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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뒤적거리다 보니 예전 자료가 있어 읽을거리로 올려봅니다.
문화일보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2012년 6월 13일)
1994년 말 기흥탁구훈련원에서 상비군 합동훈련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추억의 선수'가 된 김택수, 유남규, 유지혜, 김분식 등 20명의 국가 상비군에, 청소년 상비군도 25명이나 됐습니다. 그중에는 오정초교 6년 유승민을 비롯한 초등생 4명도 끼어 있었습니다. '코흘리개' 유승민의 연습 상대는 시온고 2년생 양희석(현 에쓰오일 코치) 등 청소년 상비군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세트(21점)에서 14점을 잡아주어야 게임이 됐는데 차츰 격차가 좁혀져 45일간의 훈련이 끝날 무렵에는 맞대결을 할 정도로 유승민의 실력이 향상됐습니다.
유승민 등은 당시 최원석 회장 시절 김창제 전무이사가 꿈나무로 지목해 상비군 훈련에 넣은 것인데, 어린 후배들의 볼을 받아주느라 고생했던 양희석은 "나중에 승민이가 올림픽 금메달을 따면 양복 한 벌과 구두를 받아야겠다"고 코칭스태프에게 투정을 부릴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유승민은 딱 10년 후 2004 아테네올림픽에서 단식 챔피언에 오릅니다.
초등생을 상비군 훈련에 포함시킨 장기적인 안목, 초등생 선수부터 대표 선수까지 50명 가까운 인원이 함께 훈련할 수 있었던 기흥훈련원의 존재가 한국 탁구의 전성기를 가져온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최 회장이 1995년 사임하면서 대표팀의 요람이었던 기흥훈련원이 없어진 것도 이후 한국 탁구의 침체와 무관치 않습니다.
일본 남자탁구 에이스 미즈타니 준(23)은 6월 현재 세계 7위로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권에서 최고 랭커입니다. 일본은 2008 베이징올림픽에 고교 3년생이던 미즈타니를 대표로 발탁합니다. 미즈타니는 32강전에서 그리스의 강자 크리엥가에 완패합니다만, 어린 나이에 밟아본 올림픽 무대 경험은 지금의 그를 만드는 데 큰 힘이 됐을 것입니다.
런던올림픽에는 주세혁, 오상은이 세계랭킹에 의해 개인·단체전에 자동 출전하고 예선을 거친 유승민이 단체전 멤버로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P카드’라는 게 있습니다. 단체전 엔트리 중 부상 등의 사유로 출전하지 못할 경우 내보낼 대체선수를 뜻합니다.
그동안 탁구계는 작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오상은-유승민의 복식이 영 시원치 않자 둘 중 하나를 복식에 강한 노장급으로 대체할 것을 대표팀에서 고려중이라는 소문 때문이었지요. P카드는 미래를 위해, 차세대에게 올림픽 분위기라도 느껴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게 탁구계의 여론입니다. 다행히 오상은-유승민은 지난주 일본오픈 복식에서 준우승하며 호흡을 맞춰가기 시작, P카드를 둘러싼 논란도 자연히 수그러들 것으로 보입니다. 이 논란을 지켜보며 한국 탁구가 그동안 미래보다는 눈앞의 성적에만 연연해 왔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화일보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2012년 6월 5일)
셀룰로이드서 플라스틱으로 탁구공, 116년만의 ‘대혁명’
탁구의 기원은 설이 여러 가지입니다만 19세기 말 더운 나라에서 식민 지배를 하던 영국인들이 테니스를 응용해 실내 게임으로 창안했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습니다. 실내 바닥에 네트를 치고 처음에는 나무에 천을 감은 공, 이후에는 코르크로 만든 공을 나무 판자로 쳐서 넘기는, 그야말로 실내 테니스나 다름없었는데 1898년 셀룰로이드 공을 사용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 크로스컨트리 선수였던 제임스 깁이 미국 여행을 하고 돌아오면서 가져온 장난감 셀룰로이드 공을 게임에 이용했는데, 쇠가죽으로 만든 라켓으로 공을 칠 때마다 ‘핑(ping)’ ‘퐁(pong)’ 소리가 난다고 해서 ‘핑퐁’이라는 새로운 이름도 얻게 됐다고 하네요. 그리고 1902년 라켓에 붙이는 ‘러버’의 발명으로 탁구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됩니다.
탁구공은 그 크기가 38㎜에서 40㎜로 한 번 바뀌었을 뿐 소재는 변함없이 셀룰로이드였습니다. 그런데 2014년부터 일반 플라스틱으로 대체된답니다. 셀룰로이드는 1869년 미국의 화학자 J W 하이어트가 발명한 플라스틱의 일종인데 섭씨 170∼190도에서 발화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다량의 탁구공은 항공 운송을 거부당합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2004아테네올림픽이 열리기 전 탁구 공인구가 무려 두 달이나 걸려 선박으로 운송됐다는 보고를 받고 그 연유를 조사합니다. 그 결과 탁구공이 그 소재 때문에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위험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IOC는 즉각 국제탁구연맹(ITTF)에 공의 소재를 바꾸라고 강력히 권유하고 ITTF는 2012런던올림픽이 끝난 후 교체한다고 발표합니다. 하지만 준비 과정과 회원국들의 반발로 그 시행을 2014년으로 미뤘습니다.
2014년부터 일반 플라스틱 공이 사용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셀룰로이드 공은 겉으로는 매끈하게 생겼지만 크게 확대해 보면 표면에 미세한 돌기가 있습니다. 또 사출이 안 돼 반구 두 개를 붙여 만들기 때문에 가운데 접합부위가 있습니다. 이런 울퉁불퉁한 표면과 접합 부위가 러버와 만나 천변만화(千變萬化)를 일으키게 됩니다.
일반 플라스틱으로 공을 만들 경우 통으로 사출할 수 있고 표면도 매끈하게 완성된답니다. 그러나 매끄럽기 때문에 기존의 탁구공이 보여주던 회전은 크게 줄지도 모릅니다. 야구공으로 비교하자면 실밥이 없는 공이 되는 것이죠. 또 일반 플라스틱의 비중(1.58)은 셀룰로이드(1.32)보다 크기 때문에 무게도 현재(2.7g)보다 더 나갈 것으로 보입니다.
116년 만에 ‘대혁명’을 맞이하게 되는 탁구는 결국 힘이 좋은 선수에게 유리해지겠지요. 한국 탁구에는 분명 악재입니다.
문화일보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2011년 05월 18일(水)]
코치는 퇴장, 선수는 실격… 中탁구 한국 견제 너무하네
탁구공은 원래 직경 38㎜에 무게 2.5g이었습니다만 2000년부터 40㎜와 2.7g으로 더 크고 무거워졌습니다. 그래도 구기종목 중에서는 가장 가볍고 작습니다. 공은 작지만 세계탁구선수권은 항상 120개국 이상이 참가, 올림픽 출전국보다 많을 정도의 초대규모 행사입니다. 종목도 5개나 돼 선수들은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4~5게임씩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래서 1999년부터는 2년마다 열렸던 대회를 개인전과 단체전으로 구분해 매년 치르고 있습니다.
개인전 대회였던 로테르담 세계선수권이 16일 폐막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중국이 전 종목을 휩쓸었습니다. 중국은 실력도 뛰어나지만 ‘전 종목 석권’이라는 명제에 너무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1995년 톈진(天津) 세계선수권에서 김택수는 중국의 이런 집착 때문에 첫 세계 제패의 꿈이 깨지고 맙니다.
