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쓰기 첫걸음 또는 반복 연습
김문억
들어가면서
조금은 해묵은 이야기지만 시조를 습작하는 사람을 위한 창이 있어 아주 오래 전에 써 두었던 글을 다시 올려 본다
세월이 간다고 해서 본말이 바뀌겠는가.
어느 나라든지 그 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민요라든가 가사가 있다. 그런 것이 발전해 내려오면서 그 민족성을 형성하고 있는 詩歌 라는 전통시가 탄생하게 되었다.
우리가 쉽게 들을 수 있는 민요를 보면 각 나라마다 그 가락이 다르거니와 크게 보면 대륙 간의 공통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아시아는 아시아대로 리듬 장단에 맞는 흥겨운 가락이 있고 유럽은 유럽대로 아프리카는 또 아프리카대로 슬프거나 빠른 리듬의 춤사위나 민속 노래가 있다. 그런 것은 하루 이틀에 걸쳐 누가 작곡한 것이 아니고 지역마다 환경에 따른 오랜 세월 속에 닦아져 내려온 전통의 소산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라마다 갖고 있는 전통문학 역시 그 나라의 민족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이웃 나라만 보더라도 일본은 그 나라의 축소 지향문화가 낳은 단가(短歌)라고 하는 아주 짧은 국민시가 있으며 중국은 대륙다운 기질의 장중하면서도 글자 수가 딱 맞아 떨어지는 오언(五言)시니 칠언(七言) 시 같은 민족시가 있다. 우리나라는 시조가 바로 그것이다. 3 장이 갖는 리듬의 댓구로 늘렸다가 줄였다가 조였다가 풀었다 하는 가락의 율조는 우리 민족의 특성이 잘 나타난 특유의 민족시 인 것이다.
어느 나라든 간에 전통 문학은 우연이 아니라 오랜 세월 속에서 닦이면서 정제된 필연적인 것이다. 그 필연의 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주 오랜 옛 사람들의 생활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지금도 우리는 혼자서 일을 한다거나 한 잔 술에 기분이 거나해지면 흥얼흥얼 노래를 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흥이다. 그런 흥은 가족끼리 놀이를 한다거나 집단으로 농사일을 한다거나 부족끼리 싸움을 한다거나 간에 항상 생활 속에 이미 깊이 배어 있다. 서부영화를 보면 아프리카 토인들이 싸움터에서 활을 소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그런 흥얼거림은 어떠한 일정한 리듬의 반복을 가져왔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노래가 되고 시가를 형성 했을 것이다. 나라마다 먹고 입는 것에서부터 생활 관습이 모두 다를진대 그런 바탕에서 자생된 민족마다의 시가 역시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시조 역시 우리 민족만이 갖고 있는 전통 시 라면 그 유래는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연구된 바에 의하면 신라의 향가에서부터 찾는 이가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문자로 전해지는 것 이 전부터도 그런 가락의 반복은 얼마든지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볼 수 있다. 그 흥얼거림 속에는 우리 선조들의 소모는 소리. 김매는 소리. 모내기 하는 소리 곡식을 타작하는 소리 웃음소리 한숨 소리 다듬이질 소리 통곡 소리 상여 나가는 소리 등등이 들어 있기 때문에 시조의 가락 속에는 민족혼이 배어 있는 것이며 민족의 내재율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전통문학으로서의 민족시인 시조의 자랑거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 문학으로서의 시조의 위상을 놓고 얘기할 때에도 정형이라고 하는 장르상의 특성이 갖는 편리라든가 불편함 같은 기능적인 것 이전에 이런 문제가 먼저 전제 되어야 한다고 생각 한다.
기본적으로 시조를 쓰기 전에 왜 시조라고 하는 가락이 형성 되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까닭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조 가락에 대한 잡소리를 안 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한 나라의 민족시는 그 민족의 리듬 가락이요 춤사위 이면서 혼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민족정신의 본류라고 하겠다. 우리 정서의 바탕이다. 때문에 나라마다 자기네 민족시가 으뜸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우리나라의 현실은 말로는 전통문화를 부르짖으면서도 민족시인 시조를 보는 시각은 그렇지 않다는 데에 안타까움이 더 크다.
시조는 어느 나라 시가 보다 구성이 훌륭하며 자유로운 내용을 담을 수 있는 넉넉한 그릇이다. 때문에 시조는 한 줄을 행이라고 부르지 않고 장(章) 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시조는 우리말에서 자생된 문학이기 때문에 우리의 말맛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큰 그릇 이다.
時調란 무엇인가
의미적으로 보는 시조는 우리말에 매우 합당한 한국적인 고유 예술 문학 양식이다.
형식적으로 3 장이라는 정형이 자리 잡히기까지는 신라의 향가에서부터 고려시대의 별곡을 거치면서 우리 말맛에 잘 어울리는 모양으로 갖추어져 내려 왔다. 그것은 우리말의 언어 풍습과 홀 수 문화라는 바탕에 근거 할 수도 있다. (필자의 산문 홀수문화 참조)
3 장이라는 몸체는 다시 6 구라고 하는 체위를 갖추고 있으며 그 6 구는 또 12 마디의 낱말인(語節)잔뼈로 엮어졌으니 밖으로 보이는 형식은 간단하되 안으로 엮어진 시적인 내용의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시조가 안고 있는 한국적 의미는 결국 한국문학의 뿌리라고 볼 수 있다. 한국문학의 서정성, 정한과 정탄이 되기도 하면서 오랜 세월을 이어 내려 왔다.
