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回復(회복? 젠장!)
내 이야기는 무지하게 길었다. 일단 태어나서부터 이야기를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고 기억나는 말은 죄다 지껄였다. 은성노모는 내가 태창허음이었다
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끄덕끄덕......은성심경의 구결을 외워보게 시켰으며 ......중얼중얼......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에 대해 말해보게 했고 ......어쩌고 저쩌고...... 은혜미에게 납치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
"그 계집애가 정녕 그런 생각으로 천산대공자와 빙화령을 납치했더란 말이냐!"
"너무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본래 철없는 어린애들은 개념이 없고, 은소저같이 구중궁궐에서 착하게 살아온 처녀는 처음 본 겉만 번지르르한 남자에게 홀딱 빠지는 법입니다. 하지만 곧 정상적이고 멋진 남자를 알아보고 정상적인 사랑을 하게 되는 거죠."
은성노모는 내 말을 듣고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예의 웃는 듯 마는듯한 미소였다.
"네 말에 의하면 넌 어린 아이가 아니냐? 몸은 컸어도 말이나 생각은 어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이렇듯 어른이라 할 수 있는 말을 지껄이는 거지?"
나는 그녀를 따라 웃다가 잠시 현기증을 느끼고 머리를 만졌다. 그 틈에 은성노모는 내 오른팔을 잡고 혈맥을 짚었다.
"그 뒤에는 어떤 일이 있었느냐?"
"육계정을 만난 이야기는 아까도 대강 했지만 내가 청수진당 묵씨 형제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천산으로 돌아왔을 때 벌어졌던 일입니다. 밤중에 천산
의 좌호법이라는 육계정이 돌연 내 앞에 나타나죠......났죠."
발음이 조금 새고 있었다. 피곤한 모양이었다. 은성노모는 내 말을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할아버지와의 약속으로 소림에서 천외경이라는 책을 훔쳐왔던 참이었습니다. 무슨 사연때문인지 마교의 부교주로 알려져 있다고 했고요. 그 자리에서 내 맥을 짚어보더니 반생편작이 내린 처방이나 진단이 모두 가짜였다고 말하더군요. 난 태창허음이 아니라고요."
"넌 틀림없이 태창허음 따위가 아니다. 천산대공자는 모르겠지만......"
"내가 바로 천산대공자라니까요. 설명을 하죠. 빙화령이 이렇게 누워있었고 육계정은 이렇게 나타났어요. 구리고......"
그제야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물증! 난 주저하지 않고 품에서 육계정의 반골장 초식을 적은 그의 넙적다리 피부를 꺼내서 침상에 내려놓았다.
"그게 무어냐?"
"육계정이 준 거에요. 소림에 감금되어 있으며 반골장을 그의 허벅지에 새기고 - 뭘로 어떻게 새겼는지는 모르겠어요 - 피부를 벗겨낸 거래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성노모는 육계정의 유물로 규정해야 할지 유품으로 규정해야 할지 유해로 규정해야 할지 모를 물체를 주워들고는 한참을 바라보았다.
"은성노모......"
이윽고 그녀의 커다란 눈에서 맑은 눈물이 또르르 흘러 "반골장 초식을 적은 피부" 에 떨어져 내렸다.
"이렇게 갈 거였다면......"
은성노모는 잘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더니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그 바람에 그녀의 고운 메이크업이 살짝 씻겨나갔는데 드러난 맨 얼굴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여전히 머리카락만 제외하면 압도적인 외모!
엄마 설숙영과도 비견해볼만한 얼굴!
"실례지만......"
"할 말이 있느냐?"
"연세가 어떻게 되요?"
"왜 그런 질문을 하지?"
"너무 젊고 예뻐보이는데 은소저의 할머니라니까 믿기지 않아서요,"
내 말에 은성노모는 눈물을 흘린 눈으로 환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계산하지 않았던 아부가 효과를 보는 모양이었다.
"어린 녀석이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래서 넌 반골장을 익혔느냐? 십중팔구 네 웅혼한 내력은 그 사람이 준 것이겠지?"
"네, 저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엄청난 기연을 만난 것이다. 기연이 아니라 육계정이 작정을 하고 준 것이겠지만,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반골장을 익힌 것이냐?"
"네, 그리고 천외경도요."
"천외경은 육계정이 네 할아버지에게 주라고 했던 물건이었는데 왜 익혔느냐?"
"일종의 분위기 전환이었죠. 육계정이 죽은 것은 나로서도 놀랍고 슬픈 일이었거든요. 게다가 뭐를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말이죠. 그래서 그냥 읽었습니다. 반골장도 그래서 읽었던 거구요."
