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떡
“오늘 밤, 폭설입니다.”
일기예보가 끝나자마자 나는 밖으로 나가 내 몸집보다 큰 방수 천막을 꺼낸다. 사방 귀퉁이 구멍에 묶인 줄을 확인하고 한쪽은 대문 구멍에, 다른 한 줄은 개집 지붕 끝에 묶는다. 나머지 두 가닥은 천막을 편 채 현관까지 어렵게 끌고 올라와 현관문 가까이 있는 난간에 고정시킨다. 완벽한 텐트가 운동회날 햇빛 가리개 휘장 같다. 건넛집 현철 엄마가 창문으로 내다보고 웃는다.
“오늘 밤 폭설이래.”
몇 년째 연례행사처럼 치르는 내 의식이 웃기나 보다.
우리 집 현관으로 오르는 여섯 개의 계단이 나에겐 공포다. 거기에서 미끄러지면 황천길이다. 그게 무서워 층계용 매트도 깔아 보고 큰 우산으로 가려도 봤으나 모두 못마땅하다. 그러다가 궁리한 것이 천막이다. 밤새 눈이 내려도 그 위에 소복하게 쌓이니 밑은 안전지대다. 아침에 일어나 난간 줄을 풀고 털어내면 층계가 뽀송뽀송하다. 대문 밑으로 넣어준 신문도 집어오고 택배 온 상자도 가져온다. 활동 범위에 구애받지 않으니 불편을 면할 수 있다. 이제는 눈이 내린다고 좋아서 강아지처럼 뛰쳐나가던 소녀도 없고, 첫눈 오는 날, 의미를 만들어 약속 없이 쏘다니던 낭만도 온데간데없다. 그렇게 좋아하던 눈이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다.
공포로 나를 옥죄는 게 또 있다. 찰떡이다. 아니 먹음직한 인절미다. 찹쌀을 시루에 쪄서 떡판에 쏟아놓고 가까이 사는 친척 오빠가 와서 장단 맞춰 내리치던 그 쫀득쫀득한 찰밥 덩어리, 엄마와 할머니는 물대접을 하나씩 놓고 연신 물을 발라 찰밥이 떡판에 붙지 않게 손을 움직이는데 마치 춤추는 것 같다. 어린 눈에 엄마와 할머니가 방망이 세례를 피하는 그 동작이 신기했다.
판판하고 곱게 찰밥이 으깨지면 그때부터 두 분이 물을 발라가며 적당하게 펴서 인절미 형태로 썰어 콩가루 담긴 그릇에 넣고 버무린다. 엄마는 그것을 보기 좋게 다독여서 목판에 차곡차곡 담는다. 그 콩가루 묻힌 인절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오며 가며 한 개씩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 “아직 아버지도 안 잡수셨는데...”하고 은근히 말리던 엄마 생각이 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떡집 앞에 진열된 인절미를 보면 침을 꼴깍 삼킨다. 쫀득한 식감, 고소한 콩가루 맛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잘 맞아떨어지는 순간들을 우리는 찰떡같다고 한다. 그 말속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서로 다른 재료가 만나 완벽한 맛을 내는 인절미처럼 조화롭게 잘 맞는 것을 찰떡궁합, 찰떡 우정, 찰떡같은 사랑이라 하는 것도 어울리는 표현이다. 고단한 삶을 살면서 그런 조화를 꿈꾸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까. 쫀득쫀득한 식감 속에 숨어 있는 결속의 아름다움, 서로 다른 것이 만나 하나가 되는 기쁨과 희망으로 우리는 살고 있다.
이렇게 행복의 상징인 찰떡이 그림의 떡이 되고 말았다. 나와 가까운 지인이 무심하게 한 얘기가 가슴에 머물러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난 맏며느리가 아닌데도 시부모님과 살았어요. 둘이 학교 교사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올라와 우리를 도와주셨죠.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돌어가신 거예요. 소동이 났었죠. 친척 애가 놀러 오면서 찰떡을 사 왔는데 그걸 잡수시다가 목에 걸려 병원에 갔지만 이미 늦어서 가셨어요. 아직도 슬픔이 가시지 않아요.”
찰떡에 대한 거부감이 그때 생기고 말았다. 고소하고 꿀맛이던 음식이 공포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슬픈 사건이다. 이것이 나이를 더하면서 겪게 되는 복잡한 감정인가 보다. 노인이 되고 보니 상반된 의미를 갖게 된 엉뚱한 사건들이 나를 지배한다.
겨울은 동화 속 계절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수록 슬프다. 추위와 함께 따르는 빙판길이 무섭고 감기가 걱정되고 혈압이 염려된다. 10년 넘게 계속하던 새벽 체조도 그래서 끊었다.
찰떡같이 맞아떨어지는 순간들, 그것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거부하는 내가 되고 말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런 복잡한 감정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균형을 찾는 것인가 보다.
오늘도 난 떡집 앞을 지나면서 먹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 속에 숨겨진 위험이 나를 먼저 말린다. 그림의 떡이 되어버린 인절미, 아쉬운 마음으로 슬쩍 보기만 하고 지나치는 내가 나같지 않다.
(2024.6.18)
첫댓글 찰떡에 얽힌 안타까운 스토리가 너무 슬프기도 합니다. 저는 인절미를 지금도 가끔 먹습니다. 아마도 위장 소화력이 좋다고 스스로 믿는 이유가 30 년 가까이 아침식사를 해 온 것 땜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림의 떡" 에세이 타이틀이 눈길을 끕니다. 엄 안젤라 선생님^^ 잘 읽었어요.
안젤라 선생님,
낭만적인 눈의 추억을 애써 외면하고 피할 수밖에 없는 선생님의 마음이 헤아려지네요.
어린 시절, 콩가루에 묻힌 인절미의 고소함이 그대로 전해집니다. 정겹고 그리운 추억이지요. 한때는 좋았던 것들이 '그림의 떡'이 되었으니 안타깝네요. 저도 선생님의 마음 충분히 공감하며 재미있게 잘 감상했어요. 감사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런 복잡한 감정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균형을 찾는 것인가 보다. - 엄희자 선생님 말씀에 많이 공감합니다. 그 속에서 선생님의 삶의 지혜로움이 그리고 귀여운(?) 소녀감성이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