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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발의 연설(1)(욥기 11:1-6)
지혜롭고 선한 자들까지도 논쟁의 열기로 인해 때로 과격하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 일례로 여기에서 소발을 들 수 있다. 엘리바스는 매우 정중하게 말문을 열었다(4:2). 빌닷은 욥에게 약간 거친 태도를 취했다(8:2). 그러나 소발은 무자비하게 그를 공격하고, 매우 거친 말을 퍼붓고 있다. "입이 부푼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믿겠느냐? 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겠느냐?" 이것이 욥을 위로하는 방법일까? 그렇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를 설득시킬 수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공의를 옹호하는 자로서 합당한 태도인가? Tan tatne animis caelestibus irae? 즉 거룩한 가슴 속에 이러한 분노가 거할 수 있겠는가? 논쟁에 몰두한 자들은 그들의 마음도 통제하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모든 지혜와, 경각심과 결심은 우리가 여기에서 소발의 행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러한 무례함을 범하지 않도록 해 주기에는 너무 힘이 약하게 될 것이다.
Ⅰ. 소발은 욥을 지나치게 묘사하고 있다(2, 3절). 그는 욥을 그의 이야기에서 나태하고 건방진 자로서 그리고 혼자서만 떠들기를 좋아하는 자로서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욥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그를 "비웃는 자"라고 일컫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를 징계하는 하나의 처벌로서 볼 수 있다고 한다. 형제들과 다투고 싸우려는 마음을 가진 자들은 그 형제들에게 그리고 그들의 행위에 대해 될 수 있는 한 가장 나쁜 구실을 붙이고, 옳든 그르든 그들을 가장 추악한 존재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앞 장에서의 욥의 이야기를 읽고 생각해 보았고, 그 속에서 매우 유익하고, 선한 생각들이 가득 차 있음을 발견했다. 즉 그의 원칙은 옳았고, 그의 이론은 강했으며, 그의 표현들은 무게 있고도 신중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격렬하고 감정적인 발언은 허심탄회하게 너그러운 태도로 용서해 주고, 그냥 지나쳐 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발은 여기에서 불쾌하게 욥을 다음과 같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1. 자기가 말한 것을 결코 다시 신중히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의 사정을 호소하고, 그의 책망자들을 굴복시키기를 원하면서 단지 많은 말로 시끄럽게 하기 위해 생각나는대로 지껄여 버리는 자라고 욥을 묘사하고 있다.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사실상 대답을 하고 안하고는 매우 큰 문제가 안 된다. 아마도 침묵은 불쾌함을 나타내는 최선의 반박이 될지도 모르며, 또 그것에 대한 가장 큰 경멸의 표시일는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말에는 대답을 하지 말라." 그러나 대답하게 되었을 때는 교만과 감정이 없이 이성과 은혜를 가지고 대답하도록 하자. "입이 부푼 사람"(난외, 모든 것이 혀로 된 입들을 가진 사람, 즉 오직 음성뿐인 사람이) "어찌 의롭다함을 얻겠느냐?" 사실상 수다스러움으로 인해 그가 책망당하지 않는 것처럼, 그의 수다 속에서 의롭다함을 얻겠는가? 아니다. "말이 많으면 죄도 적지 않다." 그것으로써 그가 의롭다함을 얻겠는가? 많은 말들이 유력한 탄원을 대신할 것인가? 그가 언어의 미사여구로써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가 "말을 많이 하여도"(마 6:7), 하나님이나 어떤 지혜로운 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2. 그는 욥에 대해 자기가 말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뻔뻔스런 거짓말을 가지고 그의 적대자들을 침묵시키려는 거짓말쟁이("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느냐?"),-모든 인간들을 야유하고, 어떤 것을 그릇되게 꾸미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그와 이야기한 사람들을 모두 이용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비웃는 자라고 묘사하고 있다.-"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그때는 그처럼 과격한 태도로 말할 다시 말해서 저항할 시기가 아닌가? 욥은 미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진실되고 온전한 말을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처럼 오해받고 있었다. 엘리바스와 빌닷은 욥에게 대답을 해 주었고 그를 부끄럽게 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말을 했다. 그러므로 이미 괴롭힘을 당한 자에게 이처럼 과격한 공격을 하고 있는 이 장면은 소발의 관용을 나타내는 일례로 볼 수 없다. 여기에서는 세 사람이 한 사람과 대항하고 있다.
