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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회]
팽만유와 철장우가 신황의 좌우를 압박해 왔다. 동시에 뒤에서 두려움을 모르는 연혼불사강시가 다가왔다.
그 한가운데 신황이 존재했다.
온몸이 붉은 색으로 물든 채 피풍의와 손가락 사이로 선혈을 뚝뚝 흘리고 있는 신황, 하지만 그의 모습에서 위축된 표정이나 지친기색 따위는 없었다.
예전에 십 년간 천하를 떠 돌 때도 이보다 더한 싸움도 해봤다. 그때의 무공수준 또한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결국 살아남았고 적은 모두 죽었다.
그때의 경험은 그의 훌륭한 자산이 되었고, 이후의 싸움에 지침서가 되었다.
기세에서 밀리면 싸움에서도 밀린다.
상대가 나보다 수가 많다면 최대한 잔인하게 손을 쓴다. 그래서 두 번 다시 자신에게 감히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짓밟는다.
그것이 신황의 전투 시에 갖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런 신황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이지를 읽은 연혼불사강시조차 신황을 바라보는 눈빛에 은은한 공포가 배여 있었다.
분명 모든 이지를 잃어 아무런 지각을 느끼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팽만유와 철장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신황의 잔인한 손속에 적잖은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그들의 자존심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팽만유와 철장우는 은밀히 전음을 주고받았다.
‘한 번에 몰아쳐야 하네. 연혼불사강시로 하여 먼저 최후의 공격을 하게 할 테니 우리도 최고의 절기로 한 번에 요절내야되’
‘알겠습니다’
싸움을 길게 끌어봐야 유리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판단 하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더구나 지금 이 순간 그들을 보는 많은 시선이 있었다. 최대한 신황을 빨리 처리하고 저들마저 처리해야 했다.
고오오오~!
그들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멀리 떨어져 있는 팽가의 식구들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기운, 그중에서도 팽만유의 기운은 팽광형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다.
팽광형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무슨 무공이지? 팽가의 무공 중에 이렇게 외부로 강렬한 기운을 풍기는 무공이 있었던가?’
그것은 그뿐만이 아리라 다른 사람들의 뇌리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강호에 널리 알려졌다시피 팽가를 대표하는 무공은 바로 오호단문도(五號斷門刀)이다. 팽가의 무공은 바로 오호단문도로 시작해 오호단문도로 끝난다.
물론 다른 절기도 많지만 그래도 가장 극강한 위력을 내는 무공이 바로 오호단문도였다. 때문에 장로 이상의 인물들은 모두 완수할 정도로 오호단문도를 익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팽만유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은 그런 오호단문도의 기세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녀석들은 모두 죽을 터,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이유도 없다’
팽만유는 그렇게 생각하면 도를 뽑아 들었다
스르릉~
마침내 모습을 보이는 그의 도, 도의 표면에 섬세하게 용의 비늘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의 애병인 용린도(龍鱗刀)로 그의 어머니인 하옥지가 넘겨준 귀물이었다.
‘생사가 걸린 순간이 아니면 절대 펼치지 말거라. 그리고 부득불 펼치게 되면 무공을 본 인물을 모두 죽여 증거를 남기지 마라.’
그의 어머니인 하옥지가 용린도를 넘기며 신신당부한 말이었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어머니!”
팽만유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의 눈동자가 확장되면서 온통 검은빛을 띠었고, 용린도에서도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마귀령도(麻魔鬼靈刀), 지금은 거의 몰락하다시피 했지만 하오문의 비전절기가 바로 마마귀령도법이었다.
그리고 하옥지는 하오문의 마지막 정통후계자였다.
하오문의 부활을 휘해 절치부심하던 그녀를 팽가의 전대가주가 강탈하다시피 팽가로 데려왔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바로 팽만유다.
지금 팽만유는 오랜 시간 봉인을 해두었다가 자신의 모든 것을 꺼내보였다. 그리고 그에 동조해 철장우도 철십자검을 펼칠 준비를 끝마쳤다.
두명의 엄청난 기세에 팽가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봤다. 그들은 제아무리 신황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위축될 줄 알았다.
그래서 신황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러나 그 순간 놀랍게도 신황의 얼굴에는 섬뜩한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팽만유와 철장우의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꺼냈다.
“이로써 밑천을 모두 꺼내 보인 건가?”
투두둑!
신황은 목을 좌우로 꺾으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그의 주위로 폭풍 같은 기세가 일어났다. 그러자 그의 피풍의와 머리가 미친 듯이 펄럭였다.
팽만유가 그런 신황의 모습을 보며 원독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육시를 내주마. 그래서 네 몸을 저자거리에 널어놓고 개의 먹이로 줄 것이다.”
“능력이 된다면.....하지만 안 된다면 오늘 당신의 마지막 날이 될 꺼야.”
쉭~!
순간 차갑게 내뱉으며 신황이 움직였다.
더 이상 말을 길게 한다는 것은 시간낭비다. 그는 오늘 무척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쳐랏!”
맹만유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이제까지 기회만 노리던 살아남은 연혼귀령대가 일제히 신황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서른 구가 넘는 연혼불강시가 일제히 날아오르며 허공이 마치 까마귀 때에 뒤덮인 것처럼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신황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왼손에 월영인을 만들어내며 제일 먼저 자신에게 접근하는 연혼불사강시의 복부에 쑤셔 박았다. 너무나 쉽게 박히는 기의 검.
크어어어억!
연혼불사강시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연혼불사강시의 눈에 붉은 빛이 더우 강렬해졌다.
“음?”
신황의 눈에 의혹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손에 느껴지는 반응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혹은 금방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콰콰콰쾅!
순식간에 연혼불사강시가 폭발을 일으켰다. 자폭을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혼불사강시의 진정한 위력이었다.
진짜 대적할 수 없는 자를 만났을 때 자신의 몸을 벽력탄 대용으로 사용해 적과 같이 자멸하는 지독한 공격 수법이었다.
연혼불사강시의 뼈와 근육이 파편이 되었고, 피에 함유된 지독한 극독이 봇물처럼 신황을 덮쳐왔다.
절제절명의 순간 신황은 자신의 피풍의를 벗어 활짝 펼치며 내공을 집중시켰다. 동시에 비로 바닥을 쓸어내듯 그렇게 자신의 전면을 쓸어냈다.
슈우우~!
염혼불사강시의 파편과 신황의 피풍의가 부딪쳤다.
퍼버버벅!
순간 신황의 곳곳에 구멍이 뚫리며 파편이 신황의 몸을 격타했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몸 곳곳에 구멍이 뚫리는 것은 어쩔수 없었다.
순식간에 또다시 선혈로 물드는 신황,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떤 고통의 빛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는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대신 눈앞에 있는 적을 말살하기 위하여 몸을 움직였다. 그것이 더 효율적이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손으로는 피풍의를 휘두르며 다른 한손으로는 월영인을 날리며 신황은 움직였다. 그에 따리 신황의 월영인에 격중 된 연혼불사강시가 잇달아 폭팔을 일으켰다.
