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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우리를 위해 다윗이 꿈꾼 교회>의 줄거리:
파란만장한 생의 여정을 아무나 흉내 못 낼 괄목할 업적들로 가득 채운 영광스러운 생애의 마지막에, 다윗은 과거를 돌아보며 자신의 발자취에 도취하는 대신에 아직도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한 중앙에 여호와의 성전이 세워진 나라. 그래서 각지에 흩어진 백성의 마음들이 예외 없이 성전에 모아지는 나라. 또한 거꾸로 성전이 모든 백성 각자의 삶에서 생활화 되는 나라. 이것이 다윗이 남겨주고 떠난 선민의 나라요 우리를 위한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위해 다윗이 꿈꾼 교회
(역대상 28:1~21)
1. 다윗이 이스라엘 모든 고관들 곧 각 지파의 어른과 왕을 섬기는 반장들과 천부장들과 백부장들과 및 왕과 왕자의 모든 소유와 가축의 감독과 내시와 장사와 모든 용사를 예루살렘으로 소집하고
2. 이에 다윗 왕이 일어서서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안할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3.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라 피를 많이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4. 그러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전에 나를 내 부친의 온 집에서 택하여 영원히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셨나니 곧 하나님이 유다 지파를 택하사 머리를 삼으시고 유다의 가문에서 내 부친의 집을 택하시고 내 부친의 아들들 중에서 나를 기뻐하사 온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셨느니라
5. 여호와께서 내게 여러 아들을 주시고 그 모든 아들 중에서 내 아들 솔로몬을 택하사 여호와의 나라 왕 위에 앉혀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려 하실새
6. 내게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 그가 내 성전을 건축하고 내 여러 뜰을 만들리니 이는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아들로 삼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임이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우리를 위해 다윗이 꿈꾼 교회>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우리를 위해 다윗이 꿈꾼 교회’
다윗이 생애의 마지막 순간에 이스라엘의 모든 요직에 있는 사람들과 가족들을 모아놓고 유언을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후로는 다윗과 같은 왕이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다윗은 괄목할만한 업적으로 생애를 가득 채운 성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다윗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이룩한 업적들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목동으로부터 왕을 삼으시는 많은 우여곡절 가운데 늘 함께 하심으로 얻게 해주신 승리에 대해서 마음이 빠져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다만 다윗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오직 성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왜 이렇게까지 성전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였고 성전에 사로잡혔던 것일까요?
다윗은 죽어가며 과거를 돌아보는 대신에 죽은 뒤에 세워질 성전과 그 성전을 생활화하는 이스라엘 나라를 꿈꾸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 역사상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왕임에도 불구하고 왕으로 살았던 생애의 존재의미를 성전 건축을 준비한 사람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다윗이 꿈꾼 선민의 나라의 모습은 곧 우리가 이루어야 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역대기의 저자 에스라는 정확하게 그 점을 보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교회의 모습을 다윗의 유언 속에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서남북으로 흩어져서 살고 있습니다. 다윗이 꿈꾸었던 선민의 나라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백성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속에 성전이 들어가 있으므로 성전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이 그 먼 이국땅에서 파괴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쪽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한 것과도 같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모든 백성의 마음이 성전에 모여 있는 모습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전에 수백만 개의 마음이 모이면서 또한 수백만의 마음에 성전이 들어와서 생활화되는 나라입니다.