Ⅱ. 소발은 욥이 말하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욥을 책망하고 있다(4절). "네 말이 내 도는 정결하다 하는구나." 가령 그가 그렇게 말했다 한들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욥의 믿음에 흠이 없었고, 그의 판단은 정통파였고, 그는 그의 친구들이 말했던 것보다 더욱 훌륭하게 하나님께 대해 말한 것이 사실이었다. 비록 그가 그 자신을 경솔하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직 그의 도가 진실되었다는 것만을 나타낼 뿐이었다. 그러나 소발은 욥이 "나는 주의 목전에 깨끗하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그를 책망하고 있다. 욥은 그렇게 말한 일이 없었다. 그는 사실상 "주께서는 내가 악하지 않은 줄을 아시나이다"(10:7)라고 말했으며, 또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하고 말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흠없는 완전을 결코 가장하지 않았다. 그는 실상 그들이 그를 책망한 것과 같은 사곡한 자가 아님을 주장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가 그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하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추론하는 것은 정당한 암시가 되지 못했다. 우리는 우리 형제들이 참을 수 있도록 그들의 말과 행동을 최대한으로 선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다투는 자들은 흔히 그것을 가장 나쁘게 받아들이기 쉽다.
Ⅲ. 소발은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욥을 대적하시기를 원하고 있다. 그는 욥이 그르다는 사실을 매우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 곧 나타나시어 욥을 침묵시키고 정죄하셔야 한다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우리의 싸움에 관여하시리라는 것을 지나치게 확신해 버리고, 만일 그가 말씀하시기만 한다면 그는 분명 우리 편이 되시어 우리를 옹호하는 말씀을 하시리라는 판단을 내리기 쉽다. 여기에서의 소발도 역시 그러했다. "하나님은 입을 여시기를 원하노라." 왜냐하면 그는 분명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입을 여셨을 때, 그는 이 세 친구들을 향하여 그들에게 불리한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모든 논쟁을 하나님의 심판이 결정해 주도록 맡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실대로" 판단해 주실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서둘러 그 판단에 호소하고, 그 경쟁자를 대적하여 그것을 미리 판단하는 자들이 언제나 옳은 것만은 아니다. 소발은 욥을 설득시키기에 실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그에게 납득시켜 주시기를 원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 각자가 모두 깊이 생각해 보고 우리의 모든 환난 속에서 기쁘게 고백할 만한 것들이다.
1. 하나님의 뜻은 그 깊이를 측량할 수 없다. 소발은 그것을 하는 척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 친히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6절)을 욥이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지혜의 오묘를 그에게 보이시기를 원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지혜 속에는 arcana imperii-즉 장엄한 오묘가 있다. 하나님의 길은 바 다 속에 있다. 구름과 어둠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하나님의 인에는 확고한 이치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잴 수가 없으며 또한 엿보아서도 안 된다.
(2)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감추어진 것은 드러난 것 보다 훨씬 많다(엡 3:9).
(3) 우리는 밑바닥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깊음을 경탄함으로써, 환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손 아래에서도 우리의 마음은 매우 평정시킬 수 있을 것이다.
(4)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 우리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신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죄의 광경을 보여 주시고 죄의식을 주셨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그 속에 지혜를 알게 하셨다"(시 51:6)고 말했다.
2. 하나님의 처사는 말할 수 없이 공의롭다. "그러므로 네게 내려진 징벌이 매우 쓰라리더라도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다는 사실을 알라." 또는 (어떤 사람들의 풀이대로) 이렇게도 볼 수 있다. "그가 네 죄를 경감하셨으므로, 그 잘못을 다 계산하여 너를 다루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라."
