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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 스크랩 바리톤 최현수 가곡 모음
예쁜 스콜~~~~~^^ 추천 0 조회 147 10.07.07 17: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최현수 노래모음


    (듣고싶은 곡 클릭하세요)

 

 너, 없음으로 (오세영 작시 / 윤해중 작곡 / 바리톤 최현수)

 

 그리움 2 (반영규 작시 / 김동환 작곡 / 바리톤 최현수)

 

 동무생각 (이은상 작사 / 박태준 작곡 / 바리톤 최현수)


 가려나 (김안서 작사 / 나운영 작곡 / 바리톤 최현수)


 어머님의 마음 (양주동 작사 / 이흥렬 작곡 / 바리톤 최현수)


 사랑아 (홍윤숙 작시 / 김동환 작곡 / 바리톤 최현수)


 

 자장가 (김영일 작시 / 김대현 작곡 / 바리톤 최현수)


 들국화 (장수철 작사 / 김대현 작곡 / 바리톤 최현수)


 석류 (김민부 작시 / 장일남 작곡 / 바리톤 최현수)


 석굴암 (최재호 작사 / 이수인 작곡 / 바리톤 최현수)


 바우고개 (이흥렬 작사 / 이흥렬 작곡 / 바리톤 최현수)


 산아 (신홍철 작사 / 신동수 작곡 / 바리톤 최현수)


 고향생각 (현제명 작사 / 현제명 작곡 / 바리톤 최현수)


 몽금포 타령 (황해도민요/바리톤 최현수)


 옛날은 가고 없어도 (손승교 작사 / 이호섭 작곡 / 바리톤 최현수)


 한오백년 (강원도민요 / 바리톤 최현수)


 목련화 (조영식 작사/김동진 작곡/바리톤 최현수)


 청산에 살리라 (김연준 작시/김연준 작곡/바리톤 최현수)


 가고파 (이은상 작시/김동진 작곡/바리톤 최현수)


 옛 친구 (이광수 작시/김동환 작곡/바리톤 최현수)


 모란이 피기까지 (김영랑 작시/김동환 작곡/바리톤 최현수)


 그리운 친구여 (정치근 시/이안삼 곡/바리톤 최현수/피아노 유경혜)

 

 

 

 

 

 


  3전 13승, 무패.

권투선수를 꿈꿨던 성악가 최현수(崔顯守·46·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전적’이다. 물론 주먹이 아니라 목소리의 승부였지만 그는 패배를 몰랐다. 보통 사람들은 그의 13차전만 기억한다. 1990년 차이코프스키 국제콩쿠르 성악부문 1등. 그것은 등반에 비유하면 에베레스트산 등정과 같았다. 그것도 동양인 최초로. 기악과 성악을 통틀어 이 봉우리를 다시 정복한 한국인은 아직 없다.

 그러나 최현수는 훨씬 이전부터 세계 성악계에서는 기적 같은 존재였다. 이탈리아 유학시절이던 1986년 그는 역시 동양인에게 미답봉으로 남아 있던 베르디 국제콩쿠르에서 1등상과 최고 바리톤상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것은 이탈리아에서 유학하던 동양인 성악가들에게는 ‘환희의 송가’였다. 이탈리아 성악가들에게 콧날이 짓눌려 있던 그들은 이 소식에 큰 공원에 모여 파티를 열었을 정도다.

 

88년 미국에서 열린 파바로티 국제콩쿠르 우승은 무려 1700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이뤄낸 것이었다. 그가 “내 연배의 10년 위와 10년 아래를 합친 모든 성악가와 승부해 한번도 지지 않았다”고 자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현대 성악가 중에서 독일 중세 때 끊임없이 노래 대결을 펼쳤던 마이스터징어(匠人歌手)에 가장 근접한 가수라 할 그의 성취 뒤에는 치열한 자기와의 싸움이 숨어 있다.

 

그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 6남매의 막내 외동아들이었지만 고교 시절 악보 살 돈은커녕 차비도 넉넉지 않아 서울 봉천동 산동네에서 신촌의 학교까지 3∼4시간씩 걸어 다녔다.

 

하지만 그는 대단한 야망과 남다른 꿍꿍이를 가진 사내였다. 어릴 적부터 노래는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노래자랑에 한번도 나서지 않았다. ‘내 인생의 비장의 무기로 감춰두자’는 생각에서였다.

 

 그가 잘했던 것은 축구와 ‘싸움’이었다. 키는 작았지만 중학생 시절 영등포 일대 주먹들과 매일 밤 결투를 치렀다. 수많은 학교 걸상을 맨손으로 때려 부수는 차력을 즐겨 선생님으로부터 야단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괴물’이었을까.

 

그러다 변성기를 맞은 중학교 2학년 때 강화자 베세토 오페라단장을 음악교사로 만났다. 그의 노랫소리를 들은 강 선생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내가 들은 남자 목소리 중에서 세계적으로 대성할 목소리는 너 하나밖에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성악 전공을 위해 뭘 준비해야 할지도 몰랐고, 알았다 해도 집안형편상 불가능했다.

