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H)자형 평면 주택의 진화
선병국 가옥은 1984년 문화재 지정 당시 주인의 이름을 딴 것으로, 원래 충북 보은 선씨가(家)는 전남 고흥에 살던 보성 선씨였다. 현 종손의 증조부인 영흥공이 전국을 돌면서 집터를 정했다고 한다. 속리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모이는 너른 삼각주에 마치 연꽃이 물에 뜬 형상인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인 지금 땅에 자손이 왕성하고 장수를 기원할 수 있다 하여 정착했다는 말이 전해온다.
글ㆍ이연건축 조전환 대표 | 사진ㆍ월간 전원속의 내집 변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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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은 선병국의 선조인 선정훈이 재력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목수들만 뽑아 1919년부터 3년여에 걸쳐 지어졌다. 일제시대에 조선말 신분에 따른 건축규제를 이미 벗어나 최대 99칸에다가 광을 포함하여 134칸의 고대광실(高臺廣室)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부를 이룬 집인지 짐작할 수 있다.
원래의 모습은 사랑채, 안채, 사당을 기본으로 대문 좌우로 길게 달린 바깥행랑채가 여러 구비 꺾여 사랑채로 들어가는 중문채로 이어져 있었다. 대문채, 행랑채, 화장실, 과객실, 방앗간채 등 여러 부속건물과 텃밭, 장독대, 정원까지도 두루 갖춘 대규모 가옥이었으나, 6.25동란과 두세 번의 수해 등을 겪으며 유실되고 돌담이 많이 허물어져 지금은 너른 마당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세월의 부침 속에서도 선병국 가옥을 관리하는 후손들의 노력으로 대문의 문턱을 넘나드는 사람들의 발걸음만은 선조 때만큼 여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관선정
종부인 김정옥 여사는 현재 행랑채에서 고시원을 운영 중이다.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지 여전히 이름은 ‘관선정(觀善亭)’이다. 집을 지은 후인 1926년에 대문 남쪽으로 약 300m 지점에 관선정을 창건한 선조들은 저명한 스승을 초빙하여 뛰어난 인재에게 숙식을 제공해가며 가르쳤다고 한다. 한학, 금석학, 서지학, 서예 등 한국 전통문화에 통달하며 후학에도 전념했던 청명 임창순 선생도 1927년부터 6년간 이 관선정에서 성리학자 홍치유를 사사하면서 한학을 익혔다. 평생 독학으로 학문연구에 진력하며 서당을 만들어 후학을 양성했으니, 그의 학맥은 보은 선가의 정신이 살아 이어지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예전 선조가 14년간이나 운영하는 동안 관선정에서 학문을 닦길 원하는 이들의 요청이 끊이지 않았듯 현재에도 인터넷을 통해 재현되고 있으니 한 집안의 내력이란 가히 값진 것이다. 1980년대 수해가 두 번이나 났을 때, 훗날 법조계에서 성공한 행랑채에서 공부했던 고시생들이 피해 소식을 듣고 십시일반 돈을 거두어 집수리에 보탰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오가는 길손을 받아들여 먹이고 재운 후 노자까지 들려 보냈다고 전해지는 가문이니 그 음덕이 후세에까지 미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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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
이 집의 간장은 참으로 유명하다. 해마다 집안의 대소사에 쓰이기 위해 해마다 20ℓ 정도의 덧간장을 따로 보관하는데, 다음 간장을 만들 때 이 덧간장을 부어 만든다. 특징은 간장을 달이지 않고 천일염과 옻나무, 숯으로 그 오랜 세월 맛을 일정하게 유지한다. 솔가지와 고추, 숯, 옻나무 등으로 잡균과 냄새를 없애고 다시 그것들을 매단 새끼줄을 쳐 액막이하고 버선모양의 한지를 거꾸로 독에다 붙여놓는 것은 간장이 그 집의 음식 맛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집안의 대표 맛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덧간장이 350년 묵은 간장이라 하여 1ℓ에 무려 5백만원에 팔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것을 사간 사람은, 우리네 어르신들이 집안의 불씨를 자손대대로 꺼뜨리지 않고 보존했듯이 장을 통해 가문을 이어나가는 종부의 인내와 정성에 경의를 표한 것이라 믿고 싶다.