은성노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굉장히 슬퍼보이는 얼굴이었다.
"어마어마한 내공을 갖고 있는데다 타고난 총명이 더해져서 읽어본 것만으로도 즉시 익힐 수 있었을 게다. 천외경은 어떻게 되었지?"
"그게, 곤란하게도, 그냥 시키는 대로 손바닥에 올려놓았는데 타버렸거든요."
"그렇겠지, 만일 네가 천외경을 익히고도 책이 남아 있다면 그건 가짜 천외경이다."
"잘 아시는 군요?"
"그래서 네 생각에는 네가 왜 이렇게 어른으로 변한 것 같으냐?"
나는 다시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그게 말이됴......말이죠......"
그리고 짧게 의식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은성노모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기하구나. 유세엽, 네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는 들으면서도 믿지 못했다."
"후후후, 졔말이 맞됴? 구런데 제가 왜 누워있죠?"
나는 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은성노모가 손을 뻗어 내 동작을 도와줬다.
"넌 기절했었다.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다만......"
은성노모는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초상집에 갔다가 고스톱으로 대박을 터트렸을 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듯한 대단히 불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내 몸을 내려다 보았고 비명 비슷한 소리를 질렀다.
"허거거걱, 이..이게..! "
"진정해라. 유세엽,"
"모가 진덩입니까? 몸이 이따구로 다시 변했는데......"
"본래 몸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냐? 경사스러운 일일 텐데?"
은성노모는 어쩐지 나를 놀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발끈 화가 치밀었다.
"내 몸운......내 몸운......"
"진정하라니까,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네 몸은 다섯 번도 변화를 일으켰다. 알고 있느냐?"
"정신 잃고 잠들어 있는 넘이 뭘 알겠져요?"
"자 이것 받아라......"
은성노모는 내게 빙화령에게 준 것과 같은 제품으로 보이는 설탕엿이라는 것을 내밀었다.
일종의 캬라멜 같은 것이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한살짜리 내 몸은 달콤한 사탕에 반응해서 입에서 침을 주루룩 흘리고 있었다. 급기야 나는 엿을 입에 넣으면서 울음을 터뜨렸고 은성노모는 팔을 뻗어 나를 안아들었다.
"어른의 모습으로 있을 때는 그렇듯 의젓하더니 이게 웬 추태라는 말이냐?"
"흑 지금은......흑 지굼운......흑흑......지금은 애기잖아요......흑
흑"
"네가 잠을 자면서 보이는 반응으로 판단해보고 맥을 짚어본 바에 의하면 상태의 변화는 가능할 것 같다. 네가 잠들어 있는 두 시진 동안 나름대로 연구해본 바가 있다."
나는 눈물을 그쳤고 은성노모를 올려보았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어오고 있었다. 은성노모의 가슴이 꽤 푹신하고 탄력이 좋아. 종리괴 - 얼굴만 생각하지 않으면 가장 글래머인 - 의 가슴에 육박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번 만져보고 싶었지만 어쩐지 그렇게 했다가는 큰 일날 것 같아서 볼로 슬며서 부비며 입을 열었다.
"구래요?"
"네가 한 가지 비밀만 지키겠다고 맹세하고, 한 가지 부탁만 들어준다면 그 연구 결과를 가르쳐 주겠다."
귀가 번쩍 뜨이는 제안이었다. 생각이 필요 없는 제안!
"지킬게요. 지킬 거에요. 지키겠어요."
은성노모는 배시시 웃으며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좋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첫 번째 지켜야할 비밀이란 바로 네 이러한 신체의 비밀을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네가 천외경을 읽었다는 사실과 반골장을 육계정에게 이어받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
"귀여운 녀석, 아기 모습이 훨씬 낫구나,"
"구렇지 않아욧!"
"비밀을 지킬 수 있겠느냐?"
"엄마에게 말하는 것도 안 되나요?"
내 말에 은성노모의 눈쌀이 일그러졌다.
"네 목숨과 관련된 일이다. 절대로 비밀로 해야 한다. 네 신체, 천외경, 반골장, 모두 비밀이다."
"하지만 청수진당우 형제들은 내가 육계정을 만났던 것을 알와요."
"알지만 네 신체의 변화는 전혀 모르지, 육계정이 네게 내공을 전해주었다는 것도 모를 거다. 눈치 채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잘 모를 거야. 너만 비밀로 지키면 비밀이 된다."
"내 목숨과 관련이 있다구요?"
"그래, 너 은근히 말이 많구나, 누설하면 곧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역시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일단 대답하고 나중에 생각하면 될 노릇이니까......
