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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강촌(부내ㆍ분천汾川)을 나서는 등굣길 발걸음이 마치 아지랑이 속을 살랑살랑 날아다니는 호랑나비 날갯짓처럼 가볍다. 지난 반공일날 삽지껄 감나무 아래 새끼줄을 얽어서 만든 꽃밭에 파종한 분꽃과 과꽃 그리고 채송화 씨앗의 안부도 벌써 궁금하다. 기와담장 밑에 핀 봉숭아 꽃은 이미 보름경 전부터 손톱에 꽃물을 들일 채비를 하고 있는 눈치다.
어제 밤에는 선잠을 잤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 뒷산에 높이 뜬 보름 달빛이 강물에 일렁거려서 구여울 심사를 거슬러 놓았던지 구여울이 난리를 치며 울었다. 자시가 되자 제풀에 꺾였는지는 몰라도 다행히 구여울소리는 잠잠해졌다. 그런데 웬걸 이번에는 뒷산 소나무에서 사는 늙은 부엉이가 목놓아 울어 재꼈다. 월색이 저렇게도 고우니 기어이 울어야겠다는 심보인 것이다. 고숫빠와 애일당에 사는 친척 부엉이들도 뒷산으로 죄다 몰려와서 울어대는 듯 싶었다. 하기야 뒷동산에서 바라보는 분강에 부서지는 월색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울까. 아예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 분강촌 사람들이 잠은 좀 자야할 게 아닌가. 잠을 설친 것은 사람들 뿐만이 아니었다. 효잠 할매네 집 뒤 미나리깡에 사는 엉머구리들도 시끄러워서 잠을 못잤던지 쌍나팔을 불며 함께 울어댔다. 저 구여울소리와 부엉이소리 그리고 엉머구리소리를 누가 어르고 달래서 멎게 해 줄까. 이는 우리 농암 할배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일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아랫마 사는 용규네 삼촌인 문섭이 형님이 윗마에 볼 일을 보러 왔다가 귀가하는 길에 달빛이 좋았던지 지니고 다니던 하모니카를 고적히 불며 마실 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보름달이 하도 휘영청하길래 툇마루에 누워 있다가 그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고요한 정적을 깨는 아름다운 음색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만 사달이 났다. 갑자기 뒷산에서 부엉이가 울어재끼는가 싶더니 또 구여울소리가 덩달아 재잘거리고 급기야는 달실 할매네 고택 뒤에 있는 큰 미나리깡과 효잠 할매네 집 뒤에 있던 작은 미나리깡에 사는 엉머구리 가족까지 합세하여 아예 오케스트라 소리를 냈다. 가만히 들어보니 능구렁이인 늙은 부엉이가 지휘자 역할을 하는 듯 싶었다. 부엉이가 한 번 부엉~ 하고 울고나면 쌍다래끼로 합주가 시작됐다. 부엉이소리, 구여울소리, 엉머구리소리, 소쩍새소리, 하모니카소리가 뜬금없이 한밤 중에 동시다발로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 부엉~부엉~부엉~ 쏴아~쏴아~쏴아~ 와아앙~와앙~와앙~ 소쩍~소쩍~소소쩍~ 뿌뿌삐삐~뿌뿌삐삐~~.
가만히 보자 하니 원인 제공을 한 밝은 보름달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이 뒷동산 높은 하늘에서 팔짱을 낀 채 분강촌을 내려다보며 환히 웃고 있었다.
오늘 아침 등굣길에는 덕개할매 집 앞에 있는 큰 웅굴 쪽으로는 아예 가지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옥이 아지매네 복숭아밭 돌담을 끼고 돌아가는 좁은 길은 언제나 어두컴컴해서 싫었다. 요리조리 잔망스럽게 사방을 살핀 후에 재빠르게 미나리깡에 놓인 징검다리를 총총히 건너 큰 은행나무가 버티고 있는 밭뙈기 사이를 가로질러 냅다 뛰었다. 들키거나 잡히기라도 한다면 한바탕 소란은 피할 수가 없다.
긍구당 앞을 지나서 종가집 배꼽마당을 비껴갈 때는 넘티재를 타고 내려오는 곤재 찬 공기가 흡사 성대네 할매 구멍가게에서 파는 아이스깨끼처럼 차게 느껴졌다. 이태 전 한여름에 꼬딱지 만한 그 점방에서 희한한 것을 예안에서 떼다 놓았다고 동네 아이들 사이에 큰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막대기에 어름 조각을 길다랗게 붙여다가 단지 속에 넣고 또 그 위에 두툼한 어름 봉지를 다시 덮고는 넣었다 꺼냈다 하며 여하간에 참 번거롭게도 파는 신기하고도 이상한 과자였다. 그런데 동네 아이들이 그것을 "하드" 또는 "아이스깨끼", "어름과자"라고 부르며 환장을 했다.
동네에서 사서 먹을 수 있는 아이들이 몇 명이 안되는지라 그림의 떡이었다. 종가집에 탁이 형이 사서 몇 번을 빨다가 꼬맹이들이 하도 쳐다보길래 돌아가면서 나눠 빨게 하다가 얼른 도로 가져갔다. 나는 윗마(윗마을) 사는 덕분에 한 두번 더 빨았는 데 기가 막히도록 맛나고 골이 찡하게 시릴 정도로 엄청 나게 시원했다.
오늘 따라 통소 아래 구여울 소리가 잠잠하다. 효잠할매가 그러는데 새당나무 밑에 있는 성황당(당집ㆍ서낭당)에 큰 제를 올리고 부터는 여울소리가 한 풀 꺾였다고 했다. 지난 번 보름날에는 동네 어른들이 긴 서낭대 끝에 작은 솔가지와 꿩의 꼬리 깃털을 여러 개 달고는 꽹과리와 징을 치면서 집집마다 다니며 구여울의 사나운 기운도 밟고 마실의 무사태평도 빌었다. 특히 당집에 올릴 제물을 마련하기 위해 집집마다 다니며 금부(징이나 꽹과리 등)를 울리면서 곡식이나 음식 그리고 제수 비용을 거두는 노소 무리로 구성된 걸립패들의 신바람 춤사위는 볼 만 했다. 뭐 춤사위라고 해야 별것 없이 되는대로 마구 흔들어 대는 제멋대로 식의 막춤이었지만 동네 아이들에게는 요상한 구석이 많아 보였는지 마치 각설이 타령을 처음 구경 하듯이 신기한 눈으로 가가호호 졸졸 따라 다니며 구경꾼 몰이를 부추기는 듯이 보였다. 아이들은 이를 지신밟기(답정굿ㆍ짚신풀이)라고 불렀으며 어른들은 서낭대놀이라고 했다. 단오날 새당나무에 그네를 매고 타는 그네놀이와 정초 밑에 길복을 축원하는 당집 제사 그리고 정월 대보름날 망우리 돌리기(쥐불놀이)와 함께 동네를 들썩거리게 하는 한마당 춤사위 행사인 서낭대놀이는 부내 동네가 선대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마실축제이자, 향토문화이기도 했다.
양수장 뒤 애일당으로 내려가는 신작로 오른편 고동색 밭에서는 이른 아침인 데도 부지런한 선노할배가 큰 누렁이 황소를 잘도 구슬러서 능숙한 쟁기질로 밭고랑을 마치 베틀의 눌림대끈처럼 곧게 타고 있었다. 특히 지난해 여름 장마철에 장대비가 쏟아지는 물레방간(물레방앗간) 언덕에서 하얀 적삼에 검은 탕건을 쓰고 세차게 흘러가는 누런 흙탕 강물에 맞서서 끄레이질을 하는 모습은 가히 경이로워 보였다. 워낭소리를 울리면서 밭고랑 사이를 이리 저리 누비며 힘차게 쟁기를 끄는 누렁소를 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시간이 더디 가는 듯 했다. 기예가 뒤섞여 있는 듯한 그림 같은 전경이다. 사람과 동물의 구수한 어울림이 빚어내는 풍경화는 아침녘이지만 이를 데 없이 정겹고도 아름다웠다. 선노할배의 밭갈이 행보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간다.
" 어 디디디디 디디디디 이랴~ 이랴~ 퇙! "
" 음메~ 음메~ "
영지산 끄트머리 산자락에 위에 고즈넉이 자리잡은 애일당과 강각이 소년에 눈에 또 들어온다. 강각으로 올라가는 돌 계단 중턱에는 부내 아이들이 공일날마다 모여들어 고사리 손으로 손질해 놓은 앙증맞은 동네 꽃밭에 봉숭아와 채송화, 붓꽃, 나팔꽃, 패랭이꽃 그리고 꽃철이 지난 참꽃나무가 강물에서 스멀 스멀 올라오는 옅은 물안개를 연신 마셔대고 있다.
때마침 물레방간 강섶 둔덕 따라 잔버들나무가 우거진 빨래터에서 분강서원 앞 애일당 가는 경사진 신작로로 불어오는 선선한 초여름 하늬바람이 소년의 얼굴을 시원하게 쓰다듬는다. 애일당 아래 농암바위(귀먹바위ㆍ이색암)를 지나면 구불구불한 비포장 강둑길에 듬성듬성 서 있는 소나무 가로수가 사시사철 곧은 자태로 길을 지키고 있다. 여기서부터 사실상 서취병산이 시작된다.
낙동강은 분강촌 밀양대(민왕대ㆍ愍王臺) 옆 천방 너머에 있는 구여울에서부터 토계 술도가 아래 의인 번남 앞 앤떼이까지 신작로를 따라 오른쪽 강둑 밑으로 구불구불 하게 이어진 가운데 세 번의 넓고 경사진 여울(부내 구여울, 삼바꼬옆 샅골 입구 하마비가 서 있던 맞은편 섬마 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 아래 지역, 의인 번남 앞)과 두 번의 깊은 소(참남배로 아래와 양수장 밑 통소)를 만들었다.
이 풍진 세상에 귀를 막고 살고자 하는 농암 선생이 자신을 은유해서 이름 지은 농암바위를 지나면 신작로 오른편에는 깎아지른 바위 산 협곡인 비암이골(병암)과 빼곡한 솔나무 숲이 병풍처럼 쳐져 있는 어두컴컴한 토째비골이 이어서 나온다. 지명이 주는 선입감과 음산한 기운이 싫어서 진둥걸음으로 재빨리 벗어나면 이내 도산서원으로 접어드는 삼바꼬(삼밭골)와 동취병산 입구인 샅골(살골 혹은 전곡, 석간대)이 나타나고 앞에는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섶다리)가 은빛 포말을 만들어내는 사나운 여울 위에 청푸른 비단처럼 길다랗게 놓여있다. 강건너 시사단과 솔밭 그리고 강나루에 매여있는 나룻배도 한 눈에 들어온다. 해수는 어린 나이에도 나룻배를 잘도 저었다. 한껏 기분이 올라치면 어린 아이였지만 옛노래도 구성지게 한 곡절 뽑아내쳤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배~사공~"
엄청나게 큰 왕버들 고목들과 참나무들이 강길을 따라 군락을 형성하여 늘어서 있는 도산서원 정문앞 주변 경관은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오백여 년 수령의 왕버들이 긴 손을 낙동강에 드리운 채 아이들을 기다리면 작은 호빗들은 다람쥐 마냥 살곰살곰 몸통을 타고 올라가서는 길고도 튼튼한 버들나무 줄기를 단단히 잡은 채 이리저리 한참 그네를 타다가 하나 둘 퐁당퐁당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물장난과 멱을 감는 놀이보다 몇갑절 더 재미나는 놀이였다. 섬마, 분강촌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더러는 의인 아이들도 보였다. 분강촌 아이들은 동네 물레방간 빨래터 위에서 오백여 년 동안 터줏대감처럼 자리잡고 있는 작은 산 만한 왕버들 나뭇가지를 타고 강물 속으로 뛰어내린 경력들이 화려한지라 이 정도는 눈을 감고도 할 수 있는 싱거운 놀이였다.