당시 김택수는 8강전에서 중국의 왕타오를 3-0으로 누르고 4강에 진출합니다. 그러나 국제탁구연맹(ITTF)은 김택수의 라켓을 검사한 결과 고무풀에서 규정치의 6배나 되는 유해물질이 나왔다며 다음 날 오전 10시 집행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다루겠다고 발표합니다. 그러나 ITTF는 다음 날 오전 8시에 회의를 소집해 김택수를 실격시킵니다.
당시는 고무풀의 유해물질 규정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종의 ‘계도기간’이었고 톈진대회에서도 24명이 주의를 받았지만 가혹한 실격 처리는 김택수가 유일했습니다. 5종목 중 꽃인 남자단식에서 김택수는 중국에 큰 위협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ITTF를 움직이는 중국측이 손을 쓴 의혹이 짙습니다. 김택수는 그러나 3년 후 1998방콕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의 쿵링후이, 류궈량을 연파하고 남자단식 금메달을 따내 멋있게 복수합니다.
이번 대회에서도 중국의 그런 입김이 엿보였습니다. 남자단식 16강전에서 유승민이 중국의 세계 1위 왕하오를 3-2로 앞서고 있을 때 주심이 경기 중 조언을 했다고 이철승 코치를 경고 조치도 없이 곧바로 퇴장시킵니다. 유승민은 이후 두 세트를 내주고 역전패했습니다. 여자복식의 이은희-박영숙 조는 16강전에서 중국의 펑야란-무쯔 조를 4-0으로 꺾고도 이은희의 러버 두께가 기준치를 넘겨 실격당했습니다.
두 사례 모두 중국 선수와의 경기에서 벌어져 의혹이 생깁니다. 이은희는 러버 두께가 규정치(4㎜)보다 0.14㎜ 두꺼웠다는데 이는 러버를 뗐다 붙였다 하는 과정에서 먼저 발랐던 접착제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은 부주의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세계 최강 중국을 견제할 국가는 한국뿐입니다. 따라서 비중 있는 국제대회에서 중국의 한국 견제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입니다. 국내대회에서부터 철저한 규정 준수를 생활화해 꼬투리를 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문화일보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2012년 01월 11일(水)]
탁구계에 새해부터 ‘태풍’이 몰아쳤습니다. 현존하는 남자 탁구팀 중 가장 역사가 오랜 인삼공사팀이 태풍의 진원지입니다.
인삼공사 탁구단의 뿌리는 1963년 창단한 전매청입니다. 1966년 방콕아시안게임 남자단식 결승에서 이 팀 소속이었던 김충용(에쓰오일 총감독)이 당시 세계 최강이던 일본의 하세가와를 꺾고 우승했는데 그 금메달 덕에 태국에 금 1개 차로 뒤질 뻔했던 한국은 종합 2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전매청보다 3년 먼저 농협이 남자 탁구팀을 창단했지만 몇 년 지속되지 못하고 해체된 바 있어 인삼공사 탁구팀은 그 역사가 반세기에 이르는 국내 최고의 팀이자 오늘의 한국 탁구를 일군 비옥한 토양이었습니다.
인삼공사팀은 새해 벽두 서상길 감독, 이상준 코치, 오상은 플레잉코치와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지난해 말 최강전에서 오상은이 0-11이라는 치욕적인 스코어로 패한 것에 대한 문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어 열린 종합선수권에서 4관왕을 차지한 바 있어 성적 운운은 그야말로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합니다.
인사 태풍의 실제 원인은 ‘소통 부재’입니다. 오상은의 충격적 패배는 최강전이 방송 중계 문제로 갑자기 일정이 잡혀 계약되어 있던 폴란드 리그와 겹치는 바람에 나가지 못하게 되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생긴 해프닝입니다. 오상은은 폴란드에서 인기가 높아 그 클럽에서는 오상은이 연말 대회에 출전하지 않을 경우 흥행에 큰 지장이 있다면서 지급을 미루고 있던 연간 개런티를 모두 주지 않겠다고 협박(?)했다고 합니다. 1억원이 넘는 돈도 돈이지만 당장 내년 시즌 재계약이 걱정된 오상은은 정신없이 경기를 치르다 2세트에서 치욕의 패배를 당하게 됩니다.
오상은은 “회사 측에서 계약 내용을 알고 있다”고 했지만 단장과 주무가 모두 바뀐 구단 측은 금시초문이었다고 합니다. 전임 단장과 신임 단장의 인수인계, 또는 감독과 단장과의 소통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실업 탁구팀은 지금까지 회사 측에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인지 감독이 사실상 팀 운영을 전담해 왔습니다. 프로팀의 입장에서 보자면 ‘무슨 팀 운영을 이렇게 해’ 할 정도로 말이죠. 인삼공사는 남자 프로농구, 여자 프로배구팀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 프로팀과 탁구팀 모두의 단장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는 탁구팀 운영이 괘씸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탁구인들은 이제 탁구도 프로로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로화로 가기 위해서는 팀을 운영하는 자세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실업 탁구팀 감독들은 이번 인삼공사 사태를 일종의 경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011년 12월 14일(水)]
탁구는 중국이 최강입니다. 하지만 중국 탁구도 1990년대 위기를 맞았습니다. 경제 발전과 함께 많은 선수들이 해외 진출을 희망했고 그 결과 ‘부메랑 효과’에 휘청거렸습니다. 1993년 예테보리 세계탁구선수권에서 현정화가 여자 단식 금메달을 딴 것도 이런 부메랑 효과의 덕을 좀 본 겁니다. 현정화는 현역시절 중국의 ‘핑퐁 마녀’ 덩야핑을 한 번도 이겨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회 준결승에서 덩야핑이 중국에서 싱가포르로 이민 간 진준홍에게 패하는 바람에 현정화가 ‘어부지리’했습니다. 중국은 자국 내에 슈퍼리그라는 프로리그를 만들어 유망주들의 해외 유출을 막았습니다. 억대 연봉과 고액의 상금 덕분에 이제 중국선수들은 이제 더 이상 해외로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2011년 9월 21일(水)]
대한탁구협회 전무이사를 맡아 지도자에서 스포츠 행정가로 외연을 넓히고 있는 현정화(42)씨는 1993년 세계선수권에서 여자 단식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세계선수권은 올림픽과 달리 국가별 출전 인원이 훨씬 많기 때문에 단식에서 우승하려면 보통 16강전에서부터는 세계 최강인 중국선수들을 연속으로 이겨야 가능합니다. 그때문에 남녀 통틀어 세계선수권 단식을 제패한 한국 선수는 아직 현정화밖에 없습니다.
당시 세계랭킹 1위는 ‘마녀’라는 별명의 덩야핑(38·중국)이었습니다. 현정화는 현역시절 한 번도 덩야핑을 이겨보지 못했죠. 그런데 어떻게 세계선수권 단식 챔피언이 됐냐고요? 덩야핑이 싱가포르의 진준홍이라는 선수에게 져 탈락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귀화한 진준홍이 ‘마당을 쓸어 준 덕분’에 현정화가 정상에 입성하게 된 것이죠. 현정화가 이렇게 우승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세계챔피언은 하늘이 낸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또 ‘중국탁구가 부메랑 효과에 당하다’라는 상자 기사를 송고한 것도 기억납니다.