(1) 의무의 빚이 변제되지 않았을 때 공의는 처벌의 빚을 요구한다.
(2) 이 세상에서 어떠한 처벌이 우리를 괴롭히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죄의 대가보다는 경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고통을 원망하기보다는 우리가 지옥에 있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한다(애 3:39; 시 14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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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발의 연설(2)(욥기 11:7-12)
소발은 여기에서 하나님에 관해, 그의 위대하심과 영화로우심에 관해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허탄함과 어리석음에 관해 매우 훌륭한 말을 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함께 비교되고 또 잘 고찰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모든 시여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복종하도록 강력한 영향을 줄 것이다.
Ⅰ. 여기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보고 그를 경배하자.
1. 그는 우리의 이해로서 포착될 수 없는 존재로서, 무한하고 광대하시므로 우리의 유일한 이해력으로 그의 성품과 온전하심에 대해 적합한 관념을 갖는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가장 커다란 추정이 없이는 우리가 그의 뜻과 행위를 판단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판단하기에는 너무도 무력하다. 그리고 우리가 그 시여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감히 그의 잘못을 발견해 내려 하는가?
(1)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의 이해력을 무한히 능가한다.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 네가 어찌 하겠으며, 네가 어찌 알겠느냐?"(7, 8절) 불쌍하고 약하며 근시안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 피조물인 네가, 어찌 태어난 땅의 구더기에 불과한 네가 어찌 그러하겠느냐? 네가 비록 하나님께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그를 찾아내기를 매우 원하며, 그 일에 매우 열심히라고 해서 감히 네가 측량을 시도해 보거나, 그 일을 속히 진전시키기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더듬어 찾음으로써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행 17:27). 그러나 우리는 그가 감추이길 원하시는 것 속에서 그를 발견해 낼 수는 없다. 우리가 그를 깨달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를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가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가 무엇인가는 알 수 없다. 우리의 눈으로 바다를 볼 수는 있으나, 그것을 측량할 수는 없다. 우리는 겸손과 근면과 신뢰할 수 있는 탐구로써 하나님에 대한 어떠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그를 능히 온전히 알 수는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지 모르나 충분히 알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일의 "시종"을 측량할 수 없다(전 3:11).
하나님을 헤아릴 수는 없다. 영겁의 세월은 계수될 수가 없으며, 그의 광대함의 폭은 측량할 수 없다. 그의 지혜의 깊이는 측정할 수 없고 또한 그의 능력의 한계도 규정할 수 없다. 그의 영광의 찬란함은 결코 묘사되어질 수 없으며, 그의 선하심이 가득 차 있는 창고는 헤아릴 수가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항상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고, 그를 결코 명령하거나 그와 다투어서는 안 되는 그 좋은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그 자신을 계시하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고, 실상 그대로의 하나님을 보게 될 그곳에 가기를 열망해야 한다(고전 13, 9:10).
(2) 그것은 모든 피조물의 한계를 무한히 초월하고 있다. 그것은 "하늘보다 높으시고, 큰 심연인 음부보다 깊으시며, 땅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그러므로 그 많은 부분이 오늘날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그 당시에는 더욱 그러했다. 하나님의 품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아주 요원한 일이다. "이 지식이 우리에게 너무 기이하나이다"(시 139:6).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측정할 수 없으며, 그의 행사는 이치를 찾아낼 수도 없다. 그의 심판은 매우 깊으시다. 측량할 수 없는 국면을 소발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지혜의 결과로 돌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도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로 돌리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알기를 권하고 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기를 구하노라"(엡 3:18, 19).