도산서원 정문 오른편 산모퉁이 길가에 홀로 서 있는 큰 참나무를 돌아서 완만히 경사진 길을 타고 내려가면 왼편에 시커먼 조동골이 보이고 대각선 강 너머로는 섬마에 은회색빛 양철 지붕을 이고 있는 양수장이 눈에 들어온다.
양수장 주변에서는 종종 비애에 가득찬 울부짖는 소리가 강 건너 길까지 들려오곤 했다. 특히 궂은 날씨거나 어둠이 내리거나 하굣길에 그 소리를 들을 때가 많았다. 사람들은 그를 "말고기"라고 불렀다. 하지만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양수장 주변에서 어른 거리는 형체는 가끔씩 눈에 들어왔다. 왜 그가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르며 힘들어 하는 지 그리고 사람들은 어떤 연유로 그를 말고기라고 부르는 지 그저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다. 다만 우리는 그저 호기심 반 공포심 반으로 그 소리를 들으며 바라보고 골똘히 생각하곤 했다. 조동골을 지나 올라가면 물이 깊고 검은색이 너울거리는 "소(沼)"가 무섭게 쳐다보는 참남배로가 나타난다. 사시사철 사고가 잦은 곳이다. 전설 같은 설화들이 많은 곳이라 급히 돌아서 일백보 정도를 직진 하다가 우회전 하면 토계 술도가 아래 의인 앤떼이까지 쭉 뻗은 신작로가 한동안 시원하게 길을 열어주었다. 오른쪽 언덕 아래에는 강 폭이 넓고도 길게 가파른 여울을 만들어서 연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사람들을 홀렸다.
신작로 중간 지점에는 의인으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가 물살이 센 여울 위로 위태롭게 놓여있었다. 신작로 왼편에는 헬기 비행장이 길다란 장방형 모양새로 큰 자리를 차지 했다. 비행장 주변에는 모래사장이 신작로 길을 따라 왼편으로 일자로 누운 채 종종 심술궂게 모래 먼지를 일으켰다. 겨울날 돌개바람이라도 불 때면 하얀 모래 가루를 통째로 덮어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에 도산서원에 들렀을 때 이 비행장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많이도 들었다(이종구교수의 에세이 산책/ "금송과의 인연"에서 박 대통령이 식목한 금송에 대한 이야기를 다룸).
신작로 오른편 긴 강둑에는 하얀 아카시아 꽃이 줄을 지어 만발하였다. 강바람이 이따금씩 불어올 때면 상큼한 꽃냄새가 진동하면서 하얀 꽃잎이 함박눈처럼 곱게 오랫동안 날렸다. 장관이었다. 오늘 처럼 청명하고 찬연한 날은 이름하여 "류귀현의 날"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한 그런 예쁜 날씨였다.
그러니까 그게 아마 1975년 어느 이른 초여름날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소년의 집은 삼형제가 예안중학교와 도산국민학교를 함께 다니고 있었다. 5학년인 소년에게 도시락통(밴또)이 돌아오는 날은 거의 없었다. 도시락통은 의례히 형들의 차지였으며 이따끔씩 소년이 도시락을 쌀 때면 한 바탕 난리가 났다.
소년에게 오후 수업이 있던 바로 그날 등굣길에도 의인 앞 낙동강 여울소리가 여전히 큰 울음 소리를 내고 청소깝 외나무다리 위로는 언제나 처럼 의촌리 아이들이 줄을 지어 아장아장 강을 건너오고 비행장 옆 신작로 긴 강둑길에는 도로를 덮을 만큼 아카시아 꽃이 활짝 피어 휘날리던 바로 그런 날이였다.
형들에게 도시락통을 내준 소년을 달래기 위해
예수 할머니가 누런 놋그릇에 납작보리 밥을 가득히 담고 뚜껑을 덮은 후 찬과 함께 보자기에 싸서 소년에게 건내주었다.
소년은 그 도시락통을 학교에 가지고가서 먹을 수가 없었다. 등굣길에 생각 끝에 비행장 맞은편 아카시아 군락들이 송송히 만발한 숲 속으로 들어가서 도시락통을 꼭꼭 숨겨두고 학교로 갔다. 집에 오는 길에 남몰래 혼자서 먹으려는 심산이었다.
점심 시간에 할 일이 없어서 학교 뒷동산에 있는 묘목장 옆 산등성이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목실골에 있는 엄마를 생각하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그런데 누군가가 소년을 흔들어 깨웠다. 점심시간에 뒷 교사(校舍) 오른편 언덕 위에 내살미로 가는 길 초입에 있는 묘목장을 산책하시던 담임 선생님이 잠든 소년을 발견했던 것이다.
" 왜 여기서 잠을 자니? "
" 점심은 먹었니? "
"..............."
선생님은 조용히 소년의 손을 잡으시더니 자전거 뒤에 태우고는 교문 밖으로 나갔다. 백운이용소 맞은편에 있는 선생님의 하숙방이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나가시더니 삼립단팥빵과 앞 마당 펌프에서 퍼 온 찬물 한 대접을 내놓으셨다.
" 자~ 먹거라. 앞 집 점방에서 사왔단다 "
선생님은 우체국에 다녀오신다며 자리를 피해주셨다. 눈물 젖은 빵이 소년의 입으로 마구 들어갔다.
학교로 올라오는 길에 선생님이 물으셨다.
"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니? "
" 달리기 선수나 배구 선수요! " “ 아니~ 선생님이 될 거에요. 금송에게 이미 약속을 했거든요 ”
" 노래를 불러 보거라 "
" 애국가를 불러도 되나요? "
소년은 신이 나서 애국가를 2절까지 크게 불렀다. 애국가를 다 들으신 선생님은
" 다른 노래가 있으면 더 하거라 "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시절에~"
하굣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들뜬 기분으로 토계 번화가를 한 걸음에 빠져나왔다. 콩닥거리는 바쁜 마음에 교문을 냅다 뛰어나와서 돌아가는 다리 위로 가지 않고 토계 개천을 가로 질러 건너 둑방을 상큼상큼 넘어 포도밭두렁을 금새 지나 짜장면집 골목 사이로 내달렸다. 지름길로 단숨에 지서 앞까지 온 것이다. 집으로 올 때면 늘 신비롭게 다가오던 계남고택(술도가와 버스 정류소 사이에 있던 고택, 계남댁, 하계 남쪽에 위치해서 계남이라고 함)도 안중에도 없었다. 우리 동네에 성기 형님이 일을 하고 있는 술도가를 지나서 의인 앞 앤떼이를 급히 돌아 비행기장 맞은편에 울창하게 줄지어 서 있는 하얀 아카시아 숲으로 뜀박질 하다시피 내달렸다. 함박눈처럼 휘날리는 아카시아 꽃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의 작은 머리 속에는 온통 도시락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도시락통은 뒤죽박죽이 된 채 돌멩이들 사이에서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그 놈의 들쥐가 도시락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예수 할머니가 머리에 쓰고다니시던 아끼던 보자기 마저 갈기갈기 찢어놓아버렸다.
그 날 저녁에 소년은 예수 할머니 한테 혼이 났다.
" 아까운 보자기는 왜 찢어왔느냐!" 고...
하지만 소년은 사실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 해 겨울, 어느 공일날 예수 할머니는 먼 곳으로 떠났다. 동네 사람들이 송티재(송현) 고바이
[こうばい(こう配ㆍ勾配: 경사, 비탈)]가 시작되는 고숫빠 오른쪽 골 정면 산 중턱에 있는 곳집에 가서 상여틀을 가지고 왔다. 토계 예배당 사람들이 몰려와서 손수 꽃봉오리를 만들어서 상여에 걸쳤다. 꽃상여가 되었다. 우리집 삽지껄 바깥 우릉골 할매네 청보리 밭에 멍석을 여러개 펴고 꽃상여를 올려놓고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를 부를 때는 소년도 따라 부르며 울었다. 곡을 하며 흐느끼는 아버지의 슬픈 뒷모습이 소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리고 꽃상여는 집을 떠나갔고 예수 할머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먼 옛날 어느 초여름날 아카시아 꽃잎이 무성하던 숲 속에서 하얀 요정들과 소년만이 간직했던 도시락에 깃든 동화 같은 이야기도 이제는 흘러간 세월 따라 저기 파란 하늘나라에서 예수 할머니와 함께 별이 되었다."
해마다 하얀 아카시아 꽃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는 초여름이 오면 예수 할머니와 선생님이 그리워진다. 분강촌 산야가 수몰되지 않았다면 우람찬 구당나무가 앞들을 품고 있는 동구밖 과수원 길에도 지금쯤 아카시아 꽃이 하얗게 휘날리고 있을게다😢(2001.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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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속에 나오는 분강촌 지명 고찰
● 먼저 부내 지명부터 고찰해보자. 부내는 농암선생 당시부터 부내, 분천, 분강촌이라는 동네 이름을 사용해왔다. 부내, 분천, 분강촌은 다 같은 마을(마실) 명칭이다. 부내의 행정구역 변천역사는 구한말(1863~1910: 흥선대원군 시절부터 경술국치 이전까지)에는 예안군 의동면 지역에 속했으며 당시에도 부내, 분천(汾川), 분강촌(汾江村) 등으로 불렀다. 이후 일제 치하기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1914년 4월 1일, 일제가 강행한 군면 통폐합 조치로 도산면은 가송 단천 분천 온혜 운곡 원천 의촌 의일 태자 토계 등 10개 동으로 개편 되었다) 조치에 따라 분천동(리)으로 변경되면서 안동군 도산면으로 편입되었으며 안동댐(1971년 착공~1976년 준공) 건설로 수몰이 되고 19년이 지난 1995년에 시군 통합으로 인해 지금의 안동시로 재편되었다.
부내의 입향 시조는 지금으로부터 670여 년 전인 1350년경 고려말엽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낸 이헌(李軒) 공이다
[여기서 잠깐 고려말 연대기를 보면 이때가 충정왕(1348~1351)과 공민왕(1351~1374) 시기이다. 홍건적 2차 침입(1361.10ㆍ공민왕10년ㆍ개경함락)때 공민왕은 복주(안동)로 피신했다. 난 중에 왕과 노국공주(?~1365)를 정성껏 도운 안동 백성들의 충심에 감복하여 내린 현판이 바로 우리(안동시민)가 잘 알고 있는 "안동웅부" 이다. 그리고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킨 시점도 이 무렵이다. 웅부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안동의 또 다른 지명이다. 우리나라 행정구역 시 가운데서 면적이 가장 넓은 곳이 안동시(Andong City)이다. 안동시의 면적은 서울(605제곱킬로미터)의 2.5배인 1,522.10제곱킬로미터에 달하고 있다. 안동시는 1읍 13면으로 편제돼 있으며 시화는 매화이고 시목은 은행나무이며 시조는 까치이다.
안동에는 공민왕과 관계된 지명이 차고 넘친다. 우리 도산골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곳이 대사 갈선대 오른쪽 단애 위 능성과 아래에 있는 왕모산성과 왕모산 그리고 왕모당(내살미왕모당 또는 공민왕어머니당) 이다. 이외에도 청량산 일대에 산재해 있는 유리보전 현판, 공민왕당, 감광전, 산령각, 산성, 부인당(혹은 "공주당"이라고도 부르며 공민왕의 부인인 왕비 노국공주를 의미함,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다), 오마도 등 많은 흔적들이 널려 있다. 공민왕은 안동에서 70여 일을 피신했다(1361.12.15 공민왕 일행 안동도착~1362년 2월 신축일 안동 떠남). 공민왕은 왕비와 청량산에 피신한 후 난이 평정되자 개경으로 환궁하는 도중에 부내 밀양대(민왕대ㆍ愍王臺)에 도착하여 넓은 앞들(전평)과 낙동강을 바라보며 향후 나라 일을 계획하고 도모했다고 한다. 민왕대는 이런 연유에서 나온 지명이며 장구한 세월에 따른 언어의 변화로
인해 수몰전 우리가 분강촌에 살 때는 밀양대라고 불렀다. 입향조 이헌 공이 부내에 정착할 때가 1350년 경이었으며 1370년에 긍구당을 건립했다. 공민왕 재임 시기와 이헌 공의 입향시기 그리고 긍구당 건립 등이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당시 혼란한 시국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는 광경이다. 공민왕이 그렇게 사랑했던 왕비 노국공주는 귀경 3년 후인 1365년 겨울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났다. 병든 몸과 전쟁에 지친 휴유중 때문이었으리라. 이런 노국공주의 운명과 함께 공민왕 또한 심신이 쇄약해졌으며 고려의 국운도 점차 저무는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이헌 공은 고려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벼슬을 내려놓은 후 고향 영천(永川)을 떠나 산천과 풍광이 수려한 이곳 부내에 터전을 잡았다. 부내는 알다시피 영천이씨(永川李氏) 집성촌이다.
