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삼십육검(南海三十六劍) 3권-홍파
차례
第十三章 급변(急變)
第十四章 전검과 탈혼검
第十五章 대남(大男)
第十六章 거성(巨星)과 신성(新星)
第十七章 준비하는 사람들
第十八章 갈 길은 먼데
第 十三章 급변(急變)
1
전팽이나 전방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찾아 온 사람은 뜻밖에도 유소청이었다.
그녀는 가주에게 포권지례를 취한 후, 전동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향을 살랐다.
"뻔뻔하군."
전비가 들으란 듯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유소청과 적엽명의 사이가 급속히 가까워졌다는 사실은 채
일각이 되지 않아 해남도 전 무가에 알려졌다.
각 가문에서 파견한 목부들은 각기 전서구를 가져왔고, 하
루에도 몇 번씩 전서구를 띄우고 받는 형편이었다.
전가에서 파견한 목부도 서신을 보내왔다.
그는 '적엽명과 유소청은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가리지 않
고 동침(同寢)한다.‘
'비가 사람들은 유소청을 며느리로 대하고 있다.
는 등 사실보다 훨씬 과장된 억측을 전달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 집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흠뻑 비를 맞
아야 했던 원한까지 뒤섞여 내용도 과격했다.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본 적엽명과 유소청은 분명히 연인이었고, 적엽명은
유소청의 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비가 사람들은 유소청의 병
간호를 말하고 있지만 목부들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취옥검 유소청이라면 여인으로써는 유일하게 남해삼십육검
에 거론된 무인. 그런 여인이 병에 걸렸다고 믿을 수 있는가.
그들은 그렇게 말하는 비가사람들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았
고, 그들끼리 구구한 억측을 늘어놓았다.
"유가는 법도가 엄격하기로 소문난 가문인데 딸이 저렇게
엉망으로 망가지도록 방치한 이유가 뭘까?"
"듣자하니 유가에서는 혈연의 정을 끊어 버렸다는군."
"그럴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유가주의 성미에 가만있을 리
없지."
"아무리 그렇더라도 계집이 혼례식도 안올리고……"
"쉿! 여기가 비가라는 사실을 잊었는가?"
"흐흐! 그렇게 기죽을 것 없어. 우리가 그냥 왔나? 우리 뒤
에는 해남파가 있어. 아,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데 뭐가 두
렵다는 말인가."
그들은 말을 주고받을수록 자신들의 생각이 진실일 것이라
고 생각했고, 각 가문에 보고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사견
(私見)을 적어 넣었다.
비가에 머물면서 전혈과 유소청의 명을 받으라고 했지만 전
혈은 행방을 모르고, 유소청은 적엽명과 살을 맞댄 것 같으니
유소청의 명을 계속 받아야 할지 난감했던 까닭이다.
유소청도 목부들이 자신을 대하는 눈빛에서 곱지 않은 마음
을 읽었다. 허나 그녀는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갔다. 황담
색마의 종부에 대한 것이라면 본문의 뜻을 따르되, 자신의 또
다른 임무인 관찰 대상자, 적엽명이 명부객인지 아니면 해남
파에 위해(危害)를 가할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가급적 좋은 방
향으로 매듭을 짓느라고 애썼다.
'그이의 마음을 알았어. 이제는 놓치지 않을 거야.'
유소청은 자신에게도 그런 정열이 있었는가 하고 스스로 놀
랄 만큼 사랑을 갈구하고 집착했다.
깊지 않은 병이다. 조그만 몸살에 불과하다. 허나 걱정스러
워 하는 눈빛과 이마를 짚어주는 따스한 손길이 좋아 열이 가
신 다음에도 자리를 털고 일어서지 않았다.
그녀가 일어선 다음 적엽명은 무심하던 예전으로 돌아갔다.
팔 년 전에는 모든 일과 모든 행동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
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적엽명에게는 그만의 일이 있다.
