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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하는 수필동인
알바트로스
[ 2018년 1월 행사 일정 ]
1월 11일 신년 교례회
1월 25일 5회 합평회
알바트로스
제4회 정기 합평회 _ 2017년 12월 28일(목)
1. 그 섬에는 / 김경 - 담당 김아가다
2. 성지 순례/ 이숙희 - 담당 김춘희
3. 달라졌어요 / 최선화 -담당 김현지
4. 옛집 생각/채정순 -담당 백명철
5. 아내의 요리솜씨/ 공도현 -담당 서해숙
6. 오름/김영희 - 담당 안연미
7. 인산인해/ 김경애 -담당 엄옥례
8. 천 개의 입/ 최해숙 -담당 이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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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섬에는 / 김경
내가 노인에게 내쫓기다시피 식당을 나오면서도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양념장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도 몰랐다. 사람은 인상대로 살아지거나 사는 대로 인상이 완성될 거라는 것. 순식간에 기가 꺾이고도 나란히 붙어 있는 다음 집을 향한 것은 저만치 서서 무언의 압력을 보내오고 있는 일행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치 백만 군중이라도 되는 듯 바다 끝에 도열해 일제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례없이 버스 두 대를 동원한 섬 여행은 고향 동문들을 들뜨게 하기 충분했다. 그 와중에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는 것을 여객선에 오르고야 깨달았다. 가을의 백미 도토리묵을 거나하게 준비하고도 양념장을 빠트린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반드시 곁에 있어야 할 짝이 없으면 효용가치가 떨어진다. 양념장 없는 묵을 먹는다는 것은 도토리에 대한 예의가 아닐 터, 이럴 때 총무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섬의 끝자락에 도착하고 보니 자그마한 식당이 두어 곳 눈에 띄었다. 슈퍼마켓이라도 있으면 재료를 대충 사다가 어떻게라도 만들 수 있으련만 그 작은 섬에서 바랄 것은 아니었다. 나란히 붙은 식당 중 한 곳에 문을 밀고 들어갔다. 한눈에도 내가 적절한 손님이 아니라는 것을 간파했는지 키가 작고 얼굴이 새까만 노인이 의심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 기에 눌려 떠듬떠듬 몇 마디를 하는데 노인은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던 것이다.
다음 식당에서도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이미 빈자리 없이 손님들이 들어차서 말을 건네는 것조차 미안할 지경이었지만 혹시나 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파전을 부치던 여주인이 바람같이 돌아서서 종이컵에다 양념장을 부으려 했고, 나는 더 많은 양이 필요하다고 돈을 주겠노라 덩달아 속사포로 쏟아냈다.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서는 그녀, 나는 또 죄인처럼 물러나오고 말았다.
더 이상 방법은 없어 보였다. 묵을 도로 가져가야 하나보다 하고 털레털레 걷는데 어딘가에서 “색시”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부른 것일 리 없으므로 그대로 일행 쪽을 향해 걸었다. “이리 와 보랑게.” 첫 번째 식당 이층에서 한 할머니가 고개를 담 위에 걸치고는 내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인상이 거칠던 노인의 아내인 할머니는 아까부터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나 보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장사꾼이란 다 그렇다. 어딜 가나 이재를 위해 눈이 반짝거리고 더구나 순박해 보이는 시골 할머니들이 더 무섭다고들 말하는 세상이 아닌가. 더는 기댈 데가 없으니 부르는 게 값일 것이었다. 다소 억울한 셈법이 펼쳐지더라도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양념장을 쟁취하고 싶었으므로 기꺼이 이층으로 올라갔다. 노인의 눈초리가 매섭게 뒷덜미를 따라왔다.
주방은 냄비도, 가스도, 물통도 저마다 바쁘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들은 웬 불청객인가 하고 흘끔거릴 뿐 곧장 시선을 거두어 갔다. “이 색시가 양념장이 없다는디 좀 만들어 줘야 겠구마잉.” 파도 다 떨어지고 없는데다 그럴 짬이 어디 있느냐는 퉁명스러운 반응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있는 대로 대충 만들어 주까잉?” 묻는가 싶더니 곧바로 익숙한 손놀림으로 청홍고추를 다지기 시작했다. 엉거주춤 서 있기도 뭐해서 빨리 오라는 일행들의 전화를 핑계 삼아 섬을 돌고나서 다시 들르겠다고 말하고는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역시나 섬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푸근한 바람과 더 없이 푸른 하늘과 보석처럼 빛나는 윤슬까지 과연 우리가 바라던 대로였다. 모서리를 꺾어 돌 때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끝까지 섬을 둘러보지 못하고 혼자서 중간에 되돌아 내려와야 하는 일이었다. 일명 ‘하산 주 타임’을 위해 미리 전을 펴고 먹거리를 준비할 일이 남아 있었다.
내려오자마자 양념장을 가지러 갔다. 그런데 할머니는 식당 어디에도 없었다. 일층과 이층을 바삐 오르내리는 나를 보고도 노인은 할머니의 행방을 모른다고 발뺌했다. 난처해진 나머지 양념장도 못 만들고 어딜 피해버렸나 하는 생각을 하는 찰나 젊은 여자가 커다란 플라스틱 통을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마지막 걱정이 사라지는 순간 본능적으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데 여자는 손사래를 치면서 이런 거 안 받아요, 했다. “엄마가 그냥 해 드리는 거예요.”
아, 나는 이토록 속된 여자였던가. 얼마나 많이 세상살이에 속았다고 부정적 시선에 길들여졌나.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이유들이 맞물려 돌아간다는 것을 스스로 외면해 버린 것은 아니었나. 여자가 내 손에 통을 들려주고는 돌아서므로 얼른 그녀 옷자락에 매달려 있는 꼬마에게 만 원 짜리 한 장을 쥐어 주었다. 이러시면 안 되는데 하는 소리를 들으며 도망치다시피 통을 안고 돌아섰다.
그때, “맛이 없을지도 모르는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가던 길을 멈추고 보니 할머니가 힘겹게 계단을 오르다 말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뒷걸음치는데 문득 내 안을 감싸고 흐르는 찌릿한 것, 그것은 막 방파제로 소리 없이 밀려오고 있는 바닷물의 뜨거운 함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따뜻하고도 충만한 물결이 내 마음 속에도 출렁 출렁 차오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살다가 이따금씩 그 섬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깊이 모를 쪽빛 바다나 점점이 떠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의 그림 같은 풍경, 동백나무 사이로 불어오던 훈훈하고도 산뜻한 바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마치 이국에라도 온 듯 들떴던 감정이 아니라 다만 가슴을 치고 들어오던 어느 순간의 감동, 그 할머니가 있는 까닭일 게다. 낯선 곳으로부터 온 나그네의 곤궁을 차마 뿌리치지 못해 나직이 손짓하며 부르던 목소리, 안타까움 가득한 눈빛, 그것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다 합쳐놓은 전형적인 성정이 아니었으랴.