먼저 진경산수화에 나오는 옛 부내 동네 지명을 보면 1526년 분천헌연도(작자미상ㆍ보물 제1202호)와 1710년 분강촌도(월탄 김창석ㆍ1710년경), 1751년 분강과 주변환경을 그린 표암 강세황의 그림 속에서 이들 지명이 나오고 있다. 분천헌연도에서는 그림의 이름에 분천이 나오고 분강촌도에서는 그림의 이름은 물론 그림 속에서도 분천서원과 분강촌이 표시되어 있다. 표암의 그림에서는 그림의 이름과 함께 분강촌과 분천서원이 보인다. 부내의 한자 표기는 분천(汾川)이다. 클 '분(汾)'자인데 다시 글자를 풀어서 고찰해보면 물이 많고(클 '분') 성(盛)한 모양을 의미한다. 즉, 분천이란 물이 많고 넓은 강을 의미한다. 이는 곧 분강(汾江)이 된다. 강(江) '강'자 속에는 평원 같은 넓은 내(川) 즉, 큰 강의 의미가 담겨있다. 분강은 물이 많고 넓어지는 큰 강을 말한다. 낙동강은 청량산에서 단사(단천), 천사(내살미), 의인(의촌리), 섬마(섬촌), 도산서원을 지나 부내 앞으로 흐르는데 이 강물을 낙강이라 했다. 옛날 그 강물이 분강촌 앞에서 두 줄기로 갈라져서 분천, 부내, 분강, 분수 등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낙동강물은 특히 귀먹바위(농암ㆍ이색암) 앞에 이르면 가득해져서 넓고 깊고 평평해져서 조각배도 띄울수 있게 되었다. 이곳을 농암은 분강이라고 했다. 옛날 수몰전 우리가 살 때 실제 농암바위 앞에서부터 구여울까지 물이 모여지고 깊어지고 넓어지는 형세였다. 뒷산인 영지산을 두고 분강만 보았을 때는 배(船) 같은 지형이다. 그래서 큰 종손(농암 16대 종손: 함자는 이용구) 어른 생전에 "부내에는 펌프를 박으면 안된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부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동네이다. 여기에서 배산(산을 등지고 있는 지형)은 고숫빠에서 영지산 끝자락에 그림같이 걸려 있는 애일당 뒷산까지이다. 고숫빠에서 오른쪽 골로 조금 들어가면 도랑 건너 산 중턱에는 곳집이 보이고 오솔길 따라 조금 올라가면 오른편 밭에 있는 바위에 '광현(廣峴)'이라는 각자가 있다. 여기에서 현(峴)이라는 글자는 가파른 '고개'나 '재' 혹은 '산'을 의미한다. 광현은 광티, 넙티, 넘티로도 불린다(부내 사람들은 넘티재라고 함). 옛날에 "퇴계와 농암이 강각에서 놀다가 이 고개에서 작별했다고 하여 당시에는 광티라고도 했다"고 한다.
부내는 현이라는 지명이 붙은 곳이 여러 개 있다. 먼저 광현에 대해서 살펴 보자. 고숫빠 오른쪽 골은 곳집이 있고 해서 음침하고 무서웠지만 이 골을 자세히 보면 작지 않은 통골이고 또 고숫빠와 더불어서 운치도 제법 있고 그 위로 더 올라가면 왼쪽 끝에는 마릉당골(馬陵堂谷)이 있고 오른쪽에는 현재 '농암가비'가 위치한 '곤재'와 옛부내로 내려가는 '넘티재'도 나온다. 또 곤재에서 온혜로 넘어가는 꼭대기에는 '마당재'도 있다. 송현(松峴ㆍ송티, 송티재)과 청현(靑峴ㆍ청고개, 청꼬)만 빼면 많은 재와 골이 이 주변에 대부분 운집해 있다. 어떻게보면 송현도 광현의 어귀를 지나쳐서 올라간다고 볼수 있다. 즉, 광현으로 들어서면 부내의 여러 골과 재로 이어지고 만나게 된다. 광현 오른쪽 산자락에 한 때 이건했던 애일당 위 산등성이를 타고 올라가면 영지산 정상도 나온다. 무엇보다 이 골 안에는 부내동네에서는 귀한 논마지기도 널브러져 있기 때문에 마을로 보아서는 이 곳이 아주 유용한 골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선대들이 아마 이 곳 입구에 광현이라는 각자를 만들어놓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다시말해 넓고 큰 '재'나 '고개' 그리고 '산'으로 이어지고 맞닿아지는 곳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듯 싶다.
다음은 청고개(靑峴ㆍ청현)이다. 말 그대로 푸른색을 띤 고개를 의미한다(이 고개에 담긴 이야기는 뒤에 나온다). 그리고 우리 세대에게 애환이 많은 송현(松峴)이 있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송티를 말한다. 먹을 것이 귀했던 시절 고바이가 쌘 송티재를 혼자 힘으로 넘기 어려웠던 엿장수 아저씨들의 리어카를 송티재 고갯마루까지 밀어주고는 그 노동값으로 엿을 서너 개씩 받았던 기억이 또렷하게 난다. '재'와 '고개'와 '티'는 같은 훈(맥락)이므로 한자로 쓰면 음은 모두 '현'으로 표기된다.
● 부내에 살았던 영천이씨 대동족보에 나오는 선대들의 선영을 보면 송티 대신에 모두 송현으로 기재되어 있다. 향촌 지명을 찾는데 족보만큼 편리한 서책도 드물다. 어떤 특정한 지역명칭과 집안의 내력을 추정해 볼라치면 그 집안의 족보를 보면 거의 알수 있다. 석간대와 마릉당골, 송현은 우리집 소윤공파 족보책에서 직접 본 지명이다. 유년시절 듣긴 했지만 나이들어서 잊혀진 향촌 지명을 다시 들으니 반갑고 정겹게 다가온다. 큰할배는 송현(송티), 조부님과 부모님은 석간대(샅골), 할매는 마릉당골(넘티재를 넘어 곤재를 지나 도산서원 들어가는 입구지점에서 온혜로 넘어가는 길로 100여 미터 쯤 가다가 왼쪽에 보이는 골 이름이다)로 기록되어 있다. 족보책을 펼치면 전 시대를 살아간 선인들을 만나보는 경이로움도 있다. 아내와 만나서 첫 데이트를 할 때 파주에 있는 자운서원내 신사임당 묘소를 찾았고 두번째는 효창공원에 있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가묘) 그리고 윤봉길ㆍ이봉창ㆍ백정기 삼의사 묘소를 찾은 일은 개인적으로는 두고 두고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마음이 울적해지거나 적요해질 때면 현충원과 효창공원, 4.19묘지를 찾는다. 평정심을 찾는데 이 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사견이지만 제일 비애를 느꼈던 묘소는 영월에 있는 단종대왕릉이었고 용기와 자부심을 준 묘지는 아산에 있는 민족의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와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이었다.
● 부내 동네로만 놓고 보았을 때 영지산은 고숫빠에서 비암이골(배암골ㆍ뒷편에 있는 유래 참조)이 시작되는 애일당(愛日堂)과 강각 뒷산까지 걸쳐져 있다[江閣: 강각은 농암 선생 때 귀먹바위 약간 위에 있었다. 즉, 애일당 아래에 자리했다. 1526년 분천헌연도(작자미상) 그림을 보면 실제 애일당 아래에 강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강각은 원래 강변에 있는 '소각' 즉, 작은 집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 시대 큰 강물에 휩쓸려서 없어졌다. 이후 애일당 위에 강각을 다시 지었지만 그것 또한 세월로 인한 풍우로 무너졌다. 이후 그 빈터에 1930년대 '농퇴시비'로 인해 생겨난 "욕기정(浴沂亭ㆍ지금 60대 중반 이후 세대들은 "록기정"으로 기억하고 있다)"이 세워졌다. 욕기란 논어의 '선진' 편에 나오는 "욕기풍우(浴沂風雩)"에서 나온말이다. 실제 1960년대 월파 윤수암 선생(안동대륙사진관)이 촬영한 사진을 보면 "욕기정" 정자가 보인다. 우리 위에 세대는 실제 현판도 보았다고 한다. 또한 모두가 그 정자를 그때는 '록기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리 세대가 도산국민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 초중반에는 현판도 없어졌고 정자도 허물어져서 사라지고 빈터만 남아있는 것을 직접 본 기억이 난다. 이후 수몰로 종택을 가송리(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분강촌이 1977년 완전히 수몰되자 종가집은 안동시 옥정동으로 잠시 이사를 했다. 그리고 2007년부터 수몰 전후 분천동과 운곡 등을 비롯하여 이 지역 일대에 흩어져 있던 농암 유적들을 현재 가송리로 재이건하는 농암 문화재 복원사원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이후 오늘날 농암의 대부분의 유적들이 이곳에 집적되어져 있다)로 이건한 후 애일당 바로 왼편 윗 자리에 옛날의 강각을 복원시켜 놓았다].
옛날 도산서원과 애일당 그리고 분강촌을 그린 당대 최고 화가들의 진경산수화(실물을 보고 그린 산수화)를 보면 도산서원과 분강촌도 아름답지만 애일당에서부터 삼바꼬(삼밭골: 삼이 많아서 붙여진 지명), 샅골까지의 전경도 비경처럼 창연하게 그려놓았다. 이 지형은 서취병산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하지만 유년시절 우리들에게는 이 길과 산과 골이 아름답기 보다는 머리털이 바짝바짝 설 정도로 무서운 곳이었다. 하굣길에 가장 비켜가고 싶은 길이 참남배로와 조동골 그리고 샅골에서부터 애일당까지였다. 특히 집에 오는 길에 땅거미가 내려서 어두컴컴해지거나 비가 많이 올 때 혹은 비 온뒤 강물에서 하얀 물안개가 스물렁 스물렁 강언덕으로 기어올라와서 한 치 앞이 보이지않을 때는 정말 공포스러웠다. 깎아지른 산세 때문에 지형이 큰 그림자를 만들어서 낮에도 길이 늘 어두웠다. 섬마 청소깝 외나무다리 밑을 급히 빠져나와서
취병산 옆구리를 세게 치고 농암바위 앞으로 가파르게 흘러가는 여울소리는 무서운 마음이 생길 때면 꼭 귀신이 곡을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도산국민학교 시절 배구선수와 육상선수를 했기 때문에 집에 올 때는 늘 어둠을 달고 다녔다. 먼저 애일당을 지나면서 길 위에 여러개 나타나는 골 이름들의 명칭 자체가 썩 좋게 와닿지 않았다. 애일당 위의 첫 번째 골 이름은 비암이골이다. 뱀이 많아서 그리 지었는지, 아니면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승천을 기다리던 장소라서 그리 지은 지는 몰라도 여하간 참 싫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두 번째 골 이름까지도 '작은 비암이골' 이었다. 세 번째 골 이름은 아예 활짝 만개를 했다. '토째비골'이다. 우리는 부내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토째비에 홀키고 시달렸다는 얘기를 들어왔던가. 도산면에 사는 토째비들의 절반은 이 골 안에 다 모여살고 있다고 보면 정답이다. 실제로 토째비골로 올라가보면 큰바위 세 개가 포개져 있다. 세 개의 큰바위를 포개서 올려놓자면 얼마나 많은 토째비들이 이 골 안으로 동원되었겠는가.