귀한 장답게 담을 두르고 빗장까지 쳐질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현재는 수십 개의 장독대가 안채 옆으로 따로 구획되어 있고, 군청의 지원으로 주변의 야생화 단지와 장에 쓰이는 대추나무 식재처 등을 배경으로 장을 체험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I(H)자형 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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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크게 사랑채, 안채 그리고 사당, 세 가지 권역으로 나눠진다. 특이하게도 그 권역은 모두 돌담으로 내담이 둘러쳐져 있고, 그 세 권역을 또 외담이 크게 에워싸고 있다. 이는 집터가 주위보다 지세가 낮아 3만 여 평의 너른 부지에 들어앉은 집의 경계를 삼기 위함으로 보인다. 또한 주변의 솔숲은 너른 터의 허허로움을 막고, 인근 관선정에서 공부하는 이들의 쉼터이자 안산(安山) 대신 조성되어 큰길가에서 집을 바라볼 때 확연히 드러나지 않게 한 이 집을 정한 지관과 집주인의 정성일 것이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안채와 사랑채가 동일한 정면길이를 가진 工자형이라는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민가이면서 工자 형태인 충남 아산 맹씨행단에 대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工자형 평면은 조선시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상 속에서 공(工)이 천시되면서 꺼려하던 평면이었다. 그러나 강원도 양양의 김택준 가옥, 성북동의 이태현 가옥, 전남보성의 이금재 가옥, 전남보성의 이용우 가옥, 영암의 현종식 가옥 등 드물기는 하지만 조선전기 이후로 다양한 지역에서 工자형 건물이 보인다. 이는 사농공상의 신분제가 와해된 조선후기가 아닐지라도 工자형만이 가지는 공간구성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실제로는 진입 방향에서 볼 때 건물이 H자형으로 앉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H자형의 특성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H자형은 ‘一’자형과 좌우의 ‘ㅣ’자형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중심채를 사이에 두고 좌우의 채가 구분, 통합된다는 것이다. 또한 앞뒤로 내민 공간들은 앞마당과 뒷마당을 마주하여 각각의 ㄷ자형의 통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것은 좌우가 아닌 앞과 뒤로 공간을 구분해주기도 하는 독특한 평면 구성 방법인 것이다.
이러한 H자형 주택의 특성은 좌/우, 앞/뒤로 서로 다른 성격을 갖는 영역을 단일한 채에서 복합적으로 담기에 유리한 조건이 되어 안채와 사랑채의 통합이 이루어지기도 했던 일제시대에 서울 북촌에서 박길룡, 김종량 등에 의해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간의 통합은 가능할지 모르나 작게 나눠진 필지로 인해 마당과의 관계에서 한계를 드러내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지만, 아파트의 거실처럼 중앙에 중심공간을 가진 현대한옥으로 적용 가능한 평면으로 손색이 없다. 한편, 선병국 가옥은 좁은 대지 내에 안채와 사랑채를 한 건물 안에 통합시키는 장치로 H자형을 채택한 것이 아니라 안채, 사랑채 별개로 독립적인 H자형 평면이어서 각각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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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안채는 사랑채와 직각인 서향으로 몸채가 정면이 4간, 측면이 2간반이고 좌우 날개 부분이 정면 2간, 측면 6간을 각각 둔 규모가 상당한 건물이다. 전면만 원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각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으로 꾸몄다. 구조적으로 앞퇴만 두면서 7량으로 처리하고 이것을 굽은 부재를 이용하여 앞뒤 지붕의 물매와 길이를 맞추고 있다. 이때의 구조적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홍예보를 써서 2중으로 보를 걸치고 있다.
공간구성으로는 몸채 대청에 좌우의 안방과 건넌방 영역이 ‘ㅓ’ 자형으로 관입되었다. 건물의 오른쪽은 4간의 대규모 부엌을 중심으로 실들이 3면에 붙은 형상이다. 대청 쪽으로 두간의 안방이, 후면으로 대저택의 살림규모답게 가사노동과 저장을 위한 부엌방과 부엌마루가 그리고 전면으로 반간너비의 곁방이 달린 모방이 시설되었다.
