3. 작은 교인 사업장을 빌려서 예배 장소를 옮겼다. 다단계 회사 사무실이었는데 그 곳을 빌려 쓰는 댓가로 나는 대전침신대 학교와 동기들 사이에 다단계 사업을 하는 목사로 오해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내가 겪어야 했던 고난의 작은 것이었다. 성도들과 깊이 교제하게 되니 사업도 도와야 했고 그들의 치열한 사업터를 이해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돌아보면 그들의 현실의 필요를 돕겠다고 너무 깊게 관여하면 결국은 배신이라는 아픔만 돌아온다. 사업은 사업이고 교회는 교회이다. 이 함께 함속에서 거룩한 구별이 잘 정리되지 못하면 사람잃고 목사가 너무 큰 상처를 입는 법을 나는 댓가를 지불하고 알게 되었다. 목사는 도와주고 결국은 오해받고 욕먹는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산다. 그러나 망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지금도 이 길을 걷고 있는 기적의 삶을 산다.
4. 내가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역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나는 한국교회의 흐름의 방향을 바꾸는 역사의 변곡점 교회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개척부터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 12주간의 교육커리를 가지고 교회에 낙심한자. 불신자. 교회를 잘못 이해하고 상처받은자들을 성도들이 모으면 교육을 시작했다. 그 교육이 정리되어 지금은 '새마음 드림'이라고 부른다. 그 교육이 마친 12주가 지난 3개월 후 우리는 교회와 교육자 간에 합의된 교인등록을 받았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한 기수에 4-5가정이 교육을 받고 2-3가정이 교회에 등록허락을 구했다. (대한민국에서 교회가 교인등록을 갑질하며 받는 교회가 얼마나 있을까?^*^)
그렇게 1년을 보내고 어른과 아이들이 50명이 되었을때 우리는 제주도로 교회 창립을 위한 수련회를 떠났다. 제주도3박 4일동안 성지순례를 하면서 같이 먹고 같이 놀고 같이 간증을 나누며 모아진 교회헌금 50%를 썼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한 진정한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가 태동하는 밑걸음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2016년 11월 22일 동역교회인 죽전지구촌교회를 빌려서 기독교 한국 침례회 새중앙지방회의 교회로서 등록하고 교회로서 우리의 모습을 알리게 되었다. 그 날 감격과 감사의 감동이 아직도 내 몸안에 그대로 남아있다.
만방샘교회 개척과 비젼 5번째 이야기(교회 시스템을 정리하다)
만샘교회를 개척하면서 여러 교회들의 사례를 살피며 공부해 보았습니다. 먼저는 역사적인 교회사를 살폈습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교회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다시 한번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사. 중세교회사. 현대교회사. 그리고 교회의 역사와 교부들에 관한 책들을 다시 살피면서 한가지 더욱 확신을 갖게 된것은 교회가 건강하고 새로운 개혁은 언제나 소그룹의 성도들의 모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가 그랬고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인정할때 까지 교회는 (예배당 건물이 아닙니다.) 늘 소그룹으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계셨듯이 오늘날도 교회의 지도자로서 중심이 실 존경받으시는 분들은 꼭 계셔야 합니다. 그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의 이미지를 만들고 방향을 만들고 협력과 하나됨의 중심이 되어 지시기 때문입니다. 자칫 젊은 사역자들은 유명한 목회자들을 타깃으로 삼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성향이 너무 강해지는 것은 또 다른 사탄의 시험입니다.
건강한 교회를 찾는 공부는 요한 계시록의 칭찬받은 두 교회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로 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교회는 예수님께 왜 칭찬만 받았는지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스탄불을 시작으로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직접 찾아가서 3번이상 그 발자취를 따라 다녔습니다.
니케아 신조라 불리는 니.콘.에. 칼. 콘. 콘. 니 (역사신학을 가르쳐 주신 피영민 교수님의 제자때 배운대로 7번의 종교회의를 앞자만 따서 외웠기에 지금도 이렇게 부릅니다. ^^)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오늘의 이스탄불) 에베소, 칼케톤,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플. 글고 니케 일곱번회의가 있던 지역과 장소를 찾아 다녔습니다. 오늘날의 터어키 지역 다 위치해 있어서 다 돌아보며 힘들때마다 기회가 되면 그 곳을 찾아 다시 한번 개척의 마음을 다지곤 했었습니다.
