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시창작방1, 2』, 『시창작방3』에 올라 온 총 50편의 작품 중 박찬규 시인의 <삐비>, 노수현시인의 <손톱을 깎으며>, 장희한 시인의 <가을 박>, 청담 안태영 시인의 <죽도. 널배를 밀고 봄이 오는 섬> 등 총 4편을 추천한다.
삐비
박찬규
주름진 가난 고인
논배미 둠벙길 따라
젖을 물듯
사뭇 달콤했던 한시절
방죽가 풀밭
소 되새김질인양
잘근잘근
허기를 달래고 나니
생은 어느새
하얀 풀씨 되어 날아가고 있었네
시상을 집약하여 한 문장으로 구성한 짧은 호흡의 작품이다. 자연물인 ‘삐비’의 속성을 중심으로 가난했던 시절을 함축하고 있다. 삐비가 자라는 논배미는 쌀을 품고 있는 공간이지만 그것이 화자의 소유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소 되새김질’처럼 속을 채울 대용물인 삐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게 그려지고 있다. 삐비꽃은 한의학에서 白茅花(백모화)로 주 효능은 출혈을 막는 지혈제의 작용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오뉴월에 피는 이 식물의 속성을 유추해보면 춘궁기에 보릿고개로 궁핍했을 영육을 채워 줄 대상물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화자의 가난으로부터 연유한 삶의 출혈을 삐비라는 치유제를 통해 극복해보려는 의지를 담은 작품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다만 마지막 연의 ‘하얀 풀씨’의 의미를 ‘승화’로 해석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아스라한 문장 표현이 매우 중립적이어서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궁극까지 표현해 내는 데엔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과거 현실을 극복, 또는 정체의 의미가 보다 투명하게 드러났으면 하는 아쉬움을 보탠다. 그럼에도 추상의 구체화를 통해 감각적으로 의미를 통합해 전달한 점은 높이 살만 하다.
손톱을 깎으며
노수현
가을이 쉽게 오지 않는
무료한 한낮,
손톱 밑에 낀 까만 때가 보기 싫어
한 삼십 년 전쯤에 산
손톱깎이를 가장 가깝지만
가장 무심한 손톱에 들이민다
어쩌면 손톱은 내가 매일 토해내야 하는
배설물처럼 속절없이 자라고
휴지 속에 꼭 싸서 버려야 할
이물질인 건지도 모른다
어느 날 비가 억수 같이
퍼 분 어느 날,
젊은 택배기사가
시커먼 손톱으로
박스를 뜯고 긴 한숨을 짓는
모습을 우연히 본다
내가 깎은 손톱이 빌어먹을 여유라면
함부로 깎을 수 없는
그 노동의 시커먼 손톱이
사실 모든 삶의 원천인지도 모른다
단지 이상하게도 무더운
구월의 열대야에
그 말할 수 없이 시커먼
노동의 손톱 때문에
일부러라도 잠을 설치고
핸드폰 손전등을 켜며
여유롭게 깎은 내 손톱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환절기에 손톱이라는 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에 몰두하는 화자의 의식을 따라 전개한 작품이다. 손톱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신체 부위이지만 화자에겐 보기 싫은 그 안의 때를 함께 없애야만 하는 귀찮은 존재로 인식된다. 그러나 무료한 여유가 주어져야 가능한 이 작업이 택배기사에겐 꼭 필요한 작업상의 중요한 도구로 등장한다. 손톱의 모스 굳기계 경도는 2.5 정도로, 인체의 부위들 중 제법 단단하고 날카롭기 때문에 간단한 절단 작업에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택배기사에겐 필수불가결한, ‘삶의 원천’으로서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청나라에서 손톱이 부러지지 않도록 반지의 일종인 ‘호갑투(護甲套)’를 끼운 것 같은 게으름의 표상과는 다르다. 화자와는 다른 의미로 전환된 이 손톱에 대한 발견과 인식은 결국 화자의 불면을 초래하는 데까지 이른다. 대비되는 장면과 스토리를 보여줌으로써 화자가 누리는 여유가 근원적으로 어디에서 왔는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한편, ‘밤에 손톱을 자르면 수명이 짧아진다’는 속설은 일본 전국시대의 ‘밤새워 보초서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모두가 잠든 밤 보초를 서는 택배기사의 부지런함이 모두의 행복을 늘려주는 행위임엔 분명해보이며, 특히 화자에겐 사소한 행위 하나에도 세밀하게 의미 부여를 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런 성찰의 시각을 통해 주변을 따뜻한 시선으로 불철주야 바라봐야한다는 교훈까지 덤으로 얹어주는 동기가 되어주고 있다. 다만 예측 가능한 설명들을 쳐내고 시상을 좀더 집약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가을 박
장희한
저 잡년 애기 벤 년
여름내 밤마다 하얀 손수건 흔들며 호객하던 박
지붕 위에서 허연 배를 내어놓고 임신했다고 소리 지르네
얼마나 속이 더웠으면 파란 치마 걷어 올리고 못 견디고 딩굴까
어이구 챙피해라
훌쩍 키가 큰 감나무
외눈박이 연시 하나 눈을 힐끔거리는데
부끄러움에 볼이 벌 게 졌다
어쩌나 만삭의 배를
해산은 얼핏 하지 못하고
가을 달이 만삭의 배를 어루만지네