 

집안 장독대 위에서 독창, 교회 성가대에서 악보 읽는 법 배우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곡 암기해 부르기…. 턴테이블은커녕 녹음기 하나 없던 그의 노래공부는 그렇게 시작됐다. 노래를 부르기 위해 반주가 필요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종이건반을 교복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힌 것. 고교 1학년 때부터 점심시간이면 음악실로 달려가 피아노 반주로 매일 한 시간씩 콘서트를 열었다. 언제부턴가 수십명의 학생 팬들이 몰렸다. 졸업 때까지 이어진 이 수백 차례의 콘서트 경험이 든든한 배짱을 키워줬다.

 

정규 음악시간 외에 개인레슨 한번 받은 적이 없는 그는 77년 연세대 음대에 실기시험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의 대학생활은 기행의 연속이었다. 매일 오전 7시 등교해 통금 직전에 귀가하며 연습에 매달렸다. 심지어 한 강의가 끝나면 다른 강의실로 뛰어가 담당교수가 들어올 때까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을 했다. ‘남보다 10분만 더 열심히 하자’가 그의 모토였다.

 

그의 레퍼토리는 대학 4년간 1000여곡으로 불어났다. 또 그는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세계적 성악가의 음반을 5000장이나 섭렵하며 그들 각자의 호흡법과 발성법을 익혔다.

 

그는 지독한 연습벌레였지만, 동시에 기성(旣成)에 대한 철저한 반항아였다. 신입생 때 교수를 찾아가 커리큘럼의 경직성을 지적할 만큼 당돌했던 그는 지금도 말한다. “한국의 음대에서는 고기를 잡아줄 뿐 정작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진 않는다.”

 

그는 원래 독일 가곡(리트)형 가수였다. 그가 ‘바리톤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단아하고 이지적인 리트를 섬세하게 소화해내기 때문이다. 유학도 독일행을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 4학년 때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에 출연하면서 오페라 가수로서의 재능에 눈뜨게 된다. 그는 새로움에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84년 이탈리아 유학을 떠났다.

 

 리트의 창법과 오페라의 창법은 축구와 농구만큼이나 달랐다. 아예 허리에 끈을 묶고 살아가는 호흡공부에만 1년이 걸렸다. 장학금이 유일한 돈줄이던 그는 이탈리아에서도 여전히 차비를 아끼기 위해 발품을 파는 ‘뚜벅이’ 신세였다.

 

그런 악전고투를 벌이면서 그는 성악 전문 아카데미 4곳을 모두 수석으로 졸업한다.

 

콩쿠르 사냥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였다. 우승트로피를 거머쥘 때마다 무대 제의가 들어왔지만, 그는 이를 뿌리쳤다. ‘아직 내 음악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가 13개나 되는 콩쿠르에 도전한 것에는 성악의 전 분야를 하나하나 정복하겠다는 야심이 숨어 있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독일 리트, 이탈리아 오페라, 러시아 가곡 등을 망라해 심사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 화룡점정이었다.


권재현기자
confetti@donga.com

▼최현수 교수는 ▼

 

▽1958년 서울 출생 ▽1983년 연세대 성악과 졸업 ▽1984∼1988년 이탈리아 베르디국립음악원 수석졸업, 스칼라극장 오페라 전문과정 수석졸업, 오지모 아카데미 수석졸업, 카를로 베르곤치 아카데미 수석졸업

 

▽1986년 베르디 콩쿠르 1등 ▽1988년 파바로티 콩쿠르 1등 ▽1989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센터 전문과정 졸업, 파바로티와 오페라 공연(‘사랑의 묘약’ ‘루이자 밀러’) ▽1990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1등

▽1992년 카네기홀 독창회 및 미국 순회공연 ▽1993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

차이코프스키 콩쿠르는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를 기려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 음악콩쿠르. 흔히 폴란드의 쇼팽 콩쿠르,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국제 콩쿠르’로 꼽힌다.

 

1958년부터 4년마다 개최된다. 제1회 때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2개 부문이었으나, 2회 때 첼로, 3회 때 성악을 추가해 4개 부문이 됐다.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을 비롯한 러시아 작가의 작품이 경연과제로 많이 선정된다. 피아노의 반 클라이번,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미하일 플레트네프와 첼로의 미샤 마이스키, 바이올린의 기돈 크레머 등 정상급 연주자를 배출했다.

 

 한국인으로는 최현수 외에 정명훈(74년 피아노 2위), 루드밀라 남(78년 성악 2위), 백혜선(94년 피아노 3위), 제니퍼 고(94년 바이올린 2위) 등이 수상했다.