중세교회는 쯔빙글리와 블링거, 그리고 루터와 칼뱅 그리고 영국의 성공회와 정교회를 찾아서 그 분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선교사님들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면서 루터의 시대가 지나고 루터파 경건주의를 만나면서 그들의 사역에 큰 감동과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청교도주의 영향을 받고 자라난 독일 루터파 교회의 경건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교회사에서 최대의 의미있는 교회개혁운동이 된 것을 보면서 흥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웨슬리의 소그룹운동을 만나게 되면서 지구촌교회에서 그렇게 목장교회의 사역을 부르짖었던 이목사님의 마음과 제 사역의 정체성과 소명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이 시대에 돈없이 그리고 어떤 주변의 도움없이 주님의 소명을 받고서도 두려움으로 그리고 막막함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역자들과 이 시대의 한국교회에 새로운 개척운동과 작은교회 연합운동을 다시 한번 그리며 나부터 모든것을 내려놓고 가정에서 개척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구리에 담임으로 올라가서 6년 3개월 우리지구촌교회 담임으로 섬기던 자리를 사임하는 용기를 냈습니다. 그 당시 '우리지구촌교회'는 나에게 개척에 대한 바람이 들어간(?)것 빼고는 좋은 교회였습니다. 개척에 마음이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교회리더들의 눈치를 보며 그곳에서 이 운동을 시작하려 구리에서 훈련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담임으로 예배당을 구입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당시 28억의 건물을 22억 4천만원에 구리시로부터 샀기에 (이 간증도 나눌 것입니다.) 인테리어와 이전비용으로 매해 몇년을 부채상환에 힘을 다 하는 상황에서 지금의 시스템을 도입하기에는 너무 벅찼습니다. 담임목사가 사임을 생각하고 있으면서 새로운 성도들의 입교를 받을 수 없어서 1년은 새 성도들을 받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연히 담임이 바뀌면 교회가 흔들리기에 안전하게 우리지구촌교회를 부탁할 곳은 지구촌교 지교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결정을 오해하고 이해 못한 분들도 2년이 지나면서 사과하고 감사의 뜻을 받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도 교회도 둘 다 너무 잘 되었고 '우리지구촌교회'는 다시 구리 지구촌교회가 되어 지구촌교회의 켐퍼스 사역지가 되었습니다.
만방샘교회 개척과 비젼 6 번째 이야기(교육목회를 결심하다)
만방샘목장교회를 개척준비하면서 역사에 꼭 필요한 교회를 개척해서 섬기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를 고민하고 기도하게 되었다. 영성목회. 관계목회. 이벤트목회(?)등등을 살피다가 역시 내가 관심이 있던 교육목회쪽으로 내 은사를 따르기로 했다.
제일먼저 시도한 것은 주일학교 커리큘럼을 기존의 방식에서 바꾸어서 현장교육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우선 토요일을 잘 활용해야 했다. 그래서 몇가지 큰 개념을 정리했다.
주중시간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토요일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주일은 교회에서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
주중시간은 가정과 학교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하니 일단 가정이 교육의 주체과 되어야 했다. 그렇다면 가정과 함께 교육을 하면서 가정이 주중에는 교육의 주체가 되어야 했기에 아이들이 성경읽기와 독서와 그리고 경건생활을 하도록 부모님과 연합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신앙을 챙기면서 갈 수 있도록 가정과 대화를 여러 방면으로 하면서 주중의 아이들의 신앙을 챙겼다.
토요일은 토요학교를 시작했다. 처음시작은 10시에 모여서 아이들과 영어 찬양과 암송을 했다. 전도사님 한 분이 도와주셔서 잘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점심을 먹이고는 모두다 교회차량과 부모들의 차량을 타고 현장을 찾아 다녔다. '나라. 조국'이라는 주제로 공부할때는 국회의사당도 방문해서 돌아보고 국회식당에서 밥도 아이들과 먹었다. 서울의 중요한 곳을 참 많이 다녔다. 그리고 양화진 부터 시작하여 선교지도 돌았다. 심지어는 아이들에게 현장교육을 위해 수원 재래시장도 함께 다녔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울렸다. 토요일 우리의 교육 목표는 아이들의 신앙이 진실하게 속을 드러내 보이는 진실의 마음 나누기 였다.
주일에는 예배 중심의 교육을 했다. 주일은 예배에 집중하여 오전에 예배를 드리게 했다. 예배시간에는 부모들과 아이들 함께 찬양을 하고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기도해 주고 자신들의 예배실로 가게 했다. 당시에는 예배실이라고 해 봤자 조그만 방이었지만..... 점심을 먹고 오후에는 위클리 라이프를 썼다. 한주간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도록 하면서 손으로 글씨를 쓰게 했다. 아이들이 무척 힘들어 했다. 그러나 중요하게 가르치면서 매주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신앙적인 측면과 삶의 모습을 적게 했다. 그리고 그 위클리라이프를 가능한 어른 예배에 아이들이 나와서 발표하게 했다. 무대에 많이 서는 연습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당당히 서는 훈련을 위해서 였다. 아이들이 토요일과 주일에 활동하는 모든 그림이나 결과물들은 모임장소에 전시를 했고 어른들이 축복하는 멘트를 달게 했다.