무슨 일일까?
그것을 알아내는 일이야말로 본문에서 유소청을 파견한 주
요 목적이었다.
적엽명은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는다. 화화부인도, 취영도,
결단을 내리라고 촉구했던 청천수도 무슨 일이 있다는 정도만
알 뿐,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상당히 중요하고 급한 일인 것
같은데……
수귀 탄이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때, 적엽명은 묻지
도 않았는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화를 만나기로 했어."
"……!"
"본문에는 알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럼 왜 나에게……?"
"내 사람이니까."
'내 사람……'
유소청은 적엽명이 한 말을 곱씹었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싫지는 않았다. 가슴 가득히 뿌듯한
희열이 샘솟았다. 이율배반적인 마음은 거기에도 있었다. 그
녀는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우화를 만난다니!
"우화를 왜 만나는지 알면 안 돼?"
"대답해 줄 수 없어. 나도 모르니까."
"……?"
"내 행동은 둘 중에 하나야. 우화를 죽이든지, 아니면 그냥
돌아오던지."
유소청은 적엽명의 말뜻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한 사람은 죽이려고 해남도에 들어왔어."
"누구를?"
"우화, 해남장문인, 경주자사."
"뭣!"
유소청은 깜짝 놀랐다.
"셋 중에 한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누구를 죽여야 하는 지
몰라. 그래서 우화를 만나려는 거야. 그가 죽여야 할 대상인
지 아닌지 알아보려고."
"……"
유소청은 할 말을 잊었다.
뇌주반도에서 적엽명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불길한 그림자
를 보았는데…… 적엽명의 말이 사실이라면…… 산 넘어 산이
요, 물 건너 물이다.
본문에서는 적엽명을 명부객으로 알고 있다.
가장 위협적인 일이다.
현재 황담색마의 종부 때문에 중요하지만 종부철이 지나고
나면 비무를 하자는 명분으로 석두를 죽인 복수, 옛 일에 대
한 복수를 할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것도 위험하다.
유소청은 거기까지만 생각했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가. 해남도는 섬. 적엽명이 하늘을 나는 재주가
없는 한 자신의 말마따나 들풀이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위험이 있었다니……
비가에 와서야 안 일이지만 청천수가 불구가 된 데는 모종
의 암투가 있는 듯 하다. 청천수는 다른 일은 제쳐두고 그 일
만으로도 적엽명이 살 수 없다고 한다. 극히 절망적인 어투였
다. 청천수가 정신마저 불구가 되지 않은 이상 불길한 생각은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적엽명은 한술 더 뜬다.
여족인의 우상인 우화, 해남도의 실질적인 왕인 장문인, 해
남도의 공식적인 지배자인 경주자사. 세 명은 마치 향로를 받
치고 있는 세 다리처럼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우화의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다르지만 그 역시 신출귀몰(神出鬼沒)하여 쉽게
제거하지 못한다. 해남파와 관부가 손을 잡고 전력을 다한다
면 끝을 볼 수 있겠지만, 우화가 죽고 난 다음 반란이 일어나
지 마란 보장을 하지 못한다. 그럴 바에야 귀찮지만 차라리
이대로…… 하는 것이 해남파와 관부의 입장이다.
세 명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신상에 이변이 생긴다면 짐작할
수조차 없는 대폭풍이 해남도를 휩쓸어버리리라.
적엽명이 그 일을 하겠단다.
도대체 지금 제 정신인가?
"이, 이유를 알면 안 돼? 왜 죽여야 하는지 말야."
유소청의 음성은 가늘게 떨렸다.
"묻지 마. 알려줄 때가 되면 알려줄게. 그것보다…… 내가
이 말 하는 이유를 아직 모르겠어?"
"……"
"지금이 마지막 선택이 될 거야. 우화를 죽여야 한다면
……"
"됐어. 더 말하지 마."
"……"
"넌…… 참 다정한 사내야."