중국탁구는 이후 A급 선수의 해외 이주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했는데 우승상금이 수억원 대인 자국 프로리그인 슈퍼리그를 창설한 것도 그중 하나입니다. 요즘 중국의 대표급 탁구선수들은 벤츠, BMW 중에서도 큰 놈으로 타고 다닐 정도로 주머니 사정이 좋아져 굳이 외국으로 떠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2011년 06월 08일(水)]
요즘은 예전보다 못하지만 스웨덴은 유럽탁구의 강국입니다. 아펠그렌, 발트너, 페르손 등 ‘5총사’가 건재했던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에는 중국을 꺾고 세계 정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펜홀드로 세계를 제패했던 중국 남자탁구가 펜홀드를 버리고 셰이크핸드 전형을 택한 것도 1989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에서 스웨덴에 완패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스포츠]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2011년 11월 30일(水)]
현정화 뒤늦은 명예의 전당 헌액과 스포츠외교
지난 주 카타르 도하에서 ‘피스 앤드 스포츠’라는 단체가 주관한 탁구대회가 열렸습니다. ‘피스 앤드 스포츠’는 근대 5종 올림픽 메달리스트이자 국제근대 5종연맹 사무총장인 조엘 부주(프랑스)가 5년 전 창립한 단체로 ‘스포츠를 통한 세계 평화’를 모토로 한 비정부기구입니다. 1970년대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 남북 단일팀 등 ‘갈등을 치유하는 스포츠 종목’으로 널리 알려진 탁구가 제1회 대회 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당연한 듯싶습니다.
남북한, 인도, 파키스탄,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 갈등 관계에 있었거나 아직도 그 갈등이 진행되는 10개국이 참가했고 남북한은 남녀 복식조라는 ‘작은 단일팀’을 꾸려 남자 복식에서 금, 여자 복식에서 은메달을 따내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마침 탁구 단일팀을 구성한 지 만 20년 만에 남북이 다시 손을 잡게 돼 더욱 감회가 깊었습니다.
대회가 열렸던 날(22일) 오전 대한탁구협회 현정화 전무가 국제탁구연맹(ITTF)로부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는 인증패를 받았습니다. 탁구 명예의 전당은 1993년부터 시행되고 있는데 올림픽(장애인올림픽 포함)과 세계선수권에서 5개 이상의 금메달을 따낸 선수가 그 대상이 됩니다. 사실 현 전무는 2010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바 있습니다. 은퇴한 지 20년 가까이 되는 현 전무가 뒤늦게 (동 시대에 활약했던 선수들은 대부분 2000년대 초반 헌액됐으니까요) 인정을 받은 것도 그렇지만 새삼스럽게 ITTF가 그 1년 뒤 아무런 사전 통보도 없이 헌액 인증패를 주겠다고 해서, 현지에 있던 대한탁구협회 관계자들은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ITTF는 그동안 명예의 전당 입회자들에게 패를 수여한 적이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이렇게 한국을 극진하게 대하는 ITTF의 태도 변화는 무슨 이유 때문일까요. 바로 대한항공이라는 거대 기업을 이끌고 있는 조양호 대한탁구협회 회장 덕분입니다. 조 회장이 2008년 협회장을 맡은 후 ITTF는 부쩍 한국 쪽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습니다. 뒤늦게 스포츠계에 뛰어들었지만 아시아탁구연맹 부회장, 피스 앤드 스포츠 대사로 선임되고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유치 성공의 주역이 되는 등 조 회장은 국제 스포츠계의 주역으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 문대성 선수 위원 등 아직 두 명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이 있지만 두 분은 조만간 임기가 끝납니다. 한국 스포츠계는 두 분 위원의 임기 만료에 대비해야 하는데 조 회장이 이렇게 국제무대에서 공고한 자리를 굳혀 가는 것은 고무적입니다. 국내 탁구인들도 이런 기회를 살려 ITTF 내에서 주요한 포지션을 많이 따내야 합니다.
[스포츠]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2011년 07월 27일(水)]
우리 기술 ‘트위스트 펜홀더’로 탁구 세계 제패 이루자
1973년 4월 유고 사라예보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중국은 이에리사-정현숙이 활약한 한국에 우승을 넘겨줍니다. 2년 후 인도 캘커타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중국은 거신아이라는 새로운 선수를 앞세워 정상을 차지합니다. 거신아이는 라켓 앞뒤 고무가 성질이 다른, 즉 이질 러버를 사용했습니다. 지금이야 라켓 앞뒤의 고무의 색깔을 반드시 구분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초창기에는 양쪽 고무의 색상이 똑같아 어떤 구질이 들어올지 상대 선수들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1989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 남자단체전에서 중국 남자탁구는 스웨덴에 비참한 패배를 당합니다. 이 대회를 계기로 세계탁구를 지배해 온 전진속공 스타일은 종언을 고하게 됩니다. 중국은 셰이크핸드를 발전시켜 나가는 한편, 또 다른 변칙 스타일을 준비합니다. 바로 펜홀드 라켓의 뒷면까지 이용하는 이면타법입니다. 이 기법으로 무장한 류궈량은 1996 애틀랜타올림픽과 1999 세계선수권을 석권합니다. 중국탁구는 이렇게 3신(新) 정책’, 즉 새로운 선수, 새로운 전형, 새로운 용구로 세계를 지배해 왔습니다. 중국 당국이 운영하는 상하이의 탁구 기술연구소에서는 대표급 선수들이 사용하는 러버를 연구·개발해 냅니다. 1986 서울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당시 박종대 대표팀 감독이 어렵게 구했다는 중국산 러버를 기자에게 보여 준 적이 있는데, 무슨 끈끈이를 바른 것같이 탁구공을 올려놓고 라켓을 세워도 공이 붙어있더군요.
국제탁구계에서는 중국에 대항할 유일한 국가로 한국을 꼽고 있는데, 한국은 거의 모든 용품을 수입에 의존할 뿐 자체 개발한 용구가 없었습니다. 국내 용품 시장이 협소, 경제성이 떨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최근 한 탁구 동호인이 새로운 용품을 개발해 특허까지 받았습니다. 펜홀더의 약점인 백핸드 쪽을 보완할 수 있는 ‘트위스트 펜홀더(Twistpenholder) 라켓’ (일명 트펜)이 바로 그것입니다. 개발자 이종규(47)씨로 경력 8년의 동호인 리그 3부에서 활약하고 있는데 3년 간 이 라켓을 사용해본 결과 자유자재로 강력한 백 드라이브와 스매싱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기존 펜홀드 라켓을 튜닝한 트펜은 자연스럽게 손목이 손등 쪽으로 꺾이게 해 펜홀더에게 셰이크핸더와 같은 백스윙을 할 수 있게 합니다.
국내 선수 중 세계무대에서 괄목할 성적을 낸 선수들은 거의 모두 펜홀더입니다. 백핸드 쪽의 약점에도 불구, 포어핸드 쪽에서는 ‘일발필도’의 한방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종규씨의 바람은 국내선수가 ‘드펜’을 이용해 세계 제패를 하는 것입니다. 관심이 있는 지도자들의 연락을 바란다고 합니다.
[스포츠]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 게재 일자 : 2011년 06월 15일(水)
런던올림픽 탁구단체 ‘고참 유승민이냐, 신예 김민석이냐’
국제탁구연맹(ITTF)은 1995년 탁구의 인기 회복을 위해 월드팀컵을 창설합니다. 더구나 월드팀컵 첫 대회는 그 다음 해 올림픽을 개최하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려 더욱 관심을 끌었습니다.
