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송배 시인이 만난 문인 . 33
하서 김시철 시인
하서(河書) 김시철(金時哲) 선생은 지금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재산3리 923의 12번지에 [공심산방(空心山房)]이란 아담한 전원주택에서 칩거(蟄居)하고 있다. ‘산방(山房)에서 홀로 느끼며 다스리는 고독과 적막감은, 모름지기 세월의 흐름만으로는 지워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이 즈음에서 터득하며 살고 있다. 인간이란 원래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만의 시공(時空)과 고독을 적당히 즐기면서 살아가는 동물이 아니던가’ 라고 그의 열두 번째 시집『강원도 부자』(글나무 발행) ‘책머리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시공과 고독’을 동시에 향유(享有)하는 자연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가 한국문협 부이사장으로 재임할 당시 문협 4인방(김시철 황 명 성춘복 오학영) 시절에 대학로 예총회관에서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1930년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났으니까 올해로 83세가 되지만, 그의 훤칠한 키와 신사풍의 외모에서 풍기는 지성미와 인간미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다감한 원로 시인이며 아직도 집필활동은 물론 평창에서 ‘평창문예대학’을 운영하면서 후진들 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한 치의 넉넉함도 긁어내고 / 실낱 같은 직감으로 날이 섰다 // 모두들 그렇단다 // 살기를 잃은 것으로 메워내고 / 섬뜩한 것만 얻어들인 / 일생 // 어디 한 구석 / 피볼 것도 / 구부릴 곳도 없는 너는 // 참으로 부러질 일만 남았구나
그가 이번에 상재한 열여섯 번째 시집『남의 밥그릇』(시문학사 발행)에 ‘서시(序詩)’로 수록되었으며 시집『강원도 부자』에서 이미 발표 하였던 「자화상」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날이 선 ‘직감’으로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1956년 김광섭 시인에 의해서 문단에 등단한다. 그는 ‘살기를 잃은 것으로 메워내고 / 섬뜩한 것만 얻어들인 / 일생’이라는 어조(語調)로 자신을 긍정하고 자신을 평가하고 있다.
그는 1. 4후퇴때 월남해서 환도후(還都後) 신문사와 잡지사 기자를 거쳐서 1957년부터 60년, 4. 19직후까지 김광섭 발행, 김 송 주간의 월간문학지『자유문학』편집장을 역임하고 대한출판문화협회 홍보부장으로 취임하여 『출판문화』를 창간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시인협회 창립멤버로(유치환 조지훈 장만영 신석초 박목월 시인으로 회장이 이어졌음) 참여했으며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과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에도 한국펜, 한국문협과 현대시협에서 고문을 맡고 있다. 또한 그는 한국낚시진흥회장 권한대행도 맡아서 그의 취미생활인 낚시문화에 기여하면서 낚시관계 저서 『조우수첩(釣友手帖)』등을 발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단 60년의 긴 시간을 통해서 문단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창작활동에도 매진하여 시집『임금(林檎)』을 비롯해서『남의 밥그릇』까지 16권의 시집을 간행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창작과 문단의 공로를 인정받아서 한국문학상(1977), 한국문화예술대상(1989), 서울시 문화상(문학부문. 1992), 청마문학상(2011) 등을 수상하는 영광이 뒤따랐다.
그는 칼럽집과 수상집도 다수 간행했지만, 『자유문학』의 편집장으로 재직하면서 많은 문인들과 교유(交遊)하게 되는데 이때 만난 문인들을 재조명하여 당시의 일화나 문단의 분위기를 전하는 ‘문단인물기’ 『김시철이 만난 그 때 그 사람들』을 4권이나 간행하여 우리 문단뿐만 아니라, 독서계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이는 ‘시문학사’에서 간행했는데 ‘1950년대 전후, 한국문단의 중심에서 활동하다가 고인(故人)이 된 이글의 문단인물기『김시철이 만난 그 때 그 사람들』(1)(2)(3)(4)권은 한국 문단을 조명하는데 귀중한 역사적 사료(史料)로 평가받고 있다. 구수하고 숨김없이 털어놓은 대담한 필치와 내용, 이들의 이면생활에서 당시의 문단 온기(溫氣)를 느끼게 하는 이 글은 그동안 월간『시문학(詩文學)』에 잡지 역사상 유례없이 8년간 연재 되었다’고 간행기를 적어 놓았다.
