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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안>
제목: 아브라함의 꿈, 이스라엘의 사명
일자: 2023년 6월 25일 주일
[갈라디아서 3:14, 29]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설교의 목적:
이 설교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 어떤 목적으로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지구촌의 평화로운 미래와 교회의 소임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아브라함은 전 세계 인구의 60% 이상이 추앙하는 인물이며 성경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주인공 중의 한명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인류의 미래는 아브라함의 언약성취가 그 핵심이다. 성경 드라마의 이 핵심을 이해하고 그 언약에 동참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상속자들에게 주어진 소임이다. 성경은 이 소임이 교회에 주어졌으며 교회의 순종을 통해 온 세상은 그 복스러운 세상에 동참할 것이라고 소개한다.
나는 이 설교에서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경륜이 결국 아브라함에게 제시된 언약이 성취되는 과정이며 그것의 성취를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제시하겠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길은 아브라함의 후예들이 이 언약의 목적과 본질에 충실하는 것임을 강조할 것이다. 또한 이 영광스러운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고 그것을 제거하거나 우회하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을 제안할 것이다.
설교 개요
1. 아브라함의 상속자들
2. 복의 씨앗, 아브라함 언약
3. 언약의 상속자 이스라엘
4.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1. 아브라함의 상속자들
오늘 주제는 다음의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은 왜 중요합니까?’ 세계 모든 민족에게는 각각의 조상이나 시조가 있습니다. 밀양 박씨는 박혁거세를 조상으로 모십니다. 우리 민족은 스스로를 단군의 자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인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면서 큰 민족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의 자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을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창 22:27).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이주하여 매우 크게 번성했습니다. 성경 출애굽기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출애굽기 1:7
이스라엘 자손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니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동참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할 때 그 말은 아브라함이 가진 믿음을 계승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오히려 속이 유대 사람인 사람이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로마서 2:29~30, 표준새번역성경
또한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서 3:29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적으로 유대인을 포함할 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도 포함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전 세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확대됩니다.
그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들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매우 크게 생육하고
번성하게 할지라 그가 열두 두령을 낳으리니
내가 그를 큰 나라가 되게 하려니와
창세기 17:20
이스라엘처럼 이스마엘도 열두 두령을 낳아서 큰 나라가 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마엘의 후예들이 마호메트를 따라 이슬람교를 세웠습니다. 이슬람은 하나님(알라)의 뜻에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율에 복종할 것을 다짐한 사람들을 무슬림이라고 부르는데, 그들도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전 세계에서 아브라함을 추앙하는 종교가 세개인데 그것은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입니다. 이 세 종교를 가리켜 아브라함 종교(Abrahamic Religions)라고 부릅니다. 2023년 현재 전 세계의 종교 통계를 보면 기독교인이 24억명으로 31%, 무슬림이 20억명으로 25%, 그리고 힌두교인들이 15%, 불교는 6.5%입니다. 그 중에 아브라함 종교에 속한 사람들의 수는 전 세계인 중에 55%로서 44억명 정도입니다. 이는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숫자입니다. 과연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번성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은 아브라함 링컨입니다. 작년에 제26차 세계오순절대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열렸는데 대만에서 온 강사목회자의 이름은 아브라함 쿠 목사였습니다. 이슬람권에서는 아브라함을 이브라힘으로 발음하여 자녀들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전 세계에 그 자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서로 힘을 모은다면 이 세상은 금방 평화의 동산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아브라함이 바라는 바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2. 복의 씨앗, 아브라함 언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에게 복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그의 자손들이 많아져 큰 민족을 이룰 것이며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통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모든 것을 다스리라는 복을 명하신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창 1:28).