지금은 그 주일 오후 모임이 키타교실과 복음전도 교육과 아이들만의 시간으로 만들어져 가서 아이들의 배움이 풍성해졌다. 부모들의 재능기부를 통해 아이들에게 미술이나 외국어 그리고 여러 악기에 이르기 까지 특별하고 풍성한 교육이 되도록 만들어 갔다.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장년들도 행복해졌다.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했고 교회를 너무 오고싶어 했다. 토요일과 주일이 되면 아이들은 신나했고 교회오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교회안에는 집사님. 권사님 이라는 호칭보다 아이들이 '이모, 삼촌' 이라는 호칭을 모두가 다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공동체가 만들어 지기 시작한 것이다.
주일에 기록한 위클리 라이프를 가정으로 보내어 가족들이 하브루타를 통해 한 주가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계획을 부모들이 듣고 기도해 주며 그 주간의 말씀을 나누는 시간들을 갖게 했다. 교회에서는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교재를 만들어 주고 촛대를 가정마다 선물하여 분위기를 잡게 하고 가족들의 하브루타 시행 인증샷을 밴드에 올리게 했다. 너무나도 행복한 가정들의 모습이 주일 저녁에 밴드에 가득차게 올라왔다. 그리고 수 많은 간증들이 우리공동체의 모습을 그대로 아름답게 보여 주었다.
1년에 2번은 아빠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캠핑을 했다. '아빠 어디가?'라는 프로그램을 도입해서 아빠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함께 운동하고 땀흘리고 아빠들이 해주는 밥을 먹고 찬양하고 춤추고 그리고 저녁에는 아빠와의 데이트를 하면서 아빠들이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누었다. 나도 우리 막내와 함께 복음을 나누었는데 평상시에 볼 수 없던 진지하고 깊은 대화를 잊지 못한다. 아이들은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보는 시선보다 훨씬 깊고 다양한 사고를 하고 있었다. 아빠들은 아빠들데로 자신을 돌아보고 교육의 중요성을 스스로 배우며 아빠들끼리 육아의 중요성을 알아갔고 엄마들은 잠시의 휴식을 갖고 1박2일을 즐겼으며 아이들은 아빠를 더 깊게 사랑하는 시간이 이 짧은 날에 이루어 져갔다. 그 결과로 가정이 회복되어져고 교회 공동체는 자부심을 가지고 성숙해져 갔다.
만방샘교회 개척과 비젼 7 번째 이야기(장년들 교육을 시작하다)
우리교회의 비젼을 정리해야 교회의 방향을 정할 수 있기에 처음부터 우리교회에 함께 할 성도님들의 훈련을 시작했다. 첫번째 교육생은 아내였고 함께 교회를 개척하기로 결심한 몇 가정과 교회의 비젼을 나누었다. 12주간동안 매주일 2시간 30분씩 강의를 시작했다. 그 강의가 지금 10기를 하고 있는 새마음드림 훈련이 되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분들이나 낙심하여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거나 교회에 회의감을 가진 분들을 전도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사업터에서 12주 동안 강의를 한다. 강의에 필요한 교재와 주일 저녁 식사비용은 교회와 전도해온 분들이 제공했다. 한 기수당 많을때는 4-5가정, 적을 때는 2-3가정이 이 훈련을 받는다. 3개월을 함께 하며 교회가 무어인가?를 배우고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흐름을 배우고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배운다. 그렇게 12주가 지나고 우리교회의 공동체 일원이 되겠다고 하면 입교식을 갖는다. 전체교인이 다함께 그 분들에게 함께 공동체가 되려는 이유를 묻고 교회도 그 분들을 공동체 가족으로 받아들일지를 결정하고 정교인이 되는 환영식을 가졌다.
교육을 시작하면서 처음시간에 교육생들께 약속을 받았다. 대형교회를 비판하거나 근거없는 목회자들 비판은 허용하지 않기로 말이다. 요즘 교회를 건강하게 하고 말씀을 묵상을 대중매체에 올리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졌는데 교회가 무엇인지 이해못하고 비판부터 하는 분들을 종종 본다. 특히 대형교회라면 무조건 잘 못 되었다고 보는 분들이 참 많이 있다. 그것은 아주 잘 못된 시각이다. 우리교회는 교회해체주의자들의 모임이 아니라고 말했다. 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고 목장교회로 교회가 개척되고 그 교회들이 함께 연합을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는 비젼을 분명히 하고 교육을 시작한다
새마음 드림에서 주교재로 사용한 책은 '짐 피터슨'의 '울타리 없는 교회'라는 책 이었다. 내가 강의 안을 만들어 사용하면 행여나 여러 오해가 생길까봐 책을 가지고 그 안에 내 강의안을 집어 넣어서 사용했다. 그리고 부교재로 '2020 2040 한국교회 미래지도' 와 워싱턴 지구촌교회에서 사역할때 만났던 '세이비어 교회'책과 '브라우니' 목사의 'CTK교회'의 책들을 사용했다. 그리고 교회사를 4주간 공부하면서 역사에 관점에서 교회의 흐름을 함께 나누었다.
