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의 시 세계
존재의 성찰과 그리움의 진실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시분과회장)
1. 성찰과 기원으로써 자아 인식
현대시에 있어서 자아 인식과의 상관성은 밀접하면서도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삶이라는 인간의 명제를 영위하면서 우리의 심리상태는 항상 그 삶 속에서 감정들이 변화하는 양상을 살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시인의 정서나 사유(思惟)는 인간이 어떤 대상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입(移入)하고 공감함으로써 미(美)가 성립되고 예술로 승화하는 개념에 익숙해져 있다. 이처럼 시 창작에서도 미학적 견지에서가 아니라, 무의식 중에서 감정 이입(empathy)의 위치에서 작품이 성립되는 경우가 허다하며 어쩌면 당연하게 이루어 지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
여기 김영준의 시집『당신 곁을 맴도는 바람』도 이러한 심리적인 범주(範疇)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간과(看過)하지 못한다. 그는 작품의 구상에서부터 표현에 이르기까지 삶이라는 절대적인 현실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그가 창출하려는 주제를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김영준 시인은 자아 인식의 단계를 우선 성찰이라는 심리적 변환을 기저(基底)로 해서 여기에서 파생하는 갈등요인들을 기원이라는 새로운 조화의 해법을 탐색하는 경향으로 시적 정황(situation)이나 구도를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우선 그가 진솔하게 구사하는 작품「세상살이」전문을 읽어보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이 세상 살아가면서
가슴 속에 한두 개의 아픔 덩어리
담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랴
큰 덩어리이든 작은 덩어리이든
그 아픔으로 인하여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것 때문에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보고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지도 모른다
풋과일 같은 아픔 덩어리 하나가
익어 떨어져 갈 때
전보다 훨씬 성숙한 채
나라는 자신을 새로이 생각하고
삶에의 눈을 크게 뜨게 되는 것
그때야 비로소
진정 사람 냄새나는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리니
긴긴 아픔의 세월 붙잡고
한번 크게 웃어보아도 되리라
그는 ‘세상살이’ 즉 삶의 현장을 통해서 다양한 심리적 변화로 감정을 이입하고 있다. 첫연에서 ‘이 세상 살아가면서 / 가슴 속에 한두 개의 아픔 덩어리’를 우선 우리들의 공통된 갈등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다음 연에서 ‘그 아픔으로 인하여’ 그는 ‘세상을 더 넓게 바라’볼 수 있었다는 성찰의 의식으로 전환하고 있다.
근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삶의 눈을 크게 뜨게 되는’ 동기를 부여받게 되고 ‘그때야 비로소 / 진정 사람 냄새 나는 사람으로 / 태어나게 되’는 현대인들의 생활철학이 적나라(赤裸裸)하게 적시되고 있어서 전체적으로 삶에 대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영준 시인은 이와 같은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은 ‘인식-성찰-조화-기원’이라는 하나의 등식을 형성하고 그의 주체적인 주제의 설정을 위한 시법을 자유롭게 형상화하고 있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사람살이 / 가진 자 덜 가진 자, 배운 자 덜 배운 자, 잘난 자 못난 자 / 생각해 보면 모두 종이 한 장의 차이 아닐는지-중략-세상이 쳐놓은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거든 / 작게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사람살이」중에서)’거나 ‘산다는 것은 / 참는 것 기다리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것 / 삶의 끝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앗아 가지만 / 사랑하는 마음 하나는 / 사랑하는 이의 가슴에 남아 오래도록 함께 산다(「산다는 것은」중에서)’는 어조(語調)는 화자(話者)의 내면에 잠재한 삶 또는 ‘산다는 것’에 대한 그의 순정적인 진실이 현현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아직도 이 아픔 딛고 일어설
용기가 내게 남아 있는 것일까
바람이 불면 부는가 보다 꽃이 지면 지는가 보다
그렇게 무심했는데……
세월이 나를 버리려 하는가
내가 세월을 붙잡으려 하는가
아픔이 강한만큼
오늘의 이 삶은 더 뜻 깊어야 한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데
내 이 아픔 딛고 일어설 때
내가 세월을 버리리라
그러나 김영준 시인은 ‘아직도 이 아픔’이라는 갈등이 남아 있다. 이것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많다. ‘세월이 나를 버리려 하는가’ 아니면 ‘내가 세월을 붙잡으려 하는가’에 대한 해법을 스스로 찾고 있으며 ‘내 이 아픔을 딛고 일어설 때 / 내가 세월을 버리리라’는 어조로 ‘삶의 의지’를 시간성과 동시에 조화를 탐색하고 있다.
