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명/ 저자명 초기한국 가톨릭교회의 민족교회음악 / 최필선
발행사항 민족음악연구소
수록지명 음악과 민족. 4('92.10) pp.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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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과 교회음악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3)
가톨릭신문 발행일 | 2022-08-28 [제3308호, 12면]
글로만 보던 복음말씀에 선율을 덧붙이면 더욱 각인이 쉽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에 따르면 ‘교회는 가톨릭 종교음악이 기도를 감미롭게 표현하거나 일치를 초래하며, 거룩한 의식을 더욱 성대하게 감싸 줌은 물론, 하느님의 영광과 신자들의 성화(聖化)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그 목적을 정의하고 있다. 세 차례의 가혹한 박해를 겪고 표면적으로는 조용한 시기에 사목활동을 시작한 최양업. 하지만 내부적으로 분열된 신자들의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해 그가 생각해 낸 것은 함께 부를 수 있는 천주가사였다. 완전한 성가의 형태는 아니었지만, 교리와 신앙을 소리 내어 부르는 방식을 통해 신자들의 믿음을 견고히 다질 수 있었다. 잦은 박해로 신앙을 숨겨야 했던 조선시대 신자들에게 교회 음악이 어떻게 전파되고 쓰였는지 살펴본다.
■ 서양 음악 수용의 선구자, 최양업
1858년 10월 3일 오두재에서 보낸 편지에 따르면 최양업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양음악을 여러 가지 음향으로 소리가 잘 나게 연주할 수 있는 견고하게 만들어진 악기를 하나 보내주십시오”라고 적는다. 줄곧 성물이나 성화를 보내달라고 적었던 최양업이 악기를 요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1838~1839년 마카오에서 신학생 시절을 보냈던 최양업은 당시 스승인 칼르리 신부에게 성가와 서양음악을 배웠다. 당시 반주로 사용된 프랑스의 손풍금을 처음 접한 최양업은 조선에 돌아와 신자들에게 음악을 통해 신앙을 전할 목적으로 악기를 요청한 것으로 추측된다. 최양업이 사목활동을 했던 1850년대 이전에는 조선 교회에 이렇다 할 교회 음악이 없었다.
최필선의 「초기 한국 가톨릭 교회음악에 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천주가사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779년 주어사강학(走漁寺講學) 이후다. 권철신, 정약전, 이벽 등이 참가한 토의 자리에서 십계명과 천주공경가를 지어 부른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천주가사는 곡조 없이 글을 읽는 형태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양업이 조선 땅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하면서 천주가사 확산은 활기를 띄게 된다. 최필선은 논문에서 “당시 천주가사는 전승민요 가락으로 노래됐고 리듬이 자유롭고 가창자의 감흥에 따라 자연스럽게 불렸다”며 “민중들의 일상생활 리듬에서 반영됐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민중의 노래로 보편화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최양업이 쓴 천주가사는 천주교의 주요 교리를 한글, 즉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구어로 풀었기에 글을 모르는 여성들도 이해하기 쉬운 형태였다. 또한 민요나 독경(讀經)과 같은 음영(吟詠)이었기에 토착화가 용이했을 것으로 보인다.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루카) 소장은 “최양업은 당시 유행하던 주변 노래의 곡조를 천주가사에 차용했고, 신자들에게는 가사 안에 담겨 있는 교리를 읊으며 외우도록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며 “자신의 음악적 소양과 신자들의 상황을 고려해서 교리의 토착화를 시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 박해시대의 가톨릭 성가
1784년 창설된 한국 천주교회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을 시작으로 1866년의 병인박해 때까지 크고 작은 많은 박해를 겪으면서 대외적인 발전을 할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은 교회음악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박해의 위협 속에서도 신자들의 신앙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이를 지탱해 준 것이 바로 천주가사였다. 천주가사는 3·4조나 4·4조 형식의 천주교 신앙가사다. 엄밀히 말하면 가톨릭 성가라고 볼 수 없지만 교화와 수도의 목적으로 사용됐다는 측면에서 가톨릭 성가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난다고 볼 수 없다.
초기의 천주가사는 주로 호교론적이고 윤리적인 내용을 포함한 기초적인 교리를 그 가사로 했고 비교적 박해가 완화돼 목판본 신심서적들이 발간된 1850년대 후반부터 1860년대 초반까지는 주로 성사교육을 중심으로 한 성사가와 신심수도를 중심으로 한 교훈가들이 많았다.
가톨릭 성가집 발간은 1924년에서야 이뤄졌다. 뮈텔 주교의 인준으로 종현(현 명동) 성서인쇄소에서 발간된 「죠션어셩가」에는 대림, 성탄, 사순, 부활 등 전례시기별 성가와 성모, 성심, 성체 등 각 주제별 성가 등 모두 68곡이 수록돼있다.
