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앰 댓 상권 27. 시작 없음은 영원히 시작된다.
문: 지난번에 제가 두 가지 성장의 길에 대해 질문을 했었습니다. 포기의 길과 즐기는 길 말입니다. 그런데 요기의 길과 보기의 길의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요기는 즐기기 위해 포기하고 보기는 포기하기 위해 즐깁니다. 요기는 포기를 먼저하고 보기는 즐기는 것을 먼저 하는거죠.
M: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요기는 요가를 하고 보기는 보가를 하면 되지 않나?
문: 보가의 길이 제게는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요기는 아직 덜 익은 망고가 익기도 전에 나무에서 떨어져 광주리 속에서 익게 되는 것과 같이, 공기도 충분치 못하고 열기는 너무 높아 익기는 하되 참된 맛과 향기는 상실되어 버립니다. 그렇지만 보기는 나무에 붙은 망고와 같아 크기나 색깔, 또 맛 등의 모든 것이 알차게 영글어 모든 면에서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도 요가는 칭찬을 받고 보가는 온갖 저주를 받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둘 중 보가가 더 나아 보입니다.
M: 뭘 근거로 그런 말을 하지?
문: 요기들은 대단한 노력을 합니다. 그 결과로 깨달음을 얻더라도 거기에는 뭔가 괴롭고 쓰라린 것이 있습니다. 또 이들은 많은 시간을 수행에 빠져서 삽니다. 그러다 보니 말하는 것이라곤 경전에 있는 말뿐입니다. 이렇게 깨달은 사람들은 완전하긴 하지만 단지 작은 꽃에 불과해서 향기가 멀리 퍼지지 못합니다. 반면에 숲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넓이가 있고 경이롭기 그지없어서 그들 자신이 하나의 세계라고 할 만 합니다. 이렇게 차이가 있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M: 그러니까 자네 말은 요가를 하면 사람이 위축되고 보가를 하면 화창해진단 말이군.
문: 사실 그렇지 않은가요? 요기들은 삶을 두려워하여 평화를 찾지만 보기들은 모험심이 가득합니다. 사기가 충천하고 전진에 전진을 거듭합니다. 요기들은 하나의 이상에 묶여 있고 보기들은 언제라도 탐험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말입니다.
M: 그건 많은 걸 바라느냐, 아니면 적은 것에 만족하느냐의 문제야. 요기들은 야망이 있지만 보기들은 단지 모험심이 강할 뿐이라구. 겉으로 보기에는 보기들이 더 풍부해 보이고 재미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아. 요기들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좁은 것을 깊고 부드럽게 베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어. 많은 허위의 층들을 착오 없이 꿰뚫을려면 그래야 해. 보기들은 많은 제단에서 참배를 하지만 요기들은 자신의 본성에 봉사할 뿐이야. 요기와 보기를 대립시키는 건 괜한 짓이야. 원래 자신을 돌이켜 보기 전에는 많이 나돌아 다니지 않을 수 없거든. 가만히 앉아서 판단을 하며 점수를 매기는 건 우스운 짓이야. 모든 것이 궁극적 완성을 도와주게 되어 있어. 본성의 세 측면을 진리 지혜 축복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잖아. 진리를 구하는 사람은 요기가 되고, 지혜를 구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행복을 구하는 사람은 행동적인 사람이 되는 거야.
문: 이원성을 넘어야 축복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M: 그런 축복은 오히려 대단한 평화의 본성이라 해야겠지. 즐거움과 고통은 행동의 결과야, 그 행동이 바르든 그르든 말이야.
문: 즐거움과 고통으로 결과가 나뉘는 까닭은 뭡니까?
M: 놓느냐 움켜쥐느냐에 따른 것이지. 접근 방식이 어떻든 간에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하나로 되게 마련이야.
문: 목표에 차이가 없다면 여러 가지 접근 방식을 구별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M: 각각 자신의 기질에 따라 움직이게 놔두면 돼. 어떠한 움직임이든지 궁극적인 목적에 다가가게 되어 있어. 자네가 하는 갖가지 구별이나 분류도 모두 괜찮은 거야.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어, 아무 근거도 없이 꾸게 되는 꿈도 자세하고 정확하게 조사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그건 꿈일 뿐이야. 마찬가지로 자네가 생각하는 성향도 하나의 관념으로 자네의 추측에만 들어맞는 것일 뿐이야. 자네가 이것저것 따지는 것은 하나의 관념에서 시작해서 다른 관념의 옷을 입고 끝나는 관념의 유희일 뿐이야.
문: 선생님은 사물을 어떻게 보십니까?