[주: 비암이골은 배암골이라고도 불렀다. 월탄(김창석)이 1710년 경에 그린 "분강촌도"와 표암(강세황)이 1751년에 그린 "도산도(보물 제522호ㆍ 국립중앙박물관)"를 보면 이곳의 원래 지명은 "병암(屏庵)"이다. 애일당 오른쪽으로부터 퇴계종택 오른쪽 대각선 산(도산서원내 주차장에서 고개를 너머 퇴계종택으로 가는 고개 길 오른쪽 산) 즉, 도산서원 뒷산 일대까지 병풍처럼 이어진 산이 취병산이다. 애일당 오른쪽 산은 서취병산, 도산서원 오른쪽 산은 동취병산이다. 그런데 위 두 개 그림을 보면 토째비골 안에 암자가 있다. 그 암자를 "병암[선성삼필로 알려진 농암의 여섯째 아들인 매암 이숙량(1519~1592)공이 건립]"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병암 일대 골을 비암이골이라고 부른 듯 싶다. 애일당 위 첫 번째 골은 비암이골, 두 번째 골은 작은 비암이골이라고 불렀다. 병암은 세월이 흐르면서 부르기 쉬운 비암이골 혹은 배암골이 된듯 하다. 병암이라고 표기한 월탄과 표암의 두 그림이 진경산수화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고숫빠(고시빠ㆍ고씨바 ㆍ고숫바) 내력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고시네"는 안동지역 민간에서 행하는 미신적인 신앙 관습이다. 고수레, 고시내, 고씨네, 고시례, 고시래 등으로 불린다. 들이나 산, 농지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주위를 다스리는 신에게 예를 표하는 동시에 주변의 잡귀에게도 먹고 사라지라는 주술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 선대들은 주로 밭에서 일하다가 식사 전에 '고시네' 행위를 했다. 어른들도 했고 후대인 우리들도 따라서 한 적이 있다. 주변에 신령스러운 바위나 나무, 고인돌 혹은 아무 것도 없어도 고시네 행위로 적선을 하며 복을 빌었다.
부내 고숫빠의 명칭도 알고보면 별반 다르지 않다. 실제로 고숫빠 오른쪽 골 어귀에서 조금 들어가면 밭(한때 옥천할매가 경작했던 가옥과 붙어있는 밭)에 광현(廣峴)이라는 각자도 있고 그 밭 중간쯤 도랑쪽 끝자락에 고인들 모양새와 비슷한 큰 돌이 누워 있다. 자세히 보면 돌뿌리가 도랑 섶의 바위들과 이어져 있는 형태이다. 옛날 부네 선대들이 이곳에서 농사 일을 하다가 점심이나 새참을 먹을 때 자연스럽게 그 고인돌 바위를 향해 '고시네' 행위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당시 곳집 앞 큰 공글 주변에는 송티재라는 지명 외에는 이 후미진 모랭이에 뚜렷한 이름이 있었을 리가 만무하리라 본다(곳집 맞은편 산위로 올라가면 영지산 정상이 나온다). 이런 연유로 이 지역을 '고시네'를 하는(올리는) '바위'라고 해서 처음에는 '고시네바위'로 부르다가 점차 세월이 지남에 따라 발음 축약 현상으로 다시 '고시바위'가 되고 그것이 더욱 축약 되고 경음화 되어서 '고시빠' 혹은 '고숫빠' 등으로 편한 대로 불렀을 것으로 여겨진다[주: 고숫빠에 대한 지명 고찰에는 아랫마 비밑 가는 산 아래 고택에 살았던 종친 이재덕 교수(동아대학교 교수로 정년 퇴직ㆍ77세)와 새벽할배 손자인 직장공파 후손인 이재필 선생(대구운암중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직ㆍ72세)이 도움을 주었다].
고숫빠에는 이외에도 각자가 많다. 공글 위 고숫빠로 들어가는 오른쪽 바위에 "환암"이라는 각자도 있었지만 지금은 지형파괴로 보이지 않고 있다. 농암선생의 다섯째 아들 환암공 이계량(1508~?)의 호를 뜻하는 글자이다. 그리고 곳집 맞은편 도랑 건너 길 모롱이에 "영지동천(靈之洞天)"이라는 각자도 있었다. 이는 바로 뒷산이 영지산이고 고숫빠 오른쪽 골 사이로는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맑은 개울물이 더 많이 흘렀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음침한 곳집이 위치했던 정서와는 또 다르게 선인들이 느꼈던 경치 좋은 곳을 뜻하는 용어이다. 즉, 영지동천은 산과 내로 둘러싸인 산수가 수려한 곳을 말한다. 그래서 이 말 속에는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말도 담겨져 있다.
부내는 농암(聾巖) 마을이다. 농암(이현보李賢輔 : 1467~1555ㆍ효절공孝節公)이 존재함으로서 분강촌이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이현보의 자는 비중(棐仲)이고 시호는 효절(孝節ㆍ명종12년)이다.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호는 농암(聾巖) 혹은 설빈옹(雪鬢翁)이다. 농암은 예안현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물론 분천동에 처음 들어온 입향(1350년경) 시조는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호는 낙은: 분강서원건립자ㆍ졸 84세ㆍ배위 선성이씨)공이다. 농암 사후에 불천위로 받들어지면서 농암종택으로 불리게 되었다. 분강촌은 농암이 당대에 일군 기념비적인 입지로 인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현보의 호인 '귀먹바위'를 뜻하는 농암은 탈속하여 자연과 초연히 살고자 하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 조선시대 고관대작들의 호칭을 보면 대부분 호나 이름 뒤에 재상, 정승, 판서 등을 붙여서 부르며 '선생'이라는 호칭은 거의 쓰지 않았다. 선생은 당시 학문이나 인품 그리고 덕망을 두루 가춘 선비에게만 붙이는 최고의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농암 생존 당시에 선생이란 호칭은 천균의 무게를 가진 예칭이었다. 그 시대까지 선생으로 불리어졌던 사람은 이색ㆍ서거정ㆍ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 등 극소수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쓰였던 용어였다. 1555년 농암 89세 3월, 55세 퇴계가 서울에서 돌아오는 길에 용수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농암이 기뻐서 절구 두 수를 지어 보냈다. 퇴계가 임강사의 반도단으로 농암을 찾아 뵈었다. 이날 둘은 반도단을 유람하였다. 퇴계는 "숭정대부 행지중추부사 농암 이선생 행장"에서 이 때의 일을 반추하며 "올해 봄에 내가 서울에서 돌아와 임강사의 반도단에서 공을 두 번 뵈었는데 매우 기쁘게 맞아주었다. 이제부터 길이 문하에서 제자의 도리를 다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퇴계는 스스로를 "제자"라 자처하였다. 이해 6월 농암의 병환이 깊어져 위독해졌다. 퇴계가 와서 문병하고 곁에 있었다. 농암은 13일 긍구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긍구당은 1370년경에 분강촌 입향시조인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 공이 건립했으며 손님을 맞이하는 별당으로 사용한 집이다. 긍구는 "조상의 유업을 길이 이어가라"는 의미이다. 농암 당시 긍구당이라는 편액을 붙였다. 농암은 이곳에서 태어나서 89세 때 여기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판은 시ㆍ서ㆍ화에 능하여 삼절(三絕)이라 일컬어진 신잠(申潛)의 글씨이다.
퇴계가 아들 첨정공 이준에게 보낸 편지에 "지사 선생이 결국 돌아가셨으니 나라의 불행이요 우리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다"라고 슬퍼하였다. 한국 성리학의 거봉인 퇴계는 농암 사후 제문을 지어 선생을 기렸고 일주기 경인 1556년 7월 농암에 대한 행장(죽은 사람의 일대기를 적은 글)을 완성했다. 퇴계는 농암 생전에 34살의 나이 차이를 잊으며 향촌의 막역한 벗으로서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농암에 대한 행장을 쓰며 그에 대한 덕행을 기렸다] 농암집(2019), 한국국학진흥원, 장재호ㆍ김우동 옮김, 52~53. 인용.
농암이 76세(1542ㆍ중종37년)에 수차례 은퇴를 간청했으나 불허되자 질병치료를 위해 마침내 정계를 은퇴했다. 당시 궁궐(중종은 농암이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며 친히 금서띠와 금포를 하사했다)과 한강에 있는 제천정(濟川亭)에서 송별연과 전별연(餞別燕)이 열렸는데 이 전별연에서 동향 후배(34살 차이)인 의정부사 퇴계가 농암에게 '제천정에서 창령군의 시를 따라 지어 이 참판께서 은퇴하는 데드린다'라는 전별시를 지어 올리기도 했다. 농암의 은퇴는 바람직한 '귀거래'로 평가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를 '염퇴恬退'로 기록하고 있다. '염퇴지사'란 도피나 은둔이 아닌 다른 사심이 없는 진정하고 올바른 은퇴를 말하는 것이다.
농암은 명종4년(1549년ㆍ83세) 정헌대부(정2품 상)로 제수되었으나 분강촌에 머무르며 이를 사양하자, 명종은 다시 숭정대부(종1품 하)의 품계를 내렸지만 이 또한 사양하자, 향촌에 있으면서 본의아니게 품계를 유지하는 재야의 재상이 되기도 했다(산직: 실제로 근무하지는 않지만 임금이 내려서 집에서 갖고 있는 벼슬). ♤영정(보물872호ㆍ경상도 관찰사 시절의 초상화ㆍ1537년 옥준상인 그림)사진에서 나타나듯 농암은 수염이 많고 얼굴이 크고 거무스름하여 사헌부 시절 동료들이 소주도병이라는 별명을 만들어주었다. 소수도병이란 소주를 담는 질그릇을 의미하는데 이는 투박하지만 속은 소주처럼 맑고 엄하다는 말이다. 사진 속에 당당함과 호방함이 함께 느껴진다. 농암은 벼슬을 하는 가운데서도 백성들에게 시종일관 관대하고 인자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또한 넉넉한 풍채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선비로 추앙받고 있다.
농암이 1555년(명종10)년 2월 13일, 89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사관(史官)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명종실록에 남겼다. "이현보는 영천 사람이다.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담박하고 욕심이 없어 시골에 있을 때 사사로운 일로 관아에 청탁하는 일이 없었으며 오직 유유자적하며 살았다. 근래에 만년의 지조가 완전하였던 사람으로 이현보를 으뜸으로 친다."[명종실록] 권18, 10년 6월 신묘. <영천이씨 농암종택 고전적(2004), 한국 국학진흥원, 재인용>.
2019년 농암선생 불천위 제사(음 6.13)때 종택에 있는 농암선조 영정 앞에서 아내와 함께 한 기념사진이다. 우리 종손(이성원 박사ㆍ2021년 69세)께서 앵글 속에 잘 담아주었다.