한국 남자대표팀 멤버는 유남규, 김택수, 이철승이 주전이었고, 국내 셰이크핸드 1세대인 김봉철과 오상은은 차세대 꿈나무로 동행했습니다. 당시 최강은 중국. 중국 남자탁구는 1989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 결승에서 얀 오베 발트너를 앞세운 ‘스웨덴 5총사’에게 참패한 후 홈에서 열린 1990 베이징아시안게임 4강 탈락, 1991 지바 세계선수권까지 부진을 거듭하는 시행착오 끝에 전진속공을 버리고 셰이크핸드로 재무장, 현재까지 세계 정상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공교롭게 준결승에서 이런 중국과 맞붙게 됐습니다. 4강전이 열린 8월13일, 경기장에 들어선 고수배 총감독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챕니다. 이철승이 몸을 풀지도 않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습니다. 고 총감독이 안재형 감독에게 오더를 보여 달라고 하자 안 감독은 뒷걸음치며 도망갔습니다. 뺐다시피 오더를 보니 세번째 단식에 이철승이 빠지고 대신 김봉철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중국에 질 것이 뻔한데, 이참에 꿈나무에게 기회를 주자”는 게 안 감독의 주장이었습니다. 고 총감독은 1시간여 설득 끝에 유남규-김택수-이철승으로 오더를 확정했습니다.
1991년 태극마크를 단 이철승은 1994 아시안게임, 1995 세계선수권 단체전에서 한국의 3단식을 도맡았지만 그때마다 중국 선수에게 져 두 번이나 2-3으로 패하는 빌미를 제공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날은 이철승이 일을 냅니다. 당시는 신예였지만 현재 중국팀 감독이 된 이면타법의 완성자 류궈량(당시 세계 6위)을 완파해 한국의 3-2 승리에 일등공신이 된 것이죠.
한국은 1986 아시안게임 단체전 결승에서 중국을 누르고 우승한 이후 10년 만에 중국을 다시 꺾은 것입니다. 한국은 결승에서 독일을 3-1로 제치고 첫 대회 챔피언에 오릅니다.
지금은 잠잠하지만 곧 탁구계는 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2012 런던올림픽 단체전에 출전할 선수를 뽑는 일 때문입니다. 2004 아테네올림픽 챔피언 유승민(29·삼성생명)이냐, 차세대 중 선두로 치고 나온 김민석(19·인삼공사)이냐 하는 게 논란의 핵심이겠죠.
이철승은 그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포기하고 있다가 출전이 결정되자 두 배의 시너지 효과를 냈던 것 같다. 경험이 많은 선수는 중요한 승부에서는 꼭 제 몫을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유남규 감독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궁금합니다.
[스포츠] ‘다문화 코리아’ 元年 게재 일자 : 2011년 05월 26일(木)
“처음엔 문화차이 고생… 지금은 한국팀 성적이 우선”
中서 귀화한 탁구선수 석하정
▲ 석하정(왼쪽)이 25일 충북 단양에서 열린 KRA컵 탁구최강전 도중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월간탁구 제공
석하정(26·대한항공)은 중국 랴오닝(遼寧)성 안산(鞍山)이 고향이다. 부유한 집안의 고명딸 스레이(石磊·석하정의 중국 이름)는 15세 때인 2000년 4월6일 한국에 왔다. 어린 나이였지만 “새로운 도전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두렵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7년간 얼굴 없는 선수로 지냈다. 국적 때문에 국내 대회에 출전하지 못했고 국내 7년 거주 요건 때문에 고향에도 가지 못했다. 석하정이라는 한국 이름을 얻고 2007년 12월에야 처음으로 대회에 나가게 된다.
지난해부터 국내 랭킹 1위가 된 석하정은 광저우아시안게임에 한국대표로 출전, 꿈을 이뤘다. 석하정은 가슴에 달고 있는 태극마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달 초 열린 세계선수권은 런던올림픽 단식에 나갈 한국 대표 두 명을 뽑는 대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석하정은 64강전에서 탈락, 올림픽 단식 출전권을 박미영(삼성생명)에게 넘겼다. 석하정은 “오히려 홀가분했다. 나는 복식에서 기복이 심하기 때문에 수비수인 박미영이 김경아(대한항공)와 함께 출전하는 것이 한국의 메달 획득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아직 단체전 멤버로 뽑힐 기회가 있고, 도전할 목표가 있어 즐겁다”고 말한다.
자신보다 한국팀의 성적을 먼저 생각하는 석하정에게 ‘귀화선수’라는 수식어로 구분해 온 것이 미안했다. 석하정은 다문화 사회에 접어든 한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국이 좋아서, 한국을 위해 뭔가 하려고 오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석하정은 마땅한 한국 남자가 나서면 결혼할 생각이다. “책임감 있고,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해 주고 거기에 인상도 좋다면 더 바랄 것 없다. 중국 사람과 결혼한다면 아마 중국에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석하정은 한국에 왔을 때 말도 말이지만 문화 차이 때문에 고생했다. “중국에서는 코치에게 손만 살짝 들고 인사한다. 한국은 사제지간, 선후배 사이가 굉장히 엄격하다. 중국에서는 개인 위주인데 한국에서는 조직을 우선 생각한다. 한마디로 ‘군기’가 세다. 외국인 선수에게 언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쳐 주는 코스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스포츠]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 게재 일자 : 2011년 02월 01일(火)
‘원조 탁구신동’ 유남규감독, 영어 열공하는 까닭은 ?
농심탁구단을 이끌고 있는 유남규 감독은 ‘원조 탁구신동’입니다. 1983년 부산 남중 3학년 때 벌써 국가대표가 됐습니다. 광성공고에 진학해서는 1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고등부에서는 단 1패도 기록하지 않았고 그 당시 성인무대를 양분했던 대선배 김완과 김기택도 가끔 이길 정도였습니다. 1988 서울올림픽에서 탁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됐고 유남규는 초대 올림픽 챔피언에 오릅니다.
이렇게 화려하게 선수생활을 마친 유남규지만 아주 창피했던 경험이 있답니다. 1984년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 때인데요. 고1이었던 그는 단체전 남북대결에 에이스로 출전했는데 혼자 3게임을 다 잃어 패배의 멍에를 뒤집어 씁니다. 하지만 유남규는 27년 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던 그 순간이 기고만장했던 자신을 겸허하게 만들고 피나는 훈련을 달갑게 받는 계기가 됐다고 회상합니다.
43세가 된 유남규가 살아오면서 가장 창피했던 순간은 따로 있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입니다. 공항에 내리자 수많은 취재진이 올림픽 탁구 초대 챔피언을 기다리고 있었죠. 그는 탁구가 유럽에서 그렇게 인기가 있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고 합니다. 영어로 질문공세가 이어졌지만 유남규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습니다. “살면서 그렇게 ‘쪽 팔리기’는 처음이었다”고 지금도 말합니다. 사실 미국 마이애미에서 열린 1991년 US오픈 단식 결승에서 프리모락(크로아티아)을 꺾고 우승했을 때도 현지 방송기자가 코트에 들어와 무선 마이크를 내밀어 당황했었지만 그때는 통역이 있어 위기를 넘겼다고 합니다. 유남규는 그때 ‘앞으로 세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영어가 꼭 필요하겠구나’ 생각했지만 그동안 바쁜 것을 핑계 삼아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죠.