한 가지 후회가 드는 것은 수고비가 필요 없다며 손 사레를 치는 여인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총무 근성이 발동했던 일이다. 겨우 만 원짜리 한 장으로 숙제를 해결하던 순간의 안도감, 마지막까지도 속물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타성이 내내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섬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서 때로 그 할머니의 손짓처럼 나를 움직이게 하리니.
2. 성지순례
드디어 배에 올랐다. 너울성 파도로 출항이 어렵다던 여객선은 정규 시간을 조금 넘기고서야 겨우 출항했다. 배에 올랐지만 파도는 여전히 거칠어 갑판 위에 서 있기가 힘들었다. 얼른 선실에 들어와 주변을 비집고 누웠다. 배가 요람처럼 흔들린다. 추자도는 속살을 쉽게 보여주지 않으려 하며 갈급해지는 내 심정부터 살피게 한다. 묵주를 손에 쥔다.
어제,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려않을 무렵 완도여객터미널에서 전화가 왔다. 아무래도 출항이 어려울 것 같으니 출발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승용차는 이미 출발한 후였고 기왕 집을 나왔으니 완도로 가보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막연하지만 꼭 갈 수 있으리란 믿음이었다. 우리 세 부부의 기도와 보이지 않는 은총이 늘 함께 할 것이란 믿음도 들었다.
2년 전, 성지순례를 계획하고 첫 발을 디딘 곳이 제주도의 정난주 묘였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아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 모성(母性)이 묻힌 곳이다. 제주도에서 시작한 순례가 전국을 돌고 돌아 마지막 111번째의 순례지로 가고 있다. 그곳이 추자도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지난 것들은 아쉽고 현재는 조급하고 미래는 불안해졌다. 삶의 첫머리에 두었던 신앙생활은 차츰 미지근해지고 가슴 설레게 했던 일들도 그저 무덤덤해졌다. 미몽(迷夢)에 빠진 듯 생기도 윤기도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즈음 어느 교우로부터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라는 책을 선물 받았다. 펼쳐보니 평소 쉽게 갈 수 없는 지역이었다. 여행 삼아 성지순례를 다니면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책자에 수록된 천주교성지 111곳을 모두 순례하면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에서 축복장을 수여한다고 하니 일거양득이 아닌가.
나의 성지순례 제안에 남편과 평소 가깝게 지내던 교우 두 부부가 흔쾌히 동행을 수락했다. 우리 부부는 성지순례 코스 짜기와 숙소 예약, 그리고 기도주송을 맡았고 또 한 부부는 운전과 총무를 맡아 안전을 책임졌다. 또 다른 부부는 숙소에서의 먹거리를 담당하여 순례의 길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공감한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이고 친밀도를 더욱 더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매월 첫 주말로 잡은 성지순례는 알람보다 더 정확했다. 뜨거운 뙤약볕도, 성난 비바람도, 차디찬 눈발도 개의치 않았다.
성지는 가는 곳마다 애달픈 전설의 숱한 언어가 묻혀 있었다. 고요히 머물며 기도한 곳도 있었지만, 겨울철에는 노루꼬리 같이 짧은 해넘이에 쫓겨 가끔은 확인도장 찍는 데만 급급한 날도 있었다.
순례를 시작한지 서너 달 쯤 되었을 즈음 허리에 탈이 오지게도 났다. 일행들은 더 이상의 순례는 무리라며 무기한 연기하자고 했지만 뒷좌석에 누워서라도 꼭 완주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좋은 것은 쉽게 얻을 수 없는 법이기도 하지만 간절히 바라고 마음을 모으면 결국은 이루어질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바람이 허락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추자도. 추자도는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섬이지만 가슴 저리도록 슬픈 모자(母子)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유박해(1801년)가 거세게 몰아치던 섣달 어느 날, 정약용의 조카이자 황사영의 부인인 정난주 마리아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남편은 서소문에서 처형되고 하루아침에 정경부인에서 노비 신세가 되어 제주도로 유배가게 되었다. 두 살배기 아들을 안고 목선(木船)에 올랐지만 연좌제로 젖먹이 아들조차 평생 노비로 살거나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다. 때마침 풍랑이 심하여 배가 추자도에 머물게 되자 정난주는 뱃사공을 뇌물로 매수하고, 그 뱃사공은 술로 나졸들을 매수하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아들을 저고리로 싼 뒤 이름과 생일을 적어 갯바위에 숨겨 두고 나졸들에게는 아들이 죽어 수장(水葬)했다고 한 후 유배를 떠났다.
아기의 울음소리를 듣고 달려온 한 어부의 정성으로 잘 성장한 황경한은 후일 뱃사람들을 통해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만나기를 원했으나 정난주는 아들의 안위를 생각해 끝까지 거절하였다. 모자는 서로를 그리며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채 어머니는 제주도에, 아들은 추자도에 묻히게 되었다. 미처 깨닫지 못한 어떤 말씀이 숨은 것인지 우리의 성지 순례가 어머니로부터 시작하여 아들에서 끝을 맺게 되는 셈이다.
피로써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넋이 깃든 성지를 방문하여 그들의 영성과 생애를 묵상하며 기도한 것보다 어쩌면 축복장이라는 잿밥에 더 관심을 두었는지도 모르겠다. 동기가 조금은 불손하였을지라도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는 성서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저 멀리 억새로 덥힌 하얀 추자도가 보인다. 내 삶의 역사에 또 하나의 큰 획이 그어지는 순간이다.
3. 달라졌어요/최선화
드라마 이야기만 나오면 나는 완전한 이방인이 된다. 의도적으로 보려고 노력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매번 실패다. 가정주부들로 하여금 밥 차리는 것을 미루게 하고 남편들이 술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한다는 드라마까지도 외면했다. 그 증세는 지금도 여전하다. 오히려 이제는 이런 일이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던 중 상담의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프로를 챙겨 보는 이변이 생겼다. 직업과 관련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이 프로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자신의 문제가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뿌리 내리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촬영에 응한다. 그만큼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리라. 그 중 생채기가 난 자퇴생 이야기가 생각난다. 주인공은 부모의 생이별에 이어 어머니의 재혼으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 된다. 그는 한 번도 아니고 연거푸 버림을 받았다는 배신감에 몸서리를 쳤다. 본인이 처한 현실이 청소년기에 접어든 아이에게 삭힐 수 없는 불쏘시개였으리라. 그 결과 영혼을 악당에게 저당이라도 잡힌 듯 시한폭탄처럼 생활했다. 멀쩡한 가정의 아들딸도 비행의 길로 접어드는 판에 문제의 싹을 짊어지고 생활하는 아이에게 건전하게 자라달라고 하는 것은 욕심일런지. 시청하는 내도록 호흡을 하기가 힘이 들었다.