그것은 짜여진 틀 안에서 적절한 말의 리듬을 더하고 빼면서 맛볼 수 있는 흥겨운 우리가락 율조를 느낄 수 있는 문학 장르라는 특성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말에서 자생된 우리 문학이라는 생태적인 숙명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시조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우리말이 갖는 말맛의 다양함은 시조 짓기에 있어 대단한 흥미를 유발 시키고 발전시켰으며 훈민정음의 탄생은 한국문학 전체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시조 창작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것은 한문문학의 완고한 틀 속에서 벗어나와 한국문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시조는 우리말 관계와는 떼어 놓을 수 없는 한국문학의 始組라 하겠다.
시조의 명칭에 관하여
역사 문헌상으로 보아 시조 명칭을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때는 영조 때로서 申光洙의 石北集에서
一般時調排長短—일반시조배장단
이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 즉 시조의 창에 길고 짧음이 있다는 표현이다. 당대의 최고 가객인 李世春 이라는 사람이 관서지방에서 시조창을 크게 이름 내고 있을 때다
이같이 문헌상으로 시조라고 하는 명칭이 처음 오른 이 후 정조 때에 내려와서 李學逵의 문집 落下生稿 에
誰憐花月夜 수련화월야
時調正悽悽 시조정처처
라는 싯귀를 남기면서
時調亦名時節歌 –지조역명시절가
라는 註 를 달아놓고 있다
그 다음 철종 때에 이르러 柳晩恭 이 歲時風謠에서
時節短歌音調蕩—시절단가음조탕
風吟月白 唱三章—풍음월백 창삼장
이라 하였다. 역시 註解 에서 俗歌曰時節歌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문헌으로 볼 때 시조는 세속적으로 시절단가, 시절가 로 통해 왔으며 특히 唱三章 이라고 하는 노래 곡조의 특징까지 밝힌 유만공의 기록은 시조를 더욱 구체화 시킨 기록으로 평가된다.
즉
時節短歌音調----時節歌調----時調 로 줄여졌다는 근거가 된다
그 이 후에도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시조에 관한 명칭은 개인의 학문적 고집이나 또는 시조를 신명으로 삼고 있는 학자들의 개개인 연구에 따라 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분분한 학설들은 궁극적으로 時調 라는 명칭을 뿌리 내리게 하고 있다. 전통이란 오랜 역사를 갖고 갈무리 되는 것이지 결코 누구의 개개인 주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時調 라고 하는 때시 時 는 고시조에서 왕왕 사계절의 순환에서 느끼는 감정을 노래하는 것으로만 인식하기 일쑤였지만 고시조를 면밀히 살펴보면 계절에서 느끼는 것만 시조로 쓴 것이 아니고 당대의 역사적인 애환을 담은 글이 상당히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칫 시절 이라고 하는 때가 마치 시조는 음풍농월 노랫말에 지나지 않는 오해를 일으키기 쉽지만 실지 작품을 살펴보면 시사적인 의식을 갖고 쓴 소위 지금으로 말하면 참여 시라든가 저항 시 같은 작품도 찾아 볼 수 있다.
위태로운 국난을 당한다든지 아니면 삶의 애환에서 나온, 진한 작품성을 갖고 있는 시조는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그런 면에서는 때시時 자를 쓰는것이 글시 詩 자를 쓰는 것 보다 더 강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렇게 시작된 시조라고 하는 명칭은 창으로 불러져 내려오다가 한글이 창제 되면서 시조문학 이라고 하는 큰 전환을 맞게 된다.
옛시조의 관점
시조는 처음에 詩가 아니고 歌 였다.
가곡이든 창이든 간에 부르는 노래일 따름 이고 달리 노랫말인 시가 따로 창작 되진 않았던 것이다.
時節歌調 란 그 시절을 노래한 것이라는 뜻이니 지금으로 말하면 유행가라는 말에 합당할 듯하다.
그러다가 신시조가 활발하게 창작되던 1900 년 이 후 부터는 창으로 부르기 위한 고시조가 새로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글이 창제 되면서 한문 문화권에서 완전히 해방된 우리 문학의 꽃으로 신시조라는 이름으로 읽는 시조의 자리를 잡게 되었다 고시조는 음악으로서의 지속일 뿐이며 마침내 신문, 잡지 , 단행본 등의 발행이 일반화 되면서 시조 라고 하는 문학의 갈래로 읽는 시조가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그렇게 고시조는 어쩔 수 없이 노래 속에서 이중적인 의미로 이어져 내려 올 수밖에 없었다. 자생된 전통 이란 것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문자가 생기기 이전부터 생활의 관습에서 입에 자연스럽게 오르는 노래가 나오게 되었고 노랫말이 전수 되면서 문자가 생긴 이 후 확고한 문학의 자리를 잡게 된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 역사의 공통점일 것이다.
