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 삶과 가정과 일터 위에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 말씀을 깊이 받으시고 받으신 은혜만큼 우리 좌우 앞뒷분과 인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이라는 이 단어는 사실 참 고귀하고도 아름다운 단어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랑이라는 표현을 참 흔하게 사용하는 것 같아요.너무 흔하게 사용하다 보니까 때로는 영혼 없이 대답하는 경우도 있죠. 사랑이 남발된다고 할까요? 사랑 사랑 표현은 하지만 아무 의미 없이 선포되어지는 사랑 그래서 단어의 의미와 우리의 삶이 분리되는 어쩌면 이중적 단어가 되지 않는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지, 사랑이라는 이 단어가 정말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말로만 표현하는 사랑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때에 비로소 그 아름다운 가치,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고귀함을 선명하게 드러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특별히 우리가 믿는 복음, 우리가 말하고 전하는 복음이 이 아름다움의 결정체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체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사랑을 친히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사랑을 보이신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 말씀하시면서 서로 사랑해야 된다 그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예수님께서 기준을 제시해 주셨는데, 여러분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따라 해 봅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큰 소리로 따라 합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준을 제시했는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해라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라 고백하는 자라면 주의 명령 앞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이후의 내용을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요한, 특별히 사랑의 사도로 알려졌던 요한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도 이야기하죠. 이 요한이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계명을 수신자들에게 그대로 선포해 주고 있습니다. 23절인데요.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그래서 우리는 사실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고요. 다른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고 있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친이 사랑이 무엇인지 생명으로 보여주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하신 이 계명을 잘 지켜 행함으로 이 사랑의 아름다운 가치가 우리 성도 안에서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는 그러한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이 사랑은 복음의 핵심이자 처음부터 들어왔던 것이며 오늘도 듣고 앞으로도 계속 듣게 될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라는 것이죠. 즉 요한은 지금 새로운 다른 사랑을 이 수신자들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가르쳐 주었던 사랑, 너희들이 이미 알고 있던 그 사랑, 그러나 진정으로 행하지 않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정확하고 아주 선명하게 설명해 주면서 그 사랑의 삶을 실천하며 살도록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1절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내가 지금 새롭게 만들어낸 사랑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과거부터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던 사랑, 지금까지 전해주었던 그 사랑을 내가 다시 한 번 너희에게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선포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오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처음부터 들었던 이 소식이 말뿐이 아닌 삶으로 실제가 되는 사랑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볼 수 있는 본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그냥 말로 표현되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삶의 실체가 되어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성도의 삶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첫 번째는 가인같이 하지 말아야 한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12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이 아이를 죽인 이유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악한 자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록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 그 소속이 매우 중요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아담의 죄로 인하여서 진노의 자녀, 즉 마귀에 속한 자들이었지요. 그런데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심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게 하셨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하여서 예수님께서는 친 육신의 옷을 입고 세상 가운데 오신 것이죠.
죄 없으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친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라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셔서 저와 여러분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하셨다는 거예요. 따라서 이 사실을 믿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더 이상 마귀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이죠.
이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우리가 복음 안에서 사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4장 2절은 말씀합니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오
어떤 영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합니까?
시인하는 영
따라 합시다.
시인하는 영
내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는 그 사실을 시인하는 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이제 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의 옷을 입고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시인하십니까? 시인을 해보세요.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의 옷을 입고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시인하십니까?
또 나를 위해 나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주님의 복된 소식을 믿음으로 고백하십니까?
여러분 이 질문에 아멘으로 고백하셨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더 이상 가인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게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께 속한 자로 주신 계명대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맞죠?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빛이 되어라 너희들이 소금이 되어야 된다고 말씀하지 않고 너희들은 빛이라 너희들은 소금이다. 현재 완료형을 사용하면서 지금 빛된 자가 된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음을 선포해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 더 이상 악한 자에게 속한 자가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음을 시인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의 삶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우리가 사랑의 실제가 되기 위해서 내가 지금 사랑하신 하나님께 속한 사실을 확신하고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제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 교회는 나오고 있지만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닌 여전히 악한 자에게 속해 있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될까요?
우리는 가인의 사례를 통해서 그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4장에 보시면 가인은 악한 자에 속하였기 때문에 예배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벨과 그의 재물은 하나님께서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분명히 가인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예배를 열납하지 않으신 것이죠.