교회가 나에겐 중요했다. 왜냐면 교회는 건물이 아니었다. 창세기에서 교회를 찾아 강의했고 성전의 역사를 공부했고 그리고 신약의 창세기같은 에베소서를 통해 교회에 대하여 공부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교회로 함께 지어져 가야 하는지를 깊이 나누는 영광을 누렸다. 지금 새마음드림 10기 분들이 교육을 받고 있다. 이번 기수분들은 14분이 교육을 받고 있다. 왜 교회가 은혜의 기쁨과 자유함이 사라지고 로마의 제도로 화석화 되어졌는지를 나눌때 성도들은 다 함께 진지하게 나눔을 갖는다. 우리는 그렇게 교회를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삶으로 인식해 갔다.
만방샘교회 개척과 비젼 8번째 이야기(정교인 등록받기)
워싱턴 지구촌교회에서 유학기간 사역을 했었다. 그때 이민 교회를 이해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민 성도들의 애환과 삶의 고통도 공감하며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생활이었다. 한국교회보다 더 치열하게 성도들이 필요에 의한 수평이동과 작은교회들의 고전하는 모습을 보게되었다. 그러면서 의미있는 교회들을 찾아보다가 만난 교회가 '세이비어 The Church of Savior' 교회였다. 오랫동안 청년사역을 하면서 소그룹사역을 했고 지구촌교회 청년부 사역을 하면서는 NCD사역을 인용했기에 세이비어 교회 사역은 참 신선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은사별로 각자가 섬길 수 있는 장소에서 삶을 사역으로 드리는 평신도들의 삶이 아름다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매력있던 한 부분이 교회의 정교인 등록과정이었다.
오늘날 교회등록이 얼마나 간편하고 쉬운가. 마치 주유소 멤버십 카드 만드는 속도 만큼이나 빠르고 쉽다. 과연 교회 등록을 그렇게 받으면서 건강한 공체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 라는 회의를 갖던 중에 세이비어 교회는 새로웠다. 만방샘목장교회(300목장교회)를 처음 개척하면서 교인등록은 12주간의 교육이 끝나고 등록식을 했다. 12주 동안 쌍방이 서로를 충분히 이해하였기에 그 사람과 우리가 한 공동체를 같은 비젼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의 성품과 그들의 비젼이 맞아야 한 교회의 몸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물론 성도들의 우리의 입맛에 가려 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소한 누구인지, 그리고 함께 할 수 있는지는 정확해야 함께 삶을 나누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교회는 집사님, 장로님, 권사님 이런 호칭보다 그냥 언니, 형님, 그리고 아이들은 삼촌 이모등의 호칭이 훨씬 더 자유로왔다. 자연히 우리의 인식은 가족으로 느껴져 왔고 자연스러운 공동체로 만들어져 갔다. 정교인의 기준은 첫째 교회의 비젼에 전적으로 동의 하며 그 방향성으로 함께 나아가는 동의가 필요했고
둘째 가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기쁨의 섬김사역과 물질의 나눔사역과 시간을 공유하는 서약을 하게 했다. 셋째 우리교회의 사역 시스템을 이해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자세와 태도를 갖겠다는 약속을 하면 교회는 다 같이 일어나 그들을 축복하며 환영하는 시간을 갖는다. 교회는 의미있는 선물 몇가지를 가정에 드린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 밴드에 가입하고 가족으로서 인정한다.
물론 이렇게 교회를 등록하고도 결국 떠나는 가정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육을 통한 인식의 동의와 교회의 방향성의 동의와 그리고 함께 만들어 가는 사역의 동의를 받고 모두가 다 함께 교회안에서 움직이는 100% 일군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목장들은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져 다.
만방샘교회 개척과 비젼 9번째 이야기(공동체가 사용할 건물 찾기)
작은 가족공동체로서 시작된 교회는 임시적인 이름을 가지고 성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3개월의 교회 비젼 교육이 끝나고 가정 들의 교회 등록은 잘 이루어져 갔다. 1년이 지났을때 10여가정이 되었다. 어떤 교회력이나 절기나 행사위주의 공동체가 아니었고 그냥 행복한 성도들이 되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그것을 함께 만들어 나누면 되었다. 그때 가지고 있던 교회의 돈을 사용하였고 선교비와 우리 보다 더 작은 교회에 지원을 하는 것 외에는 교회의 헌금이 사용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교육비에 더 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2년이 되었을때 교회를 정식으로 창립하자는 제안들이 나왔고 2년이 될때 장년, 청년과 아이들 50명이 우리의 동역교회 죽전지구촌교회에서 새중앙지방회에 그리고 기독교 한국 침례교회에 300목장교회라는 이름으로 창립예배를 드렸다. 우리의 기도대로 정확히 50명의 가족이 되었으며 정말 감격과 기쁨으로 교회가 세상에 탄생을 했다. 그 날짜가 2016년 11월 22일 이었다.