서양의 경우도 르네상스 이전 까지는 노래와 시가 잘 구분되어지지 않았으며 서정민요라고 하는 어중간한 용어를 사용 했었다. 소위 상징주의 이 후부터 노래와 시가 구분되었으며 역시 마찬가지로 인쇄술이 발달하는 근대 및 현대에 이르러서 시문학을 꽃피울 수 있었다. 그렇듯 모든 운문 문학의 뿌리는 노래에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현대시가 필수적으로 안고 있는 음악성과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고 하겠다. 시란 따지고 보면 신명이나 흥에서 나오는 노래인 것이다. 그런 내재율의 리듬이 살아있는 운문을 율문 이라고도 한다.
그러고 보면 근대 및 현대의 인쇄 문화가 끌어안게 된 우리말과 우리글의 방향은 이미 시조 속에 면면히 흘러 내려 온 것이며 일부 보수성의 지식인 사회가 한문 문화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의 민중들은 주체적으로 한글 신시조를 창작해 왔던 것이다. 이는 바로 민족의 주체성을 충분히 이어 내려왔다는 자부심을 갖어도 좋은 것이며 시조만의 독자성을 자랑 할 만 한 일이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그러하거니와 형식면에서도 일관성 있는 몸체를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옛 시조의 흐름
고시조가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고구려의 을파소, 백제의 성 충 등이 꼽히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고 고려 시대의 시조 역시 재검토 되어야 하지만 대체적으로 십 여 수는 인정해도 된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고려 말부터 조선 창업 사이에 이조년. 이존오. 최영. 이색. 이방원. 정몽주 등의 시조가 전해 오고있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고려의 충신들이 옛날을 회고한 시조가 있고 새 시대를 송축, 찬양 하는 시조가 나타나다가 마침내 훈민정음이 창제 되면서 한문으로 기록 되던 문화가 한글 시대를 맞게 되고 유교 사상이나 서정적인 시조, 사육신을 중심으로 한 일편단심의 님을 향한 애절한 시조가 거듭 나오게 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
* 고려국의 멸망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울 때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위하는 충신으로서의 절개가 등골이 오싹 하도록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유명한 시조 한가락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방원-
조선 개국 혁명을 앞두고 고려의 충신 정몽주의 의중을 파악한 후에 혁명 주체세력인 이방원이 내 놓은 화답송 시조다
아하!
동서양 고금 어느 역사를 막론하고 풍전등화 같은 국가의 위기 앞에서 정적 끼리 시 한 수로 상대의 뜻을 이토록 극명하게 밝혀 본 일이 있겠는가 싶다. 시조문학이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逢萊山 제일봉에 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이 滿乾坤 할제 獨也靑靑 하리라.
-성삼문-
*봉래산: 금강산의 별칭
죽음을 앞에 두고 한 점 티끌도 허용 할 수 없는 얼음장 같이 차갑고도 고고한 선비의 기개가 구절마다 하얗게 서려있는 만고충신의 유언장이다.
옛 시조는 연산군 때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약 1 백 년 기간을 발전 기간으로 잡을 수 있다. 외침이 없는 때였지만 사대부들간의 세도 다툼이 심할 때여서 당쟁이 시작 되었으며 은둔하는 사람이 늘어갔다. 관조의 시조와 음풍농월로 유유자적 하고자 했다. 특기할만한 일은 기녀들의 수준 높은 시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무렵에 서경덕. 조식. 정철. 박인로. 황진이. 매창. 홍랑.등 60 여명이 시조를 발표했다.
深山에 밤이 드니 북풍이 더욱 차다
玉樓高處에도 이 바람 부는게요
간밤에 치우신가 北斗 비켜 바래노라.
-박인노-
* 옥루고처; 임금님의 처소
靑山은 내 뜻이오 綠水는 임의 정이
綠水 흘러간들 靑山이야 변할손가
綠水도 靑山 못 잊어 울어 녀어 가는고.
-황진이-
임진왜란 이 후부터 숙종 까지 또 1 백 년 동안은 전란을 격으면서 사회 구조가 달라지고 왕실을 중심으로 하던 사대부들의 신분 체제가 흔들리면서 평민들이 눈을 뜨기 시작 했으며 문학의 흐름도 평민의식이 주제화 되어 뛰어난 작가가 배출되는 시조문학의 전성기를 이룬다. 사대부들은 물론 아래로는 평민과 기녀들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이 시조를 짓는 부흥을 이루었다. 윤선도를 비롯한 양사언. 김장생. 남구만. 송시열. 등 7 십여 명의 작가 군과 많은 무명씨의 작품이 쏟아졌다.
뫼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하고 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윤선도-
泰山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양사언-
숙종 이 후 개화기까지 약 2 백년 까지는 시조가 제자리에 있는 듯 했지만 이때야말로 시조가 장시화 되고 확대되는 시기였다. 문집이 나오기 시작했고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고문집이 대부분 이 때에 간행된 것들이다. 조선의 문예 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영,정조 시대에 실학사상이 태동 하므로써 민중들은 새로운 시의 눈을 뜨게 되었고 기존의 질서에서 보다 과감한 표현을 했으며 장시 화하기 시작했다. 김천택의 청구영언 이나 김수장의 해동가요 역시 이때에 나왔다
글도 병된 일 많고 칼도 험한 일 있세
이 두 일 마다 하여 이 몸이 편차 하면
聖主의 지극한 은덕을 어이 갚자 하리오
-김수장-
風塵에 억매이어 떨치고 못 갈지라도
江上一夢을 꾸운지 오래더니
聖恩을 다 갚은 후는 浩然長歸 하리라.