♤ 사진설명: 첫 번째 사진은 1526년 분천헌연도(작자미상) 그림이다. 애일당 아래에 있는 농암바위 좌편 조금 위에 강각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애일당 아래에 강각이 있었다. 두 번째 사진은 출처와 시대가 미상이다. 애일당과 강각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 옛날에도 여전하다. 일제 강점기 때사진으로 추정된다. 의인앞 앤떼이에서부터 부내까지 이어지는 수로를 완공한 후 관할 관서(도산면사무소)에서 관련 사진을 남기기 위해 촬영해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반도에서 식량확보를 위한 산미증식계획(1920~1934)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수리시설 정비차원에서 1927년 조선수리조합령(조선총독부제령제18호)을 발표하여 전국 지역에 조합창설과 함께 대대적인 수리시설 정비와 개량사업을 실시했다. 관계배수와 수해방지를 위해 조합을 설치하는 것이 효과적인 수리관리와 식량증식 및 확보에 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의인 번남 앞에 앤떼이(보)를 설치하고 부내까지 십리 길 수로를 만들어서 앞들과 신작로 주변에 물을 공급한 것도 일제의 이런 내심과 맞물려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앤떼이가 일제 치하기를 반증하는 용어이다. 세 번째 사진(안동 대륙사진관ㆍ월파 윤수암 선생 촬영)은 위 두 번째 사진과 똑 같은 구도이지만 "1960년대의 애일당과 강각의 전경"이다. 수려한 경관이 감탄을 자아낸다. 네 번째 사진: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분천동이 수몰되어 농암종택은 가송리로 이전하였다. 2019년 농암 선생 불천위 제사 때 강각 앞에서 잠시 아내와 함께. 다섯 번째 사진은 강각에서 차종선(이병각ㆍtvN joy Producer)과 필자가 함께 한 모습이다. 여섯 번째 사진은 애일당 앞에서 아내와 함께 했다. 일곱 번째 사진은 불천위 제사 때 종택 사랑채 사랑방에 걸려있는 선조 임금이 하사한 '적선(積善)' 앞에서 전국에서 모인 종친인 제군들이 제사를 준비하는 모습이다. 적선은 우리집안의 가훈이기도 하다. 선조는 선성삼필(宣城三筆: 매헌 금보, 춘당 오수영)로 알려진 농암의 여섯 째 아들인 매암 이숙량(1519~1592)이 왕자사부로 임명되어 인사차 알현하러 갔을 때 농암가문의 가훈이 되는 "적선지가 필유여경"이라는 여덟 글자를 즉석에서 써서 내려주었다. 매암은 왕자사부로 임명은 되었으나 실제 부임하지는 않았다. 여덟 번째 사진은 불천위 제사가 밤늦게 끝난 후 종친들이 모두 떠나고 안채 마당에서 종손과 종부님 그리고 우리부부가 함께한 모습이다. 아홉 번째, 열 번째, 열한 번째 사진은 농암 묘소 전경이다. 농암은 도산 운곡에 묻혔으나(1555년) 1791년 10월(사후 237년) 신남리 정자골 현재 위치로 이장했다. 지난 2020년 구정 다음날에 농암선조 묘소에 새해 인사를 가서 담은 전경이다. 두 분의 문인석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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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국민학교를 다닐 때(1971~1975) 기억을 떠올려보면 우리 시야에 강물이 보였던 곳은 의인앞에서부터 부내 밀양대('고려사'에는 1361년 홍건적 2차 침입 때 공민왕이 왕비 노국공주와 청량산에 피신하러 왔다가 환궁 때 부내 구당나무 부근에서 낙동강과 청고개를 바라보며 나라의 후일을 생각했던 곳이라 하여 '민왕대(愍王臺)'라고 일컬어짐, 이것이 시대가 지남에 따라 발음하기 쉬운 '밀양대'로 변했을 것으로 추정) 앞까지였다. 밀양대 앞에서부터 강물은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부포마을[성재 금난수의 터전ㆍ1530~1604: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정유재란 때 의병장, 퇴계 문하생, 1554년 서재 성성재를 짓자 퇴계가 편액을 써줌, 가사리 고산정 건립자, 예안 동계정사에 제향(동계서원), 참고로 고산정과 '올미소'는 '미스터션샤인'을 촬영한 장소이기도 함], 다래마을[월천 조목의 터전ㆍ횡성조씨 1524~1606: 다래의 한문 표기는 다음과 같다(다: 달ㆍ月), (래: 내ㆍ 川), 조목이 태어날 당시 마을 이름이 월천이었는데 선생의 호와 달리 부르기 위해 '달애' 혹은 '다래'라고 함. 월천서당이 있다] 그리고 예안을 지나 안동으로 물길을 따라 흘러간다.
다시 이야기의 초첨인 부내로 돌아가보자. 토계 술도가에서 조금 내려오면 의인 번남 앞에서 강물이 큰 여울이 되어 흘렀다(술도가에서 내려오면 여울 옆 강 언덕 위에 가설극장이 이따금씩 열렸던 작은 잔디밭도 있었다). 그런데 당시 넓은 여울을 자세히 보면 물 속에 50여 미터에 가까운 시멘트로 만든 긴 둔덕이 넓게 쳐저 있었다. 일종의 물막이 역할을 했던 둑(보)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앤떼이'라고 불렀다. 앤떼이는 일본 말이다[えんてい '언제(堰堤)' 혹은 '제언'이라고 한다. 한자 음은 '둑 언', '둑 제' 자이다. 즉, 흐르는 물을 막아 가두기 위해 만든 둑이라는 뜻이다]. 앤떼이는 위 그림(애일당 아래 길을 따라 보이는 회백색 수로)에서 보이는 수로가 조성된 시기를 가늠케 하는 시대적인 용어이다. 일본 말을 그대로 쓴 것으로 보아 이 수로가 일제 강점기 때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발견 된다. 지형적으로 보았을 때 의인과 부내는 완만한 기울기가 있어서 물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흘러내려 가는 데 아주 수월했다. 부내는 옛날부터 청고개[조선후기 광산 김씨 성을 가진 어느 병졸이 그의 스승인 농암 선생 회갑때 푸른 옷을 입고 이 고개를 넘었다는 데서 유래함. 청꼬 혹은 '청현(靑峴)'이라고도 함]에서부터 구당나무 일대, 수루미와 비밑 앞의 들(앞들ㆍ전평), 새당나무 주변 그리고 천방둑이 있던 솔밭 근처까지 논과 밭이 작지 않을 만큼 넓었다.
여기서 잠시 아랫마에 있었던 비밑과 행암대, 행암유원, 전평 등의 내력에 관해서 언급하기로 한다. 부내 아랫마 수루미 가기전에 비밑이라고 부른 곳이 있었다. 즉, '행암대' 아래 자리를 비밑이라고 불렀다. 행암대라는 글씨를 비로 본 것이다. 행암대는 바위 위쪽인데 옛날에 이곳에 있던 정자(행암대)를 기리기 위한 비(행암대라는 글씨)이다. 행암은 농암의 일곱째 아들 윤량(1516~1589)의 호이다. 그의 호는 행암이고 그가 바위 위에 세웠던 정자의 이름이 행암대이다. 행암대로 가는 길에 산 밑에 있는 바위에 "행암유원"이라는 각자가 있다. 행암이 놀던 곳으로 추정된다. 윤량은 예안에 살았으며 집 남쪽(부내 비밑지역)에 행암대를 세웠다. 즉, 행암대라는 정자를 먼저 세웠고 이를 기리기 위해 세긴 글씨가 행암대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행암대라는 비석의 밑(아래) 지역을 비의 밑이라고 해서 비밑으로 불렀다. 행암은 판사를 지냈으며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가 관작과 상을 내렸지만 받지 아니하고 분송 두 그루만 받아가지고 와서 행암대 앞에 심었는데 수몰 전에 그 자리에 실제로 소나무가 있었다. 그는 퇴계의 문하생으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리고 비밑 앞쪽에 넓은 들이 앞들이다. 수몰 전에 비밑에서 조금 내려가면 바위에 "전평(前坪) "이라는 글씨가 있었는데 이제는 강물이 들어와서 볼수가 없다. 전평이란 앞 '전' 자에 들 '평' 이다. 즉, 앞들이라는 말이다.
다시 부내 물 이야기로 돌아간다. 부내 동네 전답의 지형은 넓은 앞들과 그리고 마을을 관통하는 신작로를 따라 안쪽과 바깥 쪽에 밭이 길게 누워 있었다. 실거랑 너머에는 복숭아밭과 사과밭이 동구밖 길을 따라 펼쳐지다가 넓은 앞들로 연결되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신작로는 윗마와 아랫마를 나누는 경계선이다. 즉, 신작로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구분짓는 잣대역할을 했다. 앞들은 사실상 실거랑 건너에서부터 청고개까지로 보면 될 것이다. 부내는 강물이 마을 앞을 흘러가는 가운데 오른편 산 아래 강을 따라 길게 뻗은 둑덕 안 쪽에 자리를 잡은 산천을 다 가진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옛날부터 농사를 지을 물이 부족했던 여러 증거들을 만나볼 수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큰 낙동강물은 있었지만 마실 지형이 약 간 높아서 그 시대의 기술로는 강물을 끌어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을 안에서 나오는 농사를 지을 만한 물은 고숫빠에서 내려오는 말그대로 실처럼 가는 실거랑 물 뿐이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이 고안해낸 조형물이 지형이 높은 의인 앤떼이에서부터 우리가 학교를 다니던 십리 강둑길을 따라 오른쪽 혹은 왼쪽으로 물길을 만들어서 부내 앞들(해방 이후 만들어진 물레방간도 이 수로를 통해 공급된 물로 방아를 찧었다)까지 물을 공급할 수 있게 했던 바로 이 수로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산미증식계획(1920~1934)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다가 해방 이후 1950년대 말경까지 사용한 듯 싶다. 물레방간 자리는 분강서원에서 신작로를 가로질러 강쪽으로 내려가면 강섶에 평평하고 널다란 빨래터 바위가 있었다. 그 빨래터에서 내려왔던 신작로 쪽으로 다시 20여 미터 위로 올라가면 흙을 파내서 길다랗게 만든 우물이 있었는데 우물 바로 위 밭에 위치했었다. 의인 앤떼이에서 수로를 타고 부내까지 내려온 강물은 동네 앞으로 길게 만든 물길을 타고 천방둑과 마을옆 사이로 흐르던 실거랑을 건너 앞들로 보내졌던 것이다. 또한 추수철이거나 혹은 곡물을 찧어야 할 때는 앞들로 가는 수로를 막고 물레방간쪽으로 물을 흘려보내서 물레방아를 돌렸다. 동네 어른들의 전언에 의하면 1950년대 말경까지만 해도 이 수로와 물레방간이 가동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수몰로 인해 산천이 변해서 수로는 흔적 조차 없어졌고 옛사람도 아니 보이니 허전하고 적요한 이 적막감을 어이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유년시절 나는 애일당 아래에 있던 큰 수로를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멘트 수로가 뜬금 없이 애일당 앞에 있었던 것이다. 이 수로는 의인 앤떼이에서부터 애일당과 마을 신작로 앞을 지나 앞들까지 이어졌던 농수로이며 이 물길을 통해 동네 전답에 물을 공급한 것이었다. 실제로 위에 있는 사진(두 번째, 세 번째)을 보면 애일당 앞에 있는 수로는 높이가 꽤 높게 만들어져 있다. 이는 애일당에서부터 마을로 들어가는 길의 지형이 완만히 경사가 졌기 때문에 수로를 수평으로 만들기 위해 애일당 앞에서 높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것은 애일당 아래 있는 큰 바위에 '농암'이라는 각자(바위에 새긴 글자)가 있었는데 이 글자를 길에서도 보이게 하기 위해 기둥을 세운 뒤 수로를 그 위에 걸쳐놓아서 밖에서 보아도 '농암' 각자가 보이겠금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치밀한 토목공법이 아닐 수 없다.