죽전지구촌교회의 배려로 우리는 주일예배를 그곳에서 오후에 드릴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몇주를 사용하고 보니 오후 4시가 되어서 드려지는 예배는 약간 분위기가 어두웠다. 주일 에배를 드리기에는 역시 오후에는 부담이 되었다. 다시 사업터로 돌아와 주일 오전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다시 1년이 흘러 성도들이 70여명이 되었을때 우리는 이젠 교회가 정식으로 사용할 건물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다. 수용예배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등....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이젠 많아 지게 되었고 우리가 사용하던 사업터도 6월까지 밖에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성도들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건물을 구하게 되었다. 조건은
1.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이어서 우리가 특별히 인테리어를 하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어야 했다.
2. 두번째 조건은 가능한 지금까지 함께 하던 멤버들이 예배당을 오는것이 너무 부담스럽지 않는 거리였으면 좋겠다는 기도제목이었다.
3. 우리가 인테리어나 기타 다른곳에 우리의 돈이 사용되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장소였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탄으로 부터 북쪽으로는 송파까지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을 찾아 나섰다. 기독교 예배당을 소개하는 사이트를 중심으로 며칠씩 건물을 보러 다녔다. 그러던중 예배당으로 사용할 수 있는 너무 이쁜 건물이 나왔는데 문제는 우리가 들어가면 그곳에 있던 작은 교회가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것은 절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예배당을 찾아서 6개월의 시간을 기도하며 보내게 되었다.
만방샘교회 개척과 비젼 10번째 이야기(예배당 건물을 찾다)
교회가 예배당없이 창립되어 70여명의 인원이 되자 우리들 사이에 이젠 공간적 건물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화요일 오전 엄마들의 모임을 동네 까페에 몰려 다니면서 했더니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물론 아주 좋아하는 엄마들도 많았지만^*^)
예배당으로 사용할 공간을 찾아 많은 분들이 노력을 했다. 그런데 쉽지가 않았다. 돈은 없고 교회로 사용하던 곳을 인수인계 받으려니 딱 들어 맞는 곳이 없었다.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전화 한통을 받았다. "수지선한목자교회가 크게 성장을 해서 교회건물을 크게 짓고 나가니 이곳을 사용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집사님 몇분과 먼저 사전답사를 했고 그리고 성도들이 이곳을 돌아보았다. 사업터에서 예배를 드리던 우리에겐 너무 좋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2개층을 우리가 써야 하는데 보증금과 월 사용료가 너무 비쌌다.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그래서 일단 포기를 했다. 그런데 사업을 하던 형제들이 도전해 보자고 의견을 냈고 우리가 쓰던 장소를 비워주어야 하는 시간은 다가왔다. 몇몇 분당에 있던 사업터의 예배당이나 강당도 돌아 보았지만 역시나 여러 여건이 좋지를 않았다. 그리고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갈 곳은 없고 이곳에서는 나와야 한다. 그래서 다 같이 기도한 것이 출애굽 기도였다. 하나님의 명령이시라면 뒤에서 애굽의 병사가 따라오고 앞에서는 홍해가 갈라져서 우리가 이 길을 밀려 나가도록 해 달라고 개인적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지금 수지의 예배당으로 들어와게 되었다. 물론 제일 불편하고 힘들었던 마음의 무거움은 내가 사역했던 수지지구촌교회와 거리상으로 같은 신봉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원로목사님을 뵈었고 담임목사님을 뵈었다. 그리고 잠시 머물러야 할 곳으로 말씀드렸고 오히려 담임목사님은 축복하며 격려와 함께 동역하자는 위로의 제안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구촌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었고 그때부터 카톡을 차단했다. 괜히 수지에 들어오는 이유가 지구촌교회에서 사역한 어떠한 이득이라도 챙기려는 모습으로 보일까봐 일체 어떤 지구촌성도하고도 만나거나 연락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길거리에서 만난 분들이 놀라서 되 물으시는 일들이 생기게 되었다.
우리는 이곳 수지 예배당을 얼마나 사용할 지 모른다. 그러나 가능하면 이곳에서 협력하는 교회들을 조금 더 도울 수 있고 우리가 꿈꾸는 작은교회 연합사역의 시스템이 이루어 지길 기대하고 있다.
그 사역의 모습이 갖추어지면 우리는 예배당의 위치가 그렇게 중요해 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곳에 와서 많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기적이 우리에겐 기적이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그리고 교회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방법인것일 것이다. 사무실에 앉아서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 그저 주님의 은혜의 손길만이 보인다.