죽은 사람이나 진배없었던 생부에 대한 원망은 시간이 갈수록 저주의 싹으로 움텄다. 드디어는 꼼지락꼼지락 그 덩치를 키워나갔다. 하지만 그런 현상도 어느 순간부터는 적응이랄까 포기가 되었는지 심드렁하다못해 무심해졌다. 그와 반면 한 집에 사는 생모에게는 마치 원수를 대하듯 두 눈에 불을 켜고 저항을 해대는건 또 무언지. 그러다보니 생골치 거리였다. 드디어는 악다구니를 하는 것도 모라자서 폭력을 행사하기 까지 하는 구제불능 폐륜아로 나앉는게 아닌가. 특히나 카메라가 찍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혀를 찰 일이 수도 없이 이어졌다. 화면 밖에 앉아 있는 나까지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드디어는 촬영이 중단되는 일이 반복되었으며 모자 관계는 머쓱하다 못해 서로 섬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실오라기 엉킨 듯 한 가정은 드디어 상담전문가에 의해 완전 분석에 들어갔다. 원인을 밝혀내는 과정이 훤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현실은 과거가 낳은 씨앗이라는 것이 매번 밝혀졌다. 그뿐만 아니고 가족 모두에게 지금까지 그 누구도 가르치거나 주문을 한 적이 없는 처방전이 주어졌다. 더러는 낯간지런 요구도 있었지만 다들 근성을 발휘해 주었다. 방송의 특성상 모두 보여주지는 못했겠지만 어느 순간엔가는 내가 헛것을 보는 것이 아닌가 하고 화면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무조건적으로 상대방이 변하기를 바라던 예전과는 달랐다. 특히나 어느 순간부터는 웃음이 바이러스처럼 번지는 등 변화가 고공행진을 했다. 물론 어색함이 구석구석 배여 있었지만 말이다. 이 모든 변화는 제작진이나 상담전문가들의 격려와 응원이 매회기마다 보약으로 곁들여진 덕분이라 본다. 또한 전문가들이 내린 삶의 처방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한 결과이기도 하리라.
방송을 방송으로만 보았던 우리 집에도 일이 생겼다. 명절을 눈앞에 둔 어느 날이다. 남편이 와이셔츠를 사오라고 한다. 그러겠다고 대답한 뒤 일주일이나 지났건만 그 심부름만은 까마귀 고기를 먹은것 처럼 새카맣에 잊고 오갔다. 그런 나를 향해 남편은 한 수 아래의 사람을 대하듯 했다. 구시렁구시렁하는 말들과 어투는 가시덤불 속으로 나를 대책 없이 밀어 넣기까지 했다. 온몸이 가시에 찔린 듯 했다. 순간 그동안 나의 잘잘못들로 인해 미안했던 가지가지 마음들이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자존심에 금도 갔다. 간혹 주변인들은 아직도 사랑싸움을 하냐고들 하지만 그건 절대로 아니다.
생각해보면 솔직히 남편으로 부터 그런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시장이나 마트를 하루에 한번 꼴로 다니면서도 그 심부름을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또 하나 출퇴근길에 남성복 전문점 등이 없는 것도 아니니 더욱더 할 말이 없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치매 끼가 있는지 그런 점포 앞을 오가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옷가게 앞에 가격의 거품이 빠졌다며 총천연색 홍보를 할 때조차도 한글은 한글로 읽고 숫자는 숫자로만 구경했다. 더러는 싸게 판다고 구매하라는 현수막이 바람결에 막 잡아 올린 생선마냥 퍼덕거려도 남편의 심부름을 생각해내지 못했으니 문제는 문제다.
들은 말들로 인해 냉전이 장기전으로 돌입했던 어느 날, 남편은 어렵게 구했다면서 석류원액을 희석해서 밥공기에다 한 그릇 넘치게 부어준다. 화해의 표시다. 마음은 이해가 되었지만 그날은 그야말로 옹기처럼 투박한 표현이 싫어서 거절했다. 꼭이 주고 싶으면 투명한 유리컵이 어울릴 텐데 이런 바람이 욕심일는지. 넌지시 이런 속내를 드러냈더니 그제야 묘를 살린다는 게 깔때기 형태의 커피 잔에다 소꿉장난하듯 부어주면서 또 먹어라 한다. 여자들한테 좋다는 양념까지 텁텁하게 치면서 말이다. 경상도 남자들은 말을 해야 아냐며 당당해하는 경우가 많다고들 하던데 남편도 예외가 아니다. 사실 말이 필요 없을 수도 있지만 쉬운 게 말일 텐데 그 쉬운 길을 두고 왜 다른 방법을 찾는 건지.
하지만 결단코 남편도 바뀐 것이 많다는 것을 조금은 인정해 주어야한다. 길 나서면 혼자만 저벅저벅 걸어가 버려 찾기 일쑤였던데 열에 한번은 기다려도 준다. 더러는 충고를 하되 말 속에 은근히 녹이기에 칭찬을 듣는지 잘잘못을 따지는 것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경우도 잦다. 그러니까 직진만 길인 줄 알더니 우회적으로 말하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본 모습을 비자금처럼 숨겼다가 비수처럼 중간 중간 날리니 배려의 선물을 두 손 가득 들고 나타날 그 날을 여전히 기다리게 된다.
4. 옛집 생각 / 채정순
큰 시장 안의 한 가게가 온통 새까맣다. 말 그대로 이산 저산 다 잡아먹고 큰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아궁이 형상이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전업사인데 누전으로 불이 나는 바람에 다 타서 그렇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 몸은 그만 얼음이 되고 만다. 옛 집이 생각나서다.
옛날 우리 집은 여러 마을을 끼고 있어 목이 좋은 자리였다. 이 층이 살림집 일 층이 가게였는데 아버님이 전업사 겸 철물점을 운영하면서 전공(電工) 일은 물론 기계 수리도 하셨다. 계절이 바뀔 때면 고장 난 가전제품들과 농기구들이 골목까지 줄을 서 있었다. 맏며느리인 나는 일손이 바쁜 아버님을 도와 연장을 챙겨드리고 전화도 받고 배달도 했다.
아버님이 현장공사를 나가시면 가게를 차고앉아 공사 거리를 따고 고칠 물건도 받아 놓았다. 한가할 땐 가게에 딸린 콧구멍만 한 방에 누워서 책을 읽거나 텔레비전을 보다가 심심하면 물건들을 정리했다. 철제 책상 위에 나열된 전기테스트기, 송곳, 드라이브, 등 가계를 일으키는 일등공신들을 먼저 챙기고 팔려나갈 전등, 전선, 콘센트 같은 전기제품과 호미, 낫, 칼 같은 철물들을 먼지떨이로 털었다.