M: 구분 없음은 침묵 속에서 통용되는 언어야. 말로는 구분을 지을 수밖에 없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이름이 없어. 이름이란 것은 드러나는 것을 가리키게 되어 있는 것이지. 말 너머에 있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말로 싸우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야. 의식은 영혼이며 동시에 물질이야. 불완전한 영혼이 물질이고, 완벽한 물질이 영혼이지. 처음에도 끝에도 모든 것은 하나야. 모든 구분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 움직임과 휴식이라는 것도 마음의 상태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 반대편이 없으면 존재하질 못해. 그 자체로 보면 움직이는 것도 멈춘 것도 없어. 정신적인 것으로 절대적인 존재를 표현하려는 건 큰 잘못이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문: 선생님은 궁극적인 상태와 휴식을 동일시하는 것 같습니다.
M: 마음의 상태로서의 휴식도 있고 참존재의 상태로서의 휴식도 있지. 앞의 것은 왔다가 가는 것이지만 참된 휴식은 모든 행동의 중심이야. 불행히도 언어라는 건 정신의 도구이기 때문에 대립 속에서만 작용하지.
문: 관찰자로서의 선생님은 일을 하고 계십니까? 쉬고 계십니까?
M: 지켜본다는 것은 하나의 체험이고 휴식은 경험으로부터의 자유야.
문: 바다 깊은 곳의 고요함과 파도의 출렁임이 공존하듯이 실재의 경험이 공존할 수는 없습니까?
M: 마음 너머에는 경험 같은 건 없어. 경험이라는 건 이중적인 상태야. 실재를 가리켜 경험이라고 할 순 없어. 일단 이게 이해되면 분리된 대립 개념으로서의 존재와 생성을 구하지 않게 되지. 실제로 그 둘은 하나로서 분리될 수가 없는 거야. 같은 나무의 뿌리나 가지와 같은 것이니까. 이 둘은 모두가 의식의 빛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인데, 이건 다시 "내가 있음"이라는 감각의 결과로서 생겨나는 것이지. 이게 근본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그걸 놓치면 모든 걸 놓치게 돼.
문: 존재감이라는 것은 경험의 산물일 뿐 아닙니까? "이것이 진리다."라는 위대한 말씀도 단지 정신작용의 한 양태에 불과한 것인가요?
M: 말로 표현되는 것은 뭐든지 일단 말일 뿐이고 생각되는 건 생각일 뿐이야. 참된 의미는 표현할 수 없고 오직 체험할 수 있을 뿐이야. 마하바키야라는 것이 진리라고 할지라도 자네가 말하는 것은, 모든 관념이 거짓이듯이 거짓일 뿐이야.
문: "내가 그것(I am that)"이라는 믿음도 허위입니까?
M: 물론이지. 확신이라는 것도 하나의 정신 상태야. "그것"이라는 것 속에는 "내가 ~임"이 없거든. "내가 있음"이라는 감각이 나타나면 "그것"은 흐려지게 되어 있어, 태양이 떠오르면 별빛이 안 보이게 되듯이 말이야. 그러나 태양과 더불어 빛이 나타나듯이 자아의 감각과 함께 축복이 나타나게 되는 거지. 그러나 어리석게 축복을 "나 아님( not- I)“ 속에서 찾기 때문에 구속은 시작되는 거야.
문: 선생님께서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언제나 진리의 상태를 의식하고 계십니까?
M: 의식을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아니야. 난 확신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고 용기를 먹고 살아. 용기야말로 나의 엣센스지. 그게 바로 생에 대한 사랑이거든. 난 기억과 기대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내가 무엇이고 아니냐에는 관심이 없어, "나는 절대자이다." 라든지 "내가 무엇이다" 하는 식으로 나를 묘사하는 데에 중독되어 있지도 않고 그런 건 나에게 쓸모도 없어. 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용기가 있고, 또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구. 세상도 역시 무(無)인 것이야. 간단하지 않아? 그냥 시도해 보라구.
문: 선생님께 그런 용기를 주는 게 무엇입니까?
M: 무슨 말이 그래? 용기를 주어야 꼭 가지나? 그런 식이라면 근심하는 게 정상이고 용기는 비정상이라는 말이 되는데. 사실은 반대야. 조심과 희망은 상상에서 생겨난 것이고 난 그 둘 모두로부터 자유로워. 난 그냥 존재(being)일 뿐이고 의지할 뭔가를 필요로 하지 않아.
문: 선생님 자신을 모르신다면 자신의 존재가 자신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자기 자신의 상태에 행복감을 느끼려면 자신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게 아닙니까?
M: 존재는 앎으로서 빛을 내고 앎은 사랑 속에서 자비심을 갖게 되지. 그건 모두가 하나야. 자네는 여러 가지로 상상해서 자신을 갖가지 질문으로 괴롭히고 있어, 너무 여러 가지 공식으로 자신에게 짐을 주지 말아. 있는 그대로의 존재는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니까.