-김천택-
* 호연장귀: 이 세상을 떠나는 것.
현대시조의 흐름
현대시조의 흐름은 고시조 시대를 벗어나는 신 시조와 혁신시조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화기 라고 하는 근대화의 촉진은 문학에서도 함께 받아들여지며 인쇄술의 발달로 그 진폭은 매우 큰 것이었다. 신 시조 역시 이런 사회적 변혁에 따라 방향 전환을 하므로 고시조 시대를 고하게 되고 唱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읽는 문학 장르로서의 신 시조 시대를 맞는다
작품으로는 19 세기 초 남 궁억의 작품을 들 수 있겠는데 그 내용이 나라의 주체성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 확고한 자리 잡기 라는 데서 새로운 문학사상을 볼 수 있었다.
뒤를 이은 시조들이 대한매일신보 . 청춘. 소년 등의 신문 잡지에 실려졌다.. 안창호. 신채호. 최남선 등이 주요 작가로 등장한다.
갑오경장 이 후로 나오는 개화기의 모든 노래들은 저항과 계몽 위주로 출현한 것이었으나 침략 세력이나 추종자들을 규탄하는 시조들이 많았다. 하지만 일제 침략으로 시조는 잠시 물 밑으로 가라 앉는다. 그러나 시조의 부흥 운동으로 가람 이병기나 노산 이은상으로 이어지는 현대 시조 시대를 맞는다. 결국 시조 부흥 운동은 잘못된 운동 이었다는 지적을 받게 되는데 나중에 논하기로 한다.
님으로 해 달도 밝고
님으로 해 꽃도 고와
진실로 님 아니면
꿀이 달랴 쑥이 쓰랴
해 떠서 번하옵기로
님 탓인가 하노라
-안겨서/최남선-
인간에 발 붙이고
한울 우에 머리 두어
아츰 해 저녁 달을
금은 한 쌍 공만 녀겨
번 갈아 두편 손 끝에
주건 받건 하더라
돌아 봐 백두러니
내다보매 한라로다
천리에 마조 보며
높은 자랑 서로 할제
셋 사이 오가는 말
천풍이라 하더라
-천왕봉/ 최남선-
맑은 시내 따라 그늘 짙은 소나무 숲
높은 가지들은 비껴드는 볕을 받아
가는 잎 은바늘처럼 어지러이 반짝인다
청기와 두어 장을 법당에 이어두고
앞뒤 비인 뜰엔 새도 날아 아니오고
흥으로 나리는 물이 저나 저를 울린다
폭포소리 듣다 귀를 막아도 보다
돌을 베개삼아 모래에 누어도 보고
한 손에 해를 가리고 푸른 허공 바라보다
-계곡/이병기-
가람의 경우 시조를 혁신 시키자면서 작품과 함께 당대의 이론가로 이름을 떨친 현대 시조의 개척자 라고 할 수 있는 시조단의 큰 별이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작품을 계속 내 놓았으며 작품 또한 이 전 것과는 전연 다른 새로운 감각으로 정감 넘치는 것들이었다. 이를 이어서 조운 또한 빛나는 시조를 남겨 혁신 시대의 면모를 보다 뚜렷하게 했다.
주름진 어머니 얼굴
매보다 아픈 생각
밤도
낮도 길고
하고도 한한 날에
그래도 이 생각 아니면
어이 보냈을거나.
-어머니 얼굴/조운-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례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한 조각 심장만 남거들랑
부등켜 한고 가야만 하는 겨례가 있다.
새는 날 핏속에 웃는 모습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高地가 바로 저긴데/이은상-
가람과 함께 당대에 시조 작가로 큰 획을 그었던 노산 이은상은 타고난 감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독특한 서정으로 천의무봉하게 작품을 빚어내는 달관을 보여 주었다. 어떠한 사물이든지 그의 눈길만 닿으면 시조라는 가락으로 술술 나오는 듯이 뛰어난 작가였다.
이들로 하여금 단시조를 중심으로 연시조가 나오고 신시조 시대를 이어받은 현대시조의 기틀이 튼튼해졌다. 특히 가람에 의해 배출된 이호우. 장응두. 김상옥 중심의 체계가 그대로 내려오면서 이영도의 서정이 가해지고 이태극이 출현하여 시조 이론이 다시 한 번 정립 되었다.
사변이라는 민족상쟁의 혼란기를 격으면서 시조는 현대문학 이라는 이론에 따르면서도 전통문학 이라는 이중적 고민을 갖고 창작 되었으며 정완영. 박재삼. 장순하. 최승범. 송선영. 박경용. 이근배. 김제현 . 서벌. 박재두 등에 의해 기금까지 수많은 실험 정신으로 폭넓은 현대시조를 창작하고있다. 그것은 전통이라고 하는 정형시로서의 틀과 함께 현대시 라고 하는 이중적 문제를 어떻게 잘 조화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가 함께 포함된다.