2. 하나님은 만유를 주재하시는 주님이시다(10절). 하나님이 죽음으로써 사람을 "잡아"(난외 죽음은 변화이므로, "하나님이 사람을 변하게 하시면," 즉 하나님이 나라와 가족들과 우리들의 상황을 변하게 하시면)-만일 그가 사람을 감옥이나 환난의 그물에(시 66:11) "가두시면"-만일 그가 사냥꾼이 짐승을 노리듯이 어떤 창조물을 쥐시면 그는(패트릭 주교의 견해처럼) 그것을 모으실 것이다. 그때에 누가 감히 그에게 그것을 반환하라고 할 것인가? 또는 만일 그가 태워버릴 가라지처럼 그것을 "개정하시면," 또는 "그가 만일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찐대"(34:14), "누가 능히 막을 쏘냐?" 누가 그를 체포하거나 그 행사를 반대할 수 있겠는가? 누가 그의 능력을 통제하거나, 그의 지혜와 공의를 규탄할 수 있겠는가?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그가 모든 것을 무로 전환시키거나, 태초의 혼돈 상태로 다시 만드시는 것도 가하다고 생각한다면-처음에 빛과 어둠을 가르고 마른 땅과 비를 나누신 그가 기꺼이 그것들을 다시 합하기로 원하신다면-지으신 자가 부수어 버린다면, "누가 능히 그를 쫓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누가 능히" 그의 마음을 바꾸게 하거나 그의 손을 멈추게 할 수 있으며, 그의 처사를 방해하거나 비방할 수 있겠는가?
3. 하나님은 인간의 자녀들을 엄격하고 공정하게 감찰하신다(11절).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신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나, 그는 우리를 완전히 아신다. "하나님은 악한 일을 다 보시며," 그것을 칭찬하지 않으시고(합 1:13) 책망 하신다.
(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감찰하신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다(인간은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도 결국은 허망한 존재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다루실 때, 그것을 고려하신다. 그는 허망한 사람의 계획과 소망이 무엇인가를 아시므로, 그들의 우매한 상상에서 나온 일들을 시들게 하시고, 헛되게 하실 수 있다. 그는 하늘에 앉아 계시면서 그들을 비웃으신다. 그는 인간의 허망함(즉, 어떤 사람들의 견해대로 그들의 작은 죄악들)을 알고 계시며, 그들의 허망한 생각과 말, 그리고 선한 것을 꾸준히 지켜나가지 못하는 그들의 속성을 알고 계신다.
(2) 하나님은 악한 자들을 감찰하신다. 하나님은 비록 매우 은밀하게 저질러지고 또한 매우 교묘하게 꾸며지고 위장된 것일지라도, 잡다한 "악한 일을 다 보신다." 악인의 사악함은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 앞에서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상관치 않으실 것인가?" 분명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실 것이며, 비록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시는 듯 보일지라도 그것을 반드시 간주하실 것이다.
Ⅱ. 인간의 존재가 어떠한가를 보고 인간으로서 겸손하도록 하자(12절).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고,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을 지라도" 그리고 그처럼 주정뱅이 같고 어리석으며, 가르치기 어렵고 길들이기 어려울지라도, 그 자신이 지혜로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실을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보라.
1. 사람은 허망한, 글자 그대로 "공허한"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충만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황폐케 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그 안에 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피조물인 "라가"가 되었다.
2. 사람은 어리석은 피조물로서 "멸망하는 짐승같이"(시 49:20; 73:22), 들나귀처럼 태어난 백치 같이, 가장 우둔한 짐승같이 아직 아무 쓸모 없는 들나귀 새끼같이 되었다. 만일 사람이 선하게 되어 어떤 일을 한다면 그것은 승리의 날에 한때 나귀 새끼에 의해 섬김을 받으신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이다.
3. 사람은 괴팍하고 다루기 힘든 피조물이다. 나귀 새끼는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들나귀 새끼는 결코 그 버릇을 고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루는 사람의 소리도 존중하지 않는다(욥 29:5-7 참조). 사람은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처럼(렘 2:24), 스스로가 자유로우며, 그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라 생각하면서, 그 자신의 욕정과 감정을 충족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4. 그러나 사람은 교만하고 기만적인 피조물이다. 그는 "지각이 없으나" 있는 것같이 생각한다. 그리고 그 스스로는 지혜의 원리에 굴복하려 하지 않으면서도 그 자신의 지혜를 자랑한다. 그는 지혜로워 지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금지된 지혜를 추구하려 하며, 첫 조상들처럼, 명기된 것보다 더 지혜로와 지려하기 때문에, 지식의 나무 대신 생명의 나무를 잃는다. 이러한 피조물이 하나님과 다투거나 그를 책망하는 일이 합당한가?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해 더 잘 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우리 스스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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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발의 연설(3)(욥기 11:13-20)
다른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소발도 여기에서, 만일 욥이 좀더 선한 마음을 가지기만 한다면, 더 나은 때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말로 욥을 격려하고 있다.