"풋!"
"내게는 그래. 다른 사람은 악귀로 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다정한 남자일 뿐이야."
"휴우!"
적엽명은 탄식을 터트렸다. 그 날…… 폭우가 쏟아지던 날,
전혈이 떠난 날, 사랑을 더 이상 감출 수 없다는 것을 알았
다. 그러기에는 상대에게 쏟는 애정이 너무 컸다. 지금도 마
찬가지다. 위험이 목전에 다다랐지만 뒤로 물러설 사랑이 아
니란 것은 진작부터 알았다.
"내 사람이라고 말한 것…… 잊지 않을게. 고마워."
다음 날, 적엽명은 사귀를 모아놓고 무엇인가 당부했다.
대문을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은 일도일사 화문이다. 그는 어
디론가 부지런히 떠나갔다.
화문이 떠난 지 일각이 채 못되어 수귀 탄이 대문을 나섰
다.
그가 가는 방향은 여모봉이다. 적엽명보다 한 발 앞서 우화
에게 간다는 것쯤은 쉽게 짐작되었다.
"빌어먹을! 저 놈이 우화대원이니……"
황유귀 술이 떠나는 탄의 등 뒤에 대고 중얼거렸다.
술은 자신에게 접근해 올 우화대원이 걱정스러운 게다. 그
렇지 않아도 끈질지게 접근해왔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탄이
다가와서 우화대에 가입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술은 노인의 영향을 받아 온건한 투쟁을 선호했다.
여족인이 박해를 받지 않는 방법은 오직 자리이타(自利移
他)뿐.
한족이 구박을 하면 구박을 당하자. 폭행을 하면 폭행을 당
하고, 목숨을 달라면 목숨을 주자. 온갖 설움과 압박을 묵묵
히 참고 견디자.
여태까지 여족인은 그렇게 생활해왔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이제 와서 불끈 주먹을 쥐
고 일어설 것이 아니라, 배워야 한다. 지식을 익히고, 조금씩
이나 부(富)를 축적하고…… 나 혼자만 잘 살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모두가 배우고 모두가 잘 살도록 서로 굳건하게
협력해야 한다. 싸우기 위해 똘똘 뭉치는 것이 아니라 잘 살
기 위해 똘똘 뭉쳐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여족인의
힘도 강성해지고, 한족도 예전처럼 막 대하지는 못한다.
죽음은 죽음을 부른다.
우화에 동조하는 여족인이 많지만 적지 않은 세월이 흐른
지금 남은 게 무엇인가. 그 동안 흘린 피는 모두 어디로 갔는
가. 해남파는 여전히 우화대원을 탄압하고 우화대원은 일방적
으로 도륙 당할 뿐이다. 힘과 힘으로 부딪친다면 약한 쪽이
무너지는 것은 천고의 진리.
그렇다고 뛰어난 용사(勇士)인 술을 가만히 내버려 둘 우화
도 아니지 않은가.
산을 내려올 때부터 아내의 가족을 앞세워 접근해 올 것을
염려했는데.
"어쩐지 똑같은 입장인데 도무지 고민을 하는 기색이 없더
라니. 빌어먹을! 이미 우화대원이 된 것도 모르고…… 그러나
저러나 저놈 위치는 뭘까? 수귀정도라면 우화도 박대하지는
않았을 텐데."
"호호! 나는 관심 없어. 이제부터 난 바쁜 사람이니까 고민
은 혼자 실컷 해. 호호호!"
류가 기녀처럼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며 세 번째로 대문을
나섰다.
그는 어려운 부탁을 받았다.
상황은 극도로 어렵게 변하고 있다.
황함사귀가 예측한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황담색마의 종부가
끝나기도 전에 비가보는 쑥대밭으로 변해버릴 지 모른다.