이렇게 삶에 대한 진실 속에는 그가 탐구하고자 하는 성찰에 관해서 좀더 고차원의 가치관을 추구하려는 시혼(詩魂)이 적시되고 있는데 대체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그 깊이를 알 수 있게 하고 있다.
-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승만 존재한다 / 전생도 없고 저승도 없다 / 죽었으니 활활 타 뿌려지면 묘지 도 없다 / 조용한 허공에 바람만이 제 갈길 간다(「여명」중에서)
- 삶이 힘들다고 낙심하지도 허탈해 하지도 말게나 / 세상사는 그대가 최선을 다한 만큼 그대에게 돌 아온다네(「목 없는 돌부처」중에서)
- 빛바래 가는 추억을 / 바로 세우고 / 파아란 그때의 하늘 안으로 / 마음이 달려가는 / 내 사랑의 쉼 터는 어디 있을까(「허기진 세월」중에서)
- 나의 달력이 끝이 나고 나의 시간의 흐름도 멈춰질 때 / 난 나의 기억 속에서 그때야 너를 지우려 함이니(「허무」중에서)
- 자신의 발톱을 적절히 감출 줄 아는 사람 /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지혜가 넘치리라(「사람답게 살려 거든」중에서)
그렇다. 그가 천착(穿鑿)하는 성찰의 의식이 현대인들이 보편적으로 사유하는 일상을 넘어서 ‘허공’이나 ‘허탈’, ‘사람답게 살 수 이는 지혜’ 등의 언술로 자아를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자아 인식은 또 하나의 단계를 모색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원의 의지이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愛樂哀惡慾) 주워 모아 / 하나하나 촘촘히 엮어 / 내 마음 덮을 백결 옷 지어 입으리(「시선(詩仙)이 되고파」중에서)’거나 ‘부드럽고 시원한 한 가닥 바람이 되어 / 찌들어 가슴 답답한 모든 이들에게 / 후련함을 주었으면 좋겠네(「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네」중에서)’. ‘바다의 넓은 마음을 닮으려는 수도승이다 / 나도 바다가 되고 싶다(「을왕리 해수욕장」중에서)’, ‘책속에 묻히고 시어에 마음 뺏겨 남은 여생 글과 벗하며 / 오지에서 살고 싶다(「바람(願)」중에서)’는 간절한 기원으로 분사(噴射)하고 있다.
그의 기원은 성찰에서 구현한 ‘비움’의 미학을 실현하려는 인생관이 유로(流露)된 그의 시학이며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갈대야 / 너는 자랄수록 속을 비우고 사는데 / 난 언제나 무거운 마음을 비울 수 있을까 / 부질없는 욕망으로 가득한 나의 삶’이라는 「갈대의」의 일부에서 이해할 수 이듯이 ‘부질없는 욕망’과 ‘무거운 마음을 비’우는 대칭적인 그의 지적인 사유에서 궁극적인 문제들이 화해를 하고 있다.
2. 그리움의 진원지 혹은 사모곡
김영준 시인에게서 또 하나의 모티프(motif)는 그리움의 진원지를 탐색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소년의 추억’이 있고 ‘추억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름’다움이 있어서 더욱 그리움은 사무친다.
그러나 그가 애절하게 침잠(沈潛)된 그리움을 탐구하는 것은 일단 ‘어버이’에서 출발한다. 작품「비의 연가」에서 ‘그립고 보고픈데 비가 내린다 / 하늘 여행 중인 어버이의 사랑이 / 구름을 탄 형제들의 아쉬움이 / 그리움을 타고 비가 되어 오고 있다’는 어조와 같이 부모에게서 출발하여 종내에는 ‘어머니’에게로 결집하는 사모곡의 시적 흐름을 이해하게 된다.