열 평 남짓한 공간을 훤하게 해 놓으면 아버님이 수고했다고 용돈을 넉넉히 주는 바람에 더 가게에 집착하게 되었다. 물건들과 정이 들어 팔릴 때는 섭섭해 새 주인에게 가서 잘 살라는 덕담도 잊지 않았다. 애살스러운 관심은 가전제품들의 간단한 고장을 고치게 해 내 손으로 완성된 제품들을 손님이 찾아갈 땐 뿌듯하고 흐뭇했다.
이렇게 물건들과 교감하며 곰살궂게 가게를 보던 생활도 강산이 두어 번 바뀔 때쯤 이었다. 갑자기 우리 고장에 개발붐이 일어 건설의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논과 밭이 없어지더니 넓은 도로가 생기고 건물과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났다. 그 등에 업혀 전업사와 철물점도 군데군데 창업해 우리 집은 그만 좋은 목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가게가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설상가상 건강하시던 아버님마저 운명하셔 가계는 큰 타격을 받았다. 상실의 슬픔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가까운 친척이 자재창고로 쓰게 가게를 빌려달라고 운을 뗐다. 어쩔까 망설이다 기술자 없는 가게는 팥소 없는 찐빵 같아 그만 수락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폐업 처분으로 원가에 팔고 남은 물건들을 집 안 구석구석으로 밀쳐놓았다.
그렇게 또 십여 년이 흐르자 이제 우리 마을도 고층아파트가 들어선다고 들썩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집은 그에 편승하지 못하고 아파트 정문 쪽이 된다고 쑥덕거렸다. 술렁거리는 소문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집을 사겠다는 자들이 예서제에서 나타났다. 장정들이 삼삼오오 몰려오고 복덕방 여러 곳에서 전화가 빗발쳤다.
팔고 싶은 마음이 없다며 한사코 손사래를 쳐도 줄을 서듯 오든 사람들이 뜸하다 싶은 어느 날 밤이었다. 비가 오는 소리가 나서 비설거지를 하러 바깥으로 나갔다가 깜짝 놀랐다. 뒤란 모퉁이의 두어 자 간격으로 있는 가스통과 기름보일러 사이에서 잿빛 연기가 설설 기어 나오고 있었다. 위험하다 싶어 얼른 다가 가보니 다행히 불은 꺼지는 중이고 불쏘시개가 새바람이 몰고 들이친 비에 젖는 중이었다. 감각이 둔한 나는 어쩌다 아이들이 추워서 불장난을 했겠다고 짐작만 했다.
그 후 며칠이 지난 맑은 날 오밤중이었다. 이상하게 잠이 깨졌다 싶었는데 창밖이 여느 때와 달라져 있었다. 얼른 내다보니 먼저 불난 자리에 또 불길이 높이 쏟아 주위가 대낮처럼 훤했다. 문을 여니 검은 바지에 농구화 발이 다다닥 소리와 함께 돌담을 타고 뒷산으로 달아나는 중이었다. 아예 불쏘시개에 기름을 쳐 불을 놓았는지 불은 벌건 팔을 흔들며 희희낙락하고 있었다.
순간 팔지 않으려는 개에게 약 묻은 먹이를 던져놓고 가던 개장수가 떠올랐다. 개가 그 먹이를 삼키고 죽어버리면 똥값으로 사 가는 수법에 당하기도 한 터였다. 건물을 다 태워버리고 낙담해 있을 때 헐값에 먹겠다는 범인의 의도에 입도 달싹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했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았다. 순간 보일러 통 위에서 무엇이 주르르 떨어지더니 불은 간곳없고 시커먼 연기만이 큰 왕관형국으로 퐁퐁 올라왔다. 뭔가 하고 정신을 차려 다가 가보니 못, 보드, 니트, 압핀, 스탬플, 들이 바닥에 수두룩 쌓여 작은 무덤을 이루고 있었다. 그제야 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물건들을 비닐 자루에 넣어 보일러 통 위에 올려놓았던 기억이 섬광처럼 스쳤다.
활활 타오르던 불이 비닐을 녹이자 작은 쇠붙이들이 모래인 양 절로 주르르 흘러내린 것이다. 반짝거리는 새것도 있지만, 빛이 바랜 대부분이 아버님의 손을 거쳐 간 전기제품이나 생필품, 농기구들의 부속품들이었다. 차고 무거운 존재고 또 양이 많아 왕성한 화마를 제압할 수 있었을 터였다.
갑자기 철 결핍성 빈혈에 걸려 고생할 때 아버님이 피가 철철 흐르는 소 지라를 사 오셨던 때가 생각났다. 집안엔 철이 늘려있건만 네 몸엔 모자란다니 이것 먹고 제발 철 좀 들으라며 안겨주셨다. 늘 빌빌거리는 며느리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나는 그때 이성적 사고능력과 감정조절이 미흡한 사람에게 철이 들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처럼 피 속에 철분이 부족해도 이런 말을 할 수 있겠구나 싶어 아버님의 위트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집안에 철이 많았든 덕분에 그 재앙도 면하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신고받은 경찰이 와서 이것저것 물을 때도 내 마음은 온통 그때의 가게의 부속물품들과 아버님이 떠올라 뜨거워진 쇠붙이들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실룩거렸다. 아버님이 수리품용으로 모아둔 작은 쇠붙이들을 매정한 나는 밀쳐놓고 방치했는데도 불구덩이로 뛰어내려 줬으니 언감생심이었다. 무생물에도 발휘할 보은 심이 있다며 아마 그때 가게에서 받은 정을 십분 생각해서 일터이다.
그 후 십 여년은 더 살다가 집을 팔고 이사를 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은 동물에게만 있다지 않은가? 사람에게는 소진됐다는 그 선견지명 기능이 내게 조금 남아있어 기름보일러 통 위에 쇠붙이를 올려놓았는지 그도 아니면 아버님 혼령이 하늘나라에서 날아와 주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기적도 자연물의 조건이 갖추어질 때 이루어진다니 말이다
묘술은 인간이 부리지만 성사는 하늘이 내린다는 제갈공명의 탄식에도 절감한다. 위나라 대장군 사마의 부자(父子)가 촉나라 지략가 제갈공명의 화공계략에 걸려 불에 타 죽기 직전 절체절명의 순간에 소나기를 만났으니 그날 우리 일과 비슷하지 않은가
내가 불탄 가게 앞에서 멍청하게 서 있으니 노점상인 아줌마가 그 가게는 보험을 많이 들어서니 걱정 마라며 고의로 일갈한다. 가게도 하나 없어 길에서 장사하는 우리들이 문제라며 푸성귀를 좀 팔라 달라고 호객한다. 이 가게에는 불을 끌 세붙이 조각들도 없었나보다. 하기야 그런 기적이 아무데서나 일으나지는 않은터 불난 흔적이 나에게 옛집만 무척 그립게 한다.