류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비가 식솔이 살아남을 수 있
도록 조처를 취해야 한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절대적인 무
위를 휘두르는 해남파라 할지라도 남아있는 비가 식솔들은 털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해야 한다.
전가와의 싸움은 석두가 청해온 비무와는 다르다. 석두가
죽은 것은 일방적으로 청해온 비무의 결과에 지나지 않지만,
전가와는 시빗거리가 내포되어 있다. 자칫하면 해남파 전부를
적으로 돌리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 적엽명이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빠져나와야 한다. 해남파를 적으로 돌린다면 죽음뿐이다.
적엽명이 천하 제일 고수라 할지라도 해남파 전체를 적으로
삼는다면 살아남기 어렵다.
전가를 적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 전가 무인 한 명과 적엽
명의 싸움으로 국한해야 한다.
황함사귀와 무자음사가 머리를 맞댄다면 싸움을 피하지는
못해도 싸움을 축소시킬 수 있는 구멍 하나쯤은 찾아낼 게다.
그러나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
결과는 적엽명의 죽음으로 끝나겠지만……
호귀 류는 노노가의 기녀들을 이용하여 싸움의 결과를 해남
도 전역에 소문내야 한다. 가급적이면 무인 대 무인의 비무인
것처럼 소문내야 한다. 싸움의 결말이 어떻게 나던지 그 일로
인해 해남파가 비가보를 건드린다면 강자의 횡포로 여겨지게
끔 만들어야 한다.
"호호호! 걱정 마. 노노가 아이들은 해남파를 싫어해. 한
번도 들리지 않으면서 멸시만 하거든. 호호호!"
황함사귀는 동행을 고집했다.
"헤헤! 뒷일은 걱정하지 맙쇼. 그것보다 이 마당까지 무슨
일이지 말하지 않을 작정입니까요?"
적엽명은 말하지 않았다.
"그럼 좋습니다요. 우화를 죽이든 해남파 장문인을 죽이든
비가에 사람들이 들이닥칠 때까지는 약간의 시간 여유가 있으
니 소인이 시중을 듭죠. 그것까지 말리시면 정말 섭섭합니
다."
"황담색마는……"
"그건 걱정하지 맙쇼. 종부는 전부 끝냈고, 이제 안정만 시
키면 되는데 외팔이와 한녀(恨女). 아고! 이 놈의 주둥이
가…… 헤헤! 버릇이 되놔서…… 송지가 있으니 당분간은 괜
찮을 겁니다요. 헤헤!"
찬은 황담색마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일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황담색마보다는 적엽명의 안위가 더 걱정스러운 게
다.
이번에는 적엽명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엽명이 여장(旅裝)을 꾸릴 때, 황함사귀는 유소청과 마주
앉았다.
"헤헤! 일이 이쯤 되었으니 작은 마님으로 생각해도 될
지……"
유소청은 얼굴이 화끈거려 찬을 마주 볼 수 없었다.
"작은 마님도 아시겠지만……"
"작은 마님이란 소리는 좀……"
유소청의 음성은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보다 작았다.
"헤헤헤헤! 알겠습죠. 그럼 작은 마님이란 소리는 빼고……
유소저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지금 이랑은 해남 모든 무인들의
표적입죠."
유소청은 긴장했다.
"일을 벌이고 안 벌이고를 떠나 외관영 영주를 꺾고, 전혈
이 손가락을 잘라버린 채 떠났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생각 있으세요?"
그녀는 다급히 물었다. 적엽명의 안위에 관한 이야기라면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헤헤! 머리가 아둔해서 좋은 생각이랄 것은 없고…… 지금
현재 가장 위험한 사람은 무자음사 한백입죠."
"……?"
"그 사람은 유삼을 즐겨 입고, 말투가 온유하며, 행동거지
가 점잖죠. 또한 지략(智略)까지 밝다보니 모두들 유생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실은 누구보다 강직한 인물 입죠. 헤헤!