현재 한국 시조시인협회에 등록된 시조인 수는 대충 일천 여명이 훨씬 넘는 것으로 알며 등록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숫자까지 합치면 이 천 여명에 이를지도 모른다. 지금도 수 많은 후학들이 시조 창작을 위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그렇게 엄연히 한국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전통문학으로 독특한 우리만의 틀을 갖고 있는 정형율의 좋은 시조를 혹자는 아예 모르거나 혹자는 고시조와 현대시조의 구분도 어렵고 혹자는 아무리 후하게 맞춰 봐도 시조의 틀이 없는 것을 시조라는 이름으로 발표하는 사람도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라고 하겠다.
지금까지 대충 그야말로 수박 꼭지 만져보는 식으로 시조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더듬어 보았다. 다분히 처음 시조를 접하는 사람 위주로 집필 되었다. 보다 시조에 대한 이해가 되었는지 좋겠다.
앞으로는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넘나들며 작품 감상 하는 것으로 창작 강의가 되었으면 한다. 남의 글을 올바르게 이해할 줄 알면 자신의 작품도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시조 짓기
우리가 흔히 대하는 3 장 6 구 형식의 단시조를 평시조라고도 하는데 이는 창에서 유래된 용어다.
이미 다 알고 있듯이 단시조 형식은 3 장으로 되어있다. 시에서는 한 줄을 한 행 이라고 하지만 시조에서는 장章이라고 칭한다. 여기서의 장의 개념은 시에서의 행과는 좀 그 무게를 달리한다. 장의 사전적 해석으로는 책을 크게 구분하는 단위로 되었다. 유추 해석한다면 시조에서의 한 장은 책에서의 여러 페이지 분량에 상당하는 내용과 무게만큼 버금가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이와 같은 하나의 장 역시 말로써 이어지는 것이니 모든 시가 그렇듯 말 잇기와 말 매듭짓기일진대 말은 시의 재료이면서 수단의 전부라고 하겠다. 따라서 좋은 글을 쓰고자 하면 말 선택의 원리와 말의 조직, 이음새 등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말은 대체로 語幹(어간)에 語尾(어미)가 따라 붙어 한 小節(소절)의 말 구절을 만들고 있다. 어간과 어미가 결합하면 보통 2~4 음절로 특징 지워져 나타나는데 이러한 단위가 둘 쯤 합쳐지면 시조 형식상으로 따져서 한 句(구)가 형성된다. 모든 시의 출발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벌써 두 마디의 말이 결합되면 가락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 눈이 오는구나
구름에 달 가듯이
한 송이의 국화꽃
여기에서 이러한 가락이 또 한 줄 더 붙으면 마침내 시조로서의 한 章(장)을 이루게 된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퇴근길 번지 내 투입
우편물을 집어 들고
이렇게 되면 기본율격의 한국어 리듬이 가락과 함께 뜻이 따르게 되는데 한국어의 기본 율격이 4,4 조 라고 하는 도움말을 들어 보기로 하자.
-우리말은 4 음절을 한 번 반복하고 다시 이를 한 번 반복하여 모두 16 음절을 이룬 것이 제일 큰 단위가 된다. 이른바, 4.4. 조의 한국어 기본 율격이 이루어진다. 3.3 조니 7.5 조니 하는 것들은 실상4.4 조의 변형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자유시는 4.4 조의 기본 율격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유를 누리는 시의 운율이다. 즉 자유시의 배경에는 4.4 조 가락이 느껴지고 있다. 격앙된 산문에서도 그것이 느껴진다.
-이상섭(문학비평 용어사전. )
이런 형식으로 한 장 씩 두 장이 이어지면 시조의 초, 중장이 형성된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조금씩 높아가는 느티나무 그림자며
후루룩 떠나고 싶은 저 억새의 달음박질
여기서 우리가 귀가 따갑도록 들은 자수율은 이제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인용한 시처럼 4.4 조가 기본 율 이라는 것 뿐 , 한 두 글자의 가감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래도 기본치의 대접을 받는 것이 우리말의 리듬이다.
이렇게 초, 중장이 완성되면 종장 처리를 해야 하는데 여기서 기승전결의 구조걱 매듭을 짓는 것이 종장이라고 하겠다.
초. 중장에서 반복적으로 이끌어온 리듬이 종장에 와서는 3,5 4 .3 이라고 하는 자수율을 기본 율로 하고 있다. 이를 백수 선생님은 옛날에 물레로 실을 뽑을 적에 물레를 돌리면서 고치를 길게 빼면 실패에 실이 감겼는데 그 고치를 어깨 위까지 한껏 빼고 난 후에 어깨를 번쩍 들어 올리면서 다시 고치를 빼던 것과 비교 하였다. 흐르는 물이 이내 흘러가다가 휘돌아지는 부분에 오면 물소리도 요란해 지고 구비치는 힘이 있듯이 말이다.