5. 아내의 요리 솜씨/ 공도현
아들 녀석이 눈을 비비며 식탁에 앉는다. 가운데 놓인 찌개를 보더니 누가 했냐고 물어내가 했다고 하니 그제야 한 숟갈 푹 떠서 입에 넣는다. 제 어미는 꼭 그렇게 말하고 먹어야 맛있냐고 한 마디 하지만 이미 달관한 듯 성난 얼굴은 아니다.
아내의 음식 솜씨는 내세울 게 없다. 결혼하기 전에는 직장 다닌다고 요리는 안 해보았고 시집살이할 때도 맞벌이 핑계로 설거지만 했다. 분가하고서도 장모님이 같이 살며 다 했으니 배울 틈도 갈고닦을 시간도 없었다. 요즘도 보험영업 때문에 늦게 귀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답답한 내가 반찬을 만들기 시작하여 결국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을 통째로 떠맡고 말았다.
결혼식을 올리고 며칠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그때는 어른들과 한 집에 살았다. 친한 후배 둘이 늦은 저녁시간에 예고도 없이 방문했다. 이미 상은 물렸는데 후배들은 식대는 됨직한 선물 하나 들고 왔다고 당당하게 저녁은 먹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내는 조금만 기다리라면서 주방으로 나갔다. 후배들은 좁은 방에서 담배를 벅벅 피워대며 상이 들어오기만 기다렸다. 시간이 제법 흘렀는데도 저녁상은 좀체 들어오지를 않았다.
한 시간도 훨씬 지나고서야 문이 살며시 열리더니 요상한 밥상이 들어왔다. 우리들은 깜짝 놀라 자세히 보니 그릇에 까만 똥 덩어리 같은 게 소복이 담겨 있었다. 들고 온 아내 얼굴을 쳐다보니 부끄러워하며 나직이 자장면이라고 말했다. 그 소리를 듣고 다시 보니 자장 라면이었다. 후배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젓가락을 들었다. 무척 배가 고플 텐데도 선뜻 달려들지 않았다. 먹는 행세가 새댁의 성의 때문에 마지못해 먹는 것 같았다.
깨작거리던 후배가 먹지 않아도 되는 핑계를 찾은 듯 의기양양하게 "이게 뭡니까?"하며 콩보다 작은 까만 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같이 먹던 한 놈도 그걸 보더니 젓가락을 상에 "탁" 소리가 나도록 놓았다. 벗었던 외투와 가방을 집어 드는 품세가 달아나려는 모양새였다. 그때 아내는 들어가는 목소리로 "소고기"라고 말했다.
아내는 갑자기 찾아온 손님 저녁상에 난감하였다. 그렇다고 시어머니한테 부탁할 수도 없어 마지못해 주방으로 갔다.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간신히 라면은 끓일 수 있어 찬장 문을 열어보니 여러 종류의 라면이 있었다. 그중 가장 품격이 높다고 생각되는 자장면을 집었다. 그래도 결혼하고 처음 들른 신랑 손님인데 그냥 내기는 대면해서 소고기를 볶아 넣기로 했다.
물이 끓는 동안 고기를 다져 볶았다. 그러다 냄비에 면을 넣고 끓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김이 나지 않고 연기가 나서 뚜껑을 열어보니 물이 부족해서 면이 타고 있었다. 놀라 다시 물을 더 붓고 저었다. 그러는 사이 볶고 있는 소고기가 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없다며 울먹거렸다. 그 말을 들은 후배들은 열심히 젓가락질을 해서 까만 콩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그 후로 밥 차려 달라고 오는 후배는 없었다. 어머니도 누가 며느리 음식 솜씨를 궁금해 하면 그냥 "상은 잘 차린다."하고는 얼버무렸다. 아내의 음식 솜씨는 시간이 지나도 좀체 늘지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아내는 은행에서 명예퇴직을 했다. 나라가 휘청거리고 은행이 합병하는 판국에 감축 압력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아내는 이십 년 남짓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자 실컷 놀아보겠다 했지만 그것도 체질이 맞지 않았다. 뭐 할 것 없나 이곳저곳을 알아보았다. 마침 국비로 퇴직자들에게 재취업 지원 교육프로그램이 있었다. 아내는 요리강습에 덜컥 등록을 하였다. 이제 아내 요리 솜씨가 좋아 지려나 기대를 했지만 그것이 크나큰 고통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아내가 요리 강습을 시작하고부터 퇴근 시간 직전에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는 나를 번지점프 난간 앞에 세웠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무슨 핑계를 대고 빠져나갈까 잔머리를 틀게 만들었다. "오늘은 잉어찜 했어요. 빨리 오세요." 며칠 전 먹은 조기매운탕의 비릿한 구역질이 아직 채 가라앉지 않았는데 전화 목소리에 비린내가 실려 왔는지 벌써 속이 뒤틀려 왔다. 이상하게도 아내가 요리 했다고 전화 오는 날은 그 많던 모임도 저녁 약속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아내의 사랑스러운 전화를 받고 마음을 돈독히 다지고 있었다. 막 나서려는데 A가 구세주처럼 찾아왔다. A는 아내와 같이 근무하던 B의 남편이었다. 아내들과 같이 친하게 지내다 이젠 우리끼리 더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아내에게 A가 와서 부득이 저녁은 먹고 들어가야겠다며 아쉬운 듯 전화를 했다. 아내는 잘 보관해 둘 테니 저녁에 술안주 하자며 끊었다. 혹을 뗀 건지 붙인 건지 꼭 뒤를 닦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마주 앉은 A를 찬찬히 보자 꼴이 말이 아니었다. 꼭 털갈이하는 똥개 같았다. 도대체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신세타령을 늘어놓았다. 아내와 같이 명퇴한 B가 미용학원에 다니고 있다며 듬성듬성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학원 다녀오면 식구 수대로 모아놓고 찌지고 볶고 물들이고 그러다 다시 풀고 난리도 아니라며 다시 한 번 가엾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한참을 망설이더니 B가 나를 염색해준다고 데려오라 했다며 같이 가자며 손을 잡는다. 그 순간 요리를 택한 아내가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도 아내가 요리학원에서 배운 걸 해놓고 기다린다며 정중히 손을 거두어 들였다.