하나님은 온 세계를 지으시고 아담 부부에게 맡기시면서 그들을 통해 만물이 복을 받아 충만하게 될 것을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을 홍수에서 건져 내신 후에 동일한 복을 주시면서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관리하도록 위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벨탑 사건 이후에 온 땅에 사람들이 흩어져 길을 잃은 양무리처럼 방황할 때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천하만민을 위한 복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무엇을 기대하셨을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아담 부부를 지으시고 기대하신 것과 같은 것을 노아 가족에게 기대하셨을 것이며, 그리고 이제 동일한 기대를 가지고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온 세상에 복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씨앗처럼 아브라함의 마음과 가문에 떨어져 점점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그 자손들이 애굽에서 풀려나와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다시 한번 그 언약은 갱신됩니다. 하나님은 이제는 큰 민족이 된 이스라엘 자손에게 아브라함의 언약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을 지켜 주고 그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을 제사장의 나라로 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면 세계 모든 나라와 민족들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이며 이스라엘은 열방을 향하여 축복할 것입니다. 그 결과로 천하만민은 복을 받고 마침내 하나님의 작품인 이 세상은 생명으로 충만한 땅이 될 것입니다. 이런 기대와 희망은 성경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자리잡은 시온산에 사는 시온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꿈과 기대를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통하여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그 자손들은 열방을 경영하며 그들에게 빛을 비출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이사야 11:10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이사야 60:1~3
이사야의 예언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복의 씨앗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후손 중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돋아납니다. 그리고 만민의 깃발이 되어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자라난 나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함께하셔서 열국과 왕들이 시온에 우뚝 솟은 영광의 나무를 향해 나아올 것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새롭게 편곡하여 노래하는 작곡가와 같습니다.
그런데 천하만민을 위하여 복이 되는 아브라함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더욱 선명해집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시고 그들을 교회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에게 명하시기를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와 주님의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오늘과 같이 천하만민이 주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그러나 아직 온 세상이 다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는 종말에 온 세상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장차 완성하실 새로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이르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요한계시록 19:1, 6
성경 전체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들려주는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때로는 갈등과 좌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복의 씨앗은 결코 죽지 않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자라고 자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침내 교회라는 우람한 나무를 이루었고 결국에는 온 세상에 있는 만국이 하나님 앞에 와서 한 목소리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이 세상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꿈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아브라함의 언약을 상속하느냐가 중요합니다.
3. 언약의 상속자 이스라엘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성경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장했습니다. 우리의 문화는 성경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서양에서는 멋진 예배당이 유물로 남아 있습니다. 미국같은 나라는 성경에 손을 얹는 방식으로 대통령 취임 선서를 진행합니다. 많은 문학작품이 성경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에덴의 동쪽'(John Ernst Steinbeck, 1952)이라는 책은 가인을 생각나게 하는 이름입니다. 앞으로도 성경은 인류와 영원히 함께할 소중한 유산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중요한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에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곳이며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장차 어떤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배우면서 우리의 뿌리와 근원을 생각합니다. 성경 이야기는 하나의 드라마처럼 우리가 이 땅이라는 무대를 살아가는 배우들이며 이 거대한 이야기가 어떤 결말로 이어질 것인지를 들려줍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을 헬라인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인생을 통으로 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연극무대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스끼니 빠스 호 비오스(skene pas ho bios, 우리에게 헬라어를 가르쳤던 고려대 권창은 교수는 아테네대학에서 공부하신 분으로 우리에게 현대희랍어 발음으로 가르쳤다.) 이것은 제가 헬라어를 처음 배울 때 암송한 구절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경 이야기가 우리의 발을 비추어주는 등불이며 길을 보여주는 빛이라고 노래했습니다(시 119:105).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발견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이 세상과 인간인 우리 자신, 그리고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가 들려주는 하나님의 계획은 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마스터플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설계도에서 가장 중요한 뼈대는 아브라함의 언약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하나님이 어떻게 경영하실 것인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위대한 경륜은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역할과 임무를 맡았는지를 들려줍니다.
