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동안 ,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영화들은 작품성 면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관객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요소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서 이런 편견을 무너뜨린 첫 작품이 바로 박하사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본인에게 충격과 뜻 모를 희열을 한꺼번에 준 작품이며 작품성을 놓고 볼 때도 그렇고 영화와 공감하며 재미와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박하사탕 같은 작품은 앞으로도 쉽게 나오지 않을 거라고, 글을 쓰는 처음에서 과감히 말하고 싶다.
영화 '박하사탕'은 기차처럼 거침없이 달려가는 역사의 선로 위에서 부대끼면서 망가져 간 한 인간의 삶의 궤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칫 진부하기 십상인 이야기를 시간을 역류하여 과거로, 더 먼 과거로 이동하면서 결과를 먼저 보여주고 다음에 그 원인을 알 수 있게 함으로써 신선하고 재미있는, 한편으로는 아프고 슬픈 이야기로 만들었다. 영화의 끝에서 영호의 스무 살 시절의 순수한 젊음과 첫사랑을 보면서,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눈물을 흘리는 순수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세태에 적당히 물들어 순수함과 꿈을 잃어 가고, 점점 더 황폐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회한에 젖어 들고, 끝내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이때 우리는 영화의 처음에서 만나게 되는, 광기 어린 인물의 갑작스런 외침, "나 다시 돌아갈래"를 내 자신이 마음속으로 되뇌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전율하게 된다. 이렇게 영화 속 영호(설경구 분)의 삶이 바로 우리의 삶과 동일시되는 순간, 우리는 아프고 쓰린 상처로 만신창이가 된 한 인간의 처절한 내면을 어루만지게 된다. 또한 우리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삶은 과연 아름다운가를 자문하고 성찰하게 된다. 바로 이런 점에서, 박하사탕이라는 작품이 가진 힘이 발휘된다고 볼 수 있다. 스크린의 한 인물을 통해, 관객 각자의 성찰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커다란 의미를 가진다 할 수 있다.
또한, 박하사탕이 그 작품성을 인정받는 이유는, 사회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면으로 흘러가기 쉬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건들과 결부시켜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이 영화는 지난 20년 동안의 험난했던 격변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70년대 산업화의 그늘인 구로 공단, 80년 5월의 광주, 80년대 국가권력의 폭력성, 90년대 말의 경제 위기 등 폭력과 광기의 역사를 사실적으로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역사영화나 5.18영화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렇게 치부해버리기엔 다분히 개인적이고 순수한 영화로 보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단지, 사회적 장치를 적절히 가미함으로서, 사회성을 개인의 세계로 접목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이 즈음에서, 순수라는 단어를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 전체의 내용을 이끌어 가고 있는 소재와 주제는 바로 순수이다. 영호는 첫사랑의 여자친구에게 받았던 사진기로 아름다운 것을 찍고 싶었지만, 잃어버린 순수의 눈으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결국은 여자친구에게 돌려주지 못하고 만다. 또, 여자친구에게 받아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박하사탕은 군화 발에 의해 무참히 으깨지고 만다.
박하사탕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극명히 드러내주고 있다. 영화의 제목과도 일치하는 박하사탕의 상징성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박하사탕의 이미지를 떠올려 보면―하얗다·달다·사탕(←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것)·상쾌하다·쉽게 부서진다―등이 되겠다. 이러한 느낌들과 감독의 의도를 생각해보면, 박하사탕과 순수의 공통점을 꽤 여러 개 찾아볼 수 있다. 순수는 맑고 깨끗하며 어릴 적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세상에 의해 쉽게 부서져버리곤 한다. 또한 살아가다 가끔 어릴 적 순수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피식 웃게 되기도 한다. 곧, 이 영화는 순수함에 대한 강조와 함께, 그 순수함이 쉽게 퇴색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것을 나타내는 상징이라 볼 수 있는 박하사탕은 이지러지고 빛 바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를 비추는 동시에, 잃어버린 순수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안타까운 소망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영호는 사진 작가가 되어 길가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꽃들을 찍고 싶어했고, 들꽃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만큼 순수한 젊은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순수한 영혼을 가진 영호가 세상의 풍파에 깨지고 부딪히며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우린 영화를 통해 보았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영호의 선택은 자살로써 마지막 남은 한 줌의 순수를 지키고자 했다.