내빼듯 집으로 달려갔다. 아내가 반기며 내어놓은 요리는 여전히 산업폐기물 같았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위 속으로 집어넣었다. 미용을 택하지 않고 요리를 택해 준 아내에게 사랑스러운 눈길까지 보내면서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아내의 요리강습은 가족들의 집단 식사 거부에 부딪쳤다. 특히 나의 기피 음식 흡입(맛보거나 씹지도 않고 넘김)에 따른 헛구역질, 복부뒤틀림 등 악성 위염 증상으로 병원에 다니면서 끝이 났다. 아내는 꼭 필살기 몇 개는 익히고 싶었지만 가족들의 휑한 모습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아내는 주방에서 하는 요리를 제외한 다른 요리는 모두 잘 했다. 제사, 생신 등 중요한 날 빠트리지 않고 상 잘 차리고, 선물을 준비하여 시아버지, 시어머니 마음을 흡족하게 요리했다. 아들 둘도 맹모지교로 공부시켜 일류대 보냈으니 자식 요리 또한 성공적이었다. 주방 요리 솜씨가 문제였지만 놀랍게 그것도 연륜이 쌓이자 잘 하는 것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나열해 보면 컵라면 끓이기, 감자 삶기, 커피 끓이기...... 그리고 또 뭐 있더라?
6. 오름 /김영희
경칩이 지났지만 피부를 스치는 바람은 아직 차다. 겨우내 갇혀 지낸 답답한 마음을 떨치려 호젓한 산길을 오른다. 주말이라 앞서서 산을 오르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정겹다.
혼자 오르는 산행이라 바쁠 것이 없어 나무와 풀에게 눈길을 준다. 아직은 눈바람이 남아서인지 숲은 겨울 모습 그대로다. 나무는 고요한 풍경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선 봄의 기운을 모으느라 치열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중턱에 오르자 둥치가 한 아름인 나무에 작은 나무가 비스듬히 기대어 엉거주춤 살아가고 있다. 작은 나무는 실핏줄처럼 엉긴 뿌리가 하늘을 향해 저항하듯 서있다. 쓰러지지 않고 살아내는 것이 경이롭다. 큰 나무가 받쳐주지 않았다면 지난 태풍에 고사 되었을 것이다. 위태롭게 서있는 나무 사이로 넝쿨식물이 명줄을 잇고 여린 촉을 뾰족이 내밀고 있다. 엄동설한을 참고 견뎌낸 우직함은 봄 날 또 다른 생명을 피워내기 위함일 것이다. 나무는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서 서로 배려를 통해 공존하고 있다.
능선을 오르자 여우비가 흩날린다. 뒹굴고 있는 나뭇잎에서 ‘다닥다닥’ 정겨운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햇살은 청명한데 후드득 비가 떨어진다. 연한 꽃망울을 밀어 올리는 산수유를 보며 봄이 멀지않았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설렌다. 여린 촉들의 부산한 움직임은 해마다 반복되는 자연의 신비로움이지만 느끼는 감정은 매년 다르다.
세상에는 이유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름 모를 풀은 산자락에 의지하여 여린 꽃을 피우기 위해 애처롭게 서있다. 산수유는 봄의 시작을 알리려 화들짝 깨어나 가지마다 꽃을 매달고 있다. 머지않아 봄꽃들의 오케스트라가 이 산에 울려 퍼질 것이다. 큰 나무는 자부심으로 가녀린 꽃은 꽃대로 풀은 풀대로 어울려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간다. 숲은 겉으로는 조용해보이지만 땅심을 딛고 소소리바람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내는 초록들로 북새통이다.
산은 어우름의 공간이다. 각종 생명체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간다. 곤충은 꽃의 향기에 취하여 꽃가루를 옮기고 수액을 부산하게 빨아올린다. 다람쥐는 떡갈나무가 제공해주는 도토리를 선물로 받는다. 고라니와 꿩도 산에서 먹잇감을 찾아 숲과 어우르며 산다. 산은 경쟁해서 독식하는 것이 아닌 서로 도우면서 손을 잡는 사이다.
안식이 공존하는 산은 정중동(靜中動)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 공간은 한적하기 만하다. 하지만 나무는 뿌리를 내리기 위해 땅의 기운을 받아 물관을 채우고 몸피를 키우기 위해 햇볕, 물, 바람을 안으로 거둔다. 때로는 가지가 부러지고 찢겨나가는 천재지변과 맞서지만 온갖 시련을 이겨낸 후 튼실한 나무로 자란다.
운동기구가 놓인 곳에 언제나 낯익은 아저씨를 만난다. 청각장애인 아저씨는 손짓발짓으로 이웃들과 소통한다. 해가 뜨면 어김없이 산을 찾는 산 지킴이다. 아저씨는 태풍으로 쓰러진 나무를 일으켜 세우고 뿌리 채 뽑힌 나무를 옮겨 산책로를 새롭게 조성한다. 언제부터인지 이웃도 깨끗이 정비된 등산로 주변을 살피고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배려 덕분에 자연과 더불어 행복한 하루를 시작하는 기쁨을 누린다. 자연과 사람의 어우름은 건강한 삶의 밑거름이 된다.
산책로를 조금 벗어나니 볕이 잘 드는 평지에 탁자를 중심으로 의자가 원을 그리고 있다. 의자의 모양이 각각인 걸보니 누군가 하나씩 가져와 정겹게 담소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숲 사이로 스며드는 밝은 기운과 각양각색의 의자가 어우러져 설치미술을 보는 듯하다. 이웃이 차와 과자를 권하니 잠시 의자의 주인이 되어본다. 의자는 예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별 버성김 없이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산은 사람과 의자 등 모든 것을 본래의 것처럼 아우르며 품어준다.
산은 엄마의 품속처럼 안온하다. 이곳에서는 내 것 네 것의 구분이 없으니 넉넉한 마음그대로 누리면 된다. 여우비는 그새 그치고 청신한 바람이 불어온다. 스치는 바람 한 줄기에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숲에서만 가능하다. 겨울 볕 속에 숨어있는 봄 햇살이 머무니 마음은 더없이 다사롭다.
옆으로 시선을 옮기니 계곡 사이로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싱그럽다. 계곡물이 내려오는 웅덩이 옆 가지에 새가 날아와 노래한다. 맑은 물과 새의 재잘거림이 소프라노와 엘토의 화음처럼 들린다. 자연의 합창이 조용한 숲에 울려 퍼진다. 합창은 부드러운 음률이 되어 모차르트의 G선상의 아리아처럼 들려온다.
산은 모두를 어우르며 사는 공간이다. 꽃과 나무가 우리에게 휴식을 제공해주고 이웃처럼 다람쥐나 노루를 보듬어주는 것도 산이기에 가능하다. 능선을 오르며 걷고 사색하면서 자연과의 어우름이 활력이 된다는 것을 무언으로 느낀다. 세상살이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고달프고 힘든 삶이지만 정을 나누고 부대끼다보면 다시금 살아야겠다는 에너지를 받으며 살아간다. 세상의 모든 객체들은 서로 어울려 상생하며 조화롭게 살아간다.