곡조는 1896년 9월 14일 프랑스어로 처음 출판된 「청년성가」(Cantiques de la Jeunesse)에서 옮겨왔고, 가사는 프랑스어 가사를 번역한 것과 우리나라 고유의 것으로 이뤄져 있으며, 우리나라 고유의 가사 중 12곡을 천주가사에서 가져왔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
사향가: 최양업 신부가 지은 천주 교리의 결정체
발행일 | 2014-12-25 [제2924호, 19면]
‘사향가’는 최양업 신부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4·4조 4음보 421구로 된 장편의 천주가사이다. ‘사향가’의 필사본으로는 「경향잡지 인쇄본」, 「김동욱본 가첩」, 「금베두루 가첩」, 「한국정신문화연구원본 가첩」, 「남경지 가첩」, 「고로가 가첩」, 「유요왕 가첩」, 「한국교회사연구본 가첩」, 「엄성순 가첩」, 「언양성당본 가첩」, 「장 아뤽수 가첩」, 「서종웅 가첩」 등 약 14종이 전해지고 있다. ‘삼세대의’와 더불어 신자들 사이에 가장 많이 애창되던 곡임을 알 수 있다.........................
‘사향가’는 천주교의 모든 교리를 집약한 것으로, 서사(1구~9구), 본사(10구~396구), 결사(397구~421구)로 이루어진다. 서사는 인간의 본향을 깨닫고 그 본향으로 가야됨을 노래하며, 본사는 천주교 교리와 성경의 내용 및 영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결사는 천주교에 대한 비방을 물리치고 본향으로 찾아갈 것을 거듭 강조한다.
가창자는 조중환, 박기석, 윤기중 세 사람이다(지아임, 2010). 조중환은 충청남도 서산, 박기석은 경기도 성남에서 출생하였음을 지난번 ‘삼세대의’에서 밝힌 바 있다. 윤기중 가창곡은 1983년 충청북도 갈곡리 공소에서, 당시 81세였던 가창자가 부른 노래를 차인현 신부가 채록하였고, 후에 최필선이 채보하였다. 앞부분의 가사와 조중환 가창의 악보는 다음과 같다.
어화우리 벗님네야 우리본향 찾아가세 /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곳이 본향인고
복지로나 가자하니 모세성인 못들었고 / 지당으로 가자하니 아담원조 내쳤구나
부귀영화 얻었은들 몇해까지 즐기오며 / 빈궁재화 많다한들 몇해까지 근심하랴
이렇듯한 풍진세계 안거할곳 아니로세 / 인간영복 다얻어도 죽어지면 허사되고
세상고난 다받아도 죽어지면 그만이라 / 우주간에 비껴서서 조화묘리 살펴보니
제읍지곡(힘들게 사는 인생비유) 그아니며 찬류지소(본향인 천당으로 가기 전, 이 현세의 삶) 이아니냐
조중환 가창
조중환 가창의 ‘사향가’는 구성음이 솔 라 도 레 미의 5음이다. 선율의 특징은 대부분 하행을 하지만, 중간 중간에 4도, 5도의 도약진행과 3도 상행종지형도 나타난다. 종지음이 솔, 도음으로 나타나는 평조로 볼 수 있다. 주요 리듬은 ♪♩♪♩으로 연도의 리듬과 일치한다. 선율형태는 크게 2가지 형태의 선율로 구별된다. A형태는 Sol음으로 종지하고, B형태는 do음으로 읊조리는 형태이다. 조중환 가창의 ‘사향가’는 정악의 평조와 유사한데, 이는 ‘삼세대의’와 마찬가지로 가창자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박기석 가창
박기석 가창의 ‘사향가’는 구성음이 미 솔 라 도 레 미이다. 도약진행보다는 순차 진행을 하며, 종지음은 라와 미이다.
주요 리듬은
♪♪♪♩. 과
이며,
이외에도 다양한 변화를 주어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선율형태는 2가지로서 A형태는 미 레 도 라 미의 하행선율, B형태는 미 라 도 라의 포물선형이다.
윤기중 가창
윤기중 가창의 ‘사향가’는 구성음이 미 솔 라 도의 4음이다. 주요 리듬은 ♪♪♪♩. 이다.
선율형태는 2가지로서 A형태는 미 라 도 라 미의 상행 후 하행하는 포물선형이며, B형태는 도 라 미의 하행형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향가’는 최양업 신부님이 저작한 작품이며, 가창자에 따라 민요(민속악)와 가사(정악)의 느낌으로 구분된다. 충청도의 조중환과 경기도의 박기석은 가사, 충청도의 윤기중은 민요의 느낌으로 불렀다. 이는 천주가사의 저작시기와 저작자에 의한 차별성이 아니라 가창자의 선호도에 따라 임의로 불린 것을 알 수 있다.
강영애 교수(데레사·한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