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바람에 일렁이는 강물의 수면처럼 잔잔한 소일로 시간을 채우는 여니 노년의 일상이 아닌, 일정표를 소화함에 하루가 한나절도 아닌듯한 속도감이 자신의 시간을 더듬게 한다. 그리 현명하지 않았으나 오 롯이 나의 계획으로 진행되었던 젊은 날의 하루를 되새기면 시간의 개념 또한 상대적인 양, 나의 몰골 과 비례함이 참으로 얄궂다. 청명한 하늘을 우러러 다양한 형태로 오락가락 무리 짓는 자연의 유희에 예찬인 듯, 탄식인 듯 홀로 주 절거린 적이 언제였는지,거친 얼굴 어루만지듯 스치는 한 줌 미풍의 자비심에 순간의 행복감에 답했던 미소는 또 언제 적이었는지, 주체적 삶이 될 수 없는 현실에서 목전에 놓인 상황적 변화를 묵묵히 수용 하며 내 것 아닌 내 것이 되어 틀에 짜인 하루를 진득이 살아내는 뚝심도 나의 의지였으련만.한 움큼의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술술 빠져나가듯, 제동이 불가능한 시간의 본질 앞에 여생의 불확실함과 유유자 적이 배제된 촉박 감에 물색없는 감정의 요동이 불현듯 자기 연민을 부른다. 이미 실버세대로 통칭하는 나, 트렌드가 된 웰빙과 힐링 차원의 여가 선용은 무병장수가 아닌 유병장수 100세를 희망하듯, 어느새 하나의 문화로 형성된 활동 범위가 만만치 않다. 예컨대, 사회복지 차원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의 공급과 각종 단체의 옹골찬 내용으로 시니어의 윤택한 여생을 누릴기회가 차고도 넘쳐 누구나 한 번쯤 관심과 호기심으로 문을 두드렸을 법도 하련만, 게으름인지 무기력감인지 정작 그 대열에 편승하지 않는 이 시니컬함은 또 무슨 심보인지, 굳이 내색하자면 인생 제2막이란 웰빙, 웰다잉의 관점과는 무관한 일상적 요건들에 스스로 옭아매여 동분서주하는 치기 어린 아집이라고 자인 함이 더 솔직할 것 같다. 나날이 닳아 거덜 난 지경의 감성에도 무심히 흐르는 세월을 붙잡아 내 안에 동여매고 싶은 아쉬움이야 왜 없을까만, 생의 한가운데를 지나 돼 돌아보는 지난날은 지난하도록 부족했음에도 용케 버텨낼 수 있 도록 늘 함께하신 신의 가호에 감사함이다.치열함이 배제되었던 삶, 느린 소걸음인 일소의 숙명처럼 침 묵으로 묵묵히 일관한 시간에 쥐어 쥔 세월의 보상이 칼날처럼 예리한 지적 냉랭함이 아닌 느슨하도록 수더분하고 넉넉한 생각과 내밀함의 아량이 얼마나 고맙고 값진 건지. 목전에 놓인 알량한 이기심에 흔 들리는 의지조차 조용하고도 선명히 질책하는 이 늙음이 헛되고 싫지만은 않다. 내 비록 타인의 시선에 각색된 일상이 여유와 기쁨이 배제된 무미건조한 노년이라는 빈정과 나무람에 일면 수긍도 하나 분절될 수 없는 시간의 열차에 무던히 얹혀 갈 수 있는 나의 무딤조차 귀하게 여겨짐은, 내 생의 종점이 그리 멀 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자식을 염두에 둔 부모의 기본적 생각, 자식과 함께하는 부모의 진중함엔 일거수일투족이 천륜에 기인함 이듯 노년을 자식에게 의탁하고 그들을 위한 나의 하루가 찰나처럼 사라지는 현상에도 굳이 그들을 위해 다잡는 심기일전은 어느 부모든 자식을 두고 자신의 실리만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적 희생도 바람직하지 않음에 때로는 짐짓 놀란 듯 한걸음, 한 박자 쉬어가려 애써나 자석의 양극 음극이 서로를 끌어당기듯, 어느새 멈춘 길 돼 쫓아가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 마음, 죽어도 품을 수밖에 없는 자 식에 대한 부모 마음이요, 그 마음 불편을 감내하며 제 부모 지키려는 가련한 자식의 효성임에 그 애잔함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