성경 이야기가 없는 곳에서 인간의 존재 목적을 찾으려 한다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를 안다고 해도 ‘인간의 제일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암송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장에는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들려줄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들려주며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임무를 맡았으며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결국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를 들려줍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소중하게 간직한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으며 고난을 인내하고 결국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과 모세, 다윗과 같은 사람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히브리서 11장에는 더 많은 본보기 영웅들이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언약을 상속받을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가볍게 여긴 사람들이 어떻게 슬픈 결말을 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성경은 들려줍니다. 그들 중에는 팥죽 한 그릇에 아브라함의 언약을 상속할 권리를 팔아버린 에서가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을 가볍게 여기고 불순종한 사울왕이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는 하나님의 언약을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간 사람들이 어떻게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풍성한 삶을 살았는지를 들려주며, 동시에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을 걸으며 오만한 자들과 함께 지낸 사람들의 비참한 결말도 들려줍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아브라함의 언약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늘 이 언약을 상속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시며 그들을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간 땅에서도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고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이 바로 그 언약의 상속자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소중하게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유대인으로 나셨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처럼 열두 제자로 이루어진 새로운 언약백성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교회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언약을 상속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베드로는 교회를 새 이스라엘이라고 분명하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전서 2:9~10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유익을 얻습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과 우리 자신, 그리고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하여 들려주는 아브라함의 언약일 것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번성하게 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일깨워 그 소임을 다하게 하려고 예언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구약성경의 이야기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꿈을 이루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새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언약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신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는 음부의 불구덩이 속에서 하늘에 있는 아브라함을 봅니다(누가복음 16:19~31). 아브라함의 품에 나사로가 안겨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천상의 아브라함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을까?
아마 자기 육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대인들이 참 유대인으로 참 이스라엘로 소임을 다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 자신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와 공도를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창세기 18:19). 그런데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인 이스라엘이 된 교회에 대해서도 이 영광스러운 언약 앞에서 그 소임을 다하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 가르침을 따라서 세상에 빛이 되고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지금 자신이 낳은 또 하나의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들은 아브라함의 관심 밖에 있는 민족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의 후예인 무슬림들에게도 하나님의 계명에 복종하기를 진심으로 바랄 것입니다. 정말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같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의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서로 평화를 누리기보다는 전쟁과 갈등의 기나긴 세월을 보내다가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성취되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기까지 그 대로를 평탄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4.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지금 우리는 다문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인구 감소로 해외 이주노동자의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회가 이렇게 수동적인 필요에 의해서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는 다문화 사회가 되었을 경우에 갈등이 고조될 수 있습니다. 사회가 불안해질 수 있다는 거죠. 왜냐하면 이주민에 대한 경계심이 생겨 배타적인 입장으로 쉽게 전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집트에 들어간 히브리 민족을 이집트인들이 두려워하면서 그들을 학대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사회는 점점 더 불안해지고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처럼 개방화된 세상에서 나라의 문을 닫고 이주민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화에 역행하는 일이 될 것이며 옛날 쇄국정책을 펼치던 흥선대원군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이 한참 성장하던 시대에 미국 사회를 일컫는 말로 용광로(melting pot)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그 용광로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세계 어느 나라로부터 온 사람들이라도 미국 사회에 녹아 들게 하는 문화적 자신감이 있었던 시절의 미국을 설명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포용적이고 문화적 자신감을 가진 민족은 여러 나라의 인재와 이주민들을 받아들여 점점 강성해집니다. 그런 나라는 전 세계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민족이 되는데 저 과거로 돌아가면 한때 로마가 그랬고 이슬람 세력이 그랬습니다.
역사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이슬람 세력은 정복민에 대하여 굉장히 관대하고 관용적인 정책을 펼쳐서 기독교 세계였던 동로마제국을 거의 다 점령했다고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이슬람이 그렇게 빠르게 확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슬람이 정복한 나라들, 즉 이슬람에게 문을 열어준 나라들에게 세금을 깎아주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때 당시에 이슬람 사회는 어떤 민족의 어떤 종교나 사상이든지 용인할 수 있는 문화적 신앙적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정책을 펼칠 수 있었고 그 결과 기독교 신앙을 가진 지역에 이슬람 나라들을 건설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가 문화적 자신감을 가질 때 그 나라는 다른 나라와 민족에 대하여 개방적이 되지만, 한 나라가 문화적 자신감을 상실하고 문화적 열등감에 사로잡힐 때 지극히 폐쇄적이 되고 수동적이 되어서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슬람 사회는 과거의 개방성을 상실하고 매우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약해진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나라가 일본 문화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드러난다고 합니다. 전문가의 의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한때 일본에 대한 두려운 생각을 너무 크게 가진 나머지 일본문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한번 우리나라가 일본의 속국이 되지 않을까 주저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도리어 우리나라는 문화적으로 일본을 압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케이 컬쳐(K-Culture)라는 말이 그것을 대변합니다. 이것이 80년대 우리 민족이 일본에 대해서 가졌던 문화적 열등감에서 벗어나 문화적 자긍심을 가지게 된 현재의 상황입니다.
