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조사심판을 깨달으면 무릎이 탁 쳐집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의 성품이 어떻게 바뀌게 되는지 그 원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품성 변화에 노력할 것이 아니고 마음이 항상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거하면 품성의 열매는 자연적으로 맺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점은 우리가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은 우리의 품성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그 영생을 선물로 누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우리의 그 어떤 행위나 노력도 포함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핏의 값으로 얻게 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왜 조사심판이 필요한 것일까요? 우리가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믿으므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굳이 조사심판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 들은 조사심판의 교리를 매우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조사심판의 교리는 구원을 위해 우리의 행위를 요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오해입니다. 이것은 조사심판의 목적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조사심판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이러한 오해는 모두 사라지게 되고, 조사심판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무릎이 탁 쳐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모두 설명한 뒤에, 로마서 12장부터 16장까지 복음을 깨달은 사람 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권면 가운데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본문을 읽고 아래의 질문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봅시다.
1.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2. 조사심판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3. 조사심판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4. 조사심판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상충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번 과에서 왜 우리에게 조사심판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그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조사심판이 무엇인지부터 대략적으로 살펴본 후에, 조사심판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심판에 관해 기록된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7)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6~7)
공중에 날아가는 세 천사의 기별들 중에 첫 번째 천사의 기별의 핵심은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세천사 전하는 기별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외쳐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기별입니다. 이 세 천사가 전하는 세 가지 핵심 기별을 우리는 세천사의 기별이라고 하며 이 기별 들이야말로 이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기별입니다.
그중에 첫 번째 천사가 전하는 기별은, "심판"이 이르렀다는 기별입니다. 너무도 엄숙하고 중요한 기별입니다. 그렇다면 이 심판은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는 심판인가? 다니엘서에서는 그 심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9)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10)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단 7:9~10)
다니엘서 7장은 2장과 더불어서 세상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해주는 매우 중요한 장입니다. 이 예언을 통해서 세상은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제국으로 이어질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은 유럽의 열 나라로 분열될 것을 예언하였는데, 그 분열된 열 나라에서 작은 뿔, 곧 교황권이 등장할 것을 다니엘서는 분명하게 예언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7장은 바로 이 작은 뿔의 사건이 후에 우리가 위에서 읽은 위 구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작은 뿔의 등장과 몰락 이후에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여 심판을 베푸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심판이 베풀어지는 때가 시작되는 시기는 작은 뿔의 몰락(1798년) 이후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8장에서는 다니엘 2장과 7장에서 예언된 모든 내용 들을 다시 한번 또다시 반복해 주고 있는데, 다니엘서 8:14 절에서는 바로 그 심판이 시작되는 시기가 언제인지를 분명하게 예언해주었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함을 입으리라 하였느니라"(단 8:14)
이 구절은 1798년 교황권의 몰락 이후에 1844년부터 심판이 시작될 것을 알려주는 성경절인 것입니다.
우리 재림교회는 바로 다니엘서 8:14절을 깨닫게 되면서, 세상에 마지막의 심판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외쳐야 할 사명을 받고 탄생한 교회인 것입니다. 지면 관계상 조사심판이 무엇인지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조사심판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분들은 따로 자세하게 연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재림교인이라면 누구라도 조사심판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조사심판을 세상에 알려줘야 하고, 또 세상이 심판을 위해 준비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부름을 받은 사람 들이기 때문입니다.
자 이처럼 성경과 증언의 말씀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이 명확하게 조사심판 있음에 대하여 분명하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중요한 질문은, 왜 조사심판이 있어야 하는가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우리가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면 굳이 우리를 조사하고 심사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조사심판은 아주 오랫동안 오해를 받아왔습니다. 조사심판을 강조하는 우리 재림교회는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품성 변화에 달려있는것 처럼 가르친다는 오해를 받아왔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사심판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한 사람의 품성을 심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 들이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 +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오해한 것이고, 이것을 오해했던 많은 사람 들이 재림교회는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 않고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고 공격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실제로 우리 중에 많은 사람 들이 그와 같이 믿어왔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재림 성도 들이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사심판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부분은, "품성"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분에게는 이 말이 매우 생소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조사심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는 심사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결정짓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사심판은 믿음이 있는지를 심사하는 절차입니다. 과연 한 사람이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심사의 본질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믿음에 어떤 공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는 뜻이며 그 값없는 선물을 발견한 우리의 모습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 깨달음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자격을 준다고 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을 선물로 주신 것을 깨달았을 때(믿음) 우리는 그것을 기쁨으로 누리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화잇여사는 믿음을 구원의 선물을 받는 손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믿음 자체에는 어떤 공로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어떤 공로도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이유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용서의 선물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구원을 위해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믿음을 가졌는지를 심사하는 것이 필수적인 절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누가 그런 믿음을 가졌는지 누가 그런 믿음을 갖지 못했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공개적인 심판을 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모르시기 때문에 책 들을 펴놓고 심사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심판은 하늘에 있는 모든 존재 들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에게는 구원을 주시고, 누군가에게는 멸망을 선고하실 때, 그 모든 판결이 믿음에 기초하여 각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신 것임을 온 하늘의 존재 들이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 하늘의 존재 들이 의심의 여지 없이 하나님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심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사심판이 믿음을 심판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왜 조사심판을 이야기 할 때 항상 품성 변화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증거인 행위를 통해서 믿음을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법정에서 판사가 어떤 판결하는데, 전혀 증거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나 감정에 의해서 판결한다면 어느 누가 판사의 판결을 존중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그 판사를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판결은 드러난 증거에 의해 내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열리는 조사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6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 들이 예
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믿는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고백한 모든 사람 들이 구원받았다고 판결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들의 믿음을 심사하는 일을 하셔야 할까요?