나는 현실에서 잘 사는 인생이란, "얼마만큼 세상의 시련에 대해 무디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영호가 겪은―광주 민주화 운동 때의 우연한 살인, 첫사랑과의 이별, 부인과의 불화, 친구의 배신과 사기―등은 모두가 매우 견디기 힘든 시련들이다. 이러한 시련에 무감각하게 대할 인간은 없겠지만, 예민 혹은 둔감하게 반응하느냐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하다는 것은 그만큼 예민하다는 것을 뜻한다. 순수한 사람은 사소한 일에도 행복과 슬픔을 느낀다. 영호는 첫사랑을 시작함과 동시에 엄청난 시련들을 겪게 되고, 그의 영혼은 깊은 상처를 받았고 자신이 무뎌지기보다는 무뎌진 인간들을 피하는 것을 택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영화의 장면들은 바로 술자리이다. 우리는 보통 큰 시련을 겪은 뒤 술로 풀고, 노래를 부르면서 상처를 위로 받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술자리를 통해 우리가 점점 잃어 가는 순수에 대한 미련과 세상에 점점 젖어 더러워지는 영혼을 달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주위 사람들의 술자리에 동화되지 못하고, 이상한 행동으로 술자리를 방해하려 한다. 비록 방해를 한다해도 술판은 이내 원래대로 돌아가고 말아서 주인공은 결국 그 술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게 되지만 말이다. 결국, 술자리는 순수함을 잃어 가는 인간을 구제해주는 면죄부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하사탕이란 소재와 더불어 커다란 역할을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기차'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한 점 빛이 점점 커지면서 사방이 환하게 밝아진다. 의아해하던 관객은 이윽고 그것이 기차 터널임을 알게 된다. 조금 더 유심히 살펴 보면 기차는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후진,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간에 역행하여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주위 자동차나 사람들이 거꾸로 달리는 걸 보았을 때이지만 말이다. 또한 여러 종류의 기찻길이 나온다. 직선, 곡선, 교차로.....
기차가 달리는 기찻길은 바로 주인공 김영호가 걸어온 인생의 행로와 매우 직접적으로 비유되어 있다. 직선 길은 인생에 있어 순탄하고 편안한 시절이고, 곡선 길은 산에 가려 불과 몇 미터 앞을 보지 못하듯 한치 앞을 예견할 수 없을 만큼 불안하고 초조한 시절을 상징하고, 여러 갈래의 교차로는 인생에 있어서 선택의 기로로 상징되어 있는 듯하다. 이쯤 되면 영화의 첫 장면 역시 쉽게 설명이 된다. 바로 터널 속의 어둠은 주인공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관객은 주인공 김영호가 죽은 시점부터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처음에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그저 충격이었고 감독의 의도와 영호라는 인물에게 압도되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처음에는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서 자막이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일어나지 못했다. 무언가 더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오면서도 귓가에 김영호 역을 맡았던 설경구의 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가 그토록 처절하게 불렀던 노래…… " 나 어떻게 ~~~ "가 말이다. ) 하지만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다. 처음으로 뇌리에 불현듯 스쳐지나간 것은 김영호, 그가 과연 진정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을까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물론 어떤 인간이든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낮과 밤의 다른 자아. 밤마다 자신의 또 다른 모습과 만나야하는 그 고통. 그러나 그 고통 자체가 그의 또 다른 아픔이 된다면 그는 적어도 순수할 것이다. 내가 본 김영호도 이러한 순수의 조짐이 있긴 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영호 속의 순수는 이와는 좀 다른 것이라고 본다.
