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목 미정 15
"꽤 덥군."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의 입구를 나서던 사내의 눈매가 보일 듯 말 듯 꿈틀거렸다.
그는 더위에 구애받기에는 너무 강 한 사내였다. 하지만 이곳으로 오기 바로 전까지 툰드라의 추위속에서 수개월을 보낸 그였기에 이글거리는 지열을 뿜어내는 8월의 날씨가 반갑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단정한 검은 양복을 입은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그에게 다가와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것은 그가 청사 현관 앞에 멈춰선 지 일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까지 청사로 들어가던 젊은 여자들의 눈길이 반짝이며 그에게 머물렀다
사라지는 것이 계속되었다.
사내의 모습은 충분히 시선을 끌만큼 인상적이었다. 그는 30대 초반 정도의
나이였고 키가 컸다. 큰 키에 대나무를 보는 듯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였지만 허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얼굴선이 섬세하고 균형이 잡혀 있는 미남이었다. 그는 푸른색 반팔 와이셔츠의 윗단추 2개를 열어놓았는데 성격이 자유분방하다는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젊은 사내에게 인사를 하고 허리를 편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몇 년만에 보니 빈말도 늘었어."
"도련님도 여전하십니다."
중년 사내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편안한 어조였다. 그의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보았다면 경을 칠 일이었지만 그와 말하는 상대를 보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젖고 말 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구면이었고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였다. 중년사내의 신분은 결코 낮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사내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이 낮았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신분차는 컸지만 젊은 사내는 그런 것에 얽매이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중년사내는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고 있었다. 그가 몸을 담고 있는 조직에서 젊은 사내, 양화군 같은 사람은 정말 드물었기 때문이다.
중년 사내, 진대희는 웃는 얼굴로 양화군에게 말했다.
"그런데 짐은?"
"필요한 것은 자네가 사줄 거 아닌가?"
"후훗, 알겠습니다. 가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양반도 여전하시나?"
"도련님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분이시잖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양화군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무거운 분위기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그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는 진대희 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진대희가 걸음을 멈춘 것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검은색의 벤츠 리무진 앞에서였다. 그는 조수석 쪽의 뒷문을 열었다.
양화군은 진대희에게 싱긋 웃어 보이고 차에 탔다. 차는 진대희가 조수석에 몸을 싣고 차문을 닫자마자 출발했다.
"더 젊어지셨습니다."
"못 본 사이에 단추가 하나 더 풀렸군요."
못마땅한 어조로 말을 하는 윤찬경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양화군은 그저 싱긋 웃었을 뿐이었다. 윤찬경에게 좋은 말을 들을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멋쩍을 일도 없는 것이다. 회 내에서 그의 신분은 윤찬경보다 높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는 꾸지람에 가까운 윤찬경의 말에도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윤찬경은 원로원에 속해 있지는 않았으나 그에 버금가는 무게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공식적인 관계를 떠나서 윤찬경은 그가 어렸을 때 종종 목말을 태워주기도 했던 친인과도 같은 사람이었고 양화군은 그가 자신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지부장들은 언제 만나보실 생각입니까?"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인데 굳이 한군데로 모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양화군의 심드렁한 대답에 윤찬경의 이마에 그려졌던 내천자가 굵어졌다. 양화군을 보는 그의 눈빛이 쏘는 듯이 날카로워졌다. 드러내고 말은 안하지만 힐책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어서 양화군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며 딴청을 피워야 했다.
"그들을 보신 지도 이미 십여 년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예전 본부를 떠날 때 본 것이 마지막입니다. 모든 지부장들이 입국하실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뵙고 싶어합니다. 지금 하신 말씀을 그들이 들었다면 크게 실망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만나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들 기다리고 있으니 지부장회의는 언제라도 열 수 있습니다."
"알았어요, 알았어. 만나겠습니다. 그렇게 진지하게 말씀하시면 부담스러워요, 지회장님!"