천진한 어린 아이의 볼 닮은
영롱한 눈꽃이 소곤소곤 정답게 내리는 날
향기 나는 생각 맛이 있는 시(詩)가 그립다
어서 나를 힘차게 품어 주려므나
살그머니 내 두 어깨에 가지런히 누운
어머니의 기억을 눈꽃이 덮고 있다
먼 산 하얗게 봉긋 솟은 따뜻한 여인의 젖무덤이
어서 오라 나의 발길을 재촉하는구나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마음 아프게 했던 여인
어머니 치맛자락 매달려 조르며 울던 때가 아려온다
나의 생이 끝이 나야 잊을 수 있을까
영혼까지 사랑하리라 새김질한들 마음만 도톰할 뿐
--「눈 속의 환상」전문
하늘이 잿빛이다, 비가 오려나
홀로 걷는 공원길이 외롭다
문득 바다가 그리워진다
등대가 있고 배도 있고 아담한 포구도 있는,
멀리 물 위에 가물가물 떠있는
조그만 섬속 내 어머니의 무덤이
나에게로 둥둥 떠온다
작은 행복도 내가 줘보지 못한 가여운 나의 어머니
온갖 고생 이고 지고 가셨다
하늘이 비가 되어 내린다
내 어머니의 눈물도 하얀 비가 되어 내린다
내 머리 위에, 두 어깨 위에도 어머니의 사랑이 흘러내린다
내 새끼 외로워하지 말라고……
무엇으로 지난 나의 불효를 씻을까
목숨을 내 놓아도 갚을 길 없는 어머니 은혜
천만 번 사랑한다 한들 이제 무슨 소용있으리
--「어머니의 눈물같은 비」전문
김영준 시인은 ‘어머니의 기억’에서 ‘시’를 그리워하는 그 원류가 ‘나의 생’임을 인식하면서 ‘영혼까지 사랑하리라’는 비장한 의지를 구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며 그리움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그는 다시 ‘조그만 섬 속 내 어머니의 무덤이 / 나에게로 둥둥 떠’옴을 인지하게 되며 ‘어머니의 눈물 같은 비’가 ‘어머니의 사랑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절절한 사모곡에는 단순하게 ‘어머니’를 그리워하거나 불효한 체험적 정서의 표상이 아니라, 그에게서는 화자 ‘나’와 ‘어머니’의 상관성으로 ‘천만 번 사랑한다한들 이제 무슨 소용 있으리’라는 후회가 곧 시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김영준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회한은 다음과 같이 분화하고 있다.
- 이 세상 모든 어머니가 국화를 잘 기르기 위해 / 혼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어머니의 국화」중 에서)
- 자식새끼 길마중 나와 마음조이며 서성이는 / 홀로된 어머니가 더 외로워라(「일몰」중에서)
- 볶은 깨소금으로 비벼도 맛이 좋았던 어머니의 솜씨 / 갖은 양념이 없었지만 어머니의 그 손맛을 잊을 수 없다(「갓김치」중에서)
- 엄마의 시선은 오직 자식의 안위 밖에 없다(「그리운 엄마의 품」중에서)
- 내 가슴에 저 강 흐르게 하여 / 어머님이 기쁘게 건너오시게 해야겠다(「내 가슴 속에 흐르는 강」 중에서)
- 고된 삶의 흔적이 상처로 남아 응어리졌구나 / 내 엄마의 가슴에 있는 옹이 같다 / 언제쯤 엄마의 가슴 에서 옹이를 빼낼 수 있으려나(「옹이」중에서)
- 청국장을 끓일 때마다 엄마는 오신다(「청국장」중에서)
- 하얀 눈으로 와서 아들 곁을 밤새 지켜주신 어머니 / 삼월 하순의 봄 숲이 어머니의 소복으로 온통 덮여 있다(「하얀 눈으로 오신 어머니」중에서)
보라. 어쩌면 김영준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보편적인 정서는 사무치는 어조로 우리들에게 공명(共鳴)을 유로하고 있다. 이러한 사유는 누구에게서나 음미할 수 있는 시적 발원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가 집요하게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일은 그의 사모곡이 자신의 삶과의 불가분성을 더욱 확고하게 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되짚어보는 불효와 애모(愛慕)의 메시지는 작품 「엄마 생각」에서 ‘당신의 맑게 웃음 띈 그 모습을 / 진정 보고 싶습니다 / 언젠가는 다시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 나를 발견하고 다음에의 더 크고 강한 삶을 / 약속 받을 희망도 가져봅니다 /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찻집에서 / 뜨거운 커피 잔 마주하고 당신을 그리면서 / 파도를 하나 둘 헤아려 보고도 싶습니다’라고 스스로 염원하고 기원하는 그리움의 진실을 토로하고 있다.
