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은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의 아웃사이더로 비판자였다.
그의 『철학적 탐구』는 "진보란 대체로 그 실제보다 훨씬 위대해 보이는 법이다"라는
네스트로이의 경구를 책의 첫머리로 삼음으로써
이 작품이 반시대적 고찰임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사람들이 진보를 목격하고 칭송했던 과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인간 정신의 토보를 목격했고 절망했다.
그렇다면 과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절망,
거기서 그가 강렬하게 느낀 가공할 퇴보의 실체는 무엇인가?
과학이 조장하는 진보에 대한 신앙은
일상인들의 생활 세계와 경험과 언어를 위협한다.
집합론의 옹호자들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뒤흔들고,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옹호자들은
각각 시공간과 인식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크게 잘못된 것처럼 꾸짖는다.
과학은 이처럼 생활세계와 거기에 뿌리내린 일상적 경험을 부정하고
그 위에 새로운 권위로서 군림하려 한다.
니체와 하이데거는 그로부터 어떠한 정신적 가치나 의미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유물론(혹은 물리주의)의 도그마와
그것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허무주의(니힐리즘)의 창궐을 보았다.
경배의 대상이었던 신이 그 존재를 증명받아야 할 수상스러운 가정(假定)으로 변모하고,
윤리적 언명이 '자연주의적 오류'로 지적되는 것도 이러한 경향과 궤를 같이 한다.
일상 언어를 부정하고 이를 ㅗ다 진보된 인공 언어로 대체함으로써
철학의 진보를 이룩하려는 프레게와 러셀의 수리논리학과 분석철학은
콰인에 와서 자연주의라는 이름으로 철학(인식론)이 과학의 한 장으로 편입되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것이 감각자료이든(경허주의), 심적 상태이든(데카르트주의), 추상적 보편자이든(플라톤주의)
지시를 통해 의미를 모종의 사물로 한원하려는 의미의 물화(物化.reification)는
프레게의 「의미와 지시체에 관하여」나 러셀의 「지시에 관하여」에서부터
과인의 『낱말과 대상』이나 『지시체의 뿌리』에 이르기까지 굳건히 이어져 내려온 전통으로,
이로 말미암아 분석철학은 일종의 명명학(命名學, Baptism)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명명학은 콰인에 와서(그리고 그와는 다른 전통에 속하는 데리다에 와서)
의미의 불확정성, 의미 회의주의, 의미 허무주의로 귀착된다.
콰인에 의하면 의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에서 인정하는물리적 실체들과
과학에 필요하다고 여거지는 수, 함수, 집합 등만이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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