양화군이 윤찬경에게 손사래를 쳐 보이며 말했다. 투덜거리는 말하고 있었지만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 원로원의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가 가장 좋아하고 어려워하는 사람은 윤찬경이었다. 윤찬경은 원칙에 철저하고 까다로운 사람 이어서 변칙이나 나태한 것을 눈뜨고 못 보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양화군의 대답을 들은 윤찬경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시베리아를 헤매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그 늙은이는 만나셨습니까?"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저보다 더 잘 아시잖습니까, 구름따라 떠도는 반 신선같은 노인네인데 일 년 쫓아다닌 것으로 만나길 기대하긴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은 밝혀냈으니 허송세월한 것만은 아닙니다."
대답을 하는 양화군의 얼굴에 언뜻 짜증과 허탈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의 뇌리에 모든 업무를 정지하고 가용가능한 회의 전력을 이끌며 전세계를 돌아다닌 지난 일 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 것이다. 추적의 대상이 존재하는지 조차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그의 일 년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윤찬경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꼬리는 잡으셨다니 대단한 일을 하신 겁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그들의 수뇌를 만나본 사람은 회에서도 아무도 없습니다. 이번에 도련님이 그를 만나기만 한다면 회의 역사에 남을 일입니다."
잠시 진중한 안색으로 말을 끊었던 윤찬경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를 만나야 그들과 임한이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임한에 대한 확실한 대응을 할 수 있고 말입니다."
"그 임한이라는 자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용산에 있는 미군기지에 갔다가 어제 오후에 나와서 정운이라는 중이 있는 서울의 상원사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자는 아니니 곧 다시 움직일 겁니다."
윤찬경의 말을 듣고 있는 양화군의 얼굴은 진지해져 있었다. 그의 표정에 가득했던 장난기가 가시고 진중해지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소탈한 미남청년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수많은 사람을 이끌어본 자의 위엄과 무수한 난관을 이겨낸 자에게서나 느낄법한 강렬한 기세가 그의 전신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담력이 약한 사람은 그 기세만으로도 고개를 들지못할 정도였다.
그 모습에 윤찬경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아는 양화군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미래의 대명회 주로 인정받는 회의 젊은 지배자의 모습인 것이다.
양화군은 창밖으로 스치는 가로수에 시선을 돌리며 말문을 열었다. 차분하지만 육중한 무게를 느끼게 하는 음성이었다.
"지난 일년을 추적하면서 그 노인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은자(隱者)중의 한 명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임한이라는 자에 대해 슬며시 언급하며 그자의 반응을 보았죠. 하지만 그는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임한이 누구인지 전 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회장님도 아시다시피 그들은 거짓말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죠. 저는 그의 말에서 진실을 느꼈습니다. 그자의 말만으로 결론을 내리기에는 미흡했지만 지난 일 년의 추적 중에 알게 된 사실과 그 말을 종합하면 그들과 임한이라는 자는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한국으로 온 것은 그들의 수장인 그 노인네가 갑자기 이곳으로 들어왔다는 첩보를 입수해서이기도 하지만 임한이라는 자를 제가 직접 만나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도련님이 직접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이곳으로 오기 전 원로원에 들렀습니다. 어르신들께서는 그자의 정체를 조속히 확인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만약의 가능성이 현실화된다면 그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가능성을 인정하고 계시지는 않았지만 그자가 그들의 후예라면 단 한 명이라도 남겨두어선 안 된다는 원로분들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그분들은 별로 신경 쓰고 계신 것 같지 않지만 저는 그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무언가 안좋은 예감이 들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선 직접 부딪쳐야한다는 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만약 그자가 은자들과 관련이 없고 이미 우리에 의해 멸망한 천외천부(天外天府)의 후예라면 제가 확인해야만 합니다."
양화군의 말에 윤찬경은 우려의 빛을 보이며 물었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위험한데 직접 손을 섞어야한다면 그것은 그리 좋은 방법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제가 잠적했다 복귀한 그자를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그자를 칠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자의 배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자를 쉽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자의 주변은 언제든 의외의 변수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하하하, 무엇을 염려하시는지 잘 압니다. 저도 먼저 그자를 만나보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서 그 노인을 만나는 것이 최우선 목표입니다. 그자를 만나는 것은 제가 그 노인을 만나거나 만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판단한 후 가 될 것입니다."
양화군은 웃으며 윤찬경의 우려를 씻어 주었다. 그 대답을 들은 윤찬경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지부장회의는 언제쯤 열지 생각해 두셨습니까, 도련님?"