신앙의 영역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회가 신앙의 열등감에 사로잡혀 자신감을 상실할 때 그 사회는 굉장히 수동적 또는 폐쇄적이 되어서 ‘어디 물러가라!’ ‘어디 받아들일 수 없다!’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수세적인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개방성이 자신감의 표현이라면 배타성은 열등감의 증거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이스라엘로 여기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시며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 주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사도 바울의 신앙적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확신을 가졌습니까?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을 이루어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지역을 넘어 사마리아와 지금은 땅끝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사도 바울을 본받아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하여 이 세대와 세상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신앙적 기반을 든든히 한다면, 우리 기독교 신앙은 지금 한국 사회가 처해 있는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는 길에 바른 지침과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고 다민족이 어우러져 공생하고 공영하는 미래를 선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주님이 오시는 대로를 평탄하게 하자고 자기 시대의 백성들에게 권면했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사야 40:3~5
하나님의 대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오시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고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실 때 우리는 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로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미래의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구원의 대로입니다. 그런데 그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주문합니다.
저는 지금 우리 사회는 물론 전 세계에 아브라함의 언약이 들려주는 판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온 세상을 풍요와 번영으로 충만하게 만드시려고 자기 백성에게 기대하신 꿈이며 비전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세상 만민이 한 가족이 되고 한 나라가 되어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더불어 평화를 누리는 세상을 이루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위대한 약속에 동참하라고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그리고 유대인들과 교회를 부르셨다고 성경은 들려줍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과 편지들은 바로 이 목표를 지향하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한평생 바라보고 달음질한 푯대였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 푯대는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는 세상, 아브라함의 언약이 교회를 통하여 성취되어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대로로 걸어가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미래를 상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꿈과 이스라엘의 사명을 분명하게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문을 닫고 주저하기보다는 문을 열고 능동적이고 포용적으로 세계를 품고 축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꿈을 잃어버리거나 이스라엘의 사명을 왜곡할 때마다 우리는 다른 민족과 사상들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취함으로 우리를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대결과 전쟁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의 후예들이 대결과 테러 또는 전쟁을 자신들의 생존전략으로 삼는다면 그들이 그만큼 자신감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배타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어느 사회에나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이끌어 가는 세상에서는 약한 사람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현재 탈레반이 지배하는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이 어떤 억압과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지를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현재 우리나라의 개신교회가 취하고 있는 다른 민족과 사상, 그리고 타종교에 대한 태도가 무엇인가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비전과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자신감이 아니라 생존을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열등감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또한 이미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말한 것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어 세워지는 교회상을 우리의 모델로 삼아야 하는데 다시 육신적인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에 우리의 관심사를 국한시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대로를 역주행하여 중세 십자군 전쟁에 동참하자는 것이며, 피의 제사를 드리던 옛 언약으로 되돌아가자는 행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보수 기독교인들의 집회에서 등장하는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가 바로 그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이 왜 중요합니까? 아브라함은 전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추앙하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아브라함의 언약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담긴 축복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씨앗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갈 소임을 맡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은 육신적으로는 유대인이며 영적으로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씨앗은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 이스마엘과 그 후손들에게도 자라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아브라함의 언약이 실현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새롭게 열릴 세상으로 들어가는 대로를 닦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의 후예들은 그들이 육신의 후예이든 영적인 후예이든 아브라함의 꿈이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하고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의 대로를 닦는 일에 함께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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