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世 諱 珽임정 선조님
자는 聖方성방 호는 치재 또는 호재 이시며, 직계 임수적 선조님의 장자이시다.
[원문 정리와 번역]
晉魏絳謝賜鄭賂樂之半, 諭以如樂無所不諧, 請與子樂之.-壬寅柑賜, 三中.- 任珽
진(晉) 나라 고종(高宗)이 위강(魏絳)에게 정(鄭) 나라에서 보내 온 악기와 악공 절반을 나누어 주고 사례하며 음악이 조화된 것처럼 화합하지 않은 점이 없으니, 그대와 즐기고자 한다고 유시하다.-임인년(1722 경종2) 황감사제(黃柑賜製)에서 삼중(三中)을 맞았다.- 임정(任珽)
※ 위강(魏絳)은 춘추 시대 진 도공(晉悼公) 때의 대부(大夫)로 산융(山戎)과 화친을 성립시켜 중원에 힘을 쏟게 한 뒤 진나라를 제후의 패자(覇者)가 되게 하였다. 이에 정나라에서 보내온 악기(樂器)와 악공(樂工) 절반을 나누어 위강에게 상으로 줌으로써 그 공로에 보답하였다는 고사이다.《春秋左傳 襄公 11年》
※ 柑賜 : 감사(柑賜)의 賜자는 원문에 貝+聿로 되어있어 왼쪽 貝부분은 맞고 오른쪽 聿부분은 틀린 글자입니다. 이는 필사자의 단순 실수로 판단하여 문맥을 살펴 賜자로 바로잡았습니다. 柑賜는 황감사제(黃柑賜製)를 말하는데, 오순절제(五巡節製)의 하나인 황감제(黃柑製)를 말한다.
玉帛交騁, 蔑贊定伯之謨, 金石仍頒, 特蒙宣諭之光. 顧功何有? 與樂同和.
念, 職叨摠戎, 才乏佐國, 發稟貨息民之道, 冀恢伯圖, 用試犯戮僕之辜, 反沾禮食. 須當中華初睦之日, 敢陳外夷先和之語.
예물을 번갈아 보내 초빙하여 관직을 받고도 오패(五伯)를 정하는 계책을 세우는 것은 돕지 못했는데 금석(金石) 같은 법을 그대로 반포하여 특별히 선유(宣諭)하는 영광을 입었으니 공로를 돌아보아 무엇 하겠습니까? 함께 즐기고 화합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총융사(摠戎使)의 직임을 맡아 국사를 보좌하기에는 재주가 부족했으나 창고의 재물을 꺼내 백성을 쉬게 하는 방도를 펼쳐 패도(覇圖)를 확충하기를 바랐고, 한 번 양간(楊干)의 종을 죽이는 잘못을 범했지만 도리어 식록(食祿)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모름지기 중화(中華)가 화목해진 초반에는 외방 오랑캐의 화합을 우선해야 한다는 말을 감히 아룁니다.
※ 창고의 재물을 꺼내……바랐고 : 《동래박의(東萊薄議)》에, 진후가 돌아와서 백성을 안식(安息)시킬 방법을 계획하니, 위강이 은혜를 베풀고 노역을 폐지하여 쌓아둔 재물을 다 풀어 백성에게 대여하고, 진후에서 대부들까지 저축이 있는 자는 그 재물을 다 내놓게 하기를 청하였다.[晉侯歸, 謀所以息民, 魏絳請施舍, 輸積聚以貸, 自公以下, 苟有積者, 盡出之.]는 말이 나온다.
※ 한 번 양간(楊干)의 종을 죽인 잘못을 범했지만 : 《左傳》에 진후의 아우 양간이 곡량에서 군대의 진영을 어지럽히는 행동을 하자 위강이 이를 다스리기 위해 양간 대신 그의 종을 참수하였다.[晉侯之弟楊干, 亂行於曲梁, 魏絳戮其僕.]는 말이 나온다.
【해설】 이것은 과거 답안지입니다. 이 답안지가 지금 전해질 수 있는 것은 이 과거에 합격해서 답안지를 돌려받았기 때문입니다. 맨 우측의 큰 글씨는 공통의 제목으로 시제(試題)라고 하고, 그 아래 소자 쌍행으로 쓴 것은 과거를 친 연도와 과거 제목, 성적이며, 맨 아래는 답안 작성자의 이름입니다.
과거의 제술 시험은 모두 병려문을 쓰기 때문에 대구를 이루며 글이 전개됩니다. 그러나 각 구마다 적절한 고사를 구사해야 하기 때문에 구두를 떼는 것은 쉬우나 그 내용을 아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글 우측에 점을 찍은 것은 글이 잘 된 곳이라고 표시한 것입니다.
본 글은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룰 통해 얻은 자료로 '고전번역원'의 협조를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원문 정리, 번역과 참고 자료는 김민선이 수고하였고, 김종태가 감수하고 해설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