이번에 그는 전가와 필연적으로 부딪칠 겁니다요. 조심이야 하
겠지만 노리는 쪽에서 보면 이유란 얼마든지 붙일 수 있는 것
이어서……"
"위험하군요."
"헤헤! 문제는 그가 이랑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입죠.
보아하니 지난 세월동안 한 몸처럼 붙어 다닌 사이 같은
데…… 이걸 생각해보면 어떨 갑쇼? 만약의 경우 누가 이랑과
함께 죽을 수 있을까? 그 두 사람 입죠. 그들이 이랑을 따라
해남도에 들어왔을 때는 죽을 각오를 했을 겁니다요. 이랑께
서도 그 두 사람에게만 일을 시키는 것으로 보면…… 헤헤!
섭섭하지만 두 사람을 믿는 마음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겝죠."
"그런 게 아니라 사귀 여러분을 아끼느라 그럴 거예요."
"압죠. 못난 목숨들 부지하라고 그런다는 것을…… 유소저,
본론을 말씀드립죠. 해남파 무인들에게 멸시 당하실 수 있으
실 지……?"
"넷?"
"유소저께서 멸시 당할 각오만 서신다면……"
"무자음사를 살릴 수 있다는 말인가요?"
"아닙죠. 이랑을 살릴 수 있습죠."
"네엣?"
"소인과 이랑은 한백의 뒤를 따를 겁니다요. 별 일이 없다
면 괜찮겠지만 그럴 리는 없을 테고…… 외관영 영주를 베는
솜씨로 봐서 일전(一戰) 쯤은 괜찮을 것 같은데. 헤헤! 왜 옛
말에 한 손바닥이 열 손바닥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죠."
"그럼……?"
"이랑께서 결전이 있고 난 다음에 유소저께서는 전가에 들
리셔서……"
유소청은 '뻔뻔하다'는 전비의 말이 못내 섭섭했다.
상황이 달라졌다고 이렇게 막 대할 만큼 발길이 뜸했던 것
도 아닌데. 오라버니를 대하듯 도리를 다했는데……
그녀는 묵묵히 분향을 마쳤다.
전가에 찾아가면 멸시를 당하리라는 황함사귀의 말이 맞았
다. 세상 인심이란 것이 이렇게 조석변(朝夕變)하는 것일까.
"백명검께서 변을 당하셔서……"
"흥! 고소하겠지. 낭군의 무공이 그토록 고명하니 좋으시겠
어?"
전남이 비웃었다.
"그런 뜻으로 말씀……"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온 게냐! 뭐하는 수작이야! 사생아
여족 놈은 검을 휘두르고 다니고, 분장(糞杖)을 한 계집은 분
향을 하고. 썩 물러가!"
분장을 한 계집, 분장을 한 계집……
유소청은 눈물을 왈칵 쏟아낼 뻔했다.
여족 사내와 살림을 차린 한족 여인은 '분장을 한 계집'이
라고 멸시를 받았다. 똥을 휘젓는 막대기처럼 똥통 속에 스스
로 기어들어 갔으니 멸시를 받아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유소청 자신도 그런 풍습에 대해서 별다른 반감을 느끼지
못했다.
'간도 쓸개도 없는 인간''버러지 같은 인간들''저것들도 밤
에 할 일은 하겠지?' 등등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말을 들어
도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가 본 여족인은 무지했다.
적엽명이 여족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이고, 그것도 육삭둥
이라 비가주의 친자(親子)가 아닐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하늘
이 무너지는 듯 아찔했다.
이제 자신이 분장을 한 계집이라는 소리는 듣는다.
각오를 하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면전에서 모욕을 줄 줄이
야.
'헤헤! 여족인은 사람이 아닙죠. 해남 무인을 만나보시면
우화의 심중을 십분 이해할겁니다요. 무공을 모르는 인간들
이, 하다 못 해 싸움질 한 번 제대로 해보지 않은 무지한 버
러지들이 죽자살자 해남파에 대항하는 이유를 조금은 아실 겁
니다. 헤헤!'