"일단 그 노인의 행적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좁은 땅이니까 시베리아보다는 쉬울 것 같습니다. 지부장회의룰 언제 열 것인지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부장들이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들의 마음도 헤아려 주십시오."
양화군은 소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윤찬경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재촉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회의 위계질서는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명에 의해 생사가 순간적으로 갈리는 세월을 천년 이상 보내며 조직을 이어 온 그들에게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조직에서일지라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배려한다면 아랫사람으로부터 진심어린 충성을 얻어내기가 더 수월할 것이다. 윤찬경은 양화군에게 그런 배려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양화군을 얼마나 아끼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작은 도련님이 고생이 많으시다고 하더군요."
윤찬경은 부드럽게 말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양화군의 얼굴에 사라졌던 장난기가 다시 돌아왔다.
"하하하, 그 녀석이 저를 욕하는 소리가 일년 내내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도련님만큼이나 매이기 싫어하시는 분인데 도련님이 비운 자리를 지키셔야했으니 욕하실만 하지요. 그렇지만 원로 분들께서도 능력을 인정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잘된 일입니다."
"모든 면에서 저보다 나은 녀석입니다. 제가 몇 년 먼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녀석 덕분에 평생 제 맘대로 살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이 정말 아쉽습니다."
양화군이 혀를 차며 탄식하는 흉내를 내자 윤찬경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차안의 분위기가 밝아지는 것을 느낀 진대휘의 입가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윤찬경의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수년만에 처음 본 그였다. 그리고 그것 이 양화군의 덕임을 잘 알고 있었다.
진심으로 모실 수 있는 상관을 만나는 것도 복이다. 진대휘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지워지지 않고 있는 가운데 그들이 탄 벤츠 리무진은 미끄러지듯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사미승은 울적한 얼굴로 애꿋은 땅을 발끝으로 툭툭 차고 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어깨가 가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장신의 사내는 무뚝뚝한 표정이어서 모르는 사람들이 보았다면 매정하다 욕할만한 광경이었다.
태양이 중천을 향해 치달려 가고 있는 중이었다. 햇살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사미승, 유정의 발끝이 땅을 찰 때마 다 바싹 마른 먼지가 풀썩 하며 작은 흙구름을 만들어 유정의 운동화를 덮었다.
상원사 마당의 지프차앞에서 한은 꼬마 중 유정을 달래고 있었다. 유정은 이름처럼 정이 많아서 만난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한이 떠나는 것을 못 견디게 서운해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무슨 특별히 재미있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이 끌리는 아저씨였다.
유정은 땅을 쳐다보던 고개를 들었다. 무엇이 사내다운 것인지도 모르면서 정말 사내답다는 생각을 나이어린 유정의 마음에 저절로 불러일으켰던 사내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정 없는 얼굴이었지만 자신을 보는 한과 시선이 마주친 유정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눈에는 감정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 또 오실 거예요?"
"약속은 못한다. 하지만 또 오마."
"정말이요?"
"........."
한은 못 믿겠다는 듯 자신의 소매를 꼭 부여잡고 확인하듯 묻는 유정의 빡빡 깎은 머리를 큰손으로 쓸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본 유정이 그제야 잡고 있던 소맷자락을 놓았다. 한은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유정의 머리를 쓸고는 차에 탔다.
상원사의 떠나는 그를 배웅하는 것은 유정만이 아니었다. 정문을 벗어나며 고개를 돌린 한의 시야에 절의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정운스님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창문을 내리고 정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정운은 주름이 가득한 손을 한에게 들어 보이고는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지프차가 사라진 방향으로 계속 시선을 주고 있던 유정은 어깨를 짚는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린 유정이 마주친 것은 듬성듬성하지만 긴 눈썹에 반쯤 가려진 인자한 두 눈이었다.
"큰스님......"
"녀석, 그놈은 다시 올 테니 염려하지 말아라. 약속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놈이니까. 어여 들어가자."
"예"
정운의 확인을 받은 유정의 얼굴에 천진한 미소가 되살아났다. 유정은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주름 가득한 정운의 손을 잡았다. 유정의 손을 잡은 정운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두 노소의 모습은 곧 건물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