콰콰콰콰콰쾅!
마치 수십개의 벽력탄이 한꺼번에 터지는듯한 광경, 그에 따라 팽만유의 거처가 먼지를 일으키며 무너져 내렸고 땅거죽이 울퉁불퉁 일어났다.
팽광형을 비롯한 팽가의 남자들이 있는 곳에까지 파편이 튀었다.
과연 저런 대폭발 속에서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들만큼 엄청난 폭발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타핫!”
“이야아앗!”
팽만유와 철장우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들의 무기에는 엄청난 기운이 몰리고 있었다. 그에 따라 주위의 대기가 요동을 쳤다. 그들은 지체없이 자신들의 절기를 펼쳤다.
고오오오~!
철장우의 검이 겸치며 십자가 모양을 만들어냈고, 팽만유의 도에서도 마마귀령도가 만들어낸 도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그 광경에 누군가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 나왔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광경이었다. 과연 저런 공세를 맨몸으로 맞부딪치고 사람이 흔적이 남을까? 싶은 공격이었다.
한참 떨어진 자신들에게까지 이런 여파가 밀려오니 그 중앙에 있는 신황은 오죽하겠는가. 그들의 주먹에는 자신도 모르게 흥건히 땀이 베었다.
콰아앙~!
순간 엄천난 굉음과 함께 신황을 중심으로 방원 오장이 엄청난 압력에 반구형으로 움푹 패여 들어갔다.
팽만유와 철장우는 이에 안심하지 않고 다시 연달아 절초를 펼쳐냈다. 그들은 이번 기회에 신황의 흔적을 아예 세상에서 지워버리려 마음먹은 것이다.
한편 그 광경을 지켜보던 제갈우희는 속으로 교소를 터트렸다.
‘호호호~! 제아무리 신황이라 할지라도 이런 공격 속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지. 비록 저렇게 죽는 것은 아깝지만 그래도 후환을 남겨두는 것보다 낫지.’
제갈우희는 이제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신황의 무심한 눈만 보면 한없이 위축되는 자신의 모습이 진저리나게 싫어지던 참이었다.
그녀는 이 기회에 신황을 영원히 안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에 답답하게 막혔던 체중이 시원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모두가 신황의 처참한 죽음을 예견할 때 자욱한 먼지를 뚫고 붉은 물체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슈우우~!
온몸이 혈인이 되다시피 붉은 피로 물들이고 있는 신황, 몸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심상치 않은 상처가 보였지만 그의 눈은 전혀 꺾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섬뜩하게 번뜩이며 팽만유와 철장우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철장우는 가슴이 떨려왔다.
연혼귀령대의 자폭에도 자신과 팽만유의 합공에도 살아나오는 이 싸움귀신을 어떻게 해야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결국 악에 바쳐 소리를 지르며 절기를 펼쳐냈다.
“죽어라! 악귀 같은 새끼야.”
그것은 팽만유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악귀 같은 신황의 모습에 치를 떨며 마마령도의 절초를 뽑아냈다.
철십자검의 혈십자멸(血十字滅)이 펼쳐지고 마마귀령도의 마마창세(痲魔創世)가 펼쳐졌다.
그들 절기의 최절초로 그야말로 하늘을 가르고 대지를 가를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초식들이었다.
자신을 향해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는 공세가 펼쳐짐에도 신황은 그것을 보지 않았다. 그의 눈은 공세너머에 존재하는 팽만유와 철장우를 보고 있었다.
기이이잉~~!
그의 손에 월영륜이 생성되었다.
신황의 손바닥 안에서 둥글게 회전을 하는 기의 톱날, 신황은 그것을 망설임 없이 두 남자의 공세를 향해 던졌다.
가공할만한 절기 세 개가 같은 공간에서 격돌햇다. 그러나 너무 소리가 크면 오히려 들리지 않는다 했던가?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간 이어지는 정적.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신황과 팽만유, 철장우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의 꿈틀거림을. 그리고 마치 공간자체가 일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갑자기 거대한 폭발을 뿜어냈다.
콰아아~앙!
엄청난 충격의 여파가 팽만유의 처소가 있는 공간에 몰아쳤다.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의 여파에 모두의 신형이 흔들거렸다. 심지어 팽만유와 철장우마자도 말이다.
하지만 신황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 뒤로 물러섰으면 충격을 완화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는 뒤로 물러서는 대신 전진을 택했다. 덕분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 차이가 대세를 갈랐다.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며 자신의 몸에 닥친 충격을 해소하기 바쁜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을 향해 온몸으로 짓쳐가는 신황, 그 순간 그들의 모습은 마치 낙인처럼 중인들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됐다.
슈우우~!
자신을 향해 눈을 번뜩이며 두 팔에 월영인을 만들어낸 채 달려드는 신황의 모습에 철장우의 얼굴에 다급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지금 공력의 소모가 극심한 초식을 펼쳐내고 격돌의 여파를 감당해내느라 몸이 균형을 잃어버렸다. 때문에 회피를 할 수 없었다.
때문에 남은 방법은 한 가지,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수밖에 없었다.
철장우는 두 자루의 검을 십자로 그으며 신황의 허리와 머리를 동시에 조렸다. 그러자 폭풍 같은 검기가 쭈욱 일어나며 신황을 덮쳐왔다.
그러나 신황은 맞부딪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월영인을 회수하며 몸을 기묘하게 놀렸다. 그러자 요동치는 그의 신형이 마치 미끄러지듯 철장우의 검기를 피했다.
동시에 그가 고속으로 철장우의 옆구리 쪽으로 접근햇다.
“빌어먹을!”
그 모습에 철장우는 급히 몸을 비틀어 신황을 견제하며 오늘손에 들린 검을 거꾸로 잡고 신황의 머리를 향해 찔러갔다.
순간 신황의 손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철장우의 검신을 타고 올라왔다.
투두두둑!
신황의 손이 철장우의 팔뚝을 타고 올라가면서 철장우의 팔뚝의 살이 터져 나갔다.
지독한 고통이 팔을 타고 올라와 철장우의 머리를 하얗게 만들었다. 때문에 그의 몸이 약간 주춤거렸다.
신황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철장우의 뒤를 점유했다. 그의 팔은 철장우의 옆구리를 통해 목을 조였고 발은 허리를 휘감았다.
“끄으응~!”
목과 허리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압력에 철장우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그는 허우적 거리며 신황을 떼어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팔이 등 뒤로 돌아가지 못하게 완벽하게 제압당한 것이다.
신황은 철장우의 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넌 그때 돌아가야 했어.”
그가 무룡대에서 경고했던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흐어어~!”
철장우는 무어라 말을 하려했지만 숨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신황은 천근추를 펼쳐 바닥에 떨어져 내리는 속도에 가속력을 더했다. 철장우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눈에 커다랗게 확대되어오는 바닥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몸부림을 쳐서 신황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신황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크으으........!”