종장은 그렇게 3.5 라고 하는 꿈틀거림으로 결론을 지어 앉혔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불문율로 지금껏 내려온 것은 어떤 경우든 종장 첫 구 3 만큼은 숫자의 가감을 두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3 이라고 하는 숫자는 철저히 지켜 내려왔다. 대부분의 옛시조가 그렇게 지켜 내려왔다. 이런 지킴을 우리는 관습 미학의 초점으로 보면서 시조 구조의 구심점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것을 숫자로 표기해 보면
3,4,3,4
3.4.3.4.
3.5.4.3
이라는 그림이 나온다.
여기까지가 단시조의 기본 형식을 이루는 틀이며 옛 시조로부터 그렇게 이어 내려왔다.
우리나라에 시조가 있었고 전통문학으로 오늘까지 내려온 문학의 가치성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기본 형식으로 오늘의 시문학으로서 과연 아무 문제가 없는가. 지금도 여지껏 자랑 한 것처럼 단시조 형식으로 현대시의 의식을 맘껏 표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시조단의 공통된 문제 인식으로 떠 오른 것이며 필자 역시 그런 문제에 봉착하여 괴로운 날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중시조(中時調) 짓기
단시조가 갖춘 기본 3 장에서 초장이나 중장에서 어느 장이든 한 음절 내지 두 음절 정도가 벗어나는 형식이다. 그러나 벗어나기는 하되 어느 정도로 벗어났느냐 하는 문제는 학설에 따라서 분분하지만 계속 이야기 거리로 끌고 가는 사설 가락이 아니라면 하나의 구(句) 정도 길이로 약간 늘어난 형식을 말한다. 옛 시조의 두 작품을 보기로 하자.
藥山東臺(약산동대)여즈러진 바위 틈에 왜철쭉 같은 저 내 님이
내 길에 덜 밉거든 남인들 지내 보랴
새 많고 쥐 꼬인 동산에 오조 간 듯하여라
천세를 누리소서 만세를 누리소서
무쇠 기둥에 꽃 피어 얼음 열어 따들이도록 누리소서
그 밖에 억만세 외에 또 만세를 누리소서
위의 작품은 초장이 늘어난 것이고 아래 작품은 중장이 늘어난 경우다
여즈러진 바위 틈에 왜철쭉 같은 내 님아
해도 될 법인데 약산동대 라고 하는 한어절이 더 붙었다
아니면 바꾸어서
약산동대 여즈러진 왜 철쭉 같은 내 님아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바위 틈에
가 더 붙으므로 해서 낱말 하나가 더 붙었다
반면에 아래 글을 예를 보면
중장을 길게 썼는데 역시 마찬가지로 기본 율격인 초장처럼 쓸 수도 있지만 4 음보쯤 더 늘어나 있다.
이런 표현을 중시조 라고 하며 창법 표현으로는 엇시조 라고 한다.
보기글 보다 낱말 하나 쯤 더 늘어나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면 이런 중시조는 어느 경우에 왜 쓰게 되었을까.
나의 경험으로는 역시 신명 나는 붓 끝이 춤을 추고 북을 치는 조화로 밖에 볼 수가 없다.
시 창작은 신명이다. 신명이 없이는 좋은 시를 쓸 수가 없거니와 시조 창작은 더욱 그렇다. 어느 장르 보다 가락이라고 하는 음악적 율조를 몰아 말(言)타기를 해가는 특이한 표현법인 시조를 쓰다 보면 거미줄처럼 줄줄줄 말(詩語)을 이어가는 시상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어 중시조 내지는 사설시조가 탄생한 것으로 본다.
결국 그것은 3 장 6 구의 틀로는 시적 사상을 다 담기에 갑갑했던 것이며 사설 내지는 판소리 사설로 갈 수 있는 시조 형식의 확대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한 편 당시에는 연작 이라는 것이 없이 단시조를 쓰던 때였으며 3 장 6 구 라고 하는 짧은 형식 안에 시상을 모두 넣다 보니 그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것이었으며 그런 한계 즉 형식 이라는 틀 안에서 용출하는 가락을 멈추지 못했으니 중시조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말하거니와 중시조는 역시 멋스러운 가락의 소산이며 단시조의 기본 율을 이탈 하지마는 4,4 음보의 반복 리듬이라는 시조 기본 율의 연장선에 있다고 하겠다.
중시조를 쓸 경우 놓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것이 있다.