문: 알 수 있고 또 즐길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저한테는 소용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체험이 되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M: 진실을 경험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데 말이야. 진실이라는 건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이 바로 경험의 토대가 되는 것이야. 진실은 경험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경험 그 자체 속에 있는 것이라구. 그러나 경험이라는 건 결국 마음의 한 상태야. 하지만 존재라는 건 결코 마음의 상태가 아니야.
문: 또 헷갈립니다. 존재라는 건 앎과 분리된 것입니까?
M: 분리라는 건 외관에 불과한 것이야. 꿈이 꿈꾸는 사람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듯이 앎도 있음과 분리되어 있지 않아. 꿈이 곧 꿈꾸는 사람이고 지식이 곧 아는 사람인 거야. 구분하는 건 단지 말 뿐이지.
문: 이제 존재와 앎이 하나라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축복의 경우 어떻습니까? 존재와 의식은 항상 함께 있습니다만 축복은 이따금 번뜩이는 것에 불과하지 않은지요?
M: 혼란되지 않는 존재의 상태가 축복이고, 혼란된 상태가 바로 세계로 보이는 것이야. 비이원성 속에 축복이 있고 이원성 속에 경험이 있어. 왔다가 가는 것은 경험으로서 고통과 행복의 이원성을 지니지만, 축복이라는 건 앎의 대상이 아닌 존재 자체로서 축복이기 때문에 하나의 속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게 아니야.
문: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요기들 중 깨닫는 사람이 생겨서 타인에게 소용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누어 줄 줄을 모르고 또 그럴 능력이 없는 겁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것을 나눌 수가 있어서 타인들을 입문시킵니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입니까?
M: 차이는 없어, 자네의 접근 방식이 틀렸을 뿐이야. 도와 줄 타인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거든. 부자가 자신의 전 재산을 가족들에게 넘겨주고 나면 거지에서 줄 동전 한 닢이 없게 되지. 그와 마찬가지로 현자는 자신의 능력과 소유물을 모두 털린 것이야. 아무것도, 말 그대로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는 거야. 이런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모든 사람이기 때문에 타인을 도울 수가 없어. 그 자신이 이미 가난한 사람이고 동시에 가난이며, 또 도둑이고 또 한편 도둑질이야. 자신이 분리되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돕는다고 할 수가 있겠어? 자신을 세계와 분리된 것으로 여기고 세상을 돕도록 시키는 사람이 누구겠어?
문: 하지만 여전히 이원성이 존재합니다. 고통과 그 고통을 덜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걸 꿈이라고 치부해 버리면 어떤 일도 성취되질 않지요.
M: 도울 수 있는 거라곤 꿈에서 깨우는 것밖에 없어.
문: 깨울 사람이 필요합니다.
M: 또 누가 꿈속에 있나? 깨우는 사람은 끝의 시작을 나타내고 있어. 영원한 꿈이란 없는 거야.
문: 시작이 없을 때도 그렇습니까?
M: 그건 자네가 그렇게 들은 것이지. 그렇지 않아, 자네가 자신이 시작되는 걸 직접 봤나?
문: 전 이제 막 시작되었습니다. 나머지 모든 건 기억입니다.
M: 바로 그거야, 시작 없음이 영원히 시작되지. 마찬가지로 난 영원히 주는데 그건 내가 가진 게 없기 때문이야.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자신을 위해 저장할 것이 없는 것, 그것이 최대의 선물, 최상의 관용이지.
문: 그러면 자기라는 것은 남아 있지 않습니까?
M: 물론 자기라는 것이 있지. 그러나 그 참자기라는 것은 모든 것이란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끊이지 않고 평등한 호의가 되는 것이야. 그걸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어디라도 가서 부족한 곳을 메워주고 돕게 되어 있어. 그러한 사랑이야말로 행한다는 생각이 없는 최상의 행인 것이야.
간단하게 글 하나 덧붙이자면 답을 하는 니사르가다타 마하라지는 질문자를 의식으로 보고.. 의식으로써 답을 하고 있고, 질문자는 자기 자신을 육신과 마음을 자기자신으로 아는 동일시된 상태에서 질문을 하고 답을 듣고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기 전에는 '아이 앰 댓'의 내용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을 읽는 사람이 글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을 형체 없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치고(당신이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고 해도 계속해서 글을 읽어나간다면 개념은 조금씩 수정될 것이고 결국에는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될 겁니다. 그리고 깨달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갖게 되었을 때 책의 내용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오면 세상 모든 경전의 내용을 궁리하지 않고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런 것을 일러서 해오解悟했다고 하며 이 상태에 이르면 남는 것은 수행을 해서 진짜 깨달은 사람이 되는 일만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