그리고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믿음과 연결시키면서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여러분 예배가 무너진 삶은 어떠한 삶으로 이어졌습니까? 여러분 가인이 하나님께 속한 자로 예배가 승리자가 되었다면 그의 삶은 동생을 죽이는 자리에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그의 삶이 예배가 무너지고 삶의 현장 속에서는 동생을 살인하는 죄의 열매를 맺어가는 인생이 되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속한 자로 살아가면 우리의 예배는 믿음의 예배로 드려지는 예배가 될 것이고, 예배가 온전하게 세워지면 우리의 삶 역시 의로운 삶의 자리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반면에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여전히 구원의 은혜가 없어 악한 자에 속하고 있다면 우리의 예배는요. 믿음의 예배가 될 수 없게 되고요. 예배 후의 삶은 세상의 방법대로 시기와 질투와 미움과 다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인같이 되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로 세 사람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할 때에 우리의 예배도 받으시고 우리의 예배가 잘 형성될 때에 삶 속에서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실제가 되기 위해서 두 번째는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 있어야 된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16절 말씀 같이 읽어보십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러분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된 것은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는 놀라운 사랑의 실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지,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 우리가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 듣고 있는 이 사랑은 말뿐인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가벼운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사망에 있던 우리를 생명으로 옮겨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헌신의 사랑이며 희생의 사랑이 있었다는 거예요. 나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헌신과 희생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경험하며 감사할 때야 비로써 우리도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의 메신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들어가야 나가는 것이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때에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 속의 구현해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우리도 그 사랑을 구현하기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죽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방법을 17절에 기록해 주었습니다.
우리 17절 말씀 같이 읽어보실까요?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제 마음에 들어오는 한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이라는 단어입니다.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마음이 열려 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면 아무리 재물이 없어도 마음이 열려 있기만 한다면 궁핍한 형제를 도와줄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번 선교지 방문을 통해서 교회들을 돌아보며, 두 가지 교회를 통해서 두 교회를 통해서 제가 이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조금 다른 형태이지만 마음 안에는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빵빵 교회 우리가 잘 아는 목사님인데, 이 교회는 2017년 사랑의 종소리 학교 학생들과 함께 우리나라에 방문하셨던 안동 목사님께서 사역하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자신들의 예배 처소가 있어 모여 예배도 드리지만 이들이 더욱더 힘을 내어서 우리도 도시에만 있지 말고 빈민촌에 가서 교회를 세우자 그러한 마음을 먹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자들을 위해 주의 사랑을 나누며 매달 정기적으로 음식을 나누고 복음을 감당하는 그러한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먼저 안동 목사님이 계시는 빵빵과 교회에 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나누게 되었고, 이어 새로 건물을 지은 빈민 지역의 트라이시클을 타고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제가 이렇게 주변을 아주 자세히 살펴보았어요. 골목 골목 참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것이 보여졌습니다.
그리고 참 아이들이 많네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좁은 골목에서 제가 어렸을 때 놀았던 고무줄 놀이, 저도 남자애지만 같이 해봤거든요. 고무줄 놀이를 모여서 하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아이는 뭔가 억울한 일이 있는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엉엉 울면서 지나갑니다. 뒤에 보니까 한 형이 회초리를 들고 있어요. 그러한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친구들은 낮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갈 데가 없어서인지 농구 코트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농구하는 장면들도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빈민가의 열악한 모습이 제 시야 안에 그대로 담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트라이시피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게 되었는데 안동 목사님과 성도들이 함께 세운 건물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건물이 빈민 지역에 세워지게 된 것이죠. 사랑을 전하기 위해 도시에서 그 빈민 지역을 살리기 위해 건물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층짜리 건물을 세워 시불교회다 이름을 하였죠. 1층에서는 예배를 드리고요. 2층에서는 배우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서 유치원을 준비하는 그러한 수고를 현재 하고 있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헌신하는 목사님과 성도님들을 보면서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골목에 들어가기 전 그 대로변에는 이미 번화가가 되었어요. 그래서 그 길에는 맥도날드가 있었고 맥도날드의 CC 하이스쿨 그러니까 고등학생들이 그곳에서 많은 아이들이 모여서 이렇게 음식을 나누는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 골목을 들어가는 초입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정말 으리으리한 대저택들이 쭈르 있었다는 것이죠. 제가 나오면서 보는데 저 차는 무슨 차야 할 정도로 정말 고급지고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그러한 차가 착오에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같은 공간이지만 너무나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죠. 이 모습을 보면서 먼저는 부유하다고 다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안동 목사님과 성도님들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시내에 있지만 그 현장에 뛰어들 수 있는 그러한 사역을 감당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분명 나누는 삶을 살겠지만 여러분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없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의 나눔이 아니라는 것이죠. 