그의 입에서 묘한 신음이 토해져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는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퍼~억!
순간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철장우의 머리가 바닥에 부딪치며 그대로 깨지고 말았다.
셋이 격돌하고 신황이 철장우의 등을 점유하고 또다시 바닥에 충돌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촌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동안에 벌어진 참극인 것이다.
중인들의 입이 벌어졌다. 그들의 일생에 언제 이런 험한 싸움을 본적이 있겠는가? 그들은 넋을 잃고 철장우가 바닥에 박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이놈! 신....화.......앙!”
팽만유의 입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 자신 역시 몸을 추스르느라 잠시 손을 쓰지 못했는데 그사이에 든든한 조력자였던 철장우가 처참하게 죽고 만 것이다
분노에 눈이 뒤집힌 팽만유의 몸이 뒤로 젖혀지고 그의 용린도에 다시 검은빛 기류가 뭉치기 시작했다.
쉬익!
순간 지상에서 허공으로 올라가는 한줄기 빛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로 올라가는 한줄기 유성처럼 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팽만유의 몸을 스쳐지나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붉은 달이 마치 반쪽으로 갈라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주르륵!
팽만유의 미간 사이로 한줄기 혈흔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혈흔은 그의 이마에서 코로, 코에서 목으로 번져갔다.
“제....장! 이....게 아닌데.......”
쿠우웅~!
그 말을 마지막으로 팽만유의 몸이 바닥에 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다.
이제껏 평생을 팽가를 자신의 손에 넣기 위해 노력을 경주해온 것에 비하면 너무 허무한 최후였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팽가의 식구들 모두가 이 순간 돌이 된 것처럼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팽만유와의 싸움이 벌어지면서 일이 종료될 때까지 그들은 철저한 방관자였다.
그들은 오늘 잘 짜여진 경극 한 편을 본 것 같았다. 그만큼 너무나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들은 사람이 이렇게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스륵!
신황이 일어났다. 온통 피에 절어 어디가 코이고 어디가 입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었지만 그의 눈만큼은 아직도 살아서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뒤도 안돌아보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팽광형을 제외한 팽가의 식구들이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신황은 그에 신경을 쓰지않앗다.
그가 걸음을 옮긴 곳에는 제갈우희가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않아 있었는데 사타구니 부분이 누렇게 떠 있는 것이 오줌을 지린 것이 분명했다.
제갈우희는 반쯤 미치기 직전이었다. 그렇게 믿었던 모든 것들이 모조리 없어지고 남은 것은 오직 그녀뿐이었다.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발목에는 날카로운 상처가 생겨 있었고 그것에서는 주먹만 한 고양이 한 마리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설아였다. 설아가 도망치려는 그녀의 발목 힘줄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녀 자신도 모르게 말이다.
크르르~!
설아의 나직한 울음소리에 제갈우희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신황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많은 것을 말해야 할 거야.”
제갈우희의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떠올랐다. 눈은 울고 있는데 그녀의 입가는 억지로 웃고 있었다.
신황과 철혈각의 고수들이 떠난 금지는 조용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금지의 입구에는 단 두 명의 무인만이 지키고 있을 뿐 어떤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그만큼 금지는 정적에 빠져 있었다.
그곳에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마치 어둠의 일부처럼 조용히 불빛 속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남자들. 경비를 서던 무인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누구냐?”
순간 남자들 중 몇 명이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
무인들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안을 향해 무어라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들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번쩍!
눈부신 출수가 이루어지고 어느새 무인들의 목에는 날카로운 검신이 스치고 지나갔다.
“크르르~!”
“허윽!”
무인들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목에는 어느새 붉은 상처가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미처 무인들이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이루어진 섬전 같은 출수였다. 무인들은 미처 비명을 질러보기도 전에 허무하게 바닥에 몸을 누었다.
팽만력은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주위를 마치 그림자처럼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 그들의 주인이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 관주희에게 맡긴 인물들이다.
그들의 임무는 관주희를 도와 그들의 주인이 다시 세상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이제까지 관주희가 그들을 동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제까지 그들을 이용할 만큼 절박한 상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신물을 찾는데 그들을 동원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변했다. 이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절박하게 변했다.
주인의 명령을 거역하면서까지 저지르는 행동이다. 때문에 반드시 자신의 임무를 성공시켜야 했다.
그래야 팽만력과 자신의 손자들만이라도 용서를 받고 중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관주희는 자신을 둘러 싼 인물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능히 일당백의 힘을 가진 무인들이다. 최후의 순간에도 자신의 주인은 이들을 쓰지 않았다.
그 모두가 언젠가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을 위해서였다. 자신의 아들을 위해 그녀는 주군의 명을 기꺼이 포기했다.
‘이제 소주가 돌아오셨다. 이제 신물과 이곳의 실권만 빼앗으면 내 생애 더 이상 여한은 없다.’
관주희는 눈을 차갑게 빛내며 팽만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팽만력은 관주희에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자신을 둘러싼 흑월령(黑月令)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형님을 제외한 모두를 제거한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무이란 꼬마는 만약을 대비해 인질로 잡는다.”
“넷!”
팽만력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흑월령들이 낮게 대답하며 금지 안으로 몸을 날렸다. 몸을 날리는 그들의 표정엔 희열의 빛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이제까지 존재를 숨기느라 몸이 근질근질 했는데 이제야 몸을 풀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훗!”
“킥킥!”
그들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눈앞에 보이는 광경 때문이다.
백여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금지 안에 있었다. 횃불조차 켜지 않고 있지만 흑월령들은 그들의 존재를 꿰둟어 보았다.
“함정인가? 제법 머리 굴리는 놈이 있나보군?”
“그러게! 하지만 헛수고야.”
“후훗!”
자신들보다 훨씬 많은 무인들이 있지만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이제까지야 사정이 안 되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 그들의 주인이 세상에 나타난 이상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었다.
스윽!
검은 소매사이로 그들의 하얀 팔뚝이 드러났다. 마치 수십 년간 빛을 보지 못한 듯 창백한 피부,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섬뜩한 한 글자 마(魔).
슈슈슈슉!
순간 금지 곳곳에서 암기들이 쏫아져 나왔다. 암기들은 무서운 기세로 흑월령을 향해 덮쳐왔다.
“가소로운 것들!”
그들의 얼굴에 한줄기 비웃음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들은 소매를 휘들러 자신들의 근처에 다가오던 암기들 모두 떨어트렸다.
하늘을 가르는 야조처럼 금지의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흑월령들. 그들의 손이 새하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적들을 척살하라. 적들은 팽가의 식구들이 아니다.”
팽주형이 고함을 쳤다. 그러자 어둠속에서 남자들이 우르르 튀어 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을 덮쳐오는 흑월령들을 향해 도를 휘두르며 맞서 나갔다.
“이야아아~!”
“타앗!”