특이한 발상과 익살스런 문체로 가을밤의 풍경을 묘사한 작품이다. 가을의 박은 영글다 못해 터질 만큼 부푼 상태가 된다. 화자는 이 장면을 보고 임신부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 박을 정숙하지 못한 여인인 ‘잡년’으로 비유한 이유는 밀실이 아닌 공개된 장소에서 하얀 손수건 같은 박꽃을 피워내며 호객을 한 까닭일 것이다. 이 시에는 관찰자 둘이 등장한다. 감나무 연시의 부끄러운 힐끔거림이 하나요, 만삭의 배를 어루만지는 가을 달이 둘이다. 그런데 주조연을 막론하고 세 자연물 모두 지상에 발을 딛고 있지 않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하늘에 매달린 달이나 감나무에 매달린 연시나 지붕 위에 매달린 박이나 모두 비슷한 처지다. 지상에서는 감히 꿈꾸지도 못하는 것을 상상으로 꾸며내면서 화자 또한 자기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자연물의 적나라한 상황이 부러웠을 것이다. 비속어와 퇴폐적인 상상력을 동원한 작품이지만, 어쩌면 그래서 고상함으로 치장한 이면에 더 억눌린 상태가 된 독자들에게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것이리라. 고즈넉한 가을밤의 서정을 이렇게 색다르게 접근하고 전개하는 건 시인의 특별한 능력이 있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죽도. 널배를 밀고 봄이 오는 섬
청담 안태영
옆으로 기는 것만 게인 줄 알았었네
굽은 등 척추마다 불면이 숨어 있어
꿈에도 널배를 타고 꼬막 캐는 잠꼬대
파도는 눕고 싶은 바람의 녹명이다
수평선 가슴 줄에 목을 맨 노을 한 척
주름살 깊은 그물로 긴 신음을 낚는다
기억이 빠져나간 조개는 합장하고
펴지지 않는 몸은 한 자루 갈퀴여라
갯벌에 숨은 통증을 후벼 파는 속울음
구름을 낚는 매화, 염주를 달고 있다
탄 뼈를 수습하듯 빈 생을 줍는 노인
한 생애 다비식하면 그리움도 사리다
한 사발 피를 토한 동백꽃 가슴앓이
겨울과 봄 사이로 자유는 떠났는데
민주가 품고 온 달은 온 하늘에 떠 있다.
죽도를 생의 터전 삼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관찰자 시각으로 접근한 연시조이다. 각각의 시조들이 독립적이면서도 전체 연시조 안에서 연결되고 통합된 서사를 갖는, 이중성을 품은 작품이다. 제 1수부터 5수까지 공통적으로 바다의 생물과 풍경이 등장한다. 각 초장에서 나타난 바다풍경 안에 중장에선 사람이 겹치기 시작하고, 종장에 이르러 인사이트를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바다와 사람이 따로따로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주 안에서 모든 생물은 같은 맥락으로 생과 사를 더불어 향유하고 있다는 함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 1수의 ‘게’와 ‘굽은 등’의 주인공은 모두 미끄러지듯 개펄을 오가며 생을 낚는 대상들이다. 또 제 2수의 노을 진 수평선과 주름 진 풍경에선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신음’이 그물에 걸린 것 같은 한스러움이 느껴진다. 제 3수에선 입을 다문 조개와 씨름을 벌이는 갈퀴 든 사람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있다. 제 4수에선 바닷가에 핀 매화를 불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면서 피고 지는 생의 대비를 미묘한 시각으로 풀어내고 있다. 끝으로 제 5수는 앞의 시들과는 사뭇 다른 내용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죽도의 피맺힌 역사, 또는 자유와 민주주이가 덜 성숙한 터전의 비유로써 바라본다면 참여성이 강한 부분으로 해석된다. 대한민국에서 ‘죽도’란 이름을 가진 도서는 십 여 개가 넘는다. 조수간만을 암시하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의 제재인 죽도는 서해안일 가능성이 크지만 제 5수의 역사성을 의식한다면 다른 곳일 수도 있다. 서해안은 밀물과 썰물의 흐름이 일정 주기로 교대하는 곳이다. 그야말로 생과 사의 융합 공간인 것이다. 이 시조에서 느껴지는 한은 이 동적인 환경, 변화무쌍하지만 그럼에도 동시에 변화가 없는, '역설적'인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동식물과 사람의 운명적 생태를 잔인할 만큼 사실적으로 그린 데에서 느껴지는 정서일 것이다.
첫댓글 개인적으로 <삐삐>는 어떤 '의지'가 담긴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삶을 사실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보임.
그런데 '의지'가 담겼다고 전제하다 보니 '하얀 풀씨'에 의문을 품게 된 것 같은데 너무 깊게 들어간 게 아닌가 싶기도 함. 즉, 4연의 '허기를 달래다 보니'를 '가난에서 벗어나 보니', '살만하다 보니'로 보면, 5연의 '하얀 풀씨'는 '흰머리, 늙은이, 나아가 죽음(날아가고 있었네)이 함축된 것으로 추가로 승화시킬 여지가 없다고 할 것임.
따라서 이 작품은 물질적인 허기는 면한 반면 신체적으로는 점점 가난해지고 있는 자아를 발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봄. 다만, 마지막 행에 '있었네'라는 과거형을 쓴 것이 조금 아쉽게 느껴짐.
발행인님의 의견 감사합니다.제 시야가 좁았네요. 서술어 때문에 좀 헷갈렸어요. 하얀 풀씨가 노년이나 죽음을 비유한건 생각 못했어요. 보통은 지난한 고통 뒤에 긍정세계를 노래한다고 생각한 제 고정관념이 문제였던것같아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