세상의 구제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교회는 수비 교회였습니다. 알드린 목사님 부부께서 함께 사역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2018년 시내에서 개척하여서 사역을 하다가 팬데믹을 맞으면서 시골로 시골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고구마 밭에 새롭게 개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모아 예배를 드립니다. 저희도 차 타고 한참을 들어가다 보니 어느덧 주변은 밭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밭으로 형성된 그 지역에 야 이런 곳에 무슨 교회가 있을까 할 정도의 자리에 한 교회가 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분들의 사역을 들어보니 주중에는 매일 새벽 예배를 드리고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가정 방문 심방을 합니다. 또한 2개의 공립학교에 들어가면서 종교 과목 시간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특별한 사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 공간을 활용해서 20여 명 이상의 형제 자매들이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주중에는 돌봄 사역이 불안해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매주 토요일이 되면 학생 청년들이 그 자리에 모여서 찬양 연습을 합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기 위한 찬양 연습을 하고 청소뿐만 아니라 전도 활동을 하면서 귀한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의 돌봄 사역이었습니다. 사실 여러분 아이들을 돌본다는 것은 무엇이 필요한 거예요? 재정이 필요하잖아요. 반드시 운영해야 될 재정이 필요한데 어떻게 운영이 되는가 들어보았더니 원래 이 목사님 부부는요. 신의 집이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가지고 소유한 집 거기에서 살 수도 있는데 그것을 월세로 내어주고 월세를 받으면서 그 월세를 이 아이들에게 섬기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죠.
사실 이들은 부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부유함을 누리고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고 조건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만 그 삶을 포기하고 영혼을 세우는 사역에 매진하고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부유함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마음껏 헌신하는 정말 멋진 사역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속에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두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은 물질의 유무가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라는 것이죠.
여러분 탈무드에 나온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들어보시면 바로 아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결혼을 해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살았고요. 동생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독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 형제는 농부였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형제들에게 동일하게 밭을 나누어 주게 됩니다. 그리고 두 형제는 열심히 농사를 짓고 수확하는 철이 되어 수확을 하죠. 수확한 곡식을 형제가 서로 잘 나누어서 각자 곡간에 채워 넣게 됩니다.
그날 밤이었습니다. 아우는 곰곰히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형은 아내도 있고 자식들도 있으니 곡식이 더 많이 필요하겠구나 내 몫을 조금 갖다 주어야겠다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곳간에 있는 것을 들어 형의 곡간으로 옮겨놓기 시작합니다.
그날 밤 형도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있으니 노후에는 부양받을 수 있지만 아우는 독신으로 사니 노후에 이 필요한 것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러니 그가 좀 차곡차곡 잘 쌓아놓을 수 있도록 내 곳간에 있는 것들을 나누어 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형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자신의 곳간에 있는 것을 들어서 아우 곡간에 채워넣기 시작합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곡간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죠. 왜냐하면 이전에 내가 옮기기 전에 모습과 동일했기 때문인 것이죠. 이 형제가 자신의 곡식을 상대방의 곳간에 가져다 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형을 향한 사랑의 마음, 동생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실제로 움직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이처럼 행함으로 옮기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공연해 줍니다. 18절 말씀 읽어보실까요?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심함으로 하자.
여러분 참된 사랑은요. 말뿐인 사랑이 아니라는 거예요.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제로 행함으로 나타낼 때에 참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내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잘했다 칭찬하실 만한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법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형제 가운데로 자매 가운데로 흘러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나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는가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겠고, 그리고 내 안에 아직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 안에 예수 생명이 채워지게 해 주십시오. 이 생명을 가지고 나와 더불어 이웃과 함께 더불어 사는 거룩한 성도의 삶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러한 축복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번 선교지 방문을 통해서 많은 분들이 섬겨주셨어요.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그 사랑이 저희 교육자들에게 흘러들어왔어요. 그런데 우리 안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귀하게 섬기시는 현지 목사님과 교회에 헌금할 수 있는 은혜가 있었고, 또한 약 150여 명의 아이들에게 정말로 귀한 선물을 포장해서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랑의 교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우리를 통해서 부어주신 그 사랑이 그들에게 흘러갔던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여러분 우리는 그곳에 가서 그들이 전하는 사랑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준비해서 우리를 환대하고 마주해 주었던가 우리가 교회의 대표로 갔지만 우리 교회를 향한 마음이 그들 안에 정말 가득하구나라는 것을 보면서 사실은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그러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삶의 현장 속에서 이 사랑이 훈훈하게 세상 가운데로 전해지는 특별히 12월 성탄의 계절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