"알았져요. 맹세해요."
"좋아. 또 다른 부탁이라는 것은 은혜미와 남궁세가의 둘째를 갈라놓으라는 거다. 은혜미는 네 배필로 정했다."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질만한 부탁이었다. 이런 부탁은 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 알아서 지킬 일이었다. 이미 내 생각에 의하면 남궁세가의 혁필이란 넘은 무덤속에 들어가 있는 셈이 아니었던가? 크흐흐 남의 정혼자를 가로챈 그 개자식을 천산의 전 세력을 동원해서......
"당근이죠."
"당근?"
"아주 당연하다는 어린애들 말이에요."
"좋아. 넌 은혜미가 좋은 게지?"
"구래요."
"빙화령은?"
"너무 어려요."
"네가 두 여자애를 다 거둬들여도 빙궁은 불만이 없다. 정상적이고 체면을 세울 수 있는 혼례를 한 다음에는 네가 은혜미를 받아들여 부엌에서 설거지나 하도록 시켜도 상관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이 할망구 아닌 할망구는 은혜미에 대해 말할 때면 어쩐지 차가워지는 경향이 있었지만 어찌되었건 내게는 좋은 소리였다.
"알았져요. 맹세해용."
은성노모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옆에 내려놓았다.
"좋다. 알려주마, 넌 하루에 일정 시진동안만 어른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허거걱,"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네가 알고 있는 세 종류의 심법을 순서와 관계없이 한바퀴 순환시킨 다음 반골장의 초식을 하고 다음으로 천외경의 초식들을 일주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하루에 한번 어른의 모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녀의 말과 비슷한 행동을 한 다음 내 몸이 변했던 것 같기도 했다.
"구럼 몇 시진 동안 어른이 되는 건가요?"
"대중이 없을 게다. 네가 어른이 되는 것은 극상승 천외천의 무학 원리와 반골장을 익히면서 얻게 된 근육과 골격의 유연함과 막대한 육계정의 내력으로 인한 것이다. 쉽게 말해 내력으로 유지되는 크기이기 때문에 내력의 소모가 일정 수준으로 떨어지면 다시 어린애가 되는 것 같은데 나로서도 뭐라 말하기가 힘들다."
"어떻게 알게 된 거됴?"
"섭혼술이다.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섭혼술로 네가 무얼했는지 알아냈고 다시 한 번 섭혼술로 너를 움직여 보였다. 내가 말한 순서로 행동을 하자 어른이 되었는데 내력 소모가 심했던 모양인지 다시 아이로 돌아가더구나."
"구렇담 하루 자고 나면 다시 어른이 될 수 있다눈 건가요?"
"아마도......천외천의 무학은 특수한 구석이 있다. 일주천외천(一走天外天)이라고 해서 천외천의 무학은 하루에 한번 강하게 힘을 발휘한다고 들었다. 아마 내 말이 맞을 거다."
듣고 보니 별로 좋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은성노모의 말을 듣지 않았어도 분명히 나는 며칠 안에 그녀가 말한 순서대로 운기를 했을 테니까, 그것 말고는 나로서도 의심이 가는 부분이 없었고......
"구렇군요......"
"실망했느냐?"
"아뇨. 감사합니다."
은성노모는 후후후 하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 또한 그녀가 보여준 놀라운 모습 중의 하나였다.
"내가 왜 은혜미를 미워하는지 궁금하지 않느냐?"
"궁굼해요."
내가 대꾸하자 은성노모는 차가운 표정으로 문밖을 내다보았다.
"나중에 알려주겠다. 우선은 저 계집애를 빙궁으로 데려가서 교육을 좀 시켜야 한다."
그녀가 말하는 교육이라는 것은 들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두 뺨이 불어터진 색시를 얻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그 일은 좀 뒤로 미루면 안 될까요?"
"왜? 내가 저 애를 때릴까봐?"
"구것도 있고, 남궁공자 문제도 있고,"
"네게 무언가 생각이 있는 게냐?"
"네, 확실히 생각이 있어요."
은성노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럼 너를 한번 믿어볼까?"
내 목소리를 흉내 내어 대답했는데 꽤 예쁘고 귀여워 보였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침상 위를 아장아장 걸어가서 그녀의 입술에 뽀뽀를 하고야 말았다.
"요 망할 녀석!"
은성노모는 나를 끌어안았고 나는 그틈에 궁금했던 은성노모의 사이즈를 재볼 수가 있었다.
푹신......85에 C 혹은 D 믿어주시라. 젖을 그리워하는 어린 아이의 티없이 순수한 마음에서 그랬던 것이니......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