 

▼美무대 떠나 귀국한 까닭은 ▼

최현수는 바리톤으로서 정상에 선 시기에 홀연 한국행을 택했다. 이탈리아 유학을 마친 뒤 88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파바로티와 함께 공연하면서 미국 무대에 데뷔, 그 뒤 뉴욕시티 오페라,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필라델피아 오페라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 뒤에는 카네기홀에서 독창회는 물론 전미 순회 리사이틀도 가졌다.

 

당시 그에게는 ‘한 세대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한 베르디 가수’라는 극찬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오페라 가수가 아니라 다양한 노래를 소화하는 리사이틀 가수였다.

 

베르디 오페라 가수는 부와 명성을 거머쥘 수 있을지 모르지만 평생 베르디의 노래만 불러야 하는 굴레를 써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오페라 무대에서 바리톤 가수는 워낙 기근이라 혹사당하기 일쑤입니다. 저와 함께 데뷔한 바리톤 가수 중 오페라 무대에 남은 가수가 없을 정도니까요.”

 

독일 가곡에선 피셔 디스카우, 프랑스 가곡 제라르 수제, 이탈리아 가곡 티토 곱비와 에토레 바스티아니니 등 부문별 대가의 장점을 복원하고 종합하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개교에 맞춰 음악원 교수로 초빙되자 그는 주저 없이 응했다. 실력보다는 이름값에 매몰된 한국 클래식계의 사대주의를 깨고 싶었다.

 

“남의 땅에서 농사짓는 일은 이젠 그만둬야죠. 수확물은 들고 올 수 있을지 몰라도 땅은 들고 올 수가 없습니다. 카네기홀에 서는 것을 꿈꾸기보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을 카네기홀로 만들어야죠.”

 20040202 동아일보 <사람과 삶> 섹션 발췌

 


 

 

또한 그는 수많은 과거의 성악가들이 구사했던 장점들을 깊이 연구하여 자기화 하는데 성공하였고, 특정한 언어에 제한 받지 않고, 모든 노래들을 동등한 수준으로 부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것은 역사적으로도 흔하지 않은 일이며, 언어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천재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뛰어난 통찰력과 논리적인 음악성을 겸비하여 수많은 성악가들의 경이로움을 자아내고 있다.

 

음역도 바리톤으로만 국한하지 않아 넓은 음역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우리는 많은 노래들이 그에 의해서 불려질 때 비로써 생명을 다시 찾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아름답게 들리는 목소리 때문만이 아니고 시의 표현을 중요시 여기며 대화하듯이 풀어 나가는 진솔한 인간미가 담긴 노래 스타일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페라 가수로서나 리트 가수로서나 각 노래에 적합한 표현을 이상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뛰어난 감각 또한 있어 난이 한 노래들도 쉽게 풀어간다.

 

천부적 재능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얻어낸 정직한 음악을 구사하는 최현수는 한정된 레퍼토리로 자신을 국한하지 않고 새로운 레퍼토리의 개발과 끊임없는 연구로 겸손히 노력하는 진정한 프로의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그의 연주회장을 찾는 청중들에게 일생일대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지식을 후배들과 나누기 위해서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숭문고등학교 졸업
-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 이태리 베르디 국립음악원 졸업
- 스칼라 가극장 오페라 전문과정 졸업
- 오지모 아카데미 졸업
- 카를로 베르곤찌 아카데미 졸업
-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센터 전문과정 졸업
- 파바로티와 오페라 공연 (사랑의 묘약, 루이자 밀러)
- 뉴욕 씨티 오페라,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필라델피아 오페라 외
   미국의 주요 오페라극장에서 주역 출연
- 카네기홀 독창회 등 미국 주요 도시 순회 독창회
- 베르디의 고향 부세토에서 오페라 ‘리골렛또’ 로 데뷔 후 이태리,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캐나다, 호주, 필리핀 등에서 수 십회의 독창회와 수 백회의 콘서트
   및 오페라 주역 출연
- 한국애창가곡집, 성가곡집, 복음성가곡집, 이탈리아 애창곡집,
   카네기홀 공연 실황, 예술의전당 공연실황, 시인의 사랑 등 다수의 CD레코딩
- 2002 월드컵 홍보대사
- 2003 한국최고의 성악가로 선정
-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로 재직 중

 

-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1등과 차이코프스키상 수상 (1990)
- 베르디 국제 콩쿠르 1등과 최고 바리톤상 (1986)
- 파바로티 국제 콩쿠르 대상 (1988)
- 칼리아리 국제 콩쿠르 성악 대상 (1986)
- 마리오 델 모나코 국제 콩쿠르 1등 (1986)
- 코젠짜 국제 오페라 콩쿠르 1등 (1987)
- 미국 단젤로 국제 콩쿠르 1등 (1990)
- 대한민국 문화훈장 2회 수훈 [옥관(1990), 보관 (1995)]
- 문화부 장관상 '효시상' 수상 (1991)
- 난파 음악상 수상 (1986)
- 뉴욕을 빛낸 사람 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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