즉 초장을 늘였으면 다음에 오는 중장은 기본율 3.4.3.4 를 반드시 지키거나 가능하면 기본율 이하로 줄일 수 있으면 더욱 좋다. 그래야만 엇박자로 길게 늘여 준 장 하나의 말맛이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조는 앞 구와 뒷 구의 대칭에서 발생하는 가락의 충돌 내지는 어울림 이지만 결국은 장(章(장))과 장(章(장)) 끼리의 대칭으로 엮어지는 조응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초장에서 길게 늘여 주었다면 다음에 오는 중장은 아주 짧게 받쳐 주어야만 길게 늘여 준 초장의 가락이 더욱 살아날 수 있으며 다음에 오는 종장의 3.5.4.3 이라는 굽틀어 너머가는 가락을 더욱 뚜렷하게 살려 주므로 시조의 대미라고 하는 종장의 맛을 한껏 살릴 수 있다. 그렇지 못하고 중장 까지도 기본 율에서 이탈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면 어느 한 장을 늘여주는 맛도 심심하려니와 종장의 맛 또한 야멸차게 휘돌아 치지 못하고 빙그르르르 돌아가는 김 새는 시조가 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중장에서 길게 늘여 줬다면 초장이 또한 짧아야만 엇박자로 빼 주는 중장의 맛이 살아나고 뜻과 가락이 함께 결론지어지는 종장의 맛이 한껏 살아날 수 있다
시조 가락이란 맺었으면 풀어주고 감치면 헤쳐 나가면서 앞 구와 뒷 구의 조응 장과 장 끼리의 관계를 잘 엮어 내므로 해서 한 수의 시조가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성을 좇다가 보면 표현이 모자라게 되고 표현에 신경을 쓰다가 보면 뜻이 빠지는 경우가 왕왕 발생하는 것이 시조 쓰기의 고충인 것이다.
시조든 자유시든 처음 시를 쓰는 사람에게 판소리 사설을 읽으라고 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長時調(장시조)짓기
단시조를 기본으로 할 때 중시조 보다 더 길게 표현하는 방법을 장시조라고 한다.
장시조는 초장 중장, 종장이 모두 길게 표현하는 방법도 있고 또는 두 장만 기본 율보다 늘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중장이 길게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시가 그렇듯이 단시조는 그 뜻이 함축되어 있으면서도 상징성이 많지만 사설시조는 단시조 보다는 할 말을 다 풀어서 할 수 있기 때문에 산문화 되는 경우가 생긴다.
또한 장시조의 특징은 표현의 방법에 있어 풍자나 해학으로 비유하는 기법이 많이 도입되었다.
창법으로는 사설시조 라고 한다.
창(窓) 내고저 창을 내고저 이내 가슴에 창 내고저
고모장지 세(細) 살장지 가로다지 여다지에 암돌저귀 수돌저귀 크나 큰 장도리로 똑딱 박아
잇다감 하 답답할 제 여다져나 볼가 하노라
이 경우는 3 장이 모두 기본율을 파격하면서도 중장만 길게 늘여주고 있다.
소리 내서 읽어보면 그 가락의 기기묘묘한 느낌으로 일반 시에서는 감히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가락이 울려온다.
사람이 몇 生이나 닦아야 물이되며 몇 겁이나 轉化해야 금강에 물이 되나! 금강에 물이 되나!
샘도 강도 바다도 말고 옥류 水簾 眞珠潭 萬瀑洞 다 그만두고 구름비 눈과 서리 비로봉 새벽안개 풀끝에 이슬 되어 구슬구슬 맺혔다가 連珠八潭 함께 흘러
九龍淵 千尺絶崖에 한 번 굴러 보느냐
유명한 조운의 구룡폭포다. 흔히 장시조를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예문으로 제시 되는 작품이다.
초장은 흥을 못 이겨서 파격으로 길어졌다, 여기서 몇 음보가 길어졌다는 의미는 논리상 대단치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사설 이라는 리듬으로 장시조가 형성되는 것 자체가 초장도 좀 길게 빼 주게 되고 특히 중장은 할 말을 다 하는 본론의 위치가 된다. 대부분 지금껏 표현된 사설시조를 보면 거의가 다 중장이 길게 표현되고 있다.
산자여 일어서라, 때가 되었다 나를 따르라
나는 왕이로소리다, 남양의 푸른 갈기를 세우고 신명을 앞세우고 가자 북으로 산 자는 모두 나를 따르라
피곤한 구릉마다 코를 땅에 박고 살아있는 목숨을 깨워 가자 우리 긴긴 겨울 허전하고 배고팠던 북으로 가자 산야에 쓰러졌던 진달래며 개나리 철쭉을 깨워 앞세우고 깃발을 휘날리
며 고개고개 너머 가자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죽은 듯이 살아 있었다
이 경우는 초장과 종장은 기본 율을 지키고 중장만 길게 표현 되었다. 하지만 앞의 고시조에서 맛보았던 가락의 박자 소리가 시원치 않다.
산문이나 운문이나 대체로 한 편의 글은 起承轉結(기승전결) 이라는 순서에 따라 글 맥이 이어지고 있다. 시조 역시 그런 순서에 따라 표현되고 있으며 장시조 역시 그런 맥락에서 표현 되므로 초장에서 발단된 시상을 중장에서 이어 전하므로 어느 정도 작품의 모양새가 형성된 상태에서 종장으로 결구를 삼는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장시조라고 하여 무조건 얼마든지 길게 써도 되느냐 하는 문제를 논한다면 그 또한 문제점이 될 수가 있다. 나의 문학 스승이었던 서벌 시인은 장시조에 있어 중장도 두 개의 句(구)로 구성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장시조의 중장이 한없이 길게 표현해야 할 경우가 발생한다면 실제 작품에서는 흔하지 않지만 장시조 역시도 연작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초기 때 실험적으로 시도한 바 있다.