어떤 죄수가 재판정에서 눈물로 호소하면서 자신의 무죄를 판사에게 탄원한다고 판사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요? 모든 판결은 반드시 증거에 의해서 내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판사도 모든 사람 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조사심판이 행해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심판은 반드시 행위로만 받습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듯이 믿음은 언제든지 그에 따르는 행위를 만들어 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단어 속에는 행위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행위가 포함되지 않은 믿음을 단 한 번도 믿음으로 부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 가운데 믿음에 걸맞은 행위가 나오지 않는다면 행위가 문제가 아닙니다. 행위를 고치려고 하지 말고, 나의 믿음이 바른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취하고 있으며 그 은혜를 감사와 감격으로 누리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믿음이 바로 세워지면, 행위는 반드시 그 뒤를 따르게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사심판은 우리의 믿음을 심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행위를 통해서 심사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조사심판이 왜 필요한 것인지 또 무엇을 심사하는 것인지 이해하셨습니까?
마지막으로 조사심판이 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형수로 감옥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최고의 기쁜 소식은 심판을 다시 해주겠다는 전갈일 것입니다.
윤성여 씨는 화성 연쇄살인범으로 지목되어 20년을 감옥에서 옥살이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진범이 자백한 것입니다. 윤성여 씨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였습니다. 그리고 2020년 1월 국가의 재심 결정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때 윤성여 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날로부터 윤성여 씨는 오직 재심의 날만을 기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는 매일 그 재심의 날만을 고대하지 않았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재심의 날은 그의 누명이 벗겨지고, 그가 무죄 선고를 받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윤 씨는 같은 해 12월 17일 윤 씨는 무죄 판결받았습니다.
조사심판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선고를 받은 우리를 다시 심사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 심판이 아니라면 유죄 판결받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러나 조사심판을 통해 우리가 사단에게 속았었다는 것이 온전히 밝혀질 것이고,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피로 씻음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판결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조사심판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오히려 그날이 빨리 오기를 고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날에 나를 의롭다고 판결받게 하시기 위해 2000년 전 십자가를 지시고 생명을 내어 주신 예수님께 매일 감사와 찬송을 돌리며 그날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재판정에 서게 되는 그날을 한번 상상해 보겠습니다. 재판정에서 우리의 이름이 호명될 때, 우리가 법청에 호출되어 재판과 앞에 서 있다고 상상을 해보겠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모든 더럽고 추악한 죄 들을 재판관 앞에서 낱낱이 고할 것입니다. 그리고 재판관은 이 모든 죄를 지은 것이 맞냐고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맞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우리를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이 사람이 그 모든 죄를 지은 것이 맞지만 그것은 사단에게 속아서 지은 죄들이라고 그 모든 죄의 책임은 사단이 져야한다고 우리를 변호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해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피흘려 죽었다는 사실을 재판장에게 상기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때 재판장은 우리에게 물을 것입니다. "피고 000는 정말로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믿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그 사살을 믿음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 그 사실이 믿어지는 경험을 했던 모든 사람 들은, 반드시 "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책 들이 펴지고, 우리의 모든 삶의 페이지가 판사에게 읽혀질 것입니다. 과연 우리의 대답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믿은 사람 들이라면, 우리의 삶에는 그에 따르는 충만한 행위의 열매들이 책들에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믿음이 바르지 않았었다면,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와 자비를 이해하거나 깨닫지 못했었다면, 그래서 한 번도 우리의 삶을 그분께 드려본 적이 없었다면,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고백한 믿음에 따르는 열매들이 맺혀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참되고, 예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 사람 들이라면 우리는 조사심판에 대하여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께서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 들이니까요. 우리는 윤성여 씨처럼, 우리의 모든 누명이 벗겨지고, 무죄 선고를 받을 그날을 고대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판사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선언하실 것입니다. "이 모든 기록으로 비추어 볼 때, 피고 000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은 죄인이 분명하기에 000에게 무죄를 선언한다"
온 하늘은 기뻐하며 한 영혼의 구원을 기뻐할 것입니다. 하늘은 영과의 잔치로 기쁨 충만할 것입니다.
저는 그 기쁨의 날을 고대합니다. 나의 모든 누명이 풀려지는 날, 영광의 구주와 함께 영원히 하늘에서 살 그날을 고대합니다. 내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의 용서와 은혜를 믿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가 모두 그 영광의 날에 꼭 영원한 생명 가운데 들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함께 나눠봅시다.
1. 그동안 나는 조사심판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요?
2. 조사심판을 통과하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3. 가장 중요한 믿음을 준비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4. 조사심판에 대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은 무엇입니까?
5. 조사심판이 아직도 두렵게 느껴진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