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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포션 이름 (파라샤) | 모세오경 (토라) | 예언서 (하프타라) | 신약 (브리트하다샤) |
에모르 / 말하여 | 레 21:1-24:23 | 겔 44:15-31 | 눅 11:1-12:59 |
<단락 1> 1. 레 2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히 : 에모르) 이르라
‘말하여’의 히브리어는 ‘에모르’ 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의 조명하심을 통하여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말하여’의 히브리어는 ‘다바르’ 이며, 그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비유와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하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말씀을 비유와 은유와 영적으로 풀어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없어서 죽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제야 아론은 다른 불로 제사 드리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성의 생각 속에 있어도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없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로마서 12장 2 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이는 육신의 종 노릇하는 나를 예슈아의 십자가에 죽인자로 여기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교정해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 우리의 말 (히 : 에모르)을 통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합니다.
1)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 (토라)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 (토라)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묵상 (히 : 하가)’은 작은 소리로 읊조리듯이 낭송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늘 입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우리의 입에 있게 하는 것이 묵상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토라 (하나님의 말씀)가 없는 상태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간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자의적인 해석을 통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왜곡할 수 있고 우리의 신앙은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게 됩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는 넘지 못하는 산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는 재정의 산과 관계의 산과 환경의 산이 있습니다. 이 때, 예슈아는 우리의 문제의 산을 바다에 던져 선포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문제의 산이 사라질 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예슈아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외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마음과 생각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에 창조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 롬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우리의 생각은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으로 구분 질 수 있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는 내 생각, 내 감정, 내 뜻이 주님의 생각, 감정, 뜻보다 중요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자기 귀에 듣기 좋은 것을 따라가는 자들이 더 많아질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핍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생각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그리고 영의 속한 자는 내 생각, 내 감정, 내 뜻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말하며 살기로 결정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영이며, 좌우에 날선 어떠한 예리한 검보다 예리하고 모든 악한 것을 잘라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 ‘...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말씀합니다. 참소자 (사단)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순종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리고 참소자는 퇴근이 없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쉬지 않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결국, 사단은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핍박을 사용하여 중단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괴롭게 만드는 것은 돈과 건강과 사람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사단의 참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귀가 역사하는 곳에서 믿음으로 입을 열어 ‘내가 예슈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영은 떠나가라’고 담대히 명령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귀는 그 명령에 복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약 4:7). 시편 141편 3절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생각, 마음, 입을 지속적으로 지키는 파수꾼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술 가운데 부정적인 말과 판단과 정죄와 감정들이 담긴 말의 표현을 멈추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에 대한 믿음의 선포의 말과 축복과 격려와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단락 2> 2. 레 21:1 ...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아론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알기에 두 아들의 시체를 만지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누가복음 10장에 나온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를 묵상해야 합니다.
1)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율법에 능통한 교사는 예슈아를 시험하기 위하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예슈아께 질문합니다. 예슈아는 율법에 능통한 교사가 알고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에 최고 우선순위를 두셨으며, 이것이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하나님과 이웃 사랑하는 것에 최고의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며, 이것을 우리의 성공의 척도로 삼아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부르심이며, 가장 큰 재산입니다. 이 때, 율법 교사가 또 다른 질문합니다.
(1) 눅 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율법 교사는 예슈아께 자신의 이웃의 범위에 대해서 물어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 교사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유대인들)만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슈아는 강도 만난 사마리아 이야기를 예를 들어 말씀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예루샬라임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거의 죽어가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게 되지만 피하여 지나가게 됩니다. 우선, 제사장과 레위인이 죽은 사람을 돕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강팍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번 주 토라포션 말씀에 죽은 시체를 만지게 되면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레위기 21장 1절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나타나 그를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주며, 상처까지 다 치료해 줍니다. 이 사람은 죽어가고 있는 생명을 살리기는 하였지만, 자신의 거룩함을 더럽히게 된 것입니다. 이 때, 예슈아께서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이웃 사랑하고 있는 율법 교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겠는가를 여쭈어 봅니다. 우선, 레위기 19장 18절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말씀합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롬 13:10). 그래서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지 거룩하지 않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 거룩함의 기준을 우리가 원하는 기준으로 낮추면서 살다보면, 자기 의로움에 빠져 신앙생활 할 때가 있습니다. 이 상태는 마치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성령님의 조명하심이 없어서 죽게 되어진 상태 (히 : 다바르 :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아는 것)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슈아는 제자들이 당신을 그리워할 것을 알기에 당신을 만나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2)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우리가 세상에서 아무런 관심이 없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고 베풀었을 때에 이것은 예슈아께 행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극히 작은 자를 보내셔서 예슈아를 만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 하프타라 (예언서) 말씀입니다.
2) 겔 44:23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24. 송사하는 일을 재판하되 내 규례대로 재판할 것이며 내 모든 정한 절기에는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킬 것이며 또 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구별하지 않고 섞여 버리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교회를 다닌다고 모든 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올바른 판단과 재판을 위해 흉패 안에 우림 (빛들)과 둠밈 (온전함)을 넣도록 하십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기 때문에 ‘나는 빛 가운데 있는가, 나는 온전한 상태 가운데 있는가’를 날마다 점검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슈아를 통하여 하늘 성소를 섬기는 제사장의 부르심을 받게 되어졌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자신이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나는 빛 가운데 있는가, 나는 온전한 상태 가운데 있는가’를 먼저 점검하는 것이 아닌, 육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 빛과 온전함이 없을 때에는 어떠한 판단과 결정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되면, 먼저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릴 분주하고, 게으르고 낭비하게 하여 세상 것에 시선을 빼앗기게 할 것이며,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데 시간을 사용하도록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