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문화동아리 2월 답사》
언제:2023 2 21
참석자:이세희 오관석 이가경 (회장 이하 가나다순) 3인
회비:잔액 76540원
선비문화동아리 2023년 첫답사지로는
조선시대는 물론 우리나라 유학사儒學史 전체를 통털어서 유일하게 "자子" 칭호를 받았던
우암 송시열의 삶의 흔적을 따라 괴산으로 가보았습니다
《청안향교와 사마소 그리고》
<청안향교>
홍살문이 있고 홍살문을 지나면
비교적 높은 돌계단 위에 외삼문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은 열려있지 않습니다
늘 그렇듯이 청안향교도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담장을 끼고 한바퀴 둘러보았습니다
대성전과 내삼문입니다
앞이 낮고 뒤가 높은 지형이라 전학후묘의 형태입니다
높은 곳에 사당을 두어 성현에 제사를 지냅니다
옛 성현의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던 명륜당과 외삼문입니다
동재와 서재같은 기숙사 시설이 없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갑오경장이라고 배웠던 갑오왜란 이후였을까요?
좀 더 가까이서 들여다봅니다
내려오면서 왼쪽으로 보이는 이 건물은 청안 사마소의 사당 건물입니다
청안향교에 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복원한 것이긴하지만 전국에 몇안되는 사마소가 있는 향교입니다
사마소가 있는 향교 중에서도 아주 특이한 것은
이 곳 출신 선비들의 제사공간이 따로 있고
이 제사공간이 향교의 대성전보다 크고 웅장해보입니다
이 곳 청안향교의 사마소 안내도입니다
향교의 외삼문에서 바라본 사마소의 전경입니다
사마소의 외삼문(솟을대문?)과 향교의 홍살문이 나란히 있습니다
바로 가까이에 서원 간판을 내건 건물이 있습니다
신발이 가지런한게 인상적입니다
이왕이면 저 명륜당을 이용하게 하면 좋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안민헌과 은행나무>
안민헌은 옛 청안현의 청사로 쓰던 동헌 건물입니다
청안 면사무소 옆에 있습니다
뒤에는 청안초등학교가 있습니다
각종 비석들도 한 곳에 모아두었습니다
그냥 보기에는 닫혀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봅니다
다른 부속건물들은 다 내어주고 조용히 옛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담장 너머에는 두 분 선생님이 나란히 서서 다정하게 나무사진을 찍고 계십니다
아마도 이 모습을 찍고 계신가봅니다
오래된 회화나무인데 이 건물과 세월을 같이 하였겠지요?
보호수로 지정되어있습니다
수형이 아름다워 봄여름에 특히 좋을것같습니다
청안면에는 또다른 고목이 유명합니다
이 나무는 고려 성종(981~997) 때
이 곳의 성주가 성안에 못이 있었으면 좋겠다고하여
청당이라는 못을 파고 그 주변에 심은 나무중 하나라고 합니다
향교에 갔을 때 민간에서 운영하는 서원의 이름이 청당이었는데 이제야 그 의미를 알겠습니다
《우암 묘역》
<송병일고택>
커다란 왕릉같이 생긴 조그만 산봉우리 아래 송병일 고가가 있습니다
저 산 위에는 우암 송시열의 묘가 있고 그 아래 19세기 후반에 지어졌다는 고택이 있습니다
대한제국기에 당시 충청감사였던 우암의 8세손인 송병일이 부친을 위해 지어준 집이라고합니다
처음엔 별당으로 지었는데 증축을 거쳐 종택으로 사용되었는데
1944년부터는 사회복지법인 충북양로원에서 사용하다가
1966년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 이사가고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데
어떤 이유로 종택이 팔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 사용기간이 무척 짧은 것같습니다
ㄷ자형으로 지어진 사랑채입니다
마루는 누군가가 사용하고 있나봅니다
마당은 종손 대신 강아지가 지키고 있습니다
사람이 오고가도 그저 무심하게 그 자세 그대로 햇빛을 받으며 누워있습니다
저 작은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안채가 있습니다
구성이 좀 특이합니다
안채도 ㄷ자형의 건물에 一자형 창고가 있어 변형된 ㅁ자형 구조의 건물입니다
마당 반대편으로 쪽마루가 있는 것도 특이합니다
마당에는 우물이 있고 항아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데
항아리들에 이름이 쓰여진걸보니 살림집은 아니지만
고택을 활용한 프로그램을 운영중인가봅니다
창고로 쓰였을 건물이 길게 있는걸보니
이 댁의 살림이 꽤 넉넉했겠다싶은데 어쩌다 주인이 바뀌었을까요?