Ⅰ. 소발은 엘리바스(5:8)와 빌닷(8:5)처럼, 욥에게 좋은 권고를 하고 있다(13, 14절). 그는 욥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들려 하고 있다. 소발은 그 돌아오는 단계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를 보자.
1. 그는 내면을 살펴야 하며, 그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그 나무를 훌륭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는 "마음을 바로 정해야" 한다. 그 마음에 전향과 개혁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마음은 진압되어야 하며,-죄로 더러워지고 혼돈된 마음은 깨끗하게 되고, 다시 정돈되어야 하며,-흔들리고 불안정한 마음은 견고해지고 고정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그 말은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일을 시작하여 완수하려는 결의가 충분히 이루어질 때에 하나님을 구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2. 그는 위를 보고,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스스로 분기하여 하나님을 굳게 신봉해야 하며, 기도에 힘쓰면서, 신실하고 끈기있게 간구해야 하고, 그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주를 향하여 손을 든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그에게 복종하고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대하 30:8). 이것을 욥은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하기 위해 그의 마음을 바로 정해야 한다. 욥은 기도했었다. 그러나 소발은 욥이 더 나은 자세로, 즉 공소인으로서가 아니라, 청원자와 겸손한 탄원자로서 간구하게 하려 하고 있다.
3. 그는 그의 대화 속에서 잘못된 것을 고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기도는 효력이 없을 것이다(10절).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즉, 네 생활 속에서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죄가 있다면) 멀리 버리라. 결코 다시 그것을 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그것과 관련을 맺지 않을 것을 단호하게 결심하면서, 증오와 거룩한 분노로써 그것을 버리라(겔 18:13; 호 14:9; 사 30:22). 만일 네 손에 불의로써 얻은 것이 있다면, 거짓이니 학대로써 취한 좋은 물건이 있다면(삭게오처럼, 눅 19:8) 그것을 변상하라. 그리고 손을 흔들어 그것들을 받지 말라(사 33:15)." 죄악으로 얻은 것을 반환하지 않는 다면, 범죄함이 제거되지 않는다.
4. 그는 그의 집안을 바로잡기 위해 또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어떤 악한 자나, 악한 일 또는 사악하게 얻어진 어떤 재물이 네 집에 머물거나 거하게 하지 말라." 그는 욥의 큰 집안 일이 잘못 다스려졌던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있는 곳에 악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집안이 망한 것은 그 사악함에 대한 벌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께서 그에게 돌아오실 것을 기대한다면, 그는 거기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했고, 비록 사악함이 그의 장막을 찾아오더라도 그것이 거기에 거하지 못하도록 노력해야 한다(시 101:3 이하).