3. ‘당신’의 사랑학과 그 진실
김영준 시인은 또 하나의 사랑학을 구현하고 있다. 그것은 ‘당신’에 대한 애정이다. 이 제2인칭 대명사의 화자 ‘당신’이 구체적으로 명시한 실존의 인물인지는 ‘아내’라는 화자와 약간의 혼동이 있으나 어쨌거나 그가 설정한 시적 구도에서 지칭하는 사랑의 상대라는 명제를 충실하게 시적 메시지를 발현하는 것으로 유추해서 그의 사랑학의 원류가 된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우선 다음 두 분류의 작품을 비교해 보기로 하자.
서로 좋아 하게 된 것은
당신과 내가
마음 속 자리한 부족함이 엉겨
사랑을 얻고자 함이려니
그것은 서로서로 채워줘야 하느니
서로 사랑하게 된 것은
당신과 내가
가슴 속에 충만하게 쌓이는
허전함을 덜고자 함이려니
그것은 서로서로 비워줘야 하느니
--「연인」전문
남의 도움 없이 혼자 남을 때를 위해
홀로서기 연습이 필요하다
아내와 주말부부로 살아온 지 십년
제법 나만의 살림솜씨가 늘었다
혼자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어딘가 한 구석이 허전하다
대화의 상대가 없어서일까?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느낌
일주일에 한 번, 아내가 오는 날
그 하루를 위해 온통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이
삶의 활력소가 되게 한다
삶이란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
--「홀로서기 연습」전문
그는 ‘당신’과 ‘아내’는 동일한 화자라는 점에 논점을 정리하게 되는데 사실은 이러한 화자가 혼동을 일으키는 경우는 시적인 구도와 표현의 의도에서 다양한 정서의 분화로 우리들과 공감대의 확산을 도모할 수도 있음에 유념하게 된다.
그는 ‘당신’과 ‘아내’라는 모티프를 설정하고 ‘연인과 ’아내‘에 투영할 주제가 바로 사랑학을 위한 사유의 주관(主觀-subject)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명징성(明澄性)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아내와 주말부부로 살아온 지 십년’의 체험을 통해서 ‘남의 도움 없이 혼자 남을 때를 위해’ ‘홀로서기 연습을 하는 것이나 ’서로 사랑하게 된 것은‘ 바로 ’마음 속 자리한 부족함이 엉겨 / 사랑을 얻고자‘ 한다는 순정적인 이미지가 진솔하게 창출되고 있다.
이러한 정서의 근원에는 아마도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고백적이거나 불면과 동시에 엄습하는 그리움을 포괄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그리움의 시작은 결국 사랑일테니까(「잊히지 않으면 그리워하며 살자」중에서)’ 라는 언지뿐만 아니라, ‘당신이 그리운 것은 / 서편 하늘이 붉게 타면서 / 내 마음 물들이기 때문입니다(「당신이 그리운 것은」중에서)’라는 그의 리얼한 언어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한편 그는 ‘아내’에 대한 특별한 사랑학적 이미지의 적시를 위해서 현실적 또는 이상적인 스토리에도 다양한 환경과 정서의 지향을 탐색하고 있다. 가령 아내가 ‘눈꺼풀 수술을 받은 지 일년’이 지나서 ‘아내를 닮은 / 낯선 여자가 자고 있다(「두 여자」중에서)’거나 ‘내가 사준 구두가 편하다고 자주 고쳐 신는 / 아내의 마음 씀씀이가 / 눈송이 되어 내 몸에 행복꽃을 피운다(「낡은 구두」중에서)’는 등의 어조는 자못 그가 지향하는 사랑의 극대화를 실현하려는 열정으로 이해된다.
4. 자연서정과 내면의 순수 시학
김영준 시인은 자연서정을 추구하는 서정 시인이다. 이 시집 전체에서 일별(一瞥)할 수 있듯이 삶을 통해서 자아를 인식하고 성찰을 통해서 존재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인생문제를 살폈던 것이나 정서의 원천에 잠재해 있던 그리움과 사랑학의 전개도 결국 인본주의(humanism)의 범주를 이탈하지 않는 순수한 이미지와 주제의 투영에서 시법을 구현하는 것도 어찌 보면 그가 천성적으로 간직한 서정적 사유를 탈피하지 못하고 순수한 내면의 시 세계를 성취하려는 심성을 이해하게 한다.