건물 뒤로는 궁궐의 굴뚝을 닮은 굴뚝들이 서있습니다
벽돌을 이용해 수복강녕의 전서체 글씨가 있습니다
<재사와 신도비>
재사齋舍인것같은데 응봉병사라는 소박한 현판을 달고 있습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단순하고 깔끔한 구조이지만 결코 규모가 작은 것은 아닙니다
재사 담장너머로 신도비각이 보입니다
문은 굳게 닫혀있습니다
담장과 비각에 이중으로 갖혀 그 모양도 볼 수없는 신도비의 비문은
우암을 송자라고 부르며 존경해마지않던
정조 재위 3년차인 1776년에 쓴 정조의 어필이라고 합니다
담장너머로 보이는 구조가 특이합니다
이런 모습의 비각을 본 기억이 나지않습니다
신도비각 뒤쪽으로 난 길을 올라 묘소로 갑니다
영릉 참봉을 했다는 송재경의 묘라고 하는걸보니 우암의 후손인가봅니다
위쪽으로 우암의 묘소가 보입니다
소나무가 병풍처럼, 호위무사처럼 에워싸고 있습니다
무덤 앞에는 묘비가 둘이 서 있는데
하나는 영조 12년인 1736년에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순조 4년인 1804년에 세웠습니다
제주도 유배에서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던 우암의 묘는 화성의 무봉산에 있었습니다
8년 뒤 숙종23년인 1697년에 이 곳으로 옮겨왔다는데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오른쪽 아래로는 우암의 손자의 손자인 현손의 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양쪽에서 후손들이 우암을 받들고 있는 형상입니다
무덤 뒤쪽에서 보면 이런 모습입니다
나무가 자라 시야를 막기는하는데
나무가 없다면 예전 청안현의 중심인 현아가
바로 발아래로 내려다 보였을 것같습니다
묘소에서 내려오면 예사스럽지않은 폐가가 있습니다
숭모재라는 이름표를 달고있는 것을보니 일반 가정집은 아니었나봅니다
지금은 폐가가 된 이 집을 뒤로하고 점심을 먹으러 갑니다
자연산 버섯으로 끌였다는 버섯찌개로 점심을 먹고 선유구곡으로 갔습니다
특별한 보너스라고 하시는 이세희 선생님의 말씀에 더 기분이 좋아집니다
<선유구곡을 지나 화양구곡을 걷다>
선유동문 너른 바위에 앉아 있으면 신선이 될지도 모릅니다
커다란 바위가 리본모양으로 있는게 참 특이해서 차에서 내려봅니다
하늘도 산도 다 한곳에서 만나는 이곳에는
아직 얼음이 남아 반짝이며 일광욕을 즐기느라
자신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도 잊고있나봅니다
선유동길은 편도로 자동차로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화양계곡을 거꾸로 걸어내려옵니다
높은 산들이 세상의 번잡함과 간격을 벌려 줍니다
높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그 산봉우리들 사이로 계곡이 흐르고
넓다란 바위들이 넉넉하게 그 품을 내어줍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그 모습이 참 궁금했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가 궁금했던 만동묘를 지나
계속 걷습니다
하늘도 제 그림자를 비춰볼 것같은 잔잔한 계곡 속 작은 호수를 들여다봅니다
저 얼음이 녹으면 잔잔한 물결속에 하늘도 바위도 산도 내 모습도 함께 할까요?
그저 아름답고 넉넉한 계곡
햇빛이 따스해서 "화양"이라는 그 이름이 잘 어울리는 이 계곡이
구곡이라는 버거운 옷을 입고 불편해하고 있는것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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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리더錦輪 최윤희
錦輪 최윤희
세 분이 오븟하게 다녀오셨군요.
꾸준한 동아리 활동에 응원합니다.
이가경 서울64
@최윤희
감사합니다
이세희(천안)
살아있던 당시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권력인 송시열로 인하여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화양동은 원래 이경억 소유의 전장입니다.
이경억이 아버지 이시발과 조부의 비문을 요청하자,
송시열이 비문 쓰는 동안 화양동에 거처할 수 있도록 하면서
암서재도 짓고 만동묘도 짓고, 화양서원도 짓고.......
선문동도 답사가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가경 서울64
@이세희(천안)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권력"
그래서요
이세희(천안)
송시열이 찬하고 송준길이 쓴 이시발의 신도비가 있는 진천 초평의 쌍오비각입니다.
이가경 서울64
@이세희(천안)
여기도 기회 만들어 가봐야겠지요?
오관석(13,14,15기)
간결하고 깔끔한 후기가 선비의 기개를 닮은 듯합니다.
이가경 서울64
@오관석(13,14,15기)
감사합니다
칭찬이신거지요?^^
오관석(13,14,15기)
폐가는 청주한씨 종가라고,
그 후손 중 한 분이 개보수를 하려고 서울집을 정리하는 중이고
철마다 내려와 주변에 밭을 일구고 있다는 주민의 설명이었습니다.
고목에 새 순이 나서 거목이 되듯이 그 고택도 되살아나기를 빕니다.
이가경 서울64
@오관석(13,14,15기)
서울집 정리중이라는 말은 들었는데
청주한씨 종가라는 말은 못들었는데
이래서 함께가야 되는 거겠지요?
다음에 다시 가는 일이 생길때는
그 고택이 멋진 모습으로 잘 정비된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