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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대관령에서부터 동쪽으로 경포대와 정동진을 있는 트레킹 코스 바우길은 현재 11개의 구간이 탐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서쪽으로는 우리나라 유일의 고위평탄면인 대관령 고원길로 뻗어나가고, 또 경포대에서 북쪽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오징어잡이가 가장 왕성해 마치 동해바다 전체를 매일 아침마다 부두에 건져놓은 듯한 주문진항과 주문진의 향호 호수를 따라 계속 길이 만들어질 것 같습니다.
아뇨. 만들어지다니요. 만들어지는 길은 없습니다. 바우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옛날 우리 조상들이 걸었던 길을 연결해 나갑니다. 산길의 경우는 산림청에서 우리보다 앞서 잘 정비해 놓은 등산로를 구간구간 편입시키고, 도시 인근의 야산과 들길은 강릉시가 정비해 놓은 탐방로를 이용합니다. 그리고 폭우 때 길이 끊긴 곳은 마치 그곳에 옛날부터 길이 있은 듯한 모습으로 새 길을 내어 전체 탐방로를 이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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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항진에서 중앙시장으로 가는 제방길.
- 사람들은 더러 저에게 따지고 항의하듯 그게 너희 길이냐고 말합니다. 너희길도 아닌데 왜 함부로 바우길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난리냐고 제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듯 호통을 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대답합니다. 저는 한 번도 이 길을 저희 길이라고 말한 적도 없고, 저희가 만든 길이라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길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 왔지요. 더러는 지금도 걷고, 더러는 아주 잊혀져 인적이 끊긴 길도 있습니다.
산속에 있는 길인데도 지금도 걷는 길은 산림청이 등산로로 잘 정비해 놓은 길이고, 묻힌 길은 예전에 나뭇꾼들이 다니거나 마을과 마을을 평지길 대신 몰래 숨어 넘나들던 산길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찾아내 연결하고, 하루에 걸을 만한 구간을 정하고, 구간마다 특색을 지어 이름을 정하고, 거기에 이야기를 넣어 마치 새로운 길처럼 생명력을 불어넣어 세상에 소개하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새로 이 길을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길을 연결하다 보면 때로는 그 연결이 참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소개하는 바우길의 제6구간 ‘굴산사 가는 길’이 바로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5구간이 교산 허균이 태어난 사천 애일당 앞 바닷가에서 출발해 남쪽으로 경포대와 경포호수, 허균·허난설헌이 자란 초당마을, 그리고 동양 최대의 해송숲을 지나 남항진까지 왔는데, 제6구간이 시작하는 남항진에서는 무작정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갈 수 없습니다. 강릉비행장이 해변길이든 해변 옆길이든 가로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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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구간 종착지인 굴산사터 당간지주.
- 길을 돌려서 갈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여기서 남쪽으로 안인이나 정동진으로 나가자 해도 1구간에서 5구간까지와는 다르게 강릉시 외곽지역들을 통과해야 합니다. 아무리 들길 기분을 내도 시내 변두리길이 될 수밖에 없는데, 시내길도 아니고, 변두리길도 아니고, 들길도 아니고, 열 번도 넘게 코스를 탐사했는데 번번이 길 모양이 제대로 안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홀연히 결단을 내렸습니다. 해결은 뜻밖에 간단했는데, 정답은 ‘아닌 것을 그게 아닌 것처럼 하지 말자’였습니다. 시내 변두리를 통과하면서 시내 변두리길이 아닌 것처럼, 완전 들길이거나 완전 산길이 아닌데도 들길이나 산길인 것처럼 길을 내려고 하다 보니 길 모양도 이상해지고 코스 모양도 이상해졌던 것이죠. 그래서 오히려 정공법으로 남항진 바다에서 강릉시내 중앙시장으로, 최대한 숲길과 들길을 살려 바로 코스를 뽑았습니다. 그러니 딱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모양 좋고 물 좋은 해산물 중앙시장으로 다 모여
강릉 중앙시장은 영동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입니다. 동해바다에서 나는 가장 모양 좋고 물 좋은 해산물이 이곳으로 다 모입니다. 해산물뿐이 아닙니다. 농산물도 가장 품질 좋은 것이 이곳으로 옵니다.