만방샘교회 개척과 비젼 11번째 이야기 ( 예배당입당후에 생긴일들)
어렵게 예배당 입당을 결정하고 지금의 자리로 계약을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수지선한목자교회 새로운 예배당입당이 늦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수지선한목자교회와 의논을 하고 임시로 한 건물안에 머물게 되었다. 참 재미있는 시간이었다.(물론 다른 분들은 아주 힘들고 고통스러움을 이야기 했지만 늘 바라보기 관점 아니겠는가?)
우선 우리가 갈 곳이 없었다. 여러군데를 수.선.목 교회와 찾았지만 대안이 없었다. 있던 곳에서는 나와야 했고 이곳은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서 계약을 취소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수선목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상황을 배려했다. 그래서 우리도 청소년부가 2층에서 예배들 드렸는데 그 예배당을 우리가 사용하라고 한것을 청소년들을 생각하여 우리가 지하실 예배당을 사용하기로 했다. 우리교회 성도들이 기꺼이 그렇게 배려를 했고 우리는 처음으로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곳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사를 시작했다. 이사할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동안 살림살이가 좀 늘어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이곳 저곳에서 중고품을 사서 예배당의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이사를 마치고 지하실에서 첫 예배를 드리는날 바로 문앞의 여자 화장실에서 배수관이 터지고 오물이 역류하여 예배하는데 난리가 났다. ㅎㅎㅎㅎ(지금 생각해도 정말 재미있었다. ^*^) 그런데 어느 목사님이 말씀하신것이 생각났다. "교회에서 물이 나면 그 교회는 크게 부흥한다러던....."
첫 예배는 물과의 전쟁이었다. 모든 장비를(쓰레받이 정도였지만) 가지고 성도들이 물을 퍼 밖으로 빼냈다. 그리고 함께 너무 재미있어 했다. 그렇게 우리의 예배는 그곳에서 시작했다.
입당예배 날짜를 잡고 모든 것을 준비했는데 수선목교회의 공사가 공기일을 못 맞추어 다시 연기를 했다. 부득불 지하에서 예배하면서 어쩔 수 없이 입당예배만 먼저 4층 예배당에서 드렸다. 그때마다 수선목교회는 미안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른 배려를 해 주었고 우리는 지하실에서 5개월을 더 머물러 있었다. 그 시간에 우리교회 재정을 맞고 있던 집사한분이 사업이 어려워지자 순간의 실수를 하게되어 교회 재정에 손을 대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 큰 아픔이었고 가정에서 시작하는 교회의 제도적인 약점을 보게 되었다. (그 일로 결국 몇가정은 교회를 떠났다. 나의 더 세밀하지 못한 실수이기도 했으며 너무 사람을 신뢰했던 아픔이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 작은 교회들이 갖는 약점일 수 있기에 우리는 이 문제의 연류된 형제를 마음으로 용서하고 그리고 다시는 실수 하지 않기 위해 마음에 새겼다. 그렇다고 비밀로 감추고 싶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그 실수를 세상에 보이시고 다른 팀들이 실수 하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이었다. )
아픔을 겨우 추스리고 일어나 계속 앞으로 가야 했다. 2017년 10월 21일 우리는 4층에서 예배를 드렸고 3층의 교육관들을 새롭게 정리해 갔다.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벽지를 바르고 묵은 때를 벗기고 새롭게 예배당을 청소했다. 아마것도 없던 무에서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고 도전해온 가정교회가 목장교회로 자라서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예배당을 가진 교회로 순간이었다. 모두가 감격했고 감사하면 우리는 그날 오랫동안 우리가 예배드릴 예배다의자에 앉아 있었다.
첫 예배에 좋은 예배당에서 드려지는 예배. 그 예배에 많은 분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감사의 아멘이 가득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에벤에셀 하나님. 앞으로도 계속 주님이 주인이신 만방샘 교회의 걸음을 인도해 주시리라 믿는다.
(12번째는 어머니에 대한 글임)ㄷ
만방샘목장교회개척과 비젼 13번재 이야기
새로운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분명한 개척의 비젼이 있어야 한다. 나는 형제침례교회에서 10년을 전도사로 사역했고 지구촌교회에서 목사로 10년을 사역했다. 그리고 담임목사로 구리로 올라가서 '우리지구촌교회'에서 5년 4개월을 사역했다. 그 기간에 교회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었다. 건강한 교회란 무엇인가? 정말 내가 받은 하나님의 비젼은 무엇인가? 그 고민이 절정에 이른것은 주변의 대형교회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위기감에서 였다. 위기는 기회도 가지고 있다는 말처럼 나는 목장교회에 대한 평소의 꿈을 다시 꾸기 시작했다.