"수련총 임시 통령 자격으로 왔어요. 말을 삼가 주세요."
유소청은 이를 악무는 심정으로 말을 토해냈다.
황함사귀가 미리 암시해 주었지만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랜 친분이 있으니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황함사귀가 암시해 준대로 강경하게
밀어붙이지 않으면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끔 만들었다.
"수련총 임시 통령 자격이라 했느냐?"
전팽이 나섰다.
가주가 나서자 성난 들소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적엽명은 제일급 관찰대상자입니다."
"호오! 그래서?"
말은 전팽이 했지만 전가 일족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번졌
다.
"저는 관찰자로써 적엽명을 관찰해야 합니다. 적엽명에 대
한 처분은 회의에서 결말난 대로…… 백명검께서 변을 당한
일은 잠시……"
"접어 두라?"
"네."
"그럼 하나 묻지. 적엽명은 지금 어디 있나?"
"여모봉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뭣이? 여모봉?"
전방이 뜻밖이라는 듯 되물었다. 허나 전팽은 좁은 눈을 날
카롭게 뜨고 있을 뿐 별반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전팽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가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농장은 남으로 만주(萬州)에서
북으로 경중(( 中)까지 이백 리, 동으로 만천강[萬泉河]부터
서로 보정(保亭)까지가 또한 이백 리다.
해남도 남쪽에서 전가의 눈을 피할 사람은 가히 없다고 봐
야 한다.
전팽은 정동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적엽명의 행방을
탐문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전동의 시신조차 보지 못했을
때였다. 전팽 역시 복수를 제일 먼저 생각했고, 전방을 보내
면 충분하다고 여겼으며, 전가의 땅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
고 했다.
적엽명은 괴수에서부터 곧장 북상했다.
빠른 행보는 아니었다. 보통 사람이 걷는 걸음이었고, 태양
이 이글거리는 정오 무렵이면 다루나 주루에 들러 폭양을 피
했고, 날이 어두워지면 객잔(客殘)에 들어 잠을 청했다.
여유만만한 행보.
마치 복수를 하고 싶으면 해보라는 태도가 아니고 무엇인
가.
"본문을 찾아가는 길인가?"
전팽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모릅니다. 어쨌든 저는 적엽명의 뒤를 쫓아야 합니다."
"흥!"
전비가 또 다시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왔군. 적엽명에게 복수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
려고."
"……"
"전비, 말을 내줘라."
"넷?"
"좋은 말을 골라라. 황담색마만은 못해도 전가에는 쓸 만한
말들이 꽤 있지."
"감사합니다."
유소청은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포권지례를
올렸다.
"말을 타고 부지런히 쫓아가. 적엽명을 만나면 내 말을 그
대로 전해주게. 아들놈이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은둔했어. 조
카는 시신이 됐고…… 하하! 전가의 체면이 말이 아니야. 체
면을 세워달라. 지금 내가 말한 것을 그대로 전하게."
"그 말씀은……?"
유소청은 마음이 깊게 가라앉았다.
체면을 세워달라는 말은 적당한 대가를 치르라는 말이나 다
름없다. 두 가지가 쉽게 떠오른다. 전혈처럼 육신의 일부를
자르는 것과 싸움의 빌미를 제공한 한백의 목숨.
적엽명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게다.
"적엽명의 지금 걸음이라면 보정까지 이틀 정도 걸릴 게야.
말을 타고 가면 하루만에 따라 잡을 수 있지. 어떤가? 하루
정도면 생각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은가?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말라는 말도 전해주게. 하하! 그럼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
지. 수련총 임시 통령. 길을 재촉해야지?"
"네."
"상가(喪家)라서 차 한 잔 못 줬네."
유소청은 전팽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적엽명이 헤쳐나갈 앞날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