예부터 ‘동대문 밖 강릉’이라고 했습니다. 동대문 밖을 나가서는 강릉이 가장 살기 좋다는 뜻인데, 강릉시장 역시 동대문 밖을 나와서는 가장 큰 시장이었던 것이죠. 시장만 큰 게 아니라 물건관리도 아주 특별합니다. 지금도 나이 드신 강릉 어른들은 시장에 들러 ‘강릉 물건들은 맛보다 때깔로 판다’고 말합니다. 무 하나를 팔아도, 파 한 단을 팔아도 강릉시장은 흙 묻은 물건을 그대로 팔지 않습니다. 아이 얼굴처럼 말끔하게 씻어 내옵니다. 수산물시장이든 농산물시장이든 일단 시장에 들르면 ‘와, 여기 물건 참 좋다!’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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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강릉 중앙시장 풍경. 6구간 걷는 재미를 배가시켜주는 곳이다. / 2. 국보 제51호 강릉 객사문. 부석사 무량수전처럼 기둥이 배흘림기둥으로, 요모조모 뜯어보며 한참을 즐길만하다. / 3. 굴산사 가는 길 도중에 지나게 되는 강릉시 명주동의 칠사당. 조선시대 관공서 건물로 호구,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비리 단속 등 일곱 가지 정사를 베푸는 곳이라 하여 칠사당이라 했다.
- 거기에 또 하나, 강릉 중앙시장의 먹자골목 역시 강릉뿐 아니라 인근 영동지역 남북백리에 소문난 곳입니다. 바우길 단체걷기를 할 때는 일단 중앙시장에서 모두 흩어집니다. 식성따라 점심을 먹고, 시장을 둘러보며 구입할 물건 구입해 택배 부탁하고, 시간을 정해 다시 모이는 곳이 단오 무렵엔 단오기념관 앞, 보통 때엔 새로 복원한 강릉 임영관의 객사문 앞입니다.
혜곡 최순우 선생과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선생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배흘림기둥이 어떤 것인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다 잘 압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부석사의 무량수전 기둥이 바로 배흘림기둥이죠. 국보 제 51호 강릉 객사문의 기둥 역시 배흘림기둥인데, 무량수전 기둥보다 더 굵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굵다고 합니다. 요즘 어느 도시에 가나 자기 지역 관아들을 잘 복원해 놓았는데, 강릉관아가 특별한 것은 1920년대까지 남아 있던 강릉관아 사진을 바탕으로 그것을 그대로 복원해 건물은 새것이지만 위치와 크기와 모양은 옛날 그대로라는 것이죠.
이 길을 단체걷기를 할 때 점심을 먹고 다시 모이면 모두 첫마디로 묻는 말이 ‘무얼 먹었느냐?’입니다. 그리고 상대의 대답을 들으면 왠지 내가 먹은 것보다 상대가 먹은 게 더 맛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죠. 그만큼 강릉시장도 풍성하고 강릉시장의 먹자골목도 풍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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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굴산사 가는 길의 운치 그윽한 겨울 송림길.
- 여기서부터 다시 걷는 길은 잠시 시내 지역을 벗어나 역시나 강원도의 바우길답게 울울창창한 소나무길입니다. 강릉에 모산봉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어릴 때 우리는 여기에 올라가면 일본이 보이는데, 일본사람들이 깎아놓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 같다고 해서 밥봉이라고도 부르는데, 실제로 조선 중종 때 강릉부사 한급이라는 사람이 강릉지역에 큰 인재가 많이 배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산꼭대기를 석자 세치를 깎아내렸는데, 시대 따라 전설이 변하듯 우리는 그걸 일본사람이 그랬다고 믿었던 것이죠. 그런 모산봉을 얼마 전 강릉사람들이 다시 산꼭대기까지 한 삽 한 삽 흙을 퍼올려 석자 세치를 돋아놓았습니다. 그런 이야기 하나 속에도 강릉사람들은 강릉사람으로서의 애향심과 긍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못난 관리 하나가 와서 모산봉을 깎았겠느냐, 우리는 특별하다, 하는 긍지가 그 이야기 속에 집단무의식처럼 배어 있는 것이죠.