그랬던 유남규가 요즘 영어공부를 시작했답니다. 우연히 만난 미국인 청년 덕분입니다. 29세인 마이클은 텍사스 출신으로 작가 겸 컨설턴트인데 얼마 전 한국에 와서 학원 강사일도 했다고 합니다. 마이클은 선수 출신은 아니지만 탁구를 좋아해 국제탁구연맹(ITTF) 레프리 자격증도 갖고 있어 지난해 코리아오픈대회 심판을 보기도 했습니다. 1월 초 열린 종합선수권대회에도 자청해서 라켓 검사 일을 맡아 했는데 이때 유남규를 만납니다. 유남규는 그에게 탁구를 가르쳐주고 마이클은 영어를 가르칩니다. 요즘 보니 마이클이란 친구, 아예 농심탁구단 유니폼을 입고 다니더군요.
유남규뿐만 아니라 농심 선수들도 영어를 함께 배웁니다. 그냥 시키면 하는 선수가 없어 오전 연습이 끝나면 무조건 각자 마이클과 한마디라도 대화를 해야 점심을 먹으러 간답니다. “요놈들 다 죽어가는 표정, 내가 잘 알지요. 하지만 하루 10분의 공부가 나중에 큰 자산이 될 겁니다. 내가 경험자 아닙니까.” 유남규는 2년 후 영어로 기자회견을 자유자재로 하고, 그 다음에는 탁구 관련 국제 업무를 해보는 것이 목표라고 합니다.
[스포츠] 이동윤의 스포츠인생 게재 일자 : 2010년 12월 08일(水)
운동선수가 경제학 박사학위… 中 덩야핑을 배우자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의 위력을 가장 잘 보여준 종목은 역시 탁구였습니다. 전 종목 금메달을 휩쓸었을 뿐 아니라 개인종목에서는 혼합복식을 빼고는 모두 은메달까지 독식했으니까 말이죠. 탁구를 중국의 생활체육으로 보급한 주인공은 마오쩌둥(毛澤東)입니다. 그는 1950년대 세계 최강이었던 일본탁구를 보고 탁구를 생활체육화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공간도 적게 들고 비용도 크게 들 것이 없으니 안성맞춤이었겠죠. 그래서 지금도 마을마다 탁구대가 여러 대 있을 정도로 중국인들이 가장 즐기는 생활체육이 바로 탁구고, 국기(國技) 또한 탁구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탁구선수 중 지금도 가장 인상이 남는 선수는 ‘마녀’로 불렸던 덩야핑입니다. 올해 37세가 된 덩야핑이 처음 국제무대에 나온 것은 1989년 도르트문트 세계선수권이라고 기억합니다. 당시 세계대회는 중국 남자팀이 단체전에서 스웨덴에 완패해 그들의 전매특허였던 전진속공을 포기하는 계기가 됐던 대회입니다. 신인이었던 덩야핑은 도르트문트에서 썩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1990년 아시안컵에서 우승하면서 이름을 알렸고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2관왕 2연패, 세계선수권 3관왕 2연패 등의 업적을 이룬 뒤, 1997년 24세의 한창 나이에 은퇴합니다.
덩야핑은 사실 은퇴 후의 행보가 더 존경스럽습니다. 명문 칭화대 영문과에 입학했는데 입학 당시에는 영문 알파벳도 잘 몰랐지만 탁구하듯 하루 14시간 동안 공부에 매달려 2001년 졸업합니다. 이어 2002년 영국에 유학, 노팅엄대학에서 현대중국학으로 석사를 받았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덩야핑은 2008 베이징올림픽 당시 선수촌 부주임 겸 대변인을 맡아 국내에도 잘 알려졌는데 올해는 중국공산당 기관지 런민르바오(人民日報)의 부 비서장이 돼 언론인으로 변신했습니다.
물론 덩야핑은 세계 스포츠계에서도 흔치 않은 예입니다. 800년에 가까운 케임브리지대 역사에서 세계 정상급이었던 운동선수가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덩야핑이 처음이라고 하니까요.
교육당국이 운동선수들에게 공부를 시키려고 각종 제도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최근 주말리그로 학생대회를 바꿔 나가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포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공무원들이 책상에서 만들어내는 제도는 그리 효과가 없다는 것이 그동안 증명되어 왔습니다.
덩야핑이 이른 은퇴를 결심하고 공부를 시작한 것은 1996년 사마란치 당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그녀를 IOC선수위원으로 선발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합니다. 덩야핑을 보면서 우리 학생 선수들에게도 어떤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지 제도만으로 억지로 공부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포츠]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 게재 일자 : 2010년 11월 10일(水)
감독에겐 ‘벤치’가 현장… 선수 곁을 떠나지 마라
한국 남자탁구 선수들은 1980년대 이전만 해도 국제대회에 나가면 여자선수들의 짐이나 들어주는 존재였다고 탁구인들 스스로 말합니다. 여자에 비해 성적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예외가 딱 한 명 있었습니다. 1966년 방콕아시안게임 남자단식에서 일본의 세계적인 선수들을 연파하고 금메달을 따낸 김충용입니다. 그의 금메달로 대회 폐막일 오후까지 주최국 태국에 금 1개차로 뒤져 있던 한국은 기적적으로 은메달 숫자에서 앞서 종합 2위로 복귀했으니 그 금메달은 보통 귀한 금메달이 아닙니다.
삼성 탁구단에서 31년 동안 코치, 감독, 총감독을 역임하고 지난해 퇴임한 김충용씨는 지하철 공짜표가 나오는 노년(67세)이지만 올해 창단한 남자신생팀 에쓰오일의 총감독을 맡아 현역에 복귀했습니다. 지난달 열린 전국체전은 에쓰오일의 데뷔전이었는데 김충용씨의 벤치 복귀전이기도 했습니다. 일흔 가까운 나이의 총감독은 직접 벤치에 앉아 선수들에게 작전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덕분에 추첨운까지 좋았던 에쓰오일은 데뷔전에서 깜짝 은메달을 따냈습니다.
에쓰오일은 창단 팀이다 보니 실질적으로 코치 일을 하는 양희석 플레잉코치까지 선수로 나서야 하는 형편이지만 김 총감독 본인 의사에 따라 직접 벤치에 앉지 않아도 누가 뭐랄 사람은 없습니다. 삼성에 있을 때도 1990년대 후배인 강문수씨에게 감독직을 물려주고 총감독을 했으니 직접 벤치를 지키기는 20여년 만입니다. 벤치에 앉은 최고령 지도자 신기록을 세운 김충용씨를 보고 탁구인 중 7할 정도는 “보기에 좋았다”고 했고 3할 정도는 “그 나이에 무슨 벤치를 보시느냐”고 했답니다. 그 3할의 대부분은 현역 실업팀 감독들이었다 합니다.
요즘 실업팀 감독들의 상당수는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입니다. 김충용씨가 탁구협회의 중책을 맡고 있을 때 중학생 선수였을 겁니다. 그런데 이들 중 상당수는 벌써부터 벤치를 떠나 있습니다. 김 총감독에게 “본부석에나 계시지…” 했던 것도 자신은 본부석에 앉았는데 대선배가 벤치를 보는 것이 불편해서 그랬을지 모릅니다.