Ⅱ. 소발은 만일 욥이 그의 권고를 받아 들인다면, 위로를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키고 있다(15절 이하). 만일 회개하고 마음을 바로 잡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편하고 행복하게 될 것이며,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아마도 소발은 만일 하나님이 곧 이러한 욥의 상태를 변화시키지 않으신다면 그와 그의 친구들은 그가 사곡한 자이며, 하나님께 대한 위선자라는 그들의 의견을 확고히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사 32:17)는 큰 진리가 여기에 시사되어 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1.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확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면 네가 정녕 하늘을 향하여 흠없는 얼굴을 들게 되리라. 즉 네가 두려움이나 놀람이 없이(9:34),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사곡하고 회개함이 없다는 일로써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로부터 소망을 얻게 된다(요일 3:21). 만일 우리가 기름 부음 받은 얼굴을 우러러 본다면, 실의에 잠긴 우리의 얼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더럽혀진 얼굴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져 흠없는 얼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히 10:22).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사람들 앞에서 면목을 세워 주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시 37: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면, 기쁘게 우리 친구들의 얼굴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들 스스로 거룩한 침착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네가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라." 그리고 네 마음을 굳게 정하였으므로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하리라"(시 112:7). 욥은 그가 하나님을 그의 적으로 간주하고 그와 더불어 다투는 동안에도 혼돈으로 가득했었다(10:15). 소발은 만일 욥이 그 자신을 꺾고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그의 마음은 평정을 되찾게 될 것이며, 그를 이처럼 격동으로 몰아넣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마음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된다는 말로 그를 설득시키고 있다. 우리의 두려움이 덜할수록 우리의 마음은 더욱 굳건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봉사를 하기에 그리고 환난을 참기에 더욱 합당한 자가 된다.
3. 그들의 지나간 고통에 대한 편안한 마음으로 회고하게 될 것이다(16절). "아기가 태어난 기쁨으로 인해 어머니가 해산의 고통을 잊는 것과 같이, 네가 네 환난을 잊을 것이다. 너는 네게 임한 상흔을 완전히 떠날 것이며, 네가 추억할 지라도 물이 흘러감이나 또는 그릇에서 쏟아짐 같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른 액체들과 마찬가지로 거기에 맛이나 빛깔이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너의 현재의 고통의 상처는 흉터 뿐만 아니라, 고통이 남겨짐 없이 완전히 치료될 것이다." 욥은 그의 원통함을 잊으려고 노력했으나(9:27)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즉 그의 영혼은 "여전히 쓴 쑥과 쓸개즙을 기억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소발은 다소 욥으로 하여금 그것을 잊게 하고 있다. 믿음과 기도로써 그의 슬픔과 근심을 하나님께로 가져가 그에게 그것들을 맡기게 하자. 그러면 그는 그것들을 잊게 될 것이다. 죄가 무거운 곳에 환난은 가볍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잘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그만큼 우리의 환난을 잊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날인된 용서와 확고한 평온의 위로를 얻게 된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불의를 용서 받은 자는 "내가 병들었노라" 하지 아니하고 그의 병을 잊을 것이다(사 33:24).
4. 그들의 미래의 평안에 대한 즐거운 기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욥은 그가 이 세상에서 다시 좋은 날들을 보게 되리라는 소망을 가진다는 것이 소용없는 것처럼 실의에 찬 말들을 했었는데, 여기에서 소발은 이것으로써 그 말에 대답하면서 그를 기쁘게 하려 하고 있다. (소발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아니다, 너도 그것을 바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즐거운 밤들도 역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여기에서 욥에게 축복된 변화에 대해 소망을 불어 넣어주고 있다.
(1) 비록 그의 빛이 가리워졌더라도 그것은 다시 밝게 비추일 것이며, 이전보다 더욱 찬란할 것이다(17절). 그의 석양의 햇빛이 대낮의 햇빛을 무색케 할 것이며, 영화와 즐거움에 있어서도 그의 황혼은 아침처럼 훌륭하고 선명할 것이다. 그의 빛은 "흑암 중에서" 발할 것이며(사 58:10), 그 짙고 어두운 구름은 그 뒤에서 그의 햇빛이 뚫고 나올 때 금박처럼 그 광채를 더하여 줄 것이다. 그것은 노년에서도 비추일 것이며, 그 환난의 날들은 그에게 좋은 날들이 될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은 그 때에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길은 점점 밝게 비추이는 빛과 같으며, 그들의 날의 종말은 그것을 완성하는 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그들의 저녁은 좀더 나은 세상에서의 아침이 될 것이다.
