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지리산 만복대 능선을 지나~
- 白頭大幹 북진 8차 (성삼재~여원재: 21km)-
여유로운 산행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백두대간 종주도 시작한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나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다.
길고 짧은 구간을 오르내리며 워밍업(warming up)도 끝나고, 장거리 산행에 몸도 차츰
적응되고 있다. 다음구간부터는 날씨도 더워지고, 덕유산 40km, 속리산, 희양산 등 짧은
구간을 합친 길고도 힘든 구간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포기하지 말자. 절대로~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에 나오는 말을 떠올려 본다.
지행만리자 부중도이철족(志行萬里者 不中道而輟足) 만리 길을 가는데 뜻을 둔 사람은
중도에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도사해자 비회세이해대(圖四海者 非懷細以害大) 천하를
도모하려는 자는 세세한 일로 큰 뜻을 그르치지 않는다. 요즘 세대는 이런 말을 ‘가다가
아니 가도 간 만큼은 이익이다’라 바꿔 사용한다지만,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의미가 담겨
있고 다같이 ‘희망’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번 구간은 성삼재~만복대(1,433m)~정령치~큰고리봉(1,304m)~고기리~입망치~
여원재까지 약 21km로 길게, 길게 타다가 어쩔 수 없이 짧아진 구간으로 평이한 구간
이다. 성삼재에서 전남 구례군과 전북 남원시 경계선을 따라가다가 만복대에서 남원시를
종단하며 북 동진 한다.
~고리봉을 내려서 만복대를 바라본 풍경~
○ 성삼재(性三峙)는 어떤 성씨의 장군들이 지켰을까?
토요일 새벽 05:00 성삼재
무박산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랜턴 불빛 없이 산행을 시작한다. 평소보다 출발이
늦은 것은 정령치에서 지리산 태극종주 중인 우리 동료들을 격려하고 오르라 1시간
정도 지체되었다.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정령치 고갯길을 올라 갔다가 내려오고,
다시 성삼재 고개를 오르느라 속이 메슥거린다. 성삼재에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심
호흡을 해보지만 속은 쉬 진정되니 않고, 짧은 구간이라 급할 것 없는데도 습관적으로
출발을 서두른다.
숲길에 들어서는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몽환적이다. 왼쪽 능선아래 남원은 운해
속에 보였다 잠겼다 한다. 마루금은 운무가 짙게 깔려있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오솔길 양 옆에는 비에 젖은 가지가지 마다 연두색 새 순이 가득 달려있다.
옥색 물빛의 호수가, 가을하늘 창공이 이 보다 더 싱그러울 소냐! 눈이 시리도록
싱그러운 연두색 물결 속에 철쭉도 물방울을 머금고 다소곳이 피어있고, 수많은 새들은
숲 속에서 합창한다.
이번 구간은 삼한시대 역사의 현장이다.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은 마한을 에워
싸고 있는 봉우리다. 그 능선에 있는 오늘날 지명인 성삼재(性三峙) 정령치, 팔랑치,
황령재는 마한의 달궁을 방어했던 기지로서 그곳을 지켰던 장군의 성씨나 병사의 수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마한은 북쪽의 백제와 남쪽의 진한과 변한의 세력에 쫓겨 반야봉 심원계곡 하류에
달궁을 세우고 항전했던 곳이라 한다. 마한 왕은 달궁을 방어하기 위하여 서쪽
정령치(鄭嶺峙)에는 정장군을, 북쪽 팔랑치(八郞峙)에는 8명의 병사를, 동쪽 황령재
(黃嶺峙)에는 황장군을, 제일 중요한 남쪽 성상재(性三峙)에는 각기 성이 다른 3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70여 년간 방어했다고 한다.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를 떠올리며 30분
정도 걸어 고리봉(1,248m)에 올랐지만 운무는 점점 더 짙어진다.
~ 만복대 오르는 길~
○ 지리산 최고의 억새 능선 만복대는 운무 속에 잠겨있고
묘봉치를 지나 만복대까지 약 2km 구간은 시야가 트인 능선이지만 운무에 빠져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사람 키만큼 키가 큰 산죽 군락지와 잡목 사이로 뚫린
오솔길뿐이다. 사방이 뿌옇지만 연두색 나무들이 한 걸음만큼씩 점점 선명하게 다가
왔다가 지나자마자 다시 운무 속으로 숨어버리는 오솔길을 산새소리 들으며 신선되어
걸어간다. 갑자기 길 양 옆으로 밧줄로 이어진 통나무 울타리가 나타나서는 안개 속으로
이끈다.