곳곳에서 기합소리와 함께 남자들이 격돌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팽만운은 자신의 도를 들고 전장이 되어버린 금지를 바라보았다.
“이놈들.........!”
그의 수염은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같은 한솥 밥을 먹고 지낸 팽만력이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할 줄 몰랐다.
그래도 어느 정도 이성이 있다면 스스로를 굽히고 들어왔으면 했던 것이 팽만운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배다른 형제는 그런 자신의 염원을 외면하고 칼을 들이댔다.
지금 그의 심정은 비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천 년 역사의 팽가가 어쩌자고 이런 분란에 바졌단 말인가? 어떻게 내 형제들 중 이렇게 반역을 꿈꾸는 자가 둘이나 나온단 말인가?’
비록 배다른 형제였지만 그는 팽만유와 팽만력에게 한 가닥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이제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신황의 예측이 맞지 않았으면 했는데 불행히도 맞아 떨어졌다. 이젠 더 이상 그도 물러설 수 없다
그때 팽만력이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주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싸움도 바닥을 가득 메우고 흐르는 핏물도 그에겐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도를 바닥에 끌며 악귀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 형제들 중 네가 제일 영리해서 우리를 많이 놀라게 하곤했지. 이번에도 그렇구나.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느냐?”
“제 생각이 아닙니다. 전 단지 그의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 신황을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팽만운의 대답에 그렇지 않아도 험상궂던 팽만력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이제 이곳에 들어온 지 삼 일밖에 안 된 녀석의 이름이 도대체 안 튀어나오는 곳이 없다. 이젠 정말 지겹기까지 했다.
팽만운은 그런 팽만력을 보며 말을 이었다.
“형님! 이제 포기하십시오. 형님과 어머님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형님이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냥 돌아가신다면 제가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넌 이 광경이 보이지 않느냐?”
팽만력이 주위에서 벌어지는 혈전을 보며 말했다.
어찌 보면 일방적인 확살이라 할 만큼 처절한 광경이었다. 흑월령들은 거의 피해가 없는데 반해 백영각의 무인들은 연신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도무지 싸움이 되지 않았다. 싸움도 급수가 맞아야 하지 이것은 거의 일방적인 도살에 불과했다.
흑월령의 손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면 어김없이 백영각의 무인이 쓰러졌다. 그 광경에 팽만운은 이를 악물었다.
팽만력은 비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이미 칼을 뽑았다. 그렇다면 무엇이라도 하나 얻어야 하지 않겠느냐? 난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기어코 끝을 보겠단 말이군요.”
“넌 예전부터 너무 말이 많았다.”
스르릉~!
그 말을 끝으로 팽만력이 도를 뽑아 들었다.
팽만운 역시 자신의 도를 뽑아들었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비록 배는 다르지만 그래도 형제란 이름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도를 겨눴다. 그들의 도에는 흐릿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초관염은 눈을 감고 팽만우의 맥문을 잡고 있었다.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도 검이 부딪치는 소리도 그에겐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오로지 팽만운의 상세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초풍영은 그런 초관염의 뒤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예의 세 개의 검이 꽂혀있었고, 그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초관염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넌 밖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지도 않느냐? 어찌 그리 돌처럼 굳어 있느냐?”
그의 말에 초풍영의 눈이 스륵 떠졌다. 그는 예의 여유 있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팽가를 지키는 것은 저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제가 할 일은 다 늙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된 숙부님을 지키는 것입니다. 팽가를 지키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꼬부랑 할아버지? 내가 이리 된 게 다 누구 때문인데.......다 네놈이 속을 썩여 이렇게 된 것이야.”
“하지만 덕분에 즐거우시지 않습니까? 다들 딱딱하게 세상을 사는데 저마저 딱딱하게 굴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이게 다 숙부님을 위해서입니다”
여전히 능글맞은 초풍영의 대답에 초관염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그래도 어려울 때는 핏줄이 제일이라고 고생을 하며 키워놓았더니 적잖은 의지가 되었다. 그 덕에 이렇게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입으로 말은 안했지만 초풍영이 있어 든든한 초관염이었다.
초풍영은 초관염을 보고 미소를 짓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데 팽가주의 상세는 어떻습니까? 밖에서 사람들이 이리 고생하고 있는데 혹여 잘못이라도 되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갑니다.”
“지금이 고비야. 지금 이 순간만 잘 넘기면 머지않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댜. 그러니........”
팟!
순간 초풍영이 벼락처럼 몸을 움직이며 세 개의 검 중 용아(龍牙)를 뽑아 문을 향해 휘둘렀다.
촤아악!
순간 문이 두 조각나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로 암영이었다.
“제법이군! 나의 기척을 감지하다니 말이야”
그는 자신의 베어진 옷자락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딴에는 은밀히 접근한다고 했는데 들켜버렸으니 겸연쩍은 것이다.
한편 그를 보는 초풍영의 얼굴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너 얼마나 죽였지?”
마치 한겨울의 바람처럼 차가운 그의 목소리, 평상시의 초풍영이 아니었다.
초풍영의 눈은 암영의 손을 보고 있었다.
얼마나 사람을 많이 죽였는지 소매가 붉은 선혈로 찌들어 있었고, 손에서도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초풍영의 말에 암영의 입이 씨익 벌어졌다. 그는 매우 자랑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얼마 안 돼! 이제 여섯, 너까지 하면 일곱이겠군.”
“이 자식, 팽가의 식구라면서 그렇게 팽가 사람들을 베어 넘겼단 말이냐?”
너무나 뻔뻔하게 말하는 그의 태도에 초풍영이 분노를 터트렸다. 그러나 암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능글스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난 팽가의 사람이 아니야. 단지 사정에 의해서 잠시 이곳에 머물고 있었을 뿐. 그러니 얼마든지 죽여도 상관없어.”
“너.........”
스르릉~!
초풍영의 등에서 또 한 자루의 검이 뽑혔다. 호아(虎牙)였다. 그는 그렇게 두 자루의 검을 들고 차갑게 말했다.
“죽여주마!”
“크크큭! 능력이 된다면 얼마든지.”
마치 까마귀 같은 웃음소리가 암영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쉬익!
그렇게 잠시 웃음을 짓던 암영이 순간 섬전처럼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초풍영을 피해 몸을 날렸다. 그의 목표는 초풍영이 아니라 팽만우였던 것이다.
암영의 손에는 예의 하얀빛이 어린 손으로 팽만우의 앞에 앉아 이는 초관염을 공격했다. 거치적거리는 초관염과 함께 팽만우를 동시에 처리하려는 것이다.
“어딜?”
순간 초풍영이 용아를 뻘어 암영의 궤도를 막아섰다. 그러자 암영이 팽만우를 향해 뻗던 손을 회수해 초풍영의 검신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타~앙!
맑은 쇠소리가 나며 용아가 낭창 휘었다. 하지만 초풍영이 손목을 살짝 움직이자 다시 용아가 본모습을 회복하며 암영의 목을 노렸다.