도산국민학교를 다닐 때 의인 앤떼이에서부터 시작된 수로가 비행기장 오른편 둑 아래를 지나 참남배로, 조동골, 도산서원, 하마비앞, 삼바꼬, 토째비골, 비암이골, 애일당 앞까지 오는 물길을 보면 흙도랑으로 된 수로도 있었고 혹은 시멘트로 된 수로도 군 데 군 데 남아있던 것을 실제로 보기도 했고 또 지금도 몇몇 위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정확히 말하면 시멘트로 된 수로 지역은 아직도 대부분의 장소가 생각난다. 특히 삼바꼬에서 애일당 앞까지는 강물 바로 위 언덕에 길을 따라 시멘트로 만든 수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우리가 도산국민학교에 다닐 때(1971~1975)는 십리 길 수로가 이미 대부분 파손되어 있어서 쓸모가 없어졌다. 이 때는 이미 시대가 좋아져서 통소 위에 신식 양수장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학년 때는 이미 양수장도 퇴물 취급받던 시대라서 거의 돌리지 않았다. 대신 원동기로 강물을 직접 퍼올려서 신작로 근처 밭과 앞들에 물을 공급하는 모습을 여기저기서 수시로 볼 수 있었다. 실제로 한여름이면 수박밭과 참외밭, 무우밭, 배추밭에 물을 대는 원동기 소리가 크게 들렸고 또 밭고랑에 길게 놓여있는 푸른 비닐로 된 물 호스관도 많이 보았다. 물레방간이 없어진 이유는 한겨울에 얼었던 물레바퀴의 얼음을 깨다가 큰 인명사고가 났을 뿐만 아니라 1959년 9월에 전국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 태풍 사라호로 인해 애일당 아래 수로가 완전히 파괴 되어서 사실상 기능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시대상황에 맞게 신식방법인 양수장을 건립했던 것이다.
마을 신작로 중간에서(종가집에서 신작로 건너 직진으로 내려가면 강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강쪽으로 내려가는 강 둔덕 위에 만든 신식 양수장은 통소 윗쪽에 있는 강물을 양수장 아래로 물이 평형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깊이 저장고를 파서 양쪽 수로의 물높이를 수평으로 맞춘 후 물이 들어오면 양수기로 다시 양수장 안쪽에 있는 넓은 저장공간으로 물을 끌어올린후 이 물을 마을앞 수로를 통해 앞들로 내보내는 방식이었다. 어릴 때 양수장으로 물이 들어오는 시멘트로 만든 저장고를 내려다보면 깊이가 엄청나서 아찔했던 기억이 난다. 또한 그 물을 양수기로 퍼올려서 들로 내보내기 전에 모아둔 양수장 안쪽에 있던 매우 넓었던 시멘트로 만든 사각형 물 저장고는 깊이도 얕고 가장자리가 놀기도 좋아서 사각형을 따라 장난삼아 자주 돌기도 했다. 가끔 양수장 안을 들여다보면 큰 피댓줄이 감겨있는 양수기가 보였고 또 어두컴컴해서 낮인 데도 무서웠다. 하지만 우리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이미 세월이 그런대로 발전해서인 지 양수장을 돌리는 일은 거의 없었고 대신 원동기로 강물을 직접 퍼올려서 밭이나 앞들로 물을 바로바로 공급하는 방식이었다. 즉, 부내 수로의 역사는 의인 앤떼이에서부터 부내 앞들까지 십리 길을 따라 만든 인공 수로에 이어 신식 양수장 그리고 현대식 원동기 형태의 순서로 발전해온 것이다.
사진(두 번째, 세 번째)에서 애일당 앞에 보이는 시멘트로 만든 높은 수로의 기둥과 회백색의 수로가 한시대의 역사를 뒷받침 하는 증거물로 사진에 남아있다. 모든 것이 수몰된 고향 마실의 그리운 전경이 아닐 수 없다.
♤두 번째 사진 출처: 의인 앤떼이에서부터 애일당 앞으로 이어져내려오는 수로가 사진 속에 보이는 만큼 촬영한 시대가 일제 강점기 때일 것으로 추정해보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의인 번남 앞에 있는 앤떼이가 일본 말인 만큼 시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의인 앤떼이에서부터 부내 애일당까지 수로를 완성한 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관할 관서가 찍은 사진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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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암과 애일당(愛日堂): 위 두 번째, 세 번째 사진 속 아래에 위치한 정자 이름이다.
농암(1467~1555/ 권벌의 후손인 충순위 권효성의 딸인 안동권씨와 혼인함)은 조선중기때 문신이며 본관은 영천이다. 자는 비중이고 호는 농암 혹은 설빈옹이라 했다. 농암은 강호시인으로 어부가, 농암가, 효빈가 등 100여 편의 시가를 남겼다. 이 가운데 40여 편이 퇴계와 연관된 것이다. 농암의 강호문학은 퇴계의 시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도산12곡이 대표적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농암은 슬하에 8남1녀를 두었다. 분천동에서 출생하여 허백당 문광공 홍귀달에게 경전을 배웠다. 농암은 '효'와 '적선'을 몸소 실천한 선비로서 조선시대 전체를 보아도 임금으로부터 '효'와 관련된 시호를 받은 사람은 없다. 효와 적선은 농암의 삶과 철학을 형성하는 바탕이었다. 그는 사후 선조로부터 '적선'이라는 농암가문의 가훈이 되는 글자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명종12년(1557)에는 '효절(효절공)'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지금도 적선은 농암종택의 사랑채에 현판으로 걸려져 있다(농암의 여섯째 아들인 숙량공이 세자의 교육을 맡는 관직에 제수된 후 선조에게 절을 올리자, 임금이 즉석에서 써준 글씨이다. 선조가 내린 현판의 복사본이 농암종택 사랑채 사랑방에 걸려있다). 농암은 생전에 무려 44년 동안(31세~76세)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등 네 분의 임금을 모셨다. 이른바 숙청과 탄압이 난무하던 4대 사화기였지만 지방수령을 자청하여 외직에 있으면서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오히려 난국에 백성을 잘 다스려서 후배 사림들의 귀감과 존경을 받을 수 있었다.
위 사진(두 번째, 세 번째)에 있는 애일당과 강각을 한번 조명해보기로 한다. 애일당(중종7년 1512년ㆍ농암 46세 건립, 효빈가와 연관됨)은 농암이 날로 연로해지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하루 하루 가는 해와 날이 아쉬워서 즐겁고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영지산 자락에 지은 정자이다.
처음 애일당을 지은 자리는 수몰전 농암 각자가 세겨져 있던 큰 바위 위에 교각을 세워서 높게 만들었다. 1526년 분천헌연도(위 첫 번째 그림)를 보면 교각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애일당 아래 있는 강각도 교각이 있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미 위에서 언급했듯이 강각도 물에 쓰러졌지만 애일당도 강물과 비로 허물어져서 다시 건립했다. 애일당은 원래 위치했던 자리의 왼쪽 조금 위에 흙을 평평하게 만든 후 다시 지었다(두 번째, 세 번째 사진). 높았던 교각도 없앴다. 우리가 수몰 전에 보았던 바로 그 장소이다. 그때 그 큰 바위위에 "농암선생정대구장(聾巖先生亭臺舊庄)"이라는 각자가 있었다. 즉, 농암선생의 애일당 정자가 있던 옛 터"라는 뜻이다. 한말 진사 이강호의 글씨다. 옛 분천동 애일당 아래 큰 바위에 각자 되어 있던 것을 안동댐 수몰로 가송리에 이건한 농암종택내 애일당 앞 언덕에 각자 부분만 가져와서 설치해놓았다.
애일당 현판 글씨는 그의 제자가 중국에 가서 명필에게서 받아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농암은 애일당에서 고을에 사는 남녀귀천에 관계없이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모셔놓고 양로잔치를 하며 때때옷인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이러한 구로회 잔치는 이후에도 기로회, 백발회라는 이름으로 계승되어왔다. 농암은 사후(1555년) 도산 운곡에 묻혔으나 1791년 10월(사후 237년) 신남리 정자골 현재 위치로 이장했다. 묘비는 이황이 지었으며 이장후 개갈한 전면은 영의정 체제공이 했고 묘갈명은 이조판서 이가환과 형조판서 한치응이 붙였다.
♧강각(윗 첫 번째 그림 속 애일당 아래에 자리한 누각)은 1544년에 농암 선생이 애일당 아래 농암바위 조금 위에 지은 강변 소각 이름이다. 다시 말해 강변에 지은 작은 누각이라는 말이다. 이 누각이 강물에 허물어져서 농암 선생이 다시 지을 때는 애일당 위로 옮겨 지었다. 강각은 영남가단(시를 쓰는 모임)의 모태가 된 누각이기도 하다. 강각은 퇴계, 김안국, 주세붕, 이언적, 이해, 황준량, 조사수, 임내신 등의 많은 선비들이 함께 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가단이 중심이 된 풍류 속에서 농암의 어부가가 탄생한 것이다. 농암의 시는 특히 중종과 명종 때 강호시가를 창도하고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영남문단을 선도했다고 볼 수 있다.
'화산양로연도'이다. 농암이 안동부사 때 부모님과 고을 노인들을 모시고 양로잔치(53세ㆍ중종14, 1519년 음력 9월 9일)를 하는 전경을 그렸다. 농암의 삶과 철학은 '효'가 바탕이 되었다. 애일당, 효빈가, 구로회, 기로회, 백발회, 효절공, 적선 등은 이를 뒷받침하는 정자이자, 시가이자, 양로회이자, 사료들이다.
♤그림출처: 위 첫 번째 그림은 옛날 부내동네 전체 전경인 '분천마을도(柔山 김영환作, 2014)'이고 두번째는 애일당을 중심으로 분천마실을 화폭에 담은 '애일당별서도(유산柔山 김영환作, 2014)'이다. 유산 선생이 옛날 부내마을 사진과 지금의 산천, 농암종택 이성원 종손 그리고 조선시대 명인들이 빚어낸 분강촌 관련 여러 산수화를 참고하여 진경산수화적인 기법으로 그린 명작이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사진 속 인물은 종손 이성원 박사의 모습이다) 사진은 분천동 앞으로 흐르는 분강 속에 있던 전설의 바위들을 중심으로 담은 사진이다. 각도만 조금 다를 뿐 바위들의 모습이 비슷한 구도로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내는 농암선생의 호가 귀먹바위 듯이 아름다운 산천과 더불어 분강에 자리한 신령스러운 여러 바위들이 마을의 풍광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첫 번째 그림 속에는 석명(바위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애일당 아래 농암바위[귀먹바위(聾巖)ㆍ耳塞巖(귀가 먹은 바위)]를 기준으로 했을 때 오른편 앞에 사자바위(사자석獅子石) 그 옆에 자리바위(반석, 점석簟石: 분강 가운데 반석이라고 하는 비단자리와 비슷하게 생긴 평평한 바위가 실제로 있다. 즉, 이 바위를 점석이라고도 부른다), 왼편에 코끼리바위(상암象巖)도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바위들 중앙에 통소를 그렸지만 실제 통소의 위치는 양수장 조금 아래인 구여울 바로 위에 자리했다. 그리고 그림 왼편 끝에 글씨는 잘 보이지는 않지만 확대해보면 분천바위와 쌍암(유사하게 생긴 한 쌍의 바위)이 있다. 그림에는 둘다 한글로 써져 있지만 실제 바위에는 모두 한문으로 각자되어 있다. 분천바위는 정자체 한문으로 "분천"만 새겨져 있고 쌍암은 흘려서 쓴 초서체이다. 분천바위로부터 50여 미터 아래에는 감퇴바위(이 감퇴바위 속에 '쌍암'이라는 각자가 있음)가 있다.
감퇴(減退)바위에 대해서 좀더 고찰해보자. 농암선생은 말년(76세)에 임금(중종37년ㆍ1542)과 조정 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거래(歸去來)를 감행했다. 연로하신 부모님과 젊은 관료들을 위해 길을 터주기 위한 올바른 염퇴(恬退ㆍ염퇴지사)였다. 즉, 이제는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판단에서 진정한 귀거래를 굳쳤을 것이다. 귀거래란 관직에서 물러나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감퇴(減退)라는 말은 이와 연관이 깊을 것으로 추정된다. 죄다 내려 놓고 물러났다는 의미이다. 다시말해 귀거래를 했다는 것이다. 감퇴(덜 '감減' 물러날 '퇴退')는 벼슬을 덜고(내려 놓고) 물러나서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말이다. 이는 염퇴(恬退)와도 의미가 상통한다. 염퇴란 편안하게(염恬) 물러난다(퇴退)는 의미이다. 편안하려면 관직을 내려 놓고(덜고: 감減) 고향으로 돌아오지(물러나다: 퇴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귀거래가 곧 감퇴이자, 염퇴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누가봐도 올바르게 물러나는 모양새일 것이다. 귀거래와 염퇴는 곧 모든 것을 덜고(벼슬을 내려 놓고) 물러난다는 "감퇴"와 일맥상통 한다. 이 모든 것은 귀거래로 귀착되어진다. "감퇴바위"에는 이런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감퇴바위 속에는 "쌍암(雙巖)"이라는 각자가 있는 데 이는 말 그대로 비슷한 한 쌍의 바위라는 뜻이다. 감퇴바위는 쌍암으로 되어 있다. 농암은 이 바위에서 분강과 산천을 바라보며 올바른 염퇴와 귀거래에 대해 매우 지족했을 것이다.