선수의 개인 기량이 승부를 결정짓는 탁구지만 벤치에서 결정적인 타임을 부르거나 세트 사이의 짧은 시간에 주는 작전 지시로 게임당 2점 정도는 따낼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감독이 카리스마가 대단하거나 스타 출신일 경우 상대에게 주는 위압감도 상당합니다. 프로배구 현대캐피탈의 김호철 감독이 부임해 보니 현대 선수들은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의 얼굴만 봐도 주눅이 들어 있어 “신 감독은 내가 대표팀에 있을 때 공 주우러 다녔다”고 말하며 선수들 기 살리기에 힘을 쏟았다고 할 정도이니까요.
아직 어린 감독이 벌써 벤치를 떠나 있는 것은 조로(早老)를 자처하는 것입니다. 새는 높이 날아야 멀리 볼지 모르지만 탁구 감독은 테이블 가장 가까운 곳에 붙어 살아야 합니다.
[스포츠]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 게재 일자 : 2010년 09월 15일(水)
‘져주기’ 보다 ‘경쟁’ 택한 삼성생명탁구팀 ‘파이팅’
2009년 세계탁구선수권에 파견할 대표 선발전에서의 일입니다. 공격하는 수비수로 당시 2년간 국내에서 무패 가도를 달리던 주세혁(삼성생명)과 국내 정상급 오상은(KT&G)이 선발전 첫날 나란히 졌습니다.
모든 스포츠에는 이변이 있지만 특히 탁구는 라켓을 쥐는 방법, 또는 드라이브냐 속공이냐 커트수비냐 하는 등의 전형(戰型)에 따라 상대성이 아주 많습니다. 따라서 고수가 하수에게 얼마든지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진 상대는 모두 소속팀 후배들이었습니다. 다분히 고의적인 져 주기로 보였습니다. 물론 물증은 없습니다.
당시 선발전은 전년도 연말 세계랭킹 10위 이내에 든 유승민(삼성생명)과 김경아(대한항공)를 제외한 남녀 11명이 풀 리그를 펼쳐 4명은 성적순으로, 1명은 협회 추천으로 뽑았습니다. 주세혁과 오상은은 후배들에게 1패를 당하더라도 그 실력이면 충분히 성적순 4명 안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소속팀 후배들에게 1승씩을 ‘선물’한 것이죠. 혹시 탈락하더라도 탁구협회 강화위원 중 주세혁과 오상은을 구제하지 말자고 주장할 통 큰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탁구 대표선발전은 항상 이런 식의 ‘승부 조작’이 있어 왔습니다. 전형에 따른 상대성 때문에 탁구에는 추천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도의 원래 취지와는 달리 승부 조작을 낳게 하고 탁구인들의 반목을 가져오는 원인이 된 적이 더 많습니다. 감독이 집행부에 들어가 힘 좀 쓰는 팀의 선수가 추천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권력 투쟁’을 하게 되는 것이죠. 탁구협회장을 맡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어느 정도 업무 파악을 하자 “현재는 무한경쟁의 시대다. 이름값을 보고 대표를 뽑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기업인다운 시각입니다.
최근 광저우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이 열렸습니다. 삼성생명은 11명이 경쟁하는 남자부에 4명이나 들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1명에게 밀어주겠다고 맘만 먹으면 3승은 무난히 챙길 수 있습니다. 협회 전무이사를 맡고 있는 강문수 삼성 감독은 회장의 취지에 공감, 선수들에게 ‘무한경쟁’을 지시합니다. 결과는 비참합니다. 항상 세계랭킹에 의해 자동 선발돼 왔던 아테네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유승민이 성치 않은 몸 때문에 11명이 7세트 게임으로 2번의 풀 리그를 벌이는 체력전을 버티지 못하고 탈락하는 등 4명 다 태극마크를 달지 못했습니다. 같은 팀원끼리 풀세트 혈전을 벌인, 말 그대로 무한경쟁을 했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어떤 팀은 이번에도 밀어주기를 해 성공했습니다. 맘이 편치 않았을 강 감독은 “팀원끼리도 경쟁의식을 갖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이번 선발전의 진정한 승자는 삼성생명이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스포츠]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 게재 일자 : 2010년 08월 25일(水)
공격받을수록 강해지는 팽이처럼… 김경아 ‘수비수의 힘’
요즘은 처음부터 전문선수로 키우는 경향이 강해졌지만, 예전에는 축구 골키퍼는 가장 못하는 선수의 차지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다들 화려한 공격수를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인데, 한국축구의 고질적인 문제 즉 골키퍼를 포함한 수비 불안이 이래서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탁구의 수비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커트 수비수들을 인터뷰해 보면 처음부터 수비수가 되겠다고 자청한 선수는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없었습니다. 그 한 명은 ‘사라예보 신화’의 주역인 정현숙 여성체육회 회장입니다. 서울 동덕여중 1년 때 탁구부에 들어간 정 회장이 수비수를 하겠다고 손을 든 것은 무슨 큰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1년 선배인 수비수 김명숙씨의 폼이 너무 예뻐서 그랬다고 합니다.
탁구팀에는 수비수에 대한 내성을 키우기 위한 연습파트너로 수비수가 반드시 필요한데 보통 코치들이 지명합니다. 수비수가 된 과정이야 어떻든 수비수들은 지구전에 능해 고1때까지는 그런대로 성적을 냅니다. 하지만 또래 공격수들이 부쩍 성장하는 고학년이 될수록 심각한 갈등에 빠지게 되고 이를 이겨내지 못하면 좌절하고 운동을 포기하는 경우도 생긴다고 합니다. 수비수로서 세계선수권 남자 개인단식 준우승을 차지했던 주세혁(삼성생명)이 지난해 한 세미나에서 고백했던 내용입니다. 주세혁도 공격수였는데 코치의 지시로 수비수로 변신했습니다.
한국 여자탁구를 외롭게 이끌고 있는 김경아(33·대한항공) 역시 공격수를 하다 수비수로 전환했습니다. 대전 석교초교 3년 때 권승우 코치가 공격수로서 자질이 없다고 해 전형을 교체했습니다. 대전 호수돈여고를 졸업한 김경아는 이에리사씨가 감독으로 있던 현대백화점팀에 입단했는데 이경선, 석은미, 김선영 등 쟁쟁한 공격수들 때문에 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현대팀이 해체되고 대한항공으로 이적하면서 서서히 실력을 발휘하게 됐고 지금은 세계랭킹 4위인 세계 최고의 수비수로 우뚝 서 있습니다.
김경아 선수는 팽이입니다. 팽이채로 많이, 세게 맞을수록 더 잘 도는 게 팽이죠. 기술이 노출되면 불리한 공격수와는 달리 수비수는 상대의 공을 받아 볼수록 적응력이 생깁니다. 소속팀 강희찬 감독은 “김경아의 끝은 과연 어디인가 궁금하다”고 말할 정도로 김경아는 지금도 기술적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물론 철저한 체력관리가 바탕이 됐겠죠. ‘주부선수’인 김경아는 보통 80㎏으로 스쿼트 운동을 합니다. 2012년 런던올림픽까지는 현역에 남을 생각인데 지금 봐서는 그 이후에도 라켓을 놓지 않아도 될 성싶습니다. 김경아 선수를 보고 있으면 ‘인생은 긴 승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포츠]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 게재 일자 : 2010년 07월 21일(水)
독재정권의 스타 만들기…‘스포츠 우민화’ 쓰린 기억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는 많은 종목이 있습니다. 단식, 복식, 혼합복식 그리고 단체전 경기도 있죠. 그중 동서를 불문하고 탁구인들이 가장 비중 있게 여기는 것은 남녀 개인전 타이틀일 것입니다.