뜻밖의 공격에 암영이 급히 허리를 뒤로 젖히며 초풍영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제법이군!”
암명이 놀랐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초풍영의 공격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어 허를 찌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로 멈추기에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두 손에 공력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팔에 더욱 찬연한 빛이 맺혔다.백마소령수(白魔素靈手)가 발동되었다.
백마소령수는 마교의 여러 가지 절기 중 상위 서열 오십 위 권 안에 드는 무서운 무공이었다.
특히 지독한 음공(陰功)을 기본으로 하기에 한 번 격중 당한 사람은 심맥뿐 아니라 장기가 모두 음기에 침습당해 지독한 고통 속에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무공이었다.
초풍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비록 암영이 펼치려는 무공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암영은 초풍영을 보며 예의 듣기 거북한 소리를 토해냈다.
“영광으로 생각해도 좋을 거야. 본교의 무공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야.”
쉬익!
순간 초풍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암영의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강호에서 교(敎)라는 말을 쓰는 문파 중에 이렇게 강력한 절기를 보유하고 있는 곳은 오직 한 군데밖에 없다. 그렇다면.........?’
마교밖에 없었다. 그 이외의 어떤 가능성도 생각할 수 없었다.
초풍영은 속전속결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이들이 마교의 인물이 맞는다면 그냥 이곳에만 있을 수는 없었다.
초풍영의 기도가 바뀌었다. 이제까지의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암영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눈빛이 더욱 신중해졌다.
그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불꽃이 튀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초관염은 그런 초풍영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지기만 해봐라. 네놈한테 먹인 영약 모두 토해놓게 만들테니......’
그의 주먹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런 초관염의 염원을 아는지 모르는지 순간 초풍영과 암영이 격돌했다.
거칠게 기파를 뿌리며 짓쳐드는 백마소령수. 반대로 잘 정련된 날카로운 기운을 머금은 채 날아가는 초풍영의 검.
둘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쉬리릭~!
순간 초풍영의 검이 눈부시게 허공에서 변화했다. 용아가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은은하게 변화를 거듭하며 백마소령수의 엄청난 기파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와는 반대로 호아가 날카로운 기운을 뿌리며 용아가 흩트려 놓은 백마소령수의 기운을 파고들었다.
“잔재주를.........”
암영이 눈빛을 싸늘하게 빛내며 백마소령수의 절초를 사용하려했다. 하지만 그 순간 초풍영의 몸이 눈부신 변화를 일으켰다.
암영을 중앙에 두고 그의 아홉 방향을 점유하는 초풍영, 마치 순식간에 그의 몸이 일곱으로 분열된 듯했다. 절정에 이른 칠성보(七星步)였다.
동시에 그의 손에 들린 용아와 호아가 섬전처럼 움직였다. 삼재연혼검(三才燃魂劍)의 첫 번째 초식인 용호연환섬(龍虎連環閃)이었다.
슈우우~!
마치 유성의 비가 내리는 듯한 장관이 펼쳐졌다.
단지 용호연환섬의 공격만으로도 충분히 위력적이었는데 칠성보를 밟으면서 펼치니 공격력이 몇 배가 올라간 것이다.
“아.......!”
암영은 너무나 아름답게 쏟아지는 유성의 비에 자신이 초풍영과 싸우고 있었다는 것을 잊고 망연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망막 가득 채우고 떨어지는 유성의 비.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어 암영의 전신을 덮쳤다.
퍼버버버벅!
망영의 몸이 마치 우박세례를 맞는 것처럼 그렇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어 찾아온 잠시간의 정적.
문득 암영이 입을 열었다.
“뭐지? 이 초식은..........”
초풍영은 자신이 만들어낸 뜻밖의 결과를 보며 잠시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사실 이 초식은 그가 신황과 싸운 후에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던 공격법이었다. 그는 단순히 사부가 전해준 검법만 쓰는 게 아니라 섞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 칠성검진(七星劍陣)의 근간이 되는 칠성보를 섞어 쓰면 어떨까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것이 삼재연혼검과 최적의 조합을 이루며 엄청난 공격력을 자랑한 것이다.
초풍영은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말했다.
“용호연환섬(龍虎連環閃).”
“용과 호랑이의...........”
암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미 그의 심장은 기능을 멈추고 있었다.
“이게 정말 내가 펼친 무공인가?”
초풍영은 망연히 중얼거렸다. 도저히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때 초관염의 외침이 귓가에 들렸다.
“겨우 한 놈 죽여 놓고 감상에 젖어 있을 셈이냐? 밖에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어서 그들을 구하거라. 이놈아!”
그의 말이 초풍영을 현실의 세계로 돌려놨다.
‘그래! 일단은 이들을 물리치는 것이 우선이다.’
초풍영은 무공에 대한 생각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우선은 이 환란(患亂)을 무사히 넘기는 것이 급선무였다.
밖에서 소란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서문령의 태도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무이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고, 서문령은 그런 무이의 머리를 만져주고 있었다.
무이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무척이나 불안한 모습이었지만 워낙 서문령의 표정에 변화가 없어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금아현은 자신의 무릎 위에 도 한 자루를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지만 그녀의 모습에서는 왠지 범접하지 못할 박력이 풍겼다.
오랜 시간 팽가의 안주인으로써 숱한 역경과 고초를 격어온 그녀들이다.
단지 사태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고 해서 호들갑을 떤다거나 마음이 흔들리기에는 그녀들의 수양이 너무 깊었다.
이런 환란에 마음이 흔들린다면 팽가의 안주인으로서 자격이 없었다.
드르륵~!
문득 방 문이 열렸다. 그러나 서문령과 금아현 그 누구도 문쪽에 시선을 돌리는 사람은 없었다.
방 문이 열리고 안에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관주희와 흑월령 두 명이었다.
관주희는 자신이 들어왔음에도 시선조차 주지 않는 서문령과 금아현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이 빌어먹을 가문의 안주인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었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투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맺혀있었다.
지난 세월 강탈당하듯 이곳으로 시집와 기 한 번 재대로 펴지 못하고 산 세월이 수십 년이다.
자신이 그렇게 살 동안 서문령과 금아현은 팽가의 안주인으로 영광된 길을 달려왔다.
전대가주의 안주인, 그러니까 서문령의 시어머니에 밀려 음지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녀와는 대조되는 삶이다.
그래서 평소에 그녀들을 바라보는 관주희의 시선에는 시샘이 가득했었다.
서문령은 관주희의 말과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이의 머리에 예쁜 끈을 매달아 주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그녀는 무이의 엉덩이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다 끝났다. 내 강아지!”
무이를 돌려세워놓고 얼굴을 보는 서문령의 표정엔 인자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끝까지 관주희를 무시한 채 무이의 옷차림에 이상이 없는지 다 살펴보고 나서야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구나! 벌써 이렇게 예쁘니 커서는 얼마나 이쁠꼬~!”
“.......할머니!”