7. 인산인해(人山人海) /김경애
벚꽃 축제 기간에 야경을 보기 위해 진해에 갔다. 숙소에 짐을 풀고 이른 저녁을 먹고 여좌천으로 향했다. 차로 삼십 분쯤 갔을 때 입구부터 차가 밀렸다. 우린 더 차로 이동할 수 없어 차머리만 넣을 수 있는 공간을 보고 길 위에 주차했다.
이곳에서 여좌천까지는 2km 이상이 남았다. 하지만 차들은 길 위에 멈춘 상태이고 사람들은 인도를 꽉 메웠다. 이곳부터 줄지어 걷게 되었다. 초행길이라 여좌천의 위치도 방향도 몰라 그냥 일행의 뒷모습만 보고 따라갔다. 한 시간 남짓 지났지만, 목적지는 멀었다고 하는데 어둠이 깔리자 사방에 불빛이 휘황찬란했다. 걷는 길이 밤인지 낮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축제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도롯가에 핀 벚꽃이 가로등 불빛과 어울리는 그 모습만으로도 진해 벚꽃을 자랑할 만했다. 그런데 여좌천의 벚꽃이 얼마나 더 아름답기에 이 많은 사람이 도로의 양쪽 길을 꽉 메우고 2km의 길을 걷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 시간을 더 걸어 진해역까지 왔을 때 손녀가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했다.
진해역 화장실에 갔지만, 꼬리가 너무 길어 금방 볼일을 볼 수 없을 것 같아 일행을 먼저 보냈다. 30분이 넘게 지체를 하고 물어서 여좌천으로 갔지만, 일행을 찾아가기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딸과 손녀를 가운데 세우고 한 손씩 잡고 종대로 걸었다. 벚꽃을 쳐다볼 겨를이 없이 일행이 기다린다는 다리까지 겨우 왔다. 일행을 보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여좌천을 덮은 벚꽃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나무 울타리를(텍) 따라 벚꽃 터널을 걸었다. 아름드리나무에 핀 몽실몽실한 꽃송이가 여느 벚꽃과 다르게 보였다. 벚꽃 터널 속 여좌천에는 오색 무지갯빛 우산과 각종 조형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벚꽃 나무에 달린 오색등과 조화를 이루어 야경의 진미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나무 울타리를 따라 걷는 벚꽃 터널의 야경을 즐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앞사람의 발자국을 밟으며 보이는 데로 감탄사만 연발할 뿐이었다.
사진 한 컷 찍을라치면 일행을 놓치고 말뿐 아니라 뒷사람이 기다려서 미안해 눈에만 담을 뿐이었다. 어린아이를 동행한 아빠들은 아이를 어깨 위에 올려서 걷지만 이도 내렸다 올리기를 반복했다. 축제를 즐기는 것보다 인파에 밀려 스치는 관광이었다. 시간은 자정이 다 되어갔지만, 벚꽃 길은 절반도 걸어보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이날 진해시에 모인 인파가 270만 명이라고 했다. 그 속에 나 또한 인산인해의 티끌이 되었다. 그 무리의 표정은 즐겁고 감탄 속에 젖어 있었다. 축제 길 인파에 시달림은 즐거움이었다.
몇 년 전 칠월에는 실크로드 여행길에 올랐었다. 서안에서 난주로 가기위해서는 기차를 열두 시간 타야 한다고 했다. 승차시간은 저녁 열 시인데 여섯시에 역 광장에 도착했다. 기차를 탈 때까지 주의사항은 소지품과 일행을 잘 챙기라고 신신당부했다. 별 의미를 두지 않고 들었다. 천안문광장 만큼 넓은 역 광장에 내리니 사람으로 꽉 차 있었다. 발 들이밀 틈도 없었다.
이 많은 사람이 기차에 탈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중국 가이드가 흰 깃발을 들고 왔다. 차 속에서 들은 주의사항을 한 번 더 강조하며 세 줄로 세웠다. 이 광장 사람이 다 탈거니까 줄을 잘못 따라가면 일행과 함께 기차를 탈 수 없다고 했다. 기차표도 없고, 좌석도 열차 칸도 모르는 상태였다.
우리 일행은 여행용 가방을 연결하여 고리를 만들어 줄을 섰다. 앞사람의 옷과 머리 모양을 눈여겨보며 한발 한발 밀려 옮겨졌다. 대기실이 눈앞이지만 거리는 좁혀지지 않고 날은 어두워졌다.
두어 시간 밀리고 밟히며 대합실 안에 들어왔다. 2등실 대합실은 2층에 있었다. 2층을 오르는 계단까지 가지도 못 하고 희미한 불빛 아래 앉지도 못한 채 여행용 가방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서 있을 뿐이었다. 역 대기실이 마치 콩나물시루 같았다. 시끄럽고, 덥고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냄새가 낫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부채를 부치면 멀리 있는 냄새까지 내 코로 들어오는 것 같아 줄줄 흐르는 땀만 수건을 적실뿐이었다. 발밑에서 이상한 냄새가 올라왔다. 누가 작은 볼일을 본 모양이었다. 물기가 신발과 여행용 가방에 묻었지만 어쩔 수 없이 견뎌야만 했었다. 난 숨통이 막히는 고통이었지만 중국 사람들은 늘 있었던 일처럼 대합실에 들어온 것으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두 시간 남짓 기다려 기차 출발시각이 넘었지만, 사람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우리 일행들의 불평과 고통을 호하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출발시각이 30분쯤 지났을 때 개찰구 부분에서 움직임이 보였다. 밀려밀려 2층 대합실에 올라서니 가슴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기차를 보니 너무 반가웠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좌석을 찾아간 칸은 4인실 2층 침대칸이었다. 내 자리는 2층이어서 오르내리기는 불편했지만 누울 수 있어서 좋았었다. 중국 기차는 객실과 복도가 따로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복도식 아파트와 같은 구조다. 객실은 지정 침대가 있어서 탄 인원이 한정되었지만, 복도는 입석 승객인지는 모르지만 금방 꽉 찼다.
참고 참았던 화장실을 갔지만 벌써 사용한 사람들이 많았는지 오물이 변기 위로 올라와 볼일을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바닥에는 소변이 기차 바닥 틈 사이로 빠져나가 고여 있지 않았다. 염치불구하고 바닥에서 볼일을 봤다. 일찍 먹은 저녁이 소화가 다 되었는지 배도 고파왔지만 참아야 했다.
12시가 훨씬 넘어 기적이 울리며 기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가방을 베고 누웠다. 무리 속에서 겪은 일이 6.25 피난길을 연상시켰다. 기다림에 지쳐 기차의 덜커덩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들었다.
6·25 때는 피난민들의 아우성과 발악의 극치인 인산인해였지만 축제와 여행길의 인산인해는 고생도 즐거움이어서 추억이 되었다.