울타리 안에는 작년 가을을 화려하게 보냈던 억새는 녹아내려 흔적도 없고, 가녀린 억새
순이 가을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싸리나무가 빈자리를 대신한다. 만복대 능선은 어떤
식물도 한 자리를 혼자서 독차지하지 않고, 계절마다 서로 다른 나무와 풀들이 교대로
춤을 춘다. 운무가 조금만 비켜줬다면 봉우리와 부드러운 능선, 울타리를 배경으로
스토리텔링(storytelling)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인데~
다음에 운무가 걷힌 날 만복대(1,433m)에 올라서거든 그냥 휙 지나지 말고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라. 오던 길을 돌아보면 반야봉과 노고단 총석대, 성삼재와 고리봉이 보이고,
발 아래까지 이어진 부드러운 능선은 곡선미를 자랑한다. 이 곡선미에 파란 가을 하늘과
황금빛 물결치는 억새의 춤사위가 곁들여지면 미(美)의 여신 ‘밀로의 비너스
(Venus De Milo)’도 울고 갈 것이다.
오른쪽으로는 멀리 천왕봉에서 이어지는 지리산 주 능선이 한눈에 이어지고, 가야 할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면 큰 고리봉과 세결산, 팔랑치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그림처럼 펼쳐지리라.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 속으로 그리며 30분 정도를
내려서면 정령치가 나타난다.
~ 만복대 정상 ~
○ 정령치에서 지리산 태극종주 일행을 격려하고
정령치는 나와 인연이 없는 모양이다. 올 때마다 휴게소는 굳게 닫혀있고 세찬 바람이
없을 때에는 어둠이 아니면 운무가 반긴다. 잠시 시야가 열린 틈으로 전망대에서 지리산
주 능선을 한 번에 조망해보지만 아쉬움이 여전하다.
오늘 새벽, 이곳에서, 우리는 자랑스런 사람들을 만났다.
자랑스러운 그 이름은 ‘로하스’ ‘거보’ ‘한살림’ ‘주여사’ 다.
지리산 등정 100회 태극종주도 대여섯 차례나 종주한 지리산 반달곰 ‘로하스’ 칠전팔기
만에 기어이 성공한 ‘한살림’과 ‘주여사’ 그리고 탱크 같은 파워를 자랑하는 ‘거보’ 이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태극종주(92km)를 44시간만에 종주했다. 끝없이 도전한 이들에게
앞으로 영광만 펼쳐지리라.
이들의 곁에는 정령치까지 올라와서 격려해준 천문,후미대장과 산우들, 자기가 가야 할
길까지 포기하면서 마지막 길을 함께 걸어준 ‘고내리’ '탱이하트’ ‘아끼라’ '버팔로'
'아카데미'가 있었다. 아름다운 이들에게도 힘찬 박수를 보낸다.
산 꾼들은 지리산 종주를 염원한다. 일반인들이 아닌 산 꾼들이 말하는 지리산 종주는
화대종주(화엄사~주능선~천왕봉~대원사)를 말하고 우리가 지난번에 탄 주능선 종주
(중산리~성삼재)는 인정해 주지 않는다. 최근에는 화대종주를 포함해서 왕복종주
(성삼재에서 천왕봉을 24시간 안에 왕복) 태극종주(지리산 동부 거창 웅석봉에서 천왕봉,
노고단, 바래봉 지나 인월의 덕두산까지 장장 92km 종주)를 모두 거쳐야 지리산 종주를
인정해 준다고 한다.
~ 큰 고리봉 올라가다가~
산행에도 수준이 있고 급수가 있다고 한다. 초보자급인 타의입산(他意入山: 바둑8급
수준)은 자기는 가기 싫은데 남 들이 가자니까 할 수 없이 따라가는 사람, 섭생입산
(攝生入山: 바둑6급)은 산에 오르는 것보다 먹는 것에 더 중요한 사람, 선수입산(選手
入山: 바둑2급)은 어느 산을 몇 시간 안에 종주했다느니 자랑을 일삼고, 산행을 기록
경기인줄 착각하고 기록 단축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 무시입산(無時入山: 바둑1급)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시도 때도 없이 산에 가는 사람, 자아입산(自我入山: 바둑6단)은
드디어 산 심을 깨닫는 단계, 인생과 산과의 관계에 눈이 뜨여 넘어야 할 산이 마음속에
있음을 아는 사람, 불문입산(不問入山: 입신의 경지)는 산에 오르는 이유를 묻지 말라며
선문답하며 산과 하나되어 유유자적하는 사람으로 분류한다고 한다.
울트라 산행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무섭기도 부럽기도 하다. 주변에서 80km가 넘는
지리산과 설악산 태극종주를 같이 하자는 유혹이 심하다. 마음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 청음 김상현의 ‘가노라 삼각산아’ 시조로 내 심정을 대신한다.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時節)이 하 수상하여 올동말동 하여라.
○ 대간 마루금은 큰고리봉에서 좌회전한다.
정령치를 떠나 1km 가까이 걸으면 나타나는 봉우리가 큰고리봉(1,304m)이다.
느낌으로는 직진하여 세결산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바래봉 능선을 타는 것이 맞는 것
같지만 마루금은 좌측으로 꺾어 내려가야 한다.