이 책에서는 김관식에서 황 명(1권), 곽학송에서 최정희(2권), 구혜영에서 정을병(3권), 곽종원에서 황금찬(4권)까지 무려 80명의 문인(생존 문인 : 최현식, 황금찬)들과의 정다운 교유의 일면을 흥미있게 엮어내어서 많은 문인들과 문단의 관심을 집중한 바가 그의 큰 문학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여기에서 박재삼 시인과 원고 청탁을 위해서 원로작가 염상섭 선생의 상도동 자택으로 찾아갔던 일화 한 토막. ‘노환에 시달리고 있는 노대가의 소설 한 편을 얻어내기 위해 이처럼 경쟁을 벌이고 있는『현대문학』의 박재삼과『자유문학』의 김시철의 원고쟁탈전은 이렇듯 당사자의 형편과는 상관없이 서로 무슨 묘책이라도 없나 하고 은근슬쩍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하지만 기완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박재삼에게 선수(先手)를 빼앗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머리를 스치면서 방법은 좀 야비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를 얼른 따돌려 놓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박재삼 시인을 따돌리고 염상섭 선생이 좋아하는 술병을 사들고 다시 찾아가서 선생의 마지막 단편소설 「해복(解腹)」(1960년 2월호『자유문학』수록)의 원고를 쟁취(?)했던 양대 문학지의 편집장으로서의 일화가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하서 시인과 나는 그가 펜회장으로 재임할 당시 펜클럽 해외심포지엄을 영국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개최하였는데 여기에 참석차 그와 동행했던 일이 있다. 우리 일행은 런던을 거쳐서 에딘버러 대학교 기숙사에 도착했으나 비행기로 부친 가방들이 함께 오지 않아서 양치질이나 옷을 정장으로 바꿔입지 못하는 등의 불편을 겪은 기억이 새롭다.
우리 일행은 심포지엄을 마치고 북구 3국(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을 여행하였다. 핀란드의 울창한 산림에서 심호흡을 가다듬고 투르크에서 실자라인 여객선으로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유람을 했다. 비행기 여행보다 낭만적인 요소가 많아서 선내(船內)에서의 숙식과 쇼핑 그리고 공연 등이 여행객들의 정감을 흡인하고 있었다.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출발한 장거리 버스가 오슬로에 도착할 때까지 북구의 문물과 자연정경을 만끽하는 여행은 하서 회장뿐만 아니라, 동참한 홍윤숙, 장백일 선생 등 원로문인들과의 문학과 인생 교감은 일생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는 이번에 간행한 시집 ‘머리말’에서 ‘이곳 평창에다 둥지 튼지 10년 동안, 열두 권의 저서를 펴내는 셈이다. 하지만 문단생활 60년에 아직도 글이 글답지 못해서, 무척 부끄러운 마음으로 내놓게 되었다. 때마다 일단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도 그러려니와, 나이 들수록 초조해지는 조급함과, 남은 내 삶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감 그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는 겸손으로 우리후배들에게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다.
그는 이 시집과 함께『그때 그 사람들(시인편)』이란 제목으로 강 민, 구 상 시인을 비롯해서 성춘복, 조병화, 허영자, 홍윤숙 시인 등 50명에 대한 인물시를 발간했다. ‘인물시집 제1권에 이어 소설가, 평론가, 수필가, 아동문학가 등등 산문 분야의 문인들도 써나갈 계획이다. 머지않아 제2권도 빛을 보게 될 것이다.’는 서문의 언지대로 우리 문단과 문학사에 영원히 남을 자료로서의 가치를 정리하면서 만년(晩年)의 시간을 동락(同樂)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