그는 자신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한 원인을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고 있다. 감독은 그 원인을 사회적인 것으로 보고 있고 영호 자신은 자신의 주위 사람들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즉, 감독은 그가 군대시절 자신의 총에 맞아 죽은 한 학생의 죽음의 영향으로 영호가 그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 라고 보고있고,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준 사회야말로 영호의 인생을 망쳐놓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김영호 자신은 자신의 삶의 방향의 전환을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 인물들, 그의 아내, 친구, 증권사 직원 등에게로 돌리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삶을 망쳐놓은 최고의 인물을 죽인 후 자신도 자살하려 하지만 그 한 명을 선택하지 못해 마지막까지 방황한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인 요소들이 진정한 자아를 찾는데 얼마만큼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일까? 진정한 자아는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다기보다는 자신의 의지와 결단 즉, 내부세계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사회가 영호에게 그 만큼 삐뚤어 나갈 것을 강요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자신있게 답할 수 있다. 그건 어디까지나 영호의 선택이었다.
그가 돌아가고 싶어했던 그 때로 그를 돌려놓아 보자. 그 사회는 변하지 않았고 그의 외부 조건들 역시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곳에서 그는 다시 설 수 있다.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요인 즉, 군대에서 사람을 죽인 것이 그렇게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꿀 만큼 영호에게 큰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호는 그 일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을 뒤집어엎을 만큼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니다. 군대 제대 후 그는 얼마든지 사랑하는 첫사랑과 결혼 할 수 있었고 또, 그가 그 일에 대해 그토록 자신의 삶을 바꿀 만큼 아파했다면 그는 결코 경찰이나 직업군인 같은 직업은 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곳에만 있어도 영호의 기억이 영호를 괴롭혀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경찰이 되었고 그 속에서 아주 잘 적응해 나간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것이었다. 감독의 생각처럼 불행했던 우리의 과거가 영호와 같은 순수한 영혼을 타락시킨 것이 아닌 영호라는 한 남성이 그저 자신의 삶을 선택한 것이었던 것이다.
영호가 죽기 몇 년 전 그러니까 1994년으로 돌아가 보자. 영호의 생각처럼 그의 아내가 바람을 피지 않았다면 ( 이 부분에서도 할말이 많다. 영호는 그 동안 자신의 아내에게 너무 소홀했다. 그녀가 첫사랑 아니 진정한 자신의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인가. 영호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순임이 밖에 없는가, 그래서 자신의 아내를 우습게 보는 것인가, 그것이 순수인가, 이런 질문 역시 그렇지 않다고 답하고 싶다.) 또, 증권회사 직원이 자신의 돈을 날려버리지 않았다면 그의 친구가 자신을 속이고 돈을 사기 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성공한 것인가. 그의 모습을 보자 그는 그 당시 돈버는 것에서 자신의 삶의 만족을 누리고 있다. 내면 속에 있는 순수를 잃어 가는 자아와의 만남을 슬퍼하는 것이 아닌 소득증대가 그의 최대 관심사였던 것이다. 만약 그의 소득이 줄지 않고 그가 망하지 않았다면 그는 병들어 누워 있는 순임이를 만났다고 해서 그렇게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지금까지 못 잊고 있다는 그 여인을 우습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을 못 잊고 있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에게 돈을 요구하지는 않을까 그는 걱정했을 사람이다. 그는 첫사랑 시절 순수했던 한 때의 삶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다거나 혹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는 그런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니다. 오히려 시대의 흐름에 잘 적응하는 약삭빠른 속물이다. 이런 그에게 지나친 동정은 금물이다. 이 모든 것이 사회와 환경의 영향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 누군가는 이렇게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이 불쌍한 것이라고. 그러나 이것도 지나친 칭찬이며 동정이다. 그가 자신의 참모습을 언제까지 숨길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참모습은 그가 살아 온 모습이다. 그것에 더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