만샘교회는 목장을 중시여기는 교회다. 그 목장이 교회의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 줄때 교회는 교회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계적인 교회로 모든 목회는 이루어져 왔다. 교육부서의 토요학교도 그래서 시작했고 그 교육은 철저히 현장교육을 통해서 관계로 형성되도록 노력했다. 장년부도 관계가 제일 중요했기에 그 관계를 만드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 다 큰 어른들이 처음 만나서 어떻게 좋은 친구며 형제며 자매로 관계가 만들어 지겠는가?
형제들 끼리는 함께 축구를 하거나 등산을 하거나 관계를 만들어 내는 접촉점을 찾아갔다. 그리고 함께 먹는 문화를 만들어 함께 식탁의 교제를 계속해 나갔다.(개척 초기는 거의 먹고 노는 일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그러면서 교회의 비젼을 시간이 있을때 마다 강조하며 세뇌교육을 (?) 해 나갔다.
가정에서의 관계도 회복되어야 했다. 그래서 아이들이 주일 예배후에 Weeklylife를 쓰게하고 그것을 가정으로 한부 복사하여 보낸후에 가정에서 저녁을 먹으며 가정에서 우리형태의 하브루타를 하게했다. 가족들이 아이들의 한 주간 삶을 나누며 함께 음식을 먹으며 기도제목을 나누고 주일에 들었던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갖고 인증사진을 찍어 교회 밴드에 올리게 했다. 물론 열심히 잘하는 가정은 상을 주어 격려했고 아이들이 경쟁적으로 그 사역을 만들어 갔다.
교회는 정말 가족과 친척같이 관계가 만들어져 갔다. 그 중심에 유,초등부 아이들이 있었다. 부모들이 대화를 이어갈 매개체가 되어 준 것이다. 그것으로 전도가 일어났고 드디어 우리는 '아빠와 함께 하는 캠핑'을 시작했다. 1박 2일로 아버지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캠프를 한다. 엄마들은 휴식(?)을 가지며 기도로서 이 사역을 돕는다. 캠프장을 빌려서 아빠들과 신나게 운동하고 논다. 그리고 저녁에 아빠들이 고기를 굽고 아이들을 잘 먹인다. (음식이 참 맛있다. 아빠들은 역시 만능이다.) 그리고 함께 모여 찬양을 하고 담임목사가 복음을 전한다. 그 복음을 듣고 나서 아빠와 아이들이 저녁 데이트를 나간다. 그리고 함께 걷거나 벤치에 앉거나 진지한 대화들이 일어난다. 그 대화속에서 우리는 아이들의 놀라운 속 마음을 다 듣게 된다. 그리고 아빠가 진지하게 아이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다음날 새벽은 아빠들이 아이들을 위해서 아침을 준비하고 켐핑장 환경에 따라 프로그램을 넣는다. 역시 관계를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오후에 아이들이 집에 돌아 올때 우리는 정말 이제서야 내 아이를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평소에 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우리 아이들의 속을 우리는 댓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시간들 이었다.
만방샘목장교회개척과 비젼 14번째 이야기 (간절했던 주님의 마음으로 받은 비젼들)
만방샘교회를 개척하면서 가장 중요한 나의신앙고백은 나의 생전에 이 꿈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월트디즈니(Walter Elias "Walt" Disney)가 자신의 생전에 디즈니 월드를 보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듯이 나는 만샘교회를 통해 이 일이 이루어 지는 것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최선을 다해서 이 길을 가면 누군가는 그 뒤를 이어 달리는 것이 역사의 증거 아니겠는가? 오늘은 내가 꿈꾸는 교회를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려고 한다.
1. 목장사역의 꿈 Cell, small Group EXPO.
20C의 가장 위대한 주님의 사역을 나는 작은 그룹들을 통한 교회 본질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지구촌교회에서 목장센터장을 할때 장년부 목장cell만 1700개가 넘었다. 그때의 받은 비전은 분명히 어느 교회던지 20c의 주님의 이 사역을 정리해서 다음 21c를 준비해야 한다는 소망이었다. 전세계 흩어져 자생된 이 작은 교회들을 종류별로 한 곳에 모아서 주님의 하시는 일의 방향을 바라보고 그 길을 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기도만 하면 눈물이 나고 나는 뜨거워 진다. 목장은 한국교회를 넘어서 마지막 주님의 싸우시는 교회의 강력한 무기이자 교회의 회복의 대안이다.
국내cell사역을 그 종류별로 사역의 뿌리별로 정리해야 한다
해외의 모든 cell사역의 종류와 그 문화별 열매들을 정리하여 문화에 알맞는 선교전략과 교회개척운동을 정리해야 한다.
2. 국내 농촌 선교 사역 ( 땅을 사라?)