8. 천 개의 입 / 최해숙
봄은 여자의 치마 끝에서 오고 가을은 남자의 트렌치코트에서 온다고 했던가. 트렌치코트는 아니지만 셔츠만으로도 가을을 느끼고 싶어 옷 가게를 기웃거렸다. 주변 가게를 샅샅이 뒤지다 보니 뒷골목에 분답지 않은 옷집이 있었다. 마당에서 어슬렁거리던 연기가 마루밑으로 스미듯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신임사또 기생 점고하듯 하나하나 뒤적였다. 이것은 모양은 예쁜데 색이 맘에 안 드네, 이것은 색은 고운데 배가 가려지지 않네, 이 옷은 모양도 색도 마음에 드는데 내용을 모르는 글씨가 있네…. 이 집에서도 빈손으로 나가나 하는 순간 괜찮은 옷이 눈에 띄었다.
참으로 무르익은 가을 색이었다. 무르익었다는 표현이 맞을까? 여름내 해와 달의 기운을 받아 치열하게 살아냈던 한 생이 한 점 수분마저 다 소진하고는 가만가만 땅에 내려앉아 영겁의 열반에 든 색, 그 색이었다. 그 바탕에 아직은 세상의 빛놀음에 미련이 남은 이파리들이 팔랑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가격이 높았지만 살림을 거덜낼 정도는 아니었다. 더하여 비칠 듯 말 듯 한 망사천으로 불룩거리는 뱃살까지 감싸주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행여 묻어 있을 먼지를 생각해서 손빨래를 하고, 향 좋은 유연제에 담궜다가 말렸다. 며칠을 더 아껴두었다가 모임이 있어 옷을 꺼냈다. 아랫도리옷과 색이 맞는지, 겉옷과 잘 어울리는지 거울 앞에서 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뭇잎이라면 가운데 잎맥도 있고 가장자리에 톱니모양도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뭇잎이 아니었다. 나뭇잎 흉내를 내고 있는 입이었다. 낙엽과 어우러지는 가을 정취를 느끼고 싶어 고른 옷에 여름날 태양처럼 무서운 입이라니.
수많은 입으로 몸을 가린다고 생각하니 난감했다.그렇다고 머리만 쥐어뜯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장 옷가게로 달려갔다. 한 마디로 거절 당했다. 세탁한 옷을 누가 바꿔준다던가. 때로 민들레의 깃털보다 더 가벼운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딱 잘라 거절을 당하고 보니 마음에 슬슬 변화가 생겼다. 구렁이 알 같은 돈을 주고 산 옷, 입 모양의 문양이 아니면 아무 문제가 없는 옷이다. 누굴 주자니 아깝고, 버리기는 더 아까웠다. 입어야 했다. 눈 딱 감고 입기로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열반에 든 색이어서일까. 입을수록 편하고 태가 났다. 어쩌다 오겹배를 하고 앉아 있으면 휘장처럼 늘어진 망사가 민망한 마음까지 가려주었다. 여행을 할 때도, 행사가 있을 때도 즐겨 입었다. 떨어질 수 없는 연인처럼 어딜 가나 한 몸이 되었다. 우리 속담에 '백 일 붉은 꽃 없고 천 일 좋은 사람 없다'는 내용이 있지만 저야 사람이 아니니 마음 상할 일도 변할 일도 없지 않는가. 언제든 흔들리는 건 사람이요, 변하는 것 또한 사람의 마음이니까. 한데 아니었다. 절대불변의 진리에도 예외는 있고 변하는 게 진리였다.
언제 어느 자리에 있든 말없이 미소만 머금고 있던 입이 어느 때부터인가 투덜대기 시작했다. 누구는 사람이 왜 그런지 모르겠다로 시작된 푸념은 끝이 없었다. 그저께 만난 친구는 너무 자기 자랑만 하더라, 누구는 상대의 말은 안 듣고 제 주장만 하더라, 그 사람은 옷을 왜 그렇게 입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방금 지나가는 저 차 봐라. 운전하는 꼬락서니가 개차반이다 등등. 천 개의 입이 저마다 보이는대로 느끼는대로 한 마디씩 해대니 머릿속은 수천 마리의 벌 떼가 들어앉은 듯 왕왕거렸다.
벌을 치는 이가 꿀을 따려면 벌집 속에 남은 벌을 쫓아내야 일이 쉽다. 그럴 때는 연기를 피운다. 하나 나는 벌이 아닌 사람이다. 천개의 입이 제아무리 왕왕거려도 연기로 다스릴 수는 없다. 알고보면 내 허물을 덮어주며 열반에 든 듯 빼물고 있던 입은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얌전을 떨었던 나였기 때문이다. 남의 좋은 면보다는 안 좋은 면에 더 열을 올리는 그 모습이 나의 본성임을 하늘은 몰라도 스스로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근본 성정이 어질지 못하니 누군가의 도움이라도 받아야 무서운 입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
마음을 다스리는 글과 음악에 기대보려 했지만 글을 덮고 음악을 끄는 순간 약효도 떨어졌다. 종교의 힘을 빌어보려 법당에 앉아 오래 부처님과 속엣말을 주고 받아도 절 문을 나서는 순간 허사가 되기 일쑤였다. 개꼬리 삼 년을 묵혀도 황모 안 된다고 사람의 본성을 바꾸는 일이 그리 힘들 줄은 몰랐다. 그토록 용을 써도 떠나지 않던 머릿속 벌들이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날개를 접었다. 천개의 입도 말문을 닫았다.
얼마 전, 십여 년을 몸담았던 단체로부터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말을 듣게 되었다. 인간의 소통수단으로 생겨난 말이라는 게 깨알 만하던 것이 집채 만해지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둘 수 있는 속성을 가진 것이긴 하지만, 내가 갇히게 될 줄은 생각을 못 하고 살아왔다. 턱도 없는 자만이었다.
가슴 속에서는 그전보다 더 많은 벌떼가 와글거렸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놀라기도 하고 저마다의 입장에서 이런저런 말이 나올 수는 있겠지만, 전후좌우를 살피지 않은 처사라 여겨져 실망스러운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용광로를 안은 마음으로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보냈다. 만물이 얼어붙는 이즘에서야 용광로의 불길이 잦아드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평생 도를 모르고 살아온 터라 깨달음도 지혜도 부족한 사람이다. 하여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갱년기 증세처럼 지금도 서운한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곤 한다.
법구비유경 언어품言語品에 입안의 도끼라는 말이 나온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입 안에 도끼가 생기며 그것이 스스로를 상하게 하니 경계하라는 불가의 가르침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자만의 꼭대기에서 건들거리는 나를 상하게 한 것은, 나만큼이나 어리석은 누군가의 도끼라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나만 아프다고 생각했었다. 한데 천 개의 입이 말문을 닫으며 도가 튼 것인지 어쭙잖은 걱정이 가슴을 비집고 든다. 내 입에서 튀어나간 천 개의 도끼는 누구의 가슴에 박혀 피 흘리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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