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쭙쭙쭙….” 우크라이나에서 사료를 주기 위해 동물을 부를 때 내는 소리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1주년을 앞둔 17일 광주시 광산구 삼도동 마을의 농장에서 한 고려인 농부가 이를 반복하면서 연신 바가지로 닭 모이를 흩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에 흩어져 있던 닭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암탉과 수탉, 어미닭과 병아리 등 닭들이 마당에 뿌려진 먹이를 먹어댔다. 먹이는 시중에서 파는 닭 사료가 아니었다. 들판에서 수확하고 남은 이삭과 텃밭에서 뜯어온 채소류다. 어림잡아도 닭은 200마리가 넘어 보였다. 닭들이 먹이를 먹는 동안 농부는 여러 둥지에서 계란을 꺼내 커다란 바구니에 가득 담았다. 지난해 4월 러시아 전쟁을 피해 광주로 피난온 우크라이나 고려인 박에릭씨의 일터다. 박씨는 하루에 서너 차례 먹이와 물을 주면서 닭을 키우고 있다. 박씨는 우크라이나에서 양계장을 운영했다. 이 경험을 살려 지난해 8월부터 닭을 직접 부화해 사육하고 있다. 농장 옆에 마련된 그의 집에는 폐냉장고를 개조해 만든 부화기가 3대 있다. 이 부화기에서 병아리를 부화해 키우다가 닭이 다 자라면 시장에 내다 판다. 박씨의 한 달 수입은 200만∼300만원이다. 부부가 생활하는 데 부족하지 않다. 박씨처럼 전쟁의 참화를 피해 피난온 고려인은 지난 1년간 일자리를 잡고 꿈에 그리던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정착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닭 키우며 자립 꿈꾸는 고려인 고려인 박에릭씨가 지난 17일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재 자택에서 키우고 있는 닭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한현묵 기자© 제공: 세계일보 사단법인 광주고려인마을 등에 따르면 지난해 2월 러시아 침공으로 우크라이나를 떠나 광주 고려인마을로 피난온 고려인은 875명이다. 이들이 광주에 올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인마을이 지역사회에 모금운동을 펼쳐 모은 성금으로 무료 항공권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개인과 단체, 기관, 기업 등 지역사회에서 낸 후원금은 9억원에 달한다. 국내로 피난온 고려인은 2000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광주광역시와 경기 안산에 조성된 고려인마을로 들어왔다. 광주 고려인마을은 광산구 월곡동에 2000년대 초반부터 형성돼, 이곳엔 현재 8000여명의 고려인이 모여 살고 있다.
◆생계 찾아 일터로… 10명 중 9명 “한국에 살겠다”
전쟁을 피해 광주 고려인 마을에 둥지를 튼 고려인 가운데 10명중 9명은 한국 정착을 희망하고 있다. 10%만이 전쟁이 끝나면 우크라이나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고려인 상당수는 전쟁으로 집과 고향이 사라져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 7월 가족과 함께 광주로 온 레나씨는 “마을에 포탄이 떨어져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폐허로 변했다”며 “돌아가지 않고 후손들을 위해 광주에 뿌리를 내리겠다”고 말했다.
광주 고려인마을은 광주로 피란 온 고려인 자녀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 등 조기 적응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광주 고려인마을 제공© 제공: 세계일보 한국에서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고려인들은 억척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광주에 온 고려인들은 고려인마을 종합센터에서 2개월치의 방값과 생필품을 받는다. 이후에는 스스로 생계를 꾸려가야 한다. 일할 수 있는 고려인 대부분은 건설현장과 농촌지역에서 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고려인 3세의 신조야 고려인 마을 공동대표는 “월급이 아닌 당장 필요한 생필품 구입을 위해 일급이나 주급의 일자리를 선호한다”며 “여성도 요양원의 간병인과 마트, 식당에 취업해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농업국가인 우크라이나에서 영농 경험이 풍부한 고려인들이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농촌마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또 농촌의 빈집을 수리해 살면서 일손이 부족한 농촌마을에 노동력을 제공하고 마을 일도 도와 마을주민과 상생의 길을 걷고 있다. 빈집을 무상으로 빌려 고추와 채소밭을 가꾸고 있다는 김레브씨는 “먹거리를 자급자족하고 하루 품을 팔면 1주일 정도 농촌생활이 가능하다”며 ‘엄지척’을 했다.
전란 피해 온 고려인들 10명 중 9명 “한국 정착 하고파” [심층기획-우크라전쟁 1년과 한국]© 제공: 세계일보
◆전쟁 트라우마 여전… 재외동포 지위는 요원
부모와 함께 피난 온 어린이와 청소년은 어른보다 학교생활 적응이 빠른 편이다. 초등학생들은 고려인 마을 인근 학교와 대안학교인 새날학교에 다니고 있다. 학교와 고려인 마을은 고려인 아이들을 위해 통역을 배치하고 한국어교육과 사회문화교육 등 긴급 돌봄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날 만난 아이들은 1년 사이 또래 아이들과 왁자지껄 웃고 다닐 정도로 표정이 밝았다. 인근 초등학교 교사는 “처음엔 인사말도 하지 못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학교 수업을 따라갈 정도로 적응을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쟁의 포화에서 벗어난 지 1년이 됐지만 고려인들은 생사를 넘나들던 ‘그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7월 광주에 온 김따나씨는 광주 군공항 전투비행단 소속 전투기가 하늘을 날면서 내는 굉음에 대피소부터 찾았다. 헤르손 부근에 살던 김씨 가족은 포탄이 마당에 떨어진 날 지하실로 대피했다. 미사일과 포탄이 보름간이나 계속 날아오면서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꼼짝없이 갇혀지내야 했다. 포격이 멈춘 사이 보름 만에 겨우 빠져 나와 폴란드 등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광주 피난길에 올랐다. 김씨는 “전투기 소리만 들어도 지하생활이 떠오른다”고 했다.
바늘구멍 뚫어야 '대한난민' 된다…우크라 출신도 난민 인정 사례 無© 제공: 세계일보
◆난민 지위 인정 2% 이하… 인도적 체류 신분
최근 무국적 고려인의 국내 체류 비자 연장 문제는 해결됐다. 무국적자인 10여명의 고려인은 광주에 올 때 여행증명서만 갖고 왔다. 여행증명서는 1년만 법적 효력이 있어 이들은 4월부터는 체류가 불가능하다. 법무부가 최근 피란민에 한정해 정세가 안정화될 때까지 난민비자를 조건없이 갱신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이천영 고려인마을 공동대표(목사)는 “무국적자 고려인의 입국과 체류기간 연장이 한시적으로 해소됐을 뿐”이라며 “이들이 재외동포 지위를 부여받아 비자문제까지 완전히 해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난민신청 1만1539건 중 난민 지위를 인정한 것은 175건이다. 전체 신청 건수의 2%에 못 미친다. 전쟁을 피해 한국에 머물고 있는 우크라이나인 대부분은 난민이 아닌 ‘인도적 체류자’의 신분이다.
우크라이나 헤르손에서 한 주민이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불타는 집 앞을 달리고 있다. 헤르손=AP뉴시스© 제공: 세계일보" 법무부는 러시아의 침공 직후인 지난해 2월 국내 체류 우크라이나인을 대상으로 인도적 특별체류 조치를 시행했다. 학업 활동이 끝난 유학생이나 단기 방문자 등 합법 체류자 3843명을 대상으로 국내 체류를 희망할 경우 임시 체류자격으로 변경해 국내 체류와 취업이 가능하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