두 번째 그림과 세 번째~다섯 번째 사진의 바위 이름은 첫 번째 그림의 바위 위치와 대조해서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림과 사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같은 위치에 있는 같은 바위이기 때문이다.
분강촌 이종구(2020.3.11)
뒷동산 늙은 솔낭구에 부엉새 초저녁부터 울고
물레방앗간 천 년 분강에는 물안개 하얗게 피네
통소 구여울소리 목놓아 이른 봄 기별 알릴 때
분천바위 감퇴바위 묵은 이끼에도 파란색 돋네
아랫마 행암대에서 돗자리 멍석 널따랗게 펴고
서리 대리 윷놀이 하며 동네 아이들 밤새워 노네
야심한 밤 실거랑 건너 윗마 집으로 총총 올 때
휘영청이 보름달 길동무 되어 분주히 따라오네
신작로 가로질러 영월댁 우릉골댁 지나칠 때
산모랭이 정령들 무섭어 가슴조리며 마구 뛰었네
원촌댁 복숭아밭 접어들어 겨우 한숨 놓을 때면
길몫 지킨 개갈간지 흙을 뿌려 간담이 서늘했네
아! 분강촌 전설들이 강물 속에 깊이 잠들었네
오른쪽 도산서원부터 왼쪽 분강촌(부내汾川ㆍ분천동) 까지의 산수를 그렸는데 분강촌이 그림의 중심이다. 월탄선생(김창석)이 1710년 경에 아름다운 산천이 운집한 농암 선생의 고향마을인 분강촌을 그린 <분강촌도> 전경이다. 농암이 태어난 '부내'라고도 불리는 분강촌은 산과 강과 들이 수려하여 농암은 "정승 벼슬도 이 강산(산천)과 바꿀수 없다"고 했고 모재 선생(김안국)도 "부내 마을은 산수가 청랭하고 아름다워 흡사 도원에 들어가서 신선을 만난 것처럼 그윽하다"고 했다.
266년 전의 그림인데도 수몰되기 전인(안동댐 1971년 4월 착공ㆍ1976년 10월 준공) 고향 마실 분천동 전경과 너무나 흡사하다. 우리가 뛰놀던 애일당, 강각(록기정이 있던 자리, 원래는 강각 터이다), 분천서원(분강서원)과 샅골(실명은 살골 혹은 전곡)로 부른 석간대 그리고 강건너 섬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강사까지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1796년에 건립된 시사단은 분강촌도(1710) 안에는 당연히 없다. 농암선생이 정착했던 이 마을은 1976년 안동댐 준공으로 수몰이 되었고 그 흔적은 지금 가송리에 있는 농암종택으로 이건하여 보존되고 있다. 나는 1975년 국민학교 5학년 가을학기 때 물이 마을 어귀로 차오르자 본의 아니게 이 동네를 떠나 온혜국민학교로 쫓기다시피 전학 아닌 전학을 가게 되어 어린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분강촌도>에서 왼쪽 제일 아래 분천동(분강촌)을 출발해서 강 길을 따라 굽이굽이 오른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도산서원이 있다. 그림 오른쪽 끝이 도산서원이다. 도산서원 강 건너 섬마에 있던 솔밭도 보인다. 온 길만큼 한 번 하고도 반 정도를 더 가야 도산국민학교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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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 이현보(1467~1555):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영천, 시호는 효절공이다. 부제학, 경상도관찰사, 형조참판, 호조참판, 자헌대부, 중추부지사, 숭정대부(명종 1549년 내린 품계) 등을 지냈다. 농암집에 농암가, 어부가 등 다수가 전한다. 안동 도산면 가송리 분강서원에 배향되었다.
♤그림: 표암(강세황 1713~1791)이 농암 선생의 고향 마을인 분천동(분강촌)을 그린 "도산도(1751)"이다. 위 두 개의 그림은 같은 것이며 아래 그림은 위 그림의 왼쪽 부분을 확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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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보이는 전경을 그대로 화폭에 담은 진경산수화이다. 아래 그림을 위 그림과 대조해서 보면 우리가 살았던 동네 정자(누각 및 서원)들이 그림에도 그대로 나와있다. 왼쪽부터 분강촌(분천동 옛날 지명이 분강촌이다) 안에 있었던 지명들이 차례로 나온다. 분강촌, 분천서원(분강서원), 애일당 등이 보인다. 이어 마을을 벗어나서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 중간 정도에 있는 토째비골에 옛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병암(매암 이숙량이 건립ㆍ농암의 여섯 째 아들: 1519~1592)'이라는 정자가 표기되어 있다. 병암 바로 밑에는 서취병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도산서원(뒷산)을 기준으로 왼편 산은 서취병(산), 오른편 산은 현재 도산서원과 퇴계종택을 포함한 동취병(산)이다. 다시말해 서취병은 누각이름이 아니라 산 이름이다. 이어 삼바꼬(삼밭골)를 바로 지나면 우리가 샅골이라고 불렀던 살골(전곡)이 나온다. 아래 그림 오른쪽 골에 '석간대'라고 써져 있는데 이 골이 샅골이다. 산 위로 갈수록 돌 산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도산서원 선착장 주변과 주차장 아래와 위의 골이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위 그림의 중앙 부분 접힌 곳의 바로 오른편을 자세히 보면 집들이 여러개 보이는 데 이것이 도산서원이다. 도산서원 뒷산은 동취병이다. 한편 애일당 뒷산 이름은 영지산이다. 위 그림 강 건너에는 오늘날의 시시단이 표기되어 있지 않다. 이는 시사단(정조 1796년 건립)이 이 그림을 그린 시점(1751)보다 45년 뒤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삽화출처: 때때옷의 선비(농암 이현보), 국립중앙박물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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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이 그토록 원하던 귀거래(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집으로 돌아감)는 중종임금과 조정의 만류로 인해 76세(1542년 중종37년)가 되어서야 어렵게 이루어졌다. 벼슬을 내려놓고 염퇴(명종이 '염퇴이양'이라고 말한 염퇴란 바람직한 귀거래를 의미한다)한 후 부모님이 계시는 향촌인 분강촌에 내려와서 고을 노인들을 위한 구로회(이후 기로회, 백발회로 이어짐: 고을 노인들을 위한 양로 잔치이다)와 양친을 위한 애일당(부모님이 날로 연로해짐에 따라 하루하루 가는 시간이 아쉬워서 양친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지은 누각)을 지어 '적선'과 '효'를 몸소 실천했다. 또한 마실앞 분강에 배를 띄워 자연을 벗삼아 강호시가를 읊으며 은자 같은 말년을 보냈다. 특히 분강에는 농암(바위이름: 이현보의 호이자 '농암가'의 출처이다)과 함께 자리바위(점석 혹은 반석)가 있었다. 농암은 점석 위에서 퇴계(退溪ㆍ李滉: 1501~1570)와의 나이(34년 차이)를 잊은 채 학문과 문학을 담론하는 등 벗으로서 강호지락을 나누며 탈속적인 삶을 보냈다. 농암이 지은 농암가와 어부가는 한문과 한글이 함께 쓰인 강호시가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측면에서 높이 평가된다. 이러한 강호가도를 노래한 시가문학은 이후 퇴계의 '도산십이곡'과 기촌 송순(1493~1583)의 면앙정가, 정철(1536~1593)의 3대 가사(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그리고 '어부사시사'를 지은 고산 윤선도(1587~1671)에 이르며 가사문학의 절정을 맞이한다. 어부가는 국한문 가사로 강호가도의 효시이다. 국문학사에서 농암을 '강호가도의 창도자'라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 문학사에 강호시조의 작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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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어부가'의 발문을 쓰며 농암을 이렇게 묘사했다. "농암 이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분강가로 염퇴(恬退)했다. 부귀를 뜬 구름처럼 여기고 회포를 물외(物外)에 붙였다. 때로 조각배를 타고 물안개 낀 강위에서 즐겁게 읊조리거나 낚시바위 위를 배회하며 물새와 고기를 벗하여 망기지락(忘機之樂)했으니 그 강호지락(江湖之樂)의 진을 터득한 것이다.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다. 아! 선생은 이미 그 진락을 얻은 것이다." [원출처: 퇴계의 '어부가' 발문 중에서; 농암 이현보의 강호문학, 강호문학연구소 3p. 재인용]
♤♤농암은 퇴계의 숙부인 송재(이우)와 친구 사이이며 과거시험에도 함께 급제했다. 퇴계 또한 농암의 둘째 아들인 벽오 이문량(1498~1581)과 친구였다고 하니 양집안이 막역한 사이였으리라. 농암과 퇴계는 족질간이기도 하다. 퇴계는 숙부인 이우 외에는 사실상 공식적인 스승이 없다. 하지만 농암이 말년에 분강촌에서 퇴계와 큰 나이 차이를 잊고 많은 시간을 벗하며 강호지락을 나눈 것으로 보았을 때 퇴계의 문학적인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농암이 자명한 사실로 여겨진다. 실제로 우리 국문학사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강호시가를 보면 퇴계는 도산십이곡 등에서 농암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1746)> 이다(현재 사용중인 일천 원권 지폐 뒷면 산수화). 앞서 본 <분강촌도>의 구도와 조망이 매우 닮은 꼴이다. 오른쪽 정자(계상서당)만 제외하면 나머지 산수는 분강촌도와 일치한다. 분강촌도는 분강촌을 중심으로 주변의 전경을 그린 만큼 더 섬세하게 표현했을 뿐이다. 산수화의 정자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퇴계 이황 선생이 앉아있는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계상정거도(영조ㆍ1746) 속에 시사단(정조ㆍ1796)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 산수화를 그릴때 시사단은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멀리 왼쪽으로 강을 따라 길다랗게 누운 산야가 분강촌(분천동)이고 사진 앞 오른쪽은 도산서원이다. 이 강 길을 그대로 따라서 토계에 있는 학교로 가는데 분강촌에서부터 도산서원까지 온 길 만큼 한번 하고도 반을 더 가야 도산국민학교가 나온다. 신기하게 사진으로 찍어놓은 듯이 수몰 전의 전경과 똑 같다. 하기야 당대 최고의 화가가 그대로 산천을 보고 그린 진경산수화인데 더 말해서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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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의 최고의 경지를 그린 걸작품이 이번에 고 이건희 회장이 국가에 기증한 인왕산 전경을 그린 진경산수화(직접 답사해서 실제 경치를 그대로 화폭에 담은 산수화)의 백미인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이다.
조선 후기 최고 화가인 정선의 또 다른 진경산수화의 꽃이 바로 현재 일천원권 지폐 뒷면에 있는 도산서원과 분강촌을 이어서 그린 "계상정거도" 이다. 우리들의 고향 산천이 얼마나 경이로운 곳이길래 겸재 선생이 이곳을 그렸을까. 계상정거도를 자세히 보면 275년 전 그림과 수몰 전 내가 살았던 고향산천 전경이 눈을 감고도 서로 찾을 수 있을 만큼 너무나 흡사하다.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를 도산서원만 빠진 요즘 사진으로 그대로 재현해보았다. 저 멀리 그림 중앙 양 끝에 길게 누워 있는 산 아래 전부가 물 속에 잠긴 분강촌(분천동) 전경이다. 사진 왼쪽에 나무가 서 있는 장소는 지금의 도산서원 앞 마당 끝자락이다. 보이는 이 길이 만큼의 거리를 강 따라 한 번 하고도 반을 더 가야 도산국민학교가 나온다.
