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지스터라디오
김하임
“집에 라디오 있는 사람?”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지방으로 전학 가서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날은 학교에서 가정조사를 한 것 같다. 선생님의 질문은 “지붕이 초가인 사람? 기와인 사람? 헌 교과서 받은 사람?” 등등. 80여 명 되는 아이들이 수시로 손을 들었다 내렸다 했다. 지금처럼 교과서가 무상 배급이 아니었고, 책을 보자기에 싸서 허리나 어깨에 묶고 다니는 모습이 많았다.
우리집에는 라디오가 있었다. 훨씬 작은 손바닥만 한 트랜지스터라디오도 있었다. 두 개의 라디오에서는 종일 소리가 들렸다. 트랜지스터라디오는 아버지의 지체였다. 꽃을 좋아하시던 아버지가 심어 놓은 것을 보러 마당에 나갈 때나 세수하러 갈 때도 꼭 들고 다녔다. 소니 트랜지스터라디오는 방송국 기관장이던 아버지 손에 늘 들려 있었고 그건 마치 영화 속 첩보원들이 중요한 정보를 몸에 박은 칩과 다를 바 없었다.
아버지의 긴 대학앨범 사진에는 “1937년 졸업기념” 이란 문구가 있다. 졸업하고 동아일보에 취직됐다. 민족의 신문이라고 불리던 동아일보가 일제에 의해 폐간된 후 KBS로 이직하였다. 지금의 한국방송공사로 그때는 우리나라 유일한 방송국이었다. 지금처럼 공영방송과 민간 방송이 많고 인터넷 방송과 TV가 있는 4차원을 향해 살아가는 어린 세대에게는 호랑이가 담배 피우는 것처럼 낯 설은 얘기다. 아버지는 방송을 오관이나 전신으로 듣는 듯하다. 밤에 코 고는 소리가 들려 가만히 소리를 줄이면 금세 눈을 뜨시고 볼륨을 높였다. 라디오를 통해 대통령의 목소리가 나오고 음악, 오락프로그램을 들었다. 모두는 전파를 타고 나오는 즉시 사라지는 소리를 전해주는 매체였고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중요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끝난 60년대의 상황은 그럴싸한 유혹으로 자주 아버지에게 정치로 들어설 것을 권유했다. 그것은 애당초 아버지와 맞지 않는다. 사슴같이 큰 눈을 가진 선한 아버지의 삶의 척도는 그들과 달랐다. 그 시대의 정치적 혼탁이 정화될 날이 올 것이라는 신념이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나 신경 쓰이고 힘들었는지 혈압이 올라가고 안면 마비까지 왔다. 정치 대신 아버지는 전근 가는 방송국마다 과실수와 꽃을 심었다. 그가 떠나고 훗날 매달리는 열매와 꽃을 보는 이들이 가끔 소식을 전해오는 것을 보면 아버지 삶은 과일나무 같기도 하다. 그분은 가시고 없으나 내게 아버지는 작년에도 피었고 후년에도 피어날 꽃 같은 분이었다.
나라가 가난하고 힘들던 시대에 자신이 먼저 배운 지식과 경험, 방송국에서 먼저 접하게 되는 정보로 앞으로 변화되어가야 하는 세상을 함께 나누고자 했다.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인 것을 중요시하며 배움을 위해 찾아오는 친척이나 젊은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기회를 주려고 애쓰시던 모습을 보고 자랐다.
요즈음도 나는 라디오 프로를 자주 듣는다. 큰 화면의 TV 프로는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아서 재미있고 얼마든지 원하는 프로와 정보를 선택할 수 있어 좋아한다. 하지만 이제는 눈이 쉽게 피곤해지고 한자리에 앉아 시청 시간이 길어지면 다친 허리가 아프다. 무언지 빠른 템포로 쫓기듯 보는 긴박감에 긴장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때 라디오를 켜면 FM 음악 방송과 방송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사람 목소리가 긴 호흡처럼 맥박이 느려지고 편안하다. 이방 저방 들락거리거나 거실에서 마른빨래를 접거나 혹은 주방에서 설거지하며 쳐다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제일 마음에 든다.
어릴 적 전학했던 날, 방송국 꽃밭 앞에서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냈다.
“아버지”
“하림이 왔니?”
그때처럼 날 보고 웃으신다.
‘뭐하러 4학년 되면 언니, 오빠가 있는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했을까. 아버지는 사택 앞마당에 청포도 한 그루를 높이 올리고 조롱박도 심어 놓고 내가 방학하여 내려오기를 기다리셨지.’
서울 생활하다가 부모님이 보고 싶어 공연히 심사가 뒤틀리는 날에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소리 내며 서럽게 울곤 했다. 다시 내려갈 수는 없는데…. 마구마구 후회된다. 그러다가 여름 방학이 되어 기차 타고 내려가면 엄마는 봉숭아 꽃잎에 백반을 조금 넣어 찧어서 손톱에 한가득 얹고 봉숭아 잎으로 감아, 이불 꿰매는 두꺼운 실로 동여매 주었다. 지문이 쪼글쪼글해지고 손끝이 아려 올쯤이면 붉은 꽃물이 손톱에 들었다. 아버지는 조롱박을 따서 속을 파내어 말린 후 저금통을 만들고 반짝거리는 동전을 넣어 내 선물이라며 주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늘 들고 다니던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후에 큰 언니에게 주었다. 대학생이 된 언니는 그것으로 FM 클래식 음악의 광 팬이 되어 아버지처럼 끼고 다니며 음악을 들었다. 여름밤이면 가끔 귀신 나오는 으스스한 납량 드라마를 들려주곤 했다. 아버지는 퇴직하는 날까지 KBS와 평생을 함께하며 아버지의 방식대로 우리나라 역사와 동참했던 세월이다. 어둠 가운데 빛을 비추고 절망 속에 희망을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하던 등대였다. 지금도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마당에서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켜놓은 채 내게 무엇인가 일러주시던 모습이 센서 달린 영상처럼 저절로 그 속으로 데려간다.
“아버지, 참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