그는 이러한 심리적인 과정을 거쳐서 우리 현대시의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는 자연서정에 심취하여 순수시학을 구현하려는 노력은 바로 그가 탐구하는 시간적 체험이 승화하는 그의 시적 대사물관에 대한 진취적인 사고(思考)의 한 단면임을 직시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현상으로 ‘산길’, ‘호수’, ‘어촌 풍경’, ‘오지마을’, ‘물’, ‘봄을 찾으러’, ‘청보리밭’, ‘나목’, ‘노을’ 그리고 ‘수로의 봄’ 등 자연 속으로 그의 영육(靈肉)이 동시에 동화(同化-assimilation)하거나 투사(投射-project)되어 시적인 두 형태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호젓한 숲길 따라
나를 잊으며 걷는 어스름에
둥지 찾는 산새 한 마리 날아간다
외로움은 밀물처럼 가득하고
지금쯤 웃음꽃 피고 있을
내 보금자리엔 가족이 없구나
언제나 모두 모여
내 가슴 네 가슴 속 들여다보며
세월을 어루만져 줄까
꽃과 나무와 풀잎까지도
바람이 찾아 와 말동무하는데
이 마음 쓰다듬어 줄 이는 어디에 있나
만 가지 생각을 머리에 이고 걷는
내 두 어깨엔 어느새
하늘이 살포시 내려 와 앉아 미소 짓누나
--「산길」전문
욕망으로 가득한 내 안의 나에게 묻노니
마음을 모두 비우고 청보리와 화촉 밝혀 함께 살고 싶다
나는 지금 청보리와 한 몸 되어 흙에 뿌리를 내린다
청보리가 사랑스럽게 속삭인다
함께 살다 흙으로 돌아가자고……
내 몸 여기저기에서 청보리 새싹이 돋아난다
나도 청보리 초원이 된다
--「청보리 밭」중에서
그는 이와 같이 자연에 대한 응시(凝視)로 ‘세월’이라는 시간성과 ‘나’라는 화자가 상호 연관을 통해서 스스로를 자연 속에서 인격화하거나 다른 존재를 자연 속에 채우는 시법, 말하자면 흔히들 평론가들이 말하는 두 종류의 낭만적 자연관을 염두에 두는 시법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는 우선 ‘나를 잊으며 걷는 어스름’이나 ‘내 가슴 네 가슴 속 들여다보며 / 시월을 어루만져 줄까’는 등의 어조는 자연 동화에서 그가 창조하는 삶의 진실을 화해라는 근원으로 해법을 모색하고 있다.
또한 ‘욕망으로 가득한 내 안’이나 ‘마음을 모두 비우’는 일과 ‘함께 살다 흙으로 돌아가자’는 성찰의 이미지도 자연 투사에서 감응(感應)한 그의 철학이 비장한 메시지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김영준 시인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에는 ‘나를 잊는’ 망각의 정서와 ‘마음을 모두 비우’는 공허(空虛)의 정서가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까지 모르고 산 / 세월이 노여워 / 정작 모든 것을 잊고자 함이네(「노을」중에서)’ 또는 ‘세월이 허락하는 머잖은 날 / 다시 이 갈대숲에 서서 오늘을 회상하며 / 나를 또 한번 잊으리라(「수로의 봄」중에서)’라는 어조가 망각을 통해서 새로운 삶(혹은 인생)을 창조하는 사유의 중심축을 형성하려는 의식의 일단이다.
한편 그는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 그러나 나는 나의 그림자를 만들지 못한다(「물」중에서)’거나 ‘온갖 것 훌훌 털어 버리고 당신과 내가 / 하늘에 몸을 맡기는 들판의 이름 없는 나목이 되어 / 사랑의 슬픈 사연 알도록 하자(「나목(裸木)」중에서)’는 언술은 바로 비움의 미학을 실천하는 공허의 의식이 짙게 깔려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정서나 시적 사유의 지향적 주제로 현현되는 것은 현대시가 갖는 위의(威儀)를 충실하게 수용하면서 스스로의 철학을 정립하는 김영준 시학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일찍이 우리들의 일상적인 정서생활과 시적인 소재와 주제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겠으나 보편적인 생활의 언어적 표현의 기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영국의 비평가 리쳐즈(I.A. Ricards)의 말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시는 항상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 자체 속에서 이상을 쫓는 신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프랑스의 시인 볼테르-Voltaire의 말)기 때문에 그 표현방법의 다기능을 연구할 필요를 느끼게 하는데 이는 우리 시인들이 시는 언어의 예술이라는 숙명적인 대명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적절하면서도 창조성이 뛰어난 언어의 구현에 많은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