밤에 달이 뜨면 우리나라 오천만 국민이 달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시선을 따라서 오천만개의 마음이 달에 모아집니다. 거꾸로 말하면 달은 하나이지만 오천만 명이 각자의 마음에 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성전의 생활화가 이런 모습으로 이루어지기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즉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몇 만 명이 모일 수 있는 대형 예배당이 있어야 멋진 교회 부흥하는 교회가 아니라 성전에 마음이 모이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클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성전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한 장면으로 꿈꿀 수 있는 교회는 전 세계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십자가 너머에 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동선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간이 있습니다. 이 공간은 예수님이 아닌 어떤 위인들도 만들 수 없었던 공간입니다. 십자가는 세상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두 공간을 나누는 경계선이 됩니다. 즉 십자가 너머에 마음을 두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고,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은 세상에서는 마음의 만족과 기쁨거리를 더 이상 찾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꿈꾸었던 성전도 이와 같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이었고 번제단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성전이 있는 나라를 꿈꾸었던 것처럼, 이 모든 의미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속에는 십자가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는 김 집사님의 마음에 십자가가 있어야 하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마음에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국민 앞에서 연설하는 정치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달이 뜨면 오천만이 똑같이 마음을 달에 줄 수 있는 것처럼, 이 지구 위에 어디에 흩어져있든지 마음을 예수님의 십자가 너머에 둘 수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이 아닌 하늘에서부터 기쁨과 만족을 찾겠다고 하는 의지가 십자가 너머에 마음을 두는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십자가 너머의 공간은 70억 개의 마음이 모이더라도 부족함이 없기에, 교회 또한 마음이 십자가 너머에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인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다윗이 꿈꾸었던 성전의 모습이고 그리고 나서 지교회도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교회는 지교회가 개교회 중심주의가 되어서 지리멸렬되고 사분오열 되어있습니다. 즉 내가 출석하는 교회만 부흥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이렇게 하는 한 교회는 교회로서 우뚝 설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몸은 지교회에 모여 있더라도 마음은 십자가 너머에 모여야만 합니다. 미국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십자가 너머에 모이고, 러시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십자가의 너머에 모여야 합니다. 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교회를 이룬다는 생각을 가져야만 내가 출석하고 있는 지교회에서도 생명력이 생겨날 수 있고 참 의미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러한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요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제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할 것과 성전을 건축하게 될 것임을 유언합니다. 또한 자신은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를 한 사람으로 규정하며, 하나님께 영감을 받은 성전의 설계도와 성전 기구들의 식양을 솔로몬에게 넘겨줍니다. 한편으로는 솔로몬을 격려하고 고무하면서 어떤 환란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에 이 성전을 설계한 대로 완성하라는 말을 남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다윗이 꿈꾸었던 교회가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솔로몬의 왕위 계승에 대해 다시 한 번 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부인이 많았고 아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서열상 한참 아래인 솔로몬을 왕으로 삼았던 것일까요?
첫째 암논은 이복누이동생인 다말을 범하고 압살롬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둘째는 일찍 죽었고 셋째인 압살롬은 반역을 일으켰다가 요압 장군에게 죽었습니다. 넷째 아도니야는 압살롬만큼이나 외모가 준수했고 아버지 다윗에게 단 한 번의 꾸지람도 듣지 않을 정도로 성실한 사람이었는데도 왕위를 넘겨받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솔로몬은 밧세바가 낳은 네 명의 아들 중에 셋째입니다. 밧세바는 다윗의 모든 아내들 중에서 다윗 생애의 가장 큰 죄악으로 인해 얻게 된 아내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밧세바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과 거짓말 등 온갖 죄악을 떠올리게 하는 주홍 글씨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공공연하게 사무엘 선지자를 비롯한 이들이 기록하였기에 솔로몬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아들들보다도 솔로몬의 특징은 죄에 대한 자각이 강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일천 번제를 드리며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일천 번제는 단순히 하나님께 많은 것을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천 번 죽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스스로를 출입을 알지 못하는 아이라고 지칭하는 모습에서도 솔로몬은 스스로 죄인 됨에 대한 자각이 어느 정도로 강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죄인 됨의 반대는 자기 의로 충만한 상태입니다. 자기 의로 충만하면 자신감과 자기 판단에 대한 신뢰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아예 판단을 포기하고 듣는 마음을 바라며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죄에 대해 얼마나 강한 의식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기억하게 하는 아들이었고, 다윗은 솔로몬을 보면서 죄의 씨임을 느꼈을 것입니다. 솔로몬 또한 성군으로 추앙받는 아버지 다윗에게서 무시무시한 죄악 됨을 보고 바로 자신이 그 죄악 가운데서 태어난 아들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소름끼치는 죄악에 대한 깊은 깨달음으로 묶인 아버지와 아들이 성전 건축을 준비하고 완성합니다.
다윗이 꿈꾸었던 교회가 가능하려면 이렇게 깊고 깊은 죄악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으로부터 솔로몬에게로 왕위에 앞서 계승된 것은 영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죄인 됨의 자각이었습니다. 이 죄인 됨의 자각이 없다면 성전 건축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성전 건축은 단지 국가적인 대규모의 토목공사에 불과하며 왕실의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정치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꿈꾼 나라와 교회가 성립하기 위한 첫 번째 요건입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만 성전은 의미가 있습니다. ‘일천 번제를 드렸다’는 것은 일천 번을 죽어도 또 죄가 살아남을 뜻합니다. 죄를 보기 시작하면 내 생애 동안에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일은 아무것도 행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생을 내 자신의 죄와 싸우느라 다른 것을 돌아볼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죄가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포착되면 내 생애의 꿈이나 비전, 이상과 같은 것들을 볼 여력이 없습니다.
프로레슬러를 세 살 아이와 놀게 했더니 프로레슬러가 먼저 나가떨어지더랍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은 프로레슬러도 감당할 수 없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혈압과도 같습니다. 혈압 약을 먹으면 혈압이 억제되어 낮게 유지되지만 고혈압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렇게 체질이 되어버린 죄란 무엇일까요?