이제는 모든 교회들의 여름 사역으로 보편화된 농.어촌 섬김사역을 1996년 청년.대학 사역을 할때 시작해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사역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만샘교회는 올해 청주에 있는 교회를 섬겼다. 구리에서 담임으로 있을때 부터 하나님은 이 사역의 방향을 예레미야서를 통해 말씀하셨다.
렘 32:6-15을 보면 하나님은 땅을 사라고 하신다. 이 말의 의미를 잘못오해 하면 안된다. 나는 이 말씀을 농,어촌 사역에 적용해 보고싶다. 오늘날의 시대는 국내던 해외선교던 자립형으로 가야 한다. 교회들의 후원금을 받아서 움직이는 사역은 한계에 도달했다라는 말이다. 농,어촌 섬김사역은 그 현지 교회에 땅을 사주어서 자립형으로 가야 한다. 초기 땅의 명예는 그 땅을 산 교회가 되어야 하고 무상임대형태로 시작되어야 한다. 이것은 해외선교도 마찬가지 이다. 이젠 스스로 살아남는 사역을 해야 다. 그러려면 땅을 사던 아님 사업터를 만들던 독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 사역은 다시 길게 논의 할 것이다. 땅을 사서 그 땅을 그 교회성도들에게 무상임대를 하고 매 해마다 그 교회의 성도들이 공동으로 생산물을 내어 원금상환을 하게 한다. 그리고 그 상환이 끝나는 대로 원금으로 양도하고 그 교회는 그 생산물을 통해 운영되어야 한다. 이렇게 사역하고 있는 곳이 많아졌기에 다시 구체적으로 논해 보겠다.
그래서 이 모든 사역을 움직이는 재단은 꼭 중심에 있어야 한다.
3. 목회자/교역자 훈련프로그램
부목사로 사역하던 시절 담임목사님과 교회의 은혜로 유학생활을 해볼 수 있었다. 너무 감사와 감격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가정이 있는 목사로서 유학은 깊게 공부하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특히 사역까지 하게 되었기에 영어와의 부담은 늘 떠나지 않았고 영어책으로 공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다. 그래서 학교마다 좋은 자료들의 책들이 많았음에도 참 안타까웠다.
그때 기도하면서 떠오른 비젼이 교회들이 전략적으로 또는 가능한 교회가 한국교회의 미래를 보고 각 신학교마다 영어책을 번역할 만한 유학생을 선발하여 그 학교의 좋은 책을 1년에 2권씩 번역하게 하고 그 대신 유학비를 지원해 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번역된 책을 한국 교회의 목회자 그리고 신학생들에게 먼저 교육시켜 가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유학을 가는 분들중에 언어가 아직 준비가 안된분들은 유학보다는 연수형태로 미국교회를 경험하고 미국사회를 이해하는 단기 프로그램을 갖는 것이 훨씬 경제적인 면과 시간적인 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4. Global network 사역
단독으로 무엇을 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이제는 무슨일을 하던지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심지어 영화를 봐도 이젠 모든 영웅들이 다 함께 모여 집단을 이루는 어벤져스 시대가 아닌가 말이다. ㅎㅎ
함께 모여서 나눔을 시작하면 엄청난 힘을 얻게 된다. 그것이 바로 post mordern 시대의 위험과 기회의 공존성이 아닐까?
모여서 사역을 배분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전문화하여 그 사역을 나누면 된다.
만샘교회의 가장 강력한 비젼은 목장을 기초로 형성된 작은 교회들이 함께 모여서 서로 cooperate형태의 사역을 해야 한다. 이 부분도 다시 논의 해 보고 싶다. 자신의 교회들이 잘하는 장점과 비젼을 가지고 서로 나누면 꼭 한 교회가(대형교회는 가능하지만) 모든것을 다 하려고 할 이유가 없다. 형제교회들이 돌아가면서 한 달에 한번씩 세미나를 해도 10개 교회만 모이면 우리는 1년에 한번만 세미나를 전문적으로 하고 나머지 시간은 목양에 힘을 쓸 수 있다. 대형교회도 그런 형태로 내부의 구조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수 많은 부목사들은 그저 단순한 관리직이 되고 만다.
이 주제도 다시 한번 이야기 하고 싶다.
앞으로의 교회는 * 뜨거운 영성의 기도와 전도 * 치유를 통한 전인격회복 사역 * 강력한 하나님 말씀의 선포가 교회의 생명이다.
그 기본없이 만드는 모든 사역은 힘없고 뿌리없이 말라가게 된다.
그러므로 이 모든 사역은 강력한 리더십을 갖는 어머니교회(모체교회)가 있어야 하므로 대형교회가 이 일을 해준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작은 교회 그리고 대형교회들이 상생하며 공존하는 주님의 계절의 부흥시기를 한번 더 맞이하는 마지막 대를 준비하는 교회가 될 것을 나는 믿는다.
그래서 만샘교회를 개척했고 목장에 내 사역의 중요성을 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