왼쪽의 공간구성은 더욱 다양하다. 전면에 개방된 것과 문이 달린 한간씩의 마루와 작은 곳간이 연결되어 있고 건넌방 외에 갓방, 뒤뜰과 연결된 두간의 작은 부엌 그리고 3간의 광이 후면을 다 차지하고 있다. 상부는 부엌과 함께 다락으로 설치하여 뒤툇마루에서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건넌방 영역은 안사랑채처럼 독립된 마루와 부엌 등을 시설하였지만 넓은 저장의 기능과 함께 가사도 병행되는 공간이었다고 해석된다. 안채는 전면에 퇴를 설치하고 뒷면과 측면에 쪽마루를 설치하여 오른쪽에서 시작하여 왼쪽 측면까지 대청을 거치지 않고 통행이 가능하다. 직각으로 만나는 부분은 삼각형의 쪽마루를 덧대고 특히 왼쪽의 마루방 주위의 툇마루와 쪽마루가 직각으로 만나는 부분은 적극적으로 동선을 연결한 의지를 보인다. 달리 말하면 대청에서 신발을 벗은 채로 마루를 통하여 큰 부엌을 제외하고 어느 방으로든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툇마루의 설치는 통행의 자유로움 뿐만 아니라 공간의 확장 면에서도 적극 추천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삼각형의 쪽마루로 올라설 수 있도록 댓돌을 일체형으로 시설하여 통행을 극대화시킨 계획에선 조상의 지혜에 무릎까지 ‘탁’ 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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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사랑채도 안채와 마찬가지로 정면 길이가 약 22m에 달하는 H자형 평면 형태를 취하고 있고 정남향이다. 그러나 같은 형태라 할지라도 공간의 구성을 서로 비교해 볼 때, 선병국 가옥의 건축적 특성이 더욱 빛을 발한다. 사랑채는 1.8m의 넉넉한 마루가 좌우로 관통하면서 문을 통한 공간의 구분과 통합이 더욱 활발하다. 대청은 정면 3간 측면 한간 반으로 넓게 구성되었으나 좌우로 위치한 큰사랑방과 건넌방의 문을 열어 올리면 무려 정면 5간의 대공간이 형성된다. 대청의 앞뒤로 분합문 외에 미닫이가 달려 그 대공간의 사용은 계절에 상관없이 이루어졌으리라.
몸채 대청의 오른쪽으로 한간씩의 방과, 동시에 세 방의 불을 넣을 수 있는 아궁이실, 마루방과 온돌방으로 조합된 공간이 후면으로 배치되고 전면으로는 넓은 서루가 독립적으로 배치되었다. 날개로 이어지는 툇마루의 문을 닫으면 오른쪽 공간은 철저히 독립되고 다시 서루을 돌고 있는 툇마루문을 닫으면 서루만의 영역이 형성된다. 이는 안채와 달리 툇마루가 직각으로 만나는 부분에 삼각형의 쪽마루도 달지 않았거니와 댓돌마저 놓지 않고 난간을 설치해 ‘루’로서의 성격에 충실하도록 통행을 차단하는 이중장치를 적용했으니 그 공간의 독립성 확보란 면에서 탁월한 지혜라 아니할 수 없다.
왼쪽도 마찬가지로 방들이 이중 삼중으로 연결되어 방의 확장과 구분이 자유롭다. 구조적인 면에서 사랑채는 세벌대 기단 위에 4개의 간주를 제외하고 모두 팔각주초 위에 원기둥이다. 뒤에 퇴를 달면서 지붕구조는 복잡해지는데, 중앙의 대청에는 6m가 넘는 대들보가 날아오르는 용처럼 문을 달기 위한 간주를 지나 전면기둥까지 하나로 걸쳐지고 뒤로는 퇴보를 걸쳐 8량 구조이다. 대들보 위 중보, 종보가 놓이는 일반적인 보 구성이 아니어서 우미량의 사용이 돋보인다. 내진주에서 시작하여 중중도리와 중도리를 받치는 높이가 다른 두 개의 동자주에 각각 우미량을 대어 구조를 해결했는데, 전국의 능력 있는 목수를 엄선하여 지은 이집만의 독특한 가구(加構)법이라 하겠다. 안채와 사랑채 뒤로 내담으로 둘러싸인 사당은 재실과의 연결동이 있어 그 배치방식 또한 쓰는 후손들의 편의를 도모한 결과로 보인다.
선병국 가옥의 의의는 현대 한옥건축에 비추어 볼 때 단일 건물에서 다양한 기능을 가진 공간을 적절히 분리할 수 있는 H자형 평면으로 20세기 초에 지어진 집으로 일반민가와는 공간구성 및 가구를 꾸미는 수법이 다르다. 구석구석 보이는 까치발의 초각, 화려한 창호, 마름모꼴 이 조합된 난간구성, 합각의 장식적인 면모, 넓은 간잡이, 잘 다듬어진 굵은 재목들이 부유했던 선씨 집안의 경제적인 배경과 시멘트 벽돌 등 새로운 건축자재이 사용되고 한옥의 규모를 크게 하는 등 구한말 변화하는 한옥의 양식을 볼 수 있는 좋은 사례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글을 쓴 조전환 씨는 이연건축의 대표로 한옥의 현대화에 앞장서고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전업목수로 한옥에 담겨진 우리 선조들의 지혜를 되찾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또한 한옥의 고비용 문제를 해결하고 살림집에 적용하기 위해 목재의 규격을 통일하는 모듈화 작업을 시도한 바 있다. 지난 2001년에는 이연건축을 세워 목수학교를 개설하였으며, 특히 경주 보문관광단지 신라밀레니엄파크에 전통 한옥호텔 ‘라궁(羅宮)’을 짓는 역사를 지휘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