1973년 ‘사라예보 신화’의 주역들은 단체전 우승을 차지했지만 개인전 타이틀을 놓쳐 기분이 썩 상쾌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카퍼레이드를 준비해야 하니 곧바로 귀국하지 말라”는 고위층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정에도 없던 미국까지 갔다가 일정을 맞춰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는 한달여 전국을 돌며 카페레이드를 했고 국민들은 당시로는 거액인 수억원의 탁구발전 성금을 기꺼이 내놨습니다. 선수단은 “우리가 그렇게 큰일을 해냈나?”하고 뒤늦게 감격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당초 선수단 스스로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여자 단체전 우승이 왜 ‘신화’로까지 포장됐을까요. 1972년 10월17일 들어선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1979년 아르헨티나는 디에고 마라도나를 앞세워 세계청소년선수권(20세 이하)을 제패합니다. 아르헨티나가 6전 전승을 거두는 동안 6골을 성공시킨 마라도나는 자국에서 ‘축구신동’ 칭호를 받았고 대표팀은 영웅 대접을 받았다고 합니다. 1978년 월드컵을 제패했던 아르헨티나가 청소년선수권 우승에 그렇게 비중을 두고 국가 차원의 영접을 한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요. 1990년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한 아르헨티나 언론인은 마라도나의 천재성도 무시할 수 없지만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의 ‘스포츠 우민화 정책’ 때문이라고 폭로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사라예보 신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끌어 축구신동에서 축구영웅으로 격상된 마라도나는 50세 나이에 대표팀 감독을 맡아 2010남아공월드컵에 출전했지만 8강전에서 독일에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같은 신세였던 브라질의 카를루스 둥가 감독은 공항에서 팬들의 달걀세례를 받은 반면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마라도나만큼 국민을 행복하게 한 사람은 없다. 대표팀 감독을 계속 맡아달라”고 했고 의회에서는 동상설립을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3.5%가 마라도나가 대표팀 감독을 유지하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월드컵 열기가 꺼지면서 마라도나 감독에 대한 여론이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아르헨티나 일간 ‘라나시온’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86%가 마라도나의 4년 재계약을 반대한 걸로 보도됐습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신화’의 환상에서 이제야 벗어나는 것 아닐까요.
[스포츠]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 게재 일자 : 2010년 06월 01일(火)
화장실에 갇혔던 정현숙 ‘사라예보 신화’를 만들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30일 끝났습니다. 탁구하면 ‘사라예보의 신화’가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 남녀 단식 챔피언도 배출했지만 아직도 30여년 전 사라예보 신화가 탁구의 대명사로 국민의 가슴에 각인된 것은 선점효과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정현숙(58) 한국여성스포츠회 회장은 이에리사 용인대 교수와 함께 사라예보 신화의 주역입니다. 동대문구에서 태어난 서울 토박이인 정 회장은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누구네 딸 하면 다 알 정도로 소문난 말괄량이였다고 합니다. 동덕여중에 입학하면서 탁구에 입문했는데 처음에는 키가 동기들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 간신히 후보로 끼었고 별명도 ‘트랜지스터’였습니다. 세계적인 커트 수비인 정 회장은 수비수의 폼이 멋있게 보여 수비수를 자청했다고 합니다.
언젠가 정 회장을 인터뷰하면서 본인 입으로 한 이 이야기를 듣고 다시 한번 얼굴을 자세히 보니 들은 말 때문인지 아직도 눈매에 장난기가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정 회장이 말괄량이가 아니었다면 사라예보 신화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유고는 공산국가여서 한국과 북한이 모두 참가한 세계탁구선수권대회는 군인들이 경계를 서는 등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체육관 1층은 아예 관중 출입이 통제됐고 선수들만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결승라운드 2차전. 예선 1위였던 한국은 2위 헝가리와 4강전을 벌이게 됐습니다. 정현숙은 두번째 단식 출전을 눈 앞에 두고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미리 화장실을 찾았습니다. 본인 말로 ‘깔끔을 떠느라’ 1층의 여러 화장실 중 선수들이 잘 다니지 않는 외진 곳으로 갔다고 합니다.
일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고장인지 문이 자동으로 잠겨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보세요, ‘헬로’” 등 다국적어로 고함을 질렀지만 통제된 1층, 그것도 외진 회장실에 갇힌 정현숙을 도울 사람은 없었습니다. 10여분이 흐르자 큰일났다 싶은 정현숙은 화장실 벽을 타고 탈출을 감행합니다. 동구인들은 장신이 많아 그런지 화장실 벽이 그렇게 높게만 보이더랍니다. 변기 위에 올라 손으로 문틀을 잡고 다시 문 손잡이에 발을 걸치고 간신히 뛰어내리는 순간, 정현숙은 바닥에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아픈 줄도 모르고 경기장으로 뛰어들어가니 다행히 늦지는 않았고…. 상대는 당시 유럽선수 중 유일하게 펜홀드 드라이브 전형인 헝가리 에이스였지만 정현숙은 2-0으로 의외로 쉽게 이겼습니다.
“화장실 사건 때문에 더욱 집중한 덕분 같았다”고 정현숙은 회고합니다. 경기가 끝난 후 보니 허벅지에는 30㎝나 되는 긴 피멍이 생겨 있더랍니다. 정현숙에게 말괄량이 기질이 없어 계속 화장실에 갇혀 울고만 있었다면 한국은 기권패를 당했겠죠?
[스포츠]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 게재 일자 : 2010년 05월 12일(水)
몸값은 실력보다 운?… 스카우트 인연 따로 있어
선수의 몸값이 실력에 비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1995년 실업배구 시절 삼성그룹이 남자팀을 창단합니다. 삼성화재 배구팀이 창단 시기를 그해로 잡았던 것은 ‘월드스타’ 김세진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죠. 당시는 아마추어였지만 자유경쟁 스카우트를 할 때라 상한선이 정해져 있는 요즘 프로배구보다 선수 몸값은 훨씬 좋았던 시절이었죠.
한양대 졸업반이었던 김세진의 몸값은 10억원을 호가했습니다. 그러나 배구협회가 창단 팀에 우수 선수를 몰아주기로 했기 때문에 김세진은 5억원을 받고 삼성에 입단합니다. 이듬해 신진식이 성균관대를 졸업할 때가 되자 사정이 달라집니다. 신진식은 고교 시절부터 현대자동차써비스로부터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아 왔습니다. 다들 신진식은 현대로 갈 것으로 알고 LG화재는 찔러 보지도 않았는데 삼성은 배구 사상 최고액을 베팅하며 신진식의 어머니를 공략합니다. 현대는 돈이 없습니까? 현대의 마지막 베팅액은 15억원. 하지만 신진식을 뺏기고 맙니다. 삼성은 대학 측에도 상당한 지원을 약속했는지 그간의 의리를 내세워 ‘신진식은 현대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당시 김남성 감독이 잘렸고, 우연인지 몰라도 아예 성균관대 재단까지 인수합니다. 신진식이 받은 돈은 17억원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김세진과 신진식 둘 중 하나만 스카우트하라면 아마 김세진이 우선순위일 겁니다. 다만 신진식이 억세게 운때를 잘 만난 것이죠. 김세진은 헐값에 입단하면서 대신 몇 년 뛰고 나면 일본에 보내 준다는 구두 약속을 받았습니다. 슈퍼리그 3연패를 달성한 김세진은 일본 진출을 희망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은퇴하고 맙니다.