평지인 고기리까지 3,1km 고도차 약 800m 급격한 경사지대다. 고기리 방향으로
들어서자 마자 울퉁불퉁한 바위길이 이어지다가 10여분간 내려가면 흙 길로 바뀐다.
급격한 고도 변화에 따라 숲에 서식하는 나무도 확연히 구분된다. 정상에서 7부
능선까지는 당 단풍과 참나무 종류가 대부분이고, 5부 능선까지는 낙엽송, 그 이하는
수령이 수십 년은 넘을 것 같은 소나무 군락지다.
~ 큰 고리봉을 내려오면서(낙엽송 숲)~
솔 향기에 취해 큰 길에 내려서면 길 건너편에 정령치 모텔이 있는데 이곳이 고기리다.
운봉방향으로 아스팔트 길을 지루하게 따라가다가 나타나는 삼거리에서 시멘트 포장
길로 접어들어 나타나는 마을이 노치마을이다
○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노치마을 노치샘
노치(갈대 노(蘆), 언덕 峙)마을은 마을이 형성되기 전 갈대가 많았다고 해서 갈재
(갈대의 전라도 사투리)마을이라 불렀었다. 해발 550m의 이 마을은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유일한 마을로서 한 마을에 두 개의 행정구역이 존재한다. 분수지역으로서 빗물이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집은 운봉읍,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집은 주천면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어 진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물맛이 전국 최고라는
노치샘, 그리고 마을 뒷산에는 해마다 음력 1월에 당제를 지낸다는 당산 소나무 4그루가
동네를 품듯이 굽어보고 있다. 특히 노치 당산제는 전통방식으로 지내면서 국태민안,
무병장수, 풍년농사, 그리고 백두대간을 찾는 산행 사람들의 무사안녕까지 빌어준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또한 대간 마루금은 대간 꾼들이 다니는 골목길 따라 나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을 가로질러
통과하면서 어떤 집은 위채 아래채를 가른다. 심지어 어떤 집은 부엌이 있는 주천면에서
밥지어서 안방인 운봉읍에서 밥 먹어야 한다고 한다. 그냥 웃고 넘겨야 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노치마을 당산 소나무~
그리고 이 동네 노인회장님이 수년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 밤낮으로 대간 꾼들이
들어와 싼게 개새끼들이 짖어 대서 통 잠을 지대로 못 자, 아~ 젊은 이들이 때가 없드라
니께, 이마 빡에다 불을 대고, 모다들 발 디딜 구녕만 보고 가드만~ 그라고 가믄 안 엎어
지고 지대로 올라 간다냐 하고 쳐다보고 있제’ 대간 꾼들의 소란에 밤 잠을 설쳤음에도
그들을 걱정해 주시는 노치마을 어르신 죄송합니다. 그리고 반성합니다.
○ 송화가루 날리는 솔밭 길(노치마을~여원재) 6km
수령 400여 년의 당산제 소나무 아래에서 소풍 나온 기분으로 늦은 아침을 먹고 올라서면
가파른 통나무 계단길이 지그재그로 놓여있고 길 양 옆에는 소나무 숲이 이어진다. 능선에는
고인돌 같은 모양을 한 공간 돌도 있고 바위를 이리저리 돌아가다 보면 산 중턱에 수정이
생산되는 암벽이 있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수정봉(804m)이 나타난다.
솔밭 길이라고 소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정봉을 내려서면 둥글레 군락지가 나타
난다. 둥글레는 흰색도 연두색도 아닌 가녀린 꽃을 있는 듯 없는 듯 대롱대롱 매달고 있다.
길옆 소나무들은 바람결에 송화 가루를 날리고 있다. 고등학교 때 배운 朴木月 시인의
윤사월(閏四月)이 생각난다. 이 시를 읊으면 한적한 산골 풍경과 순수함이 저절로 떠올라
좋다
송화 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섬
눈먼 처녀 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 소나무 아래~
솔밭 사이사이 피어있는 붓꽃도 간간이 구경하며 내려오다 보면 입망치가 나타난다.
입망치(笠望峙: 545m)는 일명 갓바래재라고도 불리우며, 중이 삿갓을 쓰고 지나가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여하튼 삿갓하고 연관이 있을 것 같지만
고증이 필요하다.
입망치 지나서 절벽을 끼고서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서 나타나는 봉우리는 아직 이름이
없는 700고지라 한다. 고만고만한 봉우리들도 넘고 임도와 밭두렁도 지나서 나타나는
이차선 도로가 여원재다.
대간 마루금 초입에는 은성대장군이 서 있고 시계는 11;55분을 가리킨다.(끝)
2011. 5. 21
Mabare 마바르
~ 큰 고리봉 내려오는 숲속의 노송~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머리에 잘 그려지진 않지만 다음 코스가 기대되고 매번 기다려집니다. 가고싶은 코스도 많아지고.....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