옆에서 관주희가 도끼눈을 치켜뜨고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부담스러워 무이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하지만 서문령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무이만 보이는 듯했다.
그 모습에 관주희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흥! 방자한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른 것이 없구나.
넌 팽가에 들어온 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나를 어머니 대접한 적이 없었지. 하지만 오늘 너는 그런 자신을 후회해야 할 것이다.”
스윽!
그제야 서문령이 돌아앉았다. 그녀는 관주희를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어머님.”
“어머님? 흥! 네가 언제부터 나를 그리 불렀느냐?”
“전 항상 그렇게 불렀습니다.
저를 피한 것은 어머님이었고요. 화소청에 칩거하신다면서 얼굴을 보여주지 않던 분도 어머님이었습니다.”
여전히 서문령의 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녀의 음성엔 한줄기 힘이 실려 있었다.
서문령의 말에 관주희는 일시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흥! 예나 지금이나 말솜씨 하나는 알아줘야겠구나. 그 아이가 이번에 새로 들어왔다는 아이냐?”
“그렇습니다. 제 손녀입니다.”
서문령은 무이를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관주희 표정은 더욱 굳었다. 지금 서문령의 모습은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관주희의 몸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늘을 기점으로 팽가의 주인은 바뀐다. 이제 너희들도 더 이상 이곳의 안주인이 아니다. 그러니..........”
순간 그녀의 말을 끊으며 서문령이 단호히 말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팽가의 안주인은 저입니다. 그리고 다음 대의 안주인은 제 며느리입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넌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그냥 자기들끼리 노는 소리로 들리느냐?
이미 너희를 보호해주는 무인들은 거의 무너졌다. 이제 너희들에게 남은 희망이란 없다.”
“그런가요?”
너무나 담담한 서문령의 말에 관주희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이런 거대세가의 안주인은 따로 정해져 있단 말인가? 어찌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너무나 당당한 서문령의 태도에 가슴속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자격지심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누가 말로 너를 당하겠느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그 아이를 넘겨라. 그러면 아이만은 살려주겠다.”
관주희의 눈은 무이를 보고 있었다.
구김살 없이 자란 무이를 보는 관주희의 눈에는 독기가 흐르고 있었다. 무이가 서문령의 품에 안긴 모습만 봐도 가슴속에 열불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예전 그녀의 아들이 태어나 눈치를 보며 자란 것과는 너무나 대조가 되지 않는가! 그녀는 이것은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관주희의 협박에도 서문령은 별 동요 없이 말을 이었다.
“이 아이는 내 손녀입니다. 누구한테도 보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의 백부가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네가 그 아이의 백부를 믿고 그리 방자하게 구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가 돌아올 때쯤에는 모든 상황이 끝났을 것이다.
너와 잘난 네 며느리는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을 것이고, 이 아이를 인질로 삼고 있는 다면 그도 더 이상 어쩌지 못할 것이다.”
철저히 뒤틀려 있는 그녀의 말에 서문령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했다.
“휴~~! 어찌 그렇게 뒤틀리셨습니까? 비록 정식부인은 아니었지만 어머님 역시 팽가의 식구가 분명할진데..........”
“팽가의 식구? 흥! 난 한 번도 내가 팽가의 식구라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내가 어찌 팽가의 식구란 말이냐? 나의 가문을 습격해 멸망시키고 날 전리품인양 강탈해서 데려온 사람이 바로 네 시아버지인 팽사용이다.
그날 날 자신의 노리개로 생각하고 그저 승리에 따르는 부산물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데 내가 팽가의 식구라고? 내가 어찌 팽가의 식구가 된단 말이냐? 이곳은 나에게 원수의 땅이다. 난 팽가의 식구이기를 거부한다.”
관주희가 마침내 절규를 하듯 말을 토해냈다.
예전 정사연합군이 마교를 소탕할 때 그 당시 팽가의 가주인 팽사용은 팽가의 식구들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마교의 근거지로 소문난 한 장원을 습격했다. 그 당시 장원에 있던 인원은 모두 이벽여 명, 그들 대부분이 팽가에 의해서 목숨을 잃어야 했다.
관주희는 그곳에서 발견 되었다. 그녀가 함구하는 바람에 정확한 신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후환을 없애기 위해 모두가 그녀의 목을 쳐야한다고 주장할 때 나선 사람이 바로 팽사용이었다.
팽사용은 아직은 어리지만 발군의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의 외모에 마음을 뺏겨 그녀를 두둔하고 보호했다.
그리고 그녀를 팽가로 데려와 자신의 후첩으로 삼았다. 비록 일부에서 비난을 했지만 당대의 고수로 통하는 팽사용에게 감히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관주희의 팽가 생활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비록 그녀의 정확한 신분은 몰랐지만 한낱 고아에 불과한 그녀를 제대로 대해주는 식구도 없었고,
팽사용 또한 처음에만 그녀의 육체에 열을 올리다 곧 흥미를 잃었는지 발길을 끊었다.
그렇게 시작된 팽가에서의 삶이었다. 그녀는 한시도 팽사용에 대한 원한을 잊어본 적이 없다. 이제까지 함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바로 그 장원의 소주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이제까지 원수의 우산 밑에 몸을 숨기고 비를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어느 정도 팽만력이 자랐을 때 교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그들이 바로 흑월령들이다. 그들 역시 숨을 곳이 필요했고, 그래서 관주희를 찾은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이다. 부모를 죽인 원수의 품에 안겨 열락의 신음을 흘리며 목숨을 연명하고, 그의 자식을 키우며 한을 곱씹으며 살아온 세월이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살아온 세월이다.
자신의 아들인 팽만력을 키우면서 팽가의 장로들을 포섭하고, 이제까지 팽가를 자신의 손에 넣는 그 순간을 바라보고 살아왔다.
그렇게 수십 년을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바라보고 살아왔고, 오늘의 기회를 잡았다. 그녀는 결코 오늘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관주희가 차갑게 말을 이었다.
“이 모든 것이 팽사용이 자초한 것이다. 만유의 어미인 하옥지 그년도 나처럼 팽사용이 강탈해온 여인이지, 자신의 음심을 채우기 위해 말이야.
그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시작된 것이야. 그 하나의 음심으로 이렇게 천년 팽가가 이 모양이 된 것이지.
호호호, 정말 꼴좋구나. 이 사실을 안다면 팽사용 그 짐승 같은 인간, 저승에서도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하겠지. 호호호호~!”
그렇게 한참 동안 광소를 터트리던 관주희가 어느 순간 웃음을 딱 멈추고 서문령을 노려보았다.
“이제 그 아이를 내놓아라. 말을 듣지 않는다면 힘으로 제압할 것이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이제까지 뒤에서 말없이 서 있던 흑월령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거친 살기를 뿌리며 서문령 쪽을 향해 다가갔다.
번쩍!
그 순간 그들을 향해 한줄기 빛이 쇄도했다. 그 모습에 흑월령들은 백마소령수를 끌어올려 빛을 막았다.
따다당!