강릉단오의 주신 범일국사 탄생지 학산도 지나
사람들은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는 말을 합니다. 살기는 진천땅이 좋고, 죽어서 묻힐 곳으로는 용인이 좋다는 뜻인데, 아마 그래서 소문난 묘지들이 용인에 많은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강릉에도 이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생거모학산 사거성산’이라는 말인데, 살기엔 모산과 학산마을이 좋고, 묫자리 좋은 곳은 바우길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대관령 아래 성산면이 좋다는 뜻입니다.
모산봉을 넘으면 첫눈에도 아주 아늑한 산속 평지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학산땅입니다. 강릉단오의 주신 범일국사가 태어난 곳이고, 그리고 신라시대 때 불국사나 황룡사보다 더 큰 거찰 굴산사가 있던 곳입니다. 사진 속의 굴산사 당간지주를 보면 아실 겁니다. 당간은 절 입구에 세우는 깃대의 일종인데, 하늘로 향해 우람하게 솟은 이 두 개의 돌은 바로 그런 절의 당간을 양옆에서 고정하는 지주입니다. 우리가 신발만 보고도 그 사람의 키를 짐작하듯 저 당간지주를 보면 그때의 굴산사는 얼마나 큰 절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땅 위의 높이만 무려 5.4m나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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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우길 6구간 ‘굴산사 가는 길’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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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산은 강릉에서 자두(꽤)가 아주 유명한 마을인데, 겨울철도 좋고 봄철도 아주 좋습니다. 낮에 흰 자두꽃무리를 보면 마음이 한없이 밝아지고, 밤 달빛에 보면 절로 시름을 잊게 하는 꽃이라고 합니다.
현재까지 탐사한 바우길 11개의 구간 중에 ‘점심에 무얼 먹을까’를 가장 고민하게 하는 길, 그래서 먹을 때는 참 만족스러운데 다 먹고 나면 어떤 선택을 했어도 다음엔 꼭 다른 걸 먹어봐야지, 하고 다음 방문 때의 점심까지 미리 정하고 가게 하는 길, 그러다 모산봉을 넘어 학산마을로 향하다 보면 대체 강릉엔 가는 곳마다 소나무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하고 저절로 탄성을 지르게 하는 길, 그 길이 바로 ‘굴산사 가는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 구간정보
강릉 남항진 솔바람다리~남항진교~병산동~학산~성덕동~중앙시장(점심 시장에서)~강릉 단오장~모산봉~장현저수지~학산 굴산사지~학산 오독떼기전수관
교통
■ 자가용·전세버스
· 서울 방향 영동고속도로~강릉톨게이트~강릉의료원 앞~강릉우체국앞 4거리에서 우회전~남대천다리(남산교) 건너 좌회전~철길 밑 통과~입암지하차도(월드컵교) 통과~800m 6주공사거리서 우회전~500m 중앙초교 앞에서 좌회전~약 1.5km 지점 우측으로 남항진 입구~남항진.
· 부산·삼척 방향 동해고속도로~남강릉 톨게이트~7번국도 통과(구 동해고속도로)~농산물시장 지나 삼거리에서 좌회전~철길 밑 통과해 바로 우회전~6주공 사거리에서 우회전~중앙초교 지나서 좌회전~약 1.5km 지점 우측으로 남항진 입구~남항진.
/ 글 이순원 바우길 탐사단장 | 사진 이기호 바우길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