샅골(살골 혹은 전곡이라고함, 골로 올라가면 석간대가 나온다. 석간대는 지금의 주차창 자리 주변이다) 앞에서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다리(섶다리)이다. 아래 사진(1974)과 같은 곳이지만 훨씬 더 옛날 사진인 듯 싶다. 갓을 쓰고 하얀 도포를 입은 어르신의 모습이 당시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출처: 미상(일제시대?~1960?)
동취병산 입구 살골(전곡) 맞은편에 섬마로 건너가는 추억의 청소깝 외나무다리가 보인다. 가파른 여울 위로 일렁이는 하얀 포말들이 시원해 보인다. 뒤에는 소나무 가로수가 청아한 향기를 내뿜고 있다. 100여 미터만 더 가면 도산서원 정문이 나온다.
♤사진출처: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1974)
♤그림: 이택(수몰 전 분강촌을 그린 분강도ㆍ1992년 作: 화가, 농암 17대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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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강서원 건립자는 영천이씨 안동 입향시조이자, 농암 선생의 고조부인 소윤공 이헌 선생(졸 84세ㆍ배위 선성이씨)이다. 소윤공은 지금으로부터 약 670여 년 전(1976년 수몰 년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는 626여 년 전)에 부내에 처음 입성한 입향시조이다. 소윤공은 처음 이 산야를 발견하고는 낙동강물이 맑고도 밝고도 넓게 흐르고 있는 이 곳을 보고 부내(분천ㆍ분강촌)라고 지었다고 한다. 농암 사후 불천위로 받들어지면서 농암종택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림: 이재홍(2020作/ 농암삼촌인 직장공파 후손ㆍ2012년 대구운암중 교장 퇴직ㆍ72세): 위 첫번째 그림은 수몰전인 1970년대 당시의 동네를 회상해서 그린 것이고 중간 그림은 수몰된 현재 산천을 섬마에서 바라보며 그린 전경이다. 아래 그림은 필자가 그림이긴 하지만 부내 전경 전체를 담아보기 위해 두 개 그림을 붙인 것이다. 아랫마 앞들과 주당골에서부터 애일당까지를 이어붙인 그림이다. 경희대 연구실 벽에 부내 전면도인 이 그림을 붙여놓고 조석으로 늘 신앙 처럼 기도하며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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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아래로 흘러가는 푸른 낙동강은 시사단과 동취병산 강나루 사이 물길을 따라 굽이쳐 내려가다가 영지산 끝자락에 선경처럼 걸려있는 애일당과 강각 앞에서 천 년의 흐름을 멈추며 아름다운 분강촌과 반나절을 노닐다가 다시 밀양대를 비켜지나서 급히 부포로 접어든다. 당대 최고 화가인 겸재 정선이 당대 최고의 명승지 가운데 하나인 이 산천을 마침내 진경산수화로 화폭에 옮기니 이것이 이름하여 한국 산수화의 걸작품인 '계상정거도'이다. 시대의 명인과 도원 같은 산천이 함께 빚어낸 이 수려한 산수화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현재 일천 원 짜리 지폐 뒷면 산수화).
우리들은 농암 선생과 퇴계 선생 때부터 심고 벗 삼았을 법한 오백년 솔밭 가로수 길을 지나 살골(전곡ㆍ일명 샅골)로 내려오면 섬마로 건너가는 청소깝 외나무 다리가 하얀 포말을 만들며 거친 울음소리를 내는 여울 위에 푸른 비단 띠마냥 넓게 펼쳐진 채 두 팔을 벌려 우리들을 유혹하곤 했다. 하마비(下馬碑ㆍ현재 선착장 부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산서원에는 퇴계 사후에 서원의 어귀에 세운 하마비가 있다. 옛날에 도산서원 아랫 길이 수몰되기 전에는 샅골 초입에 관광공예품을 팔던 뒷쪽 자리에 있었지만 지금은 도산서원 주차장 안내판 옆에 비석이 있다. 옛날 말을 타고 다니던 시절, 이 지역부터는 말에서 내려서가라는 일종의 푯돌이다. 하마비는 궁월이나 서원, 고궁, 향교 등의 입구에 설치했는데 누구든지 이 앞을 지날 때에는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라는 일종의 '예를 갖추라'는 표시이다) 앞을 지나서 삼바꼬(삼밭골)에 이어 나타나는 토째비골을 벗어나면 비암이골과 맞닿아 있는 수려한 애일당[애일당 왼편에 있는 분강서원(분천서원)뒷골은 독짓골이다]이 보이고 여기서 부터 마을 길로 접어드는 완만하게 경사진 신작로 길이 직선으로 시원하게 트여져 있다. 애일당부터는 낙동강(분강) 둔덕 위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초여름 하늬바람에 산들산들 춤을 추는 형형색색의 코스모스들이 마을을 관통하는 신작로 길을 따라 줄지어 서서 동사무소 앞까지 우리들을 마치 개선장군 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굣길에 우리는 마을 초입에 있는 애일당(바로 위에는 강각이 있었다)이 보이면 집에 다왔다는 반가움에 누가 먼저라 할것 없이 당시에 유행하던 가수 이용복씨의 어린시절을 부르기 시작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며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은 그 사람 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마음~ 아름답던 시절은 꽃잎처럼 떨어져~ 꿈이었다고~"
누군가 하나가 선창을 하면 우리 모두는 떼창을 하며 선선한 강바람이 불어오는 애일당 아래를 굽이 돌아나와서 동네 삽지껄인 분강서원 앞까지 끝이 없이 메들리를 불러재켰다.
분강서원 어귀부터 동네 번화가인 성대네 할매 구멍가게가 있는 동사무소 앞까지, 직선으로 마을 앞을 관통하는 신작로 길은 그야말로 꽃대궐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코스모스 길이었다. 위 첫번째 그림 왼편 아래 아랫마 천방둑이 있던 솔밭 옆에 작은 산만큼이나 컸던 새당나무와 당집이었던 성황당의 옛 모습들이 그리운 잔상으로 다가온다. 아~ 그리운 분강촌이여!
바로 위 사진 소나무 가로수 오른편 끝, 길 정면에 서서 도산서원을 향해 찍은 사진이다. 필자의 글 속에 나오는(도산서원 정문 옆 오른쪽 산모퉁이 길가에 홀로 서 있는 큰 참나무~) 큰 참나무가 사람들 뒤에 멀리에 있긴 하지만 실제로 보이고 있다. 사람들 뒤에서 50여 미터만 더 가면 왼쪽에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큰 정문 입구가 나온다. 사진은 직선으로만 나오기 때문에 위 사진에서는 정문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위 사진의 사람들과 뒤로 멀리 보이는 참나무 중간 지점에 도산서원 큰 정문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정문 바로 왼쪽 입구에는 조그마한 작은 기와집 속에 도산서원 역사와 건물들의 위치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있었다. 정문에서 다시 60여 미터를 올라가야 지금의 도산서원 앞마당이 나오는데 올라가는 길은 제법 경사가 졌고 바닥은 절편 같은 자연석 돌로 깔려져있었다. 자연석 돌 밑에는 공글로 만든 큰 터널이 있었고 그 속에는 도산서원 뒷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여름철이면 우리는 등하굣길에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터널 속에 들어가서 놀기도 했다. 오르막길 정문 양 옆으로는 수백년 묵은 왕버들과 참나무들이 줄지어 빼곡하게 서 있어서 낮인데도 어두컴컴 했다. 지금 도산서원 앞마당에 누워있는 큰 왕버들도 이들 나무 가운데 하나였다. 위 사진은 새벽할배 손자인 재술이 아재(1974년 12월 도산서원 입구에서 촬영)가 경북기록문화연구원에 출품한 사진 가운데 하나이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수몰 전 당시 분강촌에 살았던 손위 종친들이다. 농암선생 후손들이자, 영천이씨 집성촌 동네인 분강촌은 모두가 이리저리 친척들로 얽켜 있는 마을이었다.
♤사진출처: (사)경북기록문화연구원
1972년에 졸업한 53회 선배님들이 도산서원 정문 오른편 산모퉁이 앞에서 단체로 찍은 소풍 사진이다.
본문 속에는 이 사진의 위치에 대해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도산서원 정문 옆 오른쪽 산모퉁이 길가에 홀로 서 있는 큰 참나무~). 사진 오른쪽 끝에 서 있는 큰 참나무가 실제로 사진에 잡혔다. 위에 선배들이 소풍 때 찍은 사진의 위치를 겸재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를 놓고 본다면 산수화의 오른쪽 절벽 아래 산모롱이 길의 중앙이 아닌 왼쪽이 된다.
강위기 선생님은 5학년 1학기 때 담임이었다(사진 아래 오른쪽에서 두 번째). 어린 생각에도 모던한 얼굴에 선한 성정을 지니신 신사였다.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면 내 차 뒷좌석에 모시고는 파리바게뜨 단팥빵에 파스꾸찌를 드리고 싶은 그런 5월이다. 아니 내 자전거 뒷자리에 앉히시고는 삼립단팥빵에 오렌지색 환타를 드리며 스승의 은혜를 불러주고 싶은 그런 5월이다.
♤ 에세이 속의 나오는 "류귀현 선생님"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만난 선생님이었다. 담임인 선생님을 통해 "선생님"이라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우리들을 대하는 모습은 내가 아는 천사의 모습과 흡사했다. 선생님은 1학년인 우리들을 전기줄에 줄지어 앉은 참새 마냥 운동장에 모아놓고 연단 위에서 사쁜사쁜 무용을 하시며 꾀꼬리처럼 동요를 잘도 부르셨다.
"우리들은 1학년 어서어서 배우자 구경하는 참새들아 같이 배우자. 우리들은 1학년 어서어서 배우자. 학교마당 나무들아 같이 배우자."
"주먹 쥐고 손을 펴서 손뼉 치고 주먹 쥐고 두 손을 머리 위에 햇님이 반짝 햇님이 반짝 반짝거려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 손뼉 치고 주먹 쥐고 또 다시 펴서 나비가 훨훨 나비가 훨훨, 훨훨 날아요."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일 먼저 이를 닦자, 윗니 아래 이 닦자, 세수할 때는 깨끗이, 이쪽저쪽 몸 닦고, 머리 빗고 옷을 입고, 거울을 봅니다, 꼭꼭 씹어 밥을 먹고, 가방 메고 인사하고, 학교에 갑니다, 씩씩하게 갑니다.”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배우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배우자. 사이 좋게 오늘도 공부 잘 하자."
참새들인 우리들은 하늘거리는 플라타너스 이파리 아래에서 아무 걱정도 없이 예쁜 선생님을 쳐다보며 참새들처럼 입을 쪽쪽 모아서 목청껏 "지지배배" "지지배배" 소리를 지르며 앙증맞게 동요를 따라 불렀다. 그 당시 선생님은 교대를 갓 졸업하고 첫 부임하신 학교인 만큼 곱디고운 모습에 아름다운 청춘이셨다. 무심한 세월은 흘러흘러 어느덧 선생님의 연세도 일흔을 훌쩍 넘으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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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즈음 아이들은 '청소깝"이 무엇인지 알랑가? 구수한 고향사투리와 방언 정겹네~
고마워~~잘봤어
언제 들어도 반갑고 그리운 고향얘기입니다.
고향을 아름답게 묘사해서 기억하게 해주시는 선배님이 계셔 무지 흐믓합니다.
감사합니다.
반공일이면 뺀또는 못 까먹지만 일찍 하교하고
좋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온공일이 되었네
지금은 금요일도 온공일로 되어 가려고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