이어 터지는 쇳소리.
어느새 금아현이 도를 뽑아 들고 있었다. 조금 전의 일격은 바로 그녀가 날린 것이다.
이제까지 조용히 눈만 감고 있었던 금아현의 몸에서는 어느새 절제된 기도가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곳부터는 제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감히 네 쥐꼬리만 한 무공으로 막겠다는 말이냐?”
“내 어머님과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관주희의 비아냥거림에 금아현은 차분히 대답했다. 그녀의 음성엔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녀는 일반 여인이 아니다. 이제까지 팽주형이란 팽가의 소가주와 함께 수많은 역경을 헤쳐 온 여걸이다.
그녀는 서문령을 시어머니로 모시고 있고, 무이를 자신의 딸로 생각하고 있다. 당연히 그들을 지킬 사람은 자신이었다.
어머니를 지키고 자식을 지키는 일은 자신의 본분이었으니까.
“오냐! 내 그렇지 않아도 네년 역시 손을 바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관주희는 이성을 거의 잃어버리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녀의 일생에서 팽사용 다음으로 꼴 보기 싫은 두 여인이 사사건건 그녀의 신경을 박박 긁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문에 그녀의 자격지심이 극에 달했다.
“저년을 제압해 너희들 맘대로 해라. 팽가의 안주인의 살맛을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흑월령들의 눈에 음산한 빛이 떠올랐다.
이제까지 본의 아닌 금욕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관주희의 말을 듣자 성욕이 주체를 하지 못하고 끊어올랐기 때문이다.
“클클클~! 팽가의 안주인이라..... 허리가 가늘면서도 엉동이에 살집이 풍만한 것이 힘을 잘 쓰겠군.”
“흐흐흐! 제법 앙칼지게 생겼잖아.”
금아현의 모습에서는 은연중에 고수의 풍모가 풍겼다. 때문에 흑월령들은 감히 그녀를 경시하지 못하고 음란한 말로 먼저 그녀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나 그들이 음란한 말을 뱉으며 다가오고 있음에도 금아현의 얼굴에는 전혀 동요의 빛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반쯤 감겨 있었는데 고개를 바닥을 향해 있어 속내를 알기 힘들었다.
서문령은 그런 금아현을 보며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자신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금아현은 팽가의 안주인들에게만 전해지는 무공인 은하유성도(銀河流星刀)를 극성까지 익히고 있었다.
그런면에서 보면 금아현은 정말 철의 여인이었다. 방대한 팽가의 안살림은 물론 팽주형을 내조하고 자식을 키우고 무공까지 익혔으니 말이다.
여하튼 그렇게 익힌 금아현의 무공은 팽가의 절정고수에 비해 절대 뒤지지 않았다.
쩌어~엉!
그때 격돌이 시작되었다.
흑월령과 금아현이 서로의 절기를 펼쳐낸 것이다.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하여 부딪쳤다. 흑월령은 백마소령수를 펼쳤고, 금아현은 은하유성도의 절기를 펼쳐냈다.
흑월령도 강했지만 금아현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녀는 팽가의 안주인들에게 전해지는 절기를 착실하게 구현해내며 둘의 압박에서 서문령과 무이를 보호하려 애를 썼다.
그들이 격돌하는 여파로 실내의 가구가 부서지고 문이 떨어져 나갔다.서문령은 그 와중에도 무이만은 자신의 뒤에 숨기며 보호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조금만 더 버티거라. 조금만 더 버티면 모든 것이 끝난다. 애미야!’
서문령은 혼자 고분군투하는 금아현을 보며 중얼거렸다.
한편 관주희는 흑월령과 싸우고 있는 금아현을 무시하고 서문령을 향해 다가갔다. 이제 방해할 사람도 없으니 눈엣가시 같은 서문령을 처리하려는 것이다.
“이제 누가 널 보호해줄 수 있을까? 또 누가 있어 구원해줄 석이냐? 오만한년!”
관주희의 입에서는 거친 말이 쏟아져 나왔고, 그녀의 몸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에 따라 서문령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그녀로서는 관주희의 살기를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뒤에는 무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물러서면 이제 겨우 만난 그녀의 손녀는 얼마나 험한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나를 죽이기 전에는 내 손녀의 몸에 절대 손을 댈 수 없을 겁니다.”
그녀가 오영하게 소리쳤다. 그러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관주희가 그녀를 향해 살수를 펼쳤다.
쉬이익!
그녀의 허리에서 채대가 어금니를 드러낸 독사처럼 서문령을 향해 날라왔다. 그러자 서문령은 피하는 것을 포기하고 무이를 감싸 안으며 보호했다.
서문령의 눈은 질끈 감겨져 있었다. 그녀는 무이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줬다. 자신이 죽더라도 무이의 몸에는 털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녀의 의지였다.
그렇게 꼼짝없이 죽게 될 순간 무이가 갑자기 서문령의 손을 빠져 나가며 채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무이야!”
서문령이 놀라 소리쳤으나 이미 무이는 저만치 달려간 후였다.
쉬이익!
순간 무이의 허리에서 눈부시게 도가 출수됐다.
파~앙!
채대와 도가 부딪치며 공기가 울렸다.
“흑!”
무이의 입에서 거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할머니를 보호하기 위해서 신황에게 전수받은 자령도법을 펼쳤지만 현실적으로 그녀가 관주희를 당해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초식은 둘째 치고 겨우 반 갑자의 내공으로는 관주희에게 턱도 없는 것이다.
한 번의 격돌로 손바닥이 아파서 눈물까지 나려했다. 그러나 무이는 눈물을 꾹 참고 앞을 바라봤다.
“안 된다! 애야. 어서 이리 오거라.”
서문령이 놀라 소리쳤지만 무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할머니를 지킬 거예요. 절대 안 물러설 거에요.”
“무이야!”
서문령의 말에도 무이는 오직 관주희만을 노려보며 도를 두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비록 어설픈 자세지만 그 의지가 전해져 온다. 때문에 서문령의 눈가에는 한 방울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무이의 뒤에 나란히 서며 말했다.
“그래! 죽더라도 같이 죽자꾸나. 착한 내 새끼!”
“할머니!”
죽음도 초월한 듯 끈끈한 두 사람의 모습에 관주희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꼬였던 심기가 더욱 꼬인 것이다.
“오냐, 한번에 죽여주마. 할미고 손녀고 말이다.”
그녀의 화가 폭발하면서 채대가 무이를 향해 날아왔다. 그러자 무이도 자령일섬의 초식을 펼쳤다. 신황이 전수해준 자령도법의 일 초식이었다.
비록 어설프긴 했지만 무이는 착실하게 자령일섬의 초식을 구현해냈다. 도에 기세도 실리고 힘도 제법 실릴 정도로 착실한 공격,
하지만 상대는 관주희였다. 무이보다 최소 열 배는 더 오래 살았고 그만큼 무공도 강한 여인이었다.