억세게 ‘쇠복’이 없는 선수의 으뜸은 유남규입니다. 부산 광성공고 3학년 때 서울올림픽 남자탁구 단식 금메달을 딴 유남규는 대우증권 입단을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대우가 제시한 계약금은 7000만원. 강남 105㎡(약 32평) 아파트가 3000만원 하던 시절입니다. 그러나 당시 탁구협회장을 맡고 있던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은 집요하게 유남규에게 동아생명 입단을 권합니다. 결국 유남규는 아버지와 함께 최 회장을 만나 도장을 찍습니다. 계약금은 달랑 1500만원. 최 회장은 “‘회장사에서 돈으로 끌어갔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하며 입단 후 상당한 대우를 해 줄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답니다. 유남규도 시원찮은 오픈대회에서 우승해도 아파트 한 채를 줬던 회장님이기에 ‘뭔가 있겠지’하며 군소리 없이 계약서에 사인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더 이상은 없었다고 합니다. 며칠 전 만난 유남규 농심탁구단 감독은 “그때 대우에 갔으면 팔자가 달라졌을 것 같다”고 한탄하데요.
[스포츠] 이동윤 선임기자의 스포츠 인사이드 게재 일자 : 2010년 04월 14일(水)
조작된 승부는 언제나 패배로 끝났다 ?
1988 서울올림픽 탁구 여자 단식 4강에서 중국의 자오즈민은 동료인 첸징과의 대결에서 성의 없는 경기 끝에 패하고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중에 한국으로 시집 온 자오즈민은 감독이 고의 패배를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그 눈물의 의미를 털어놓았습니다. 당시 또다른 준결승 상대는 하라코바(체코)와 중국의 리후이펀이었습니다. 하라코바는 1987세계선수권대회 16강전에서 자오즈민을 꺾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 대표감독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자오즈민에게 질 것을 지시했던 것이죠. 그러나 하라코바는 탈락했고 결승에서 첸징이 이겼습니다.
1987 뉴델리세계대회에서도 중국은 여자 단식4강에서 헤지리에게 질 것을 지시합니다. 한국의 양영자가 결승에 선착해 있었기 때문에 양영자에게 한번 진 적이 있는 헤지리를 제외시키려 했던 것이죠. 그러나 성깔있는 헤지리는 동료를 이겨 버렸고 결국 금메달을 땁니다. 세계랭킹 1위 헤지리는 그러나 다음해 서울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합니다. 명령 불족종에 대한 징계였던 것이죠.
2004 아테네올림픽 남자 단식 4강전에서 유승민이 발트너(스웨덴)을 꺾고 결승에 오르자 중국은 자기 선수끼리 치른 또 다른 4강에서 결승진출자를 감독이 고릅니다. 유승민에게 1패를 당한 적이 있는 왕리친보다는 한번도 진 적이 없는 왕하오를 결승에 올린 것이죠. 사실 유승민에게는 왕리친이 더 힘든 상대였다는데 중국 감독이 오판한 것이죠. 중국의 이런 필사적인 노력에 대해서는 여러 시각이 있을 겁니다.
한국의 동계올림픽 효자종목인 쇼트트랙에서 한 선수가 세계선수권 개인전에 출전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을 감사한 대한체육회는 코치의 외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지난해 4월 대표선발전 당시 코치들과 선수 몇명이 모여 “함께 국가대표로 선발돼 국제대회에서 모두 메달을 딸 수 있도록 하자”고 협의한 사실도 확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한국 쇼트트랙 관계자들을 모두 협잡꾼으로 모는 것 같습니다. 쇼트트랙은 기록종목이 아닌 순위종목입니다. 상대를 적절히 견제해 줄 우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합니다. 마라톤에도 페이스 메이커용 선수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누가 1위로 골인하고 누구는 상대를 견제하라”는 작전이 없으면 메달획득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어떤 일선 지도자는 말합니다. 그 말이 맞다면 한 대회에서 견제역할을 했던 선수에게 다른 대회에서 주역을 맡게 해주는 것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스포츠] 게재 일자 : 2008년 08월 19일(火)
남자탁구 ‘형만한 아우 없네’
오상은, 고비마다 노련한 경기로 값진‘銅’수확
‘맏형’의 책임감이 한국 남자탁구에 동메달을 안겼다. 중국과의 준결승에서 패한 남자탁구는 18일 오스트리아와의 3위 결정전에 나섰다. 오스트리아는 2003 파리 세계선수권 단식 챔피언 베르너 슐라거를 보유한 강팀. 슐라거는 당시 결승에서 한국 남자탁구 사상 첫 단식 우승에 도전했던 ‘수비 달인’ 주세혁(삼성생명)의 꿈을 무너뜨린 장본인. 한국은 맏형 오상은(31·KT&G)을 첫 단식에 내보냈다.
오상은은 슐라거와의 상대전적에서 4승5패로 열세였다. 출발은 좋지 않았다. 오상은은 첫 세트를 10-6까지 앞서고도 방심한 탓인지 슐라거에게 연속실점하더니 듀스에서도 잇단 범실로 패하고 말았다. 오상은은 그러나 2세트부터 드라이브 공세를 펼쳐 3~4점차 리드를 유지한 끝에 11-5로 여유있게 이겨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후 날카로운 백핸드 드라이브로 슐라거의 허점을 파고 들며 3, 4세트도 따냈다. 그러나 아테네올림픽 단식 챔피언 유승민(삼성생명)이 세계 47위에 불과한 로베르트 가르도스에게 발목을 잡혀 1-3으로 패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하지만 오상은은 후배 윤재영(상무)과 조를 이룬 3복식에서 가르도스-천웨이싱 조를 3-0으로 완파했고 이어 유승민은 4단식에서 천웨이싱을 3-0으로 제압, 동메달을 확정했다. 지난해 11월 힘줄이 끊어진 어깨에 칼을 대는 바람에 올림픽 직전까지 예전의 파워를 찾지 못했던 맏형 오상은이 단복식 2게임을 따내며 한국에 동메달을 안긴 것.
여자탁구가 동메달을 딸 때 ‘주부 선수’ 김경아(31·대한항공)가 했던 ‘맏언니’의 역할을 맏형이 똑같이 해낸 것이다.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 올림픽 무대인 오상은은 “재영이가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아 집중력이 흐트러지 않도록 잘 다독였다”면서 “아직 몸이 완전하지 않지만 단식에서도 분위기를 살려 좋은 성적을 내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깨수술의 후유증은 아직 그를 괴롭히고 있다.오상은은 “아직 어깨를 완전히 위로 올릴 수 없을 정도”라고 털어놨다. 오상은은 중국과의 준결승에서 이면타법의 마린과 풀세트 접전을 펼쳤다. 최근 페이스가 처진 후배이자 에이스인 유승민 때문에 맏형의 책임감은 그만큼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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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옛날 기사를 보니 그때가 생각나네요. 그때는 그래도 우리나라가 못해도 2등은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때가 그립네요...
꼼꼼히 읽어니깐 재미나네요..^^
예전에 올림픽 과정 정리하던 기록이 새록새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