(2) 비록 지금 그가 끊임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처해 있을지라도, 그는 거룩한 휴식과 안전함 속에서 살게 될 것이며, 그 자신이 계속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18절). "네가 소망이 있으므로 든든할지라."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 안에 그리고 하늘에 대해 선한 소망을 지닌 자들은 분명히 든든하며, 그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어려운 때를 겪더라도 안심할 수 있다. 곧게 걸어가는 자는 이처럼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비록 그곳에 환난과 위험이 있을지라도, 결국엔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소망은 "영혼이 닻"이다(히 6:19). "네 둘레가 두루 파여질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보루 속에 있는 군대처럼 안전할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는 자들은 그의 보호를 받게 되므로 밤낮 안정할 것이다.
[1] 낮에 그들은 밖에서 수고했다. "네 둘레가 안전하게 파여질 것이다. 밭을 가는 네 종들을 습격한 약탈자들이(1:14, 15) 다시는 너와 네 종을 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나태하게 살아가면 형통함을 약속해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청하고 추구하며, 그것을 위해 수고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보호를 입게 되었을 것이다. 의무를 행하는 것이 안전해 질 수 있는 방법이다.
[2] 밤에 그들은 집에서 휴식을 취한다. "네가 흑암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안전히 쉬리라"(그리고 노동자는 잠을 달게 잔다). 낮의 구름 기둥은 밤에 불 기둥이 될 것이다. "네가 누워도 어느 곳에 네 머리를 둘 것인가 하고 당황하게 되지 않을 것이며, 습격을 예상하여 밤을 새우며 지키는 일도 없을 것이다. 너는 잘 시간에 침상에서 잘 것이며, 그 누구도 너를 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너로 하여금 두렵게 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너를 놀랍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조용한 밤과 방해받지 않는 잠을 자는 것은 매우 은혜로운 일이다. 내적으로 싸우는 시끄러운 소리를 느끼는 자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리고 안온함을 누리는 방법은 하나님을 구하고 그의 사랑 안에 우리 스스로가 거하는 것이다. "안식처 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를 자기의 거할 곳으로 삼는 자들은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3) 비록 지금은 그가 멸시를 당하더라도 그는 아첨을 받게 될 것이다. "사람이 네게 첨을 드리리라. 그리고 너와의 우정을 확고히 해 두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뛰어나게 지혜롭거나 또는 매우 부유하거나 권력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평판을 얻은 자들은 아첨을 받는다. 소발은 욥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으므로 비록 이 현재의 형세가 매우 천하더라도 일단 상황이 바뀌면 그것은 전처럼 드높이 흘러넘치게 되리라는 것을 예고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는 다시 그의 백성들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 올바로 첨을 드리는 자들은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있는 처녀들에게 "우리에게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아첨하는 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Ⅲ. 소발은 사악한 백성들의 저주에 대한 간단한 설명으로써 결론을 내리고 있다(20절). "그러나 악한 자는 눈이 어두워지리라." 그는 욥이 그의 충고를 받아들일 것인가를 의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러할 경우에 그 앞에 생명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제시하면서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그에게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사악함을 고집하면서 그것을 고치려하지 않으려 하는 자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라.
1. 그들은 이 세상과 저 세상에 대한 소망으로써 그들 자신에게 속살거렸던 그 유익함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실망은 그들의 저주, 수치, 그리고 그들의 끊임없는 고통이 될 것이다. 그들의 눈은 결코 오지 않을 소망에 대한 기대로써 어두워질 것이다. "악인이 죽을 때는 그 소망이 끊어진다"(잠 11:17). "그들의 소망은 입김처럼 되어"(난외) 사라져 버리고, 다시 돌이켜질 수 없을 것이다. 또는 그들의 소망은 기운이 끊긴 사람처럼 끊어지고 사라질 것이다. 그들에게 그것이 가장 필요할 때, 그리고 그것이 이행되리라고 기대할 때, 그것은 끊어질 것이다. 그것은 사라져 버리고 그들에게 철저한 혼돈을 남겨 줄 것이다.
2. 그들은 그들이 그것을 느끼고 때로 놀라곤 했던 그 재앙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 엄습해온 형의 집행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그것에 용감히 도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쫓아내지도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로 달아나려 하지 않는 자들은 그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1:14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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