더구나 그녀의 손에는 사정 따위는 전혀 없어 그 기세가 무척이나 사나웠다.
퍼어억~!
“캬아악!”
무이는 그만 관주희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겨나가 버렸다. 관주희는 무이가 어린아이라고 결코 바주는 법이 없었다. 그녀는 채대를 더욱 거세게 휘둘렀다.
“무이야!”
무이가 채대에 당하게 되자 서문령이 급히 무이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관주희의 채대가 서문령의 등을 격타했다.
촤아악~!
“흡!”
등에서느껴지는 불같은 통증에 서문령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참아내려 했다.
“할머니!”
무이가 서문령의 몸을 통해 전달되는 충격에 크게 소리쳤다. 무이는 자신의 몸으로 서문령을 가리켜 했지만 서문령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할머니! 이러지 마세요. 내가 맞을게. 대신 내가 맞을게. 할머니!”
무이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서문령은 흐릿한 웃음을 지을 뿐, 더욱 무이를 꼭 껴안았다.
짜아악! 짜아악!
다시 서문령의 등 위로 관주희의 채대가 작렬했다. 그때마다 서문령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관주희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리며 서문령의 등에 채대를 날렸다.
“호호호~ 죽어랏! 너희 팽가 놈들을 증오한다. 원망을 하려면 네 시아비나 원망해라. 모두 그 인간이 뿌린 업보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광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서문령이 한 번에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
녀는 서문령이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길 원했다. 그래서 채대에 힘을 절묘하게 조절해 서문령을 때렸다.
“할며니! 이러면 안 돼. 정말 죽는단 말이야. 우와아앙! 할머니.”
무이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무이는 그 작은 몸으로 서문령을 감싸 안으려 했지만 서문령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통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 트리면서도 무이의 손발이 행여 밖으로 나갈까 살폈다.
무이의 얼굴에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됐다.
한편 금아현은 무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아무리 냉정을 유지하려해도 자신의 시어머니와 무이가 당하는 소리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잔뜩 밀리던 그녀의 몸은 더욱 수세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흑월령들은 입가에 어린 음소가 더욱 짙어졌다.
“클클클! 어린 년. 이제 포기하거라. 네 어미도 이젠 죽은 목숨인데 무얼 그리 발악하느냐.”
“그냥 우리에게 몸 보시나 하거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그들의 조롱에 금아현은 손발이 더욱 어지러워졌다.
그녀는 결국 이를 악물며 서문령 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는 기꺼이 팔 한쪽이라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우와아앙~! 할머니.”
그때 무이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관주희의 관기에 찬 목소리도 들렸다.
“오냐! 네 할미와 함께 네년도 같이 저세상으로 보내주마. 시끄러운 년!”
이미 관주희의 머릿속에는 무이를 인질로 잡아 신황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 따위는 저 멀리 날아가고 없었다.
이성이 사라진 것이다. 그녀는 예전 그녀가 당했던 치욕을 갚는다는 생각에 주체 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채대에 맞아 서문령의 몸이 점점 오그라들수록 그에 비례해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광기도 더욱 짙어졌다.
“백부님~! 배...액...부...우...님!”
마침내 무이가 신황을 찾았다. 그녀의 서러운 목소리는 공기를 타고 팽가 구석구석으로 울려 퍼졌다.
무이는 그렇게 목 놓아 신황을 찾았다.
그러자 관주희가 더욱 거세게 손목을 움직이며 싸늘하게 말했다.
“네년 백부는 지금쯤 엉뚱한 데서 힘을 쓰고 있을 것이다. 소용없다. 꼬마 계집년아!”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쳤다.
“우와아앙! 할머니가 죽는단 말이야. 백부님.....! 설아야.....!”
너무나 서러운 무이의 울음소리. 관주희의 안색이 싹 변했다.
“오냐! 이젠 더 이상 시끄러워서 봐줄 수 없구나. 영원히 그 입을 다물게 해주마.”
이제 더 이상 참을수 없는지 관주희의 손에 공력이 집중됐다. 마치 창처럼 꼿꼿이 서는 그녀의 채대. 그녀는 그것을 망설임 없이 서문령의 등 뒤로 날렸다.
이대로 날리면 서문령과 무이, 둘다 마치 꼬치처럼 꿰이고 말 것이다.
무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마지막 힘을 모아 소리쳤다.
“백부니.....임! 설아야....!”
촤~앙!
위기의 순간 무언가 창문을 뚫고 하얀 물체가 섬전처럼 날아왔다. 하얀 물체는 바로 관주희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돌진했다.
관주희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감히!”
그녀는 서문령과 무이를 찔러가던 채대를 회수해 하얀 물체를 쳐갔다.
하지만 그 순간 하얀 물체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녀의 채대를 밟고 도약하더니 그대로 관주희희 얼굴을 향해 궤도를 바꿨다.
그것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급박하게 일어나 관주희가 어찌 반응할 틈도 없었다.
촤아악~!
“끼야아악!”
순간 하얀 물체가 관주희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면서 그녀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채대를 놓고 자신의 얼굴을 감싼 채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관주희,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선혈이 철철 흐르고 있었다.
크르르~!
순간 관주희의 얼굴을 스쳐지나갔던 하얀 물체가 바닥에 내려 앉으며 나직한 울음을 토해냈다.
눈물로 얼룩진 무이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나직하게 울음을 터트리며 살기를 뿜어내는 하얀 물체는 바로 설아였다.
설아의 앞발은 선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설아야~!”
무이가 설아를 불렀지만 설아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설아의 눈은 관주희를 향해 고정 되어 있었다.
신황이 싸울 때도 살기를 자제하던 설아가 이제 모든 살기를 관주희를 향해 터트리고 있었다.
설아의 친구인 무이가 울고 있다. 무이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그리고 서문령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무이를 안고 있었다.
그것이 설아의 숨겨진 본성을 자극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설아는 자신의 친구를 이렇게 만든 관주희에게 엄청난 살기를 터트리고 있는 것이다.
“이 고양이 새끼가~!”
관주희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에서 손을 떼며 설아를 향해 살기를 터트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설아의 발톱자국이 길게 고랑을 만들고 있었다.
거의 하얀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엄중한 상처, 이것은 평생 낫지 않을 것이다.
“주인님!”
“아가씨!”
흑월령은 이 뜻밖의 사태에 관주희의 안위를 살피려 했다. 그들에게 있어 관주희는 자신들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들리는 스산한 소리가 있었다.
“너희들 목숨이나 걱정해!”
순간 흑월령의 동작이 멈쳤다. 이제까지 아무런 기척도 느기지 못했는데 갑자기 엄청난 존재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순간 무이가 크게 소리쳤다.
“백부님!”
어느새 방안에 들어선 남자, 그는 바로 신황인 것이다.
피투성이로 널브러진 서문령의 모습과 눈과 얼굴이 퉁퉁 부어 있는 채로 눈물을 흘리는 무이의 모습을 보는 신황의 얼굴에 스산한 빛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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