2절에 보면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안할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라고 성전 건축의 핵심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모실 장소를 성전으로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하나님의 발판’이라고 합니다. 법궤를 덮고 있는 덮개를 여호와의 발판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덮개는 속죄소 뚜껑 위에 두 천사가 날개를 펴서 보호하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즉 죄의 깨달음이 있어야 성전이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그 의미를 알 때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성전을 마음속에 담을 수 있습니다. 밤하늘에 뜬 달을 오천만 명이 각자의 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바로 법궤의 모습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죄가 발생하는 속죄소는 곧 마음의 지성소에 말씀의 돌판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와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법궤 안에 말씀의 돌판과 하나님의 이름은 하늘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로서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성전을 ‘여호와의 언약궤를 두는 곳’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 위하여 택한 곳’이라고도 합니다. 죄는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와 있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는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어지는 대상의 이름이 들어옵니다. 그 대상 자체는 들어오지 못하고 이름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만족과 기쁨은 영원토록 궁극적인 기쁨인데 영원한 기쁨을 추구하지 못한 채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는데 그렇게 들어온 이름이 죄입니다. 다시 말해 죄는 하나님 이외의 대상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돈 건강 자녀의 형통 승진 외모 출세 등의 세상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려고 하는 것이 죄악이고 간음입니다.
우리는 조금의 틈만 있어도 이러한 기질이 발동하기 때문에 24시간 편의점처럼 마음에서 지성소를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세상의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려는 마음이 되고 맙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이 세상 것들의 이름이 들어오면 이것하고 싸우느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교인 한 사람씩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았을 때 그 사람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시장에서 돈을 벌려는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돈을 벌어서 기뻐하려는 것이 죄악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기억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서도 성전을 기억했던 것처럼 시장에서 장사를 하면서도 성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돈을 더 벌고 싶은 죄적인 마음과 싸우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예배당에 모여 있는 것이 교회가 아니라 어디에 있든지 마음에 십자가를 품고 자기 죄와 싸우는 모습 전체가 교회입니다. 죄와 싸우느라 이 세상일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편으로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 동안에 내 생애의 현장은 하나님의 활동무대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생각하시고 원하시는 것들을 성취해 나가십니다. 나는 지속적으로 죄와 싸우기만 하면 됩니다. 혈압 약을 매일 먹어야 하는 것처럼 날마다 죽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고 사는 동안에 죄의 체질을 제거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체질이 나타나는 것을 억누를 수 있을 뿐이므로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내 생각과 의지와 능력으로는 장사도 못하고 생애 비전을 꿈꾸고 달려가지도 못하고 자식도 키우지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가십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이루어져야 될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십니다. 다윗이 그런 나라를 꿈꾸는 것입니다.
온 나라의 백성들이 오직 마음에 성전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상번제가 드려질 때마다, 마음을 성전의 구성에 대입해서 지성소에 무엇이 들어와 있는가를 살핍니다. 하나님의 이름 외에 다른 것이 들어와 있다면 상번제를 통하여 죽어가는 어린양과 나를 동일시하며 성전을 생활화합니다. 날마다 일 년 된 어린양을 아침저녁으로 한 마리씩 번제로 드리면 그 번제에서 죽는 양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봅니다.
그렇게 죄와 싸우고 있는 동안에 백성 한 사람의 삶의 현장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활동무대가 되는 것을 봅니다. 이게 진정한 교회요 진정한 선민의 나라인 것을 꿈꾸면서 다윗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런 교회를 세워야 하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행동으로 하는 죄들은 죄의 결과이고 증상 일뿐입니다. 증상을 치료해서는 안 되고 증상을 나타나게 하는 바이러스를 죽여야 합니다. 죄는 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외에 이 세상의 것이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이 세상 것들의 이름을 붙잡고 추구하려는 성향입니다. 이 죄를 알게 되면 이제 여러분의 인생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하고만 싸워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죄와 싸우는 것이 교인이고 선민입니다.
그렇게 죄와 싸우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일 사업 자녀 등의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이 계획해놓으신 뜻대로 활동하시며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면서 역사하시며 이루어 가시는 것까지 다 교회 안에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모였을 때만 교회가 아니라 시장에 나가서 장사하는 동안에 죄와 싸우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장사하는 시장에서 이루는 것까지 다 포함해서 교회입니다.
다윗이 꿈꾼 나라가 바로 우리를 위해 꿈꾼 교회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다윗이 우리를 위해 꿈꾼 교회가 실제로 윤곽을 드러내는 복된 타이밍이 우리들에게 주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