이야기가 이 쯤 되면 시조인이 쓸 수 있는 것이 창작 판소리 사설 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제창 하고 싶다. 이 문제는 다음에 별지에서 다루기로 하겠다.
느낌과 표현 문제
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처럼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하지만 시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의 그릇 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어느 것이나 마음이 움직이고 움직이는 마을에 따라 느낌을 새기게 된다. 그렇게 늘 새롭게 맞는 느낌의 상태는 환하게 밝아오는 등불이지만 아무 느낌을 갖지 못하고 막연하게 살아간다면 그 생활은 캄캄한 생활이요. 무의미한 생활이라고 하겠다.
그러면 그런 생활은 누가 가르쳐 주는 것인가, 다름 아닌 스스로가 열어 가는 것이다. 스스로 느낀 것이 속에서 삭아지고 있을 때 비로소 말이란 그릇을 통하여 밖으로 내 보내지는 일이 즉 시 창작의 기본이다.
그런 느낌의 끝없는 움직임은 시 창작의 끝없는 에너지로 폭발하게 된다. 산을 보거나 물을 보거나. 꽃가마를 보고나 꽃상여를 보거나 바람 소리를 듣거나 울음소리를 듣거나 모든 사물을 오관을 통하여 들어오는 느낌의 충동으로 우리는 감동을 받는다
움직이는 생각 솟아오르는 마음 상태가 감동으로 움직일 때에 시는 쓰여진다.
뜻하지 않은 일로 경악하거나. 울거나, 웃거나. 소리치는 일 따위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때에 악보를 통하여 음악으로 나타내고 화필을 통하여 그림으로 나타나고 말을 통하여 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초상집에 가서 함께 슬퍼하면서도 마음의 움직임에 대한 포충망을 잡고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양한 시가 나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시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밖으로 내 보일 수밖에 없는 절실한 심상일 때에 시가 나오는 것이지만 가다듬고 닦아두었다가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추려서 내 보여야 한다.
마음은 속뜻이다. 품고 있는 안의 바닥이므로 보이지 않는다. 바닥을 치고 용솟음치는 마음을 말이 끌고 간다. 어디로? 밖으로.
이미 시가 되고 있다.
때문에 시는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는 일이며 그도 아름답게 가다듬어서 훌륭하게 보여주는 일이다. 그렇게 절실한 것을 밖으로 표현하는 일이 시이기 때문에 시문은 읽는 이로 하여금 감동으로 나타난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서 그냥 밖으로 다 표현하면 좋은 시라고 할 수 없다. 최대한 간추리고 같은 느낌은 같은 것끼리 묶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시가 다른 장르 보다 짧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가 산문이 되지 못하고 운문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 근거한다.
여기서 또 하나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강동적인 운문 세계를 제대로 확보해서 독자를 얻으려면 남다른 바를 보여 주어야 한다. 남다른 말로 감동을 주지 못하면 그 글은 기억에서 이내 사라지고 만다
이미 남들이 이루어 놓은 세계를 그대로 다시 보여준다면 누가 감동을 하겠는가.
때문에 시를 일컬어 창조적 감동의 세계라고 한다.
그러한 세계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런 인식을 갖고 시 창작에 임하는 사람과 아무 감동을 주지 못하면서도 시적 물결에 두둥실 떠내려가고 있는 사람과의 차이는 사뭇 다르다.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
낮이면 세 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
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읋고 싶구나.
지난 봄 진달래와 올 봄에 피는 진달래가
지난 여름 꾀꼬리와 올 여름에 우는 꾀꼬리
그 얼마 다를까마는 새롭다고 않는가
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어떤 건가
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
냉이 꽃 한 잎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
-이병기<냉이꽃>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 슬었나
보리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 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 보네.
한 끼 건느기가 江(강)물보다 어렵던가
古國(고국)을 찾아온 겨례 몸둘 곳이 없단 말이
오늘도 밥 얻는 무리 속에서 새 얼굴이 보인다.
-이영도<麥嶺>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해 안 될 곳이 없는 아주 쉬운 시다. 그런데도 남다른 소리로 울려오는 감동으로 감탄이 절로 튀어 나온다.
누구나 무심하게 보아 넘길 길거리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냉이 꽃 한 포기에 목숨의 진귀한 뜻을 불어 넣고 새삼스럽게 바라보면 사람의 목숨이야 얼마나 더 존귀한 것인가. 그러므로 사람 중요한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토록 냉이 꽃 하나를 바라보는 눈에 한없는 사랑과 함께 목숨 뜻을 담고 바라 볼 수 있는 남다른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닌 예삿말로 써 놓아도 독자는 여지껏 격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받게 된다.
지난봄에 피었던 진달래나 지난봄에 울었던 꾀꼬리 역시 올 봄에도 다시 운다고 해서 되풀이만 되는 것이 아닌 늘 새로운 것이라는 것이다. 어제 기운 태양이 오늘 아침 또 떠 올랐다고 해서 그 태양을 어제의 그것으로만 본다면 새로운 창조는 없다. 하지만 태양은 날마다 새롭게 떠오르는 것이라고 느꼈을 때 시는 탄생하는 것이다
이영도의 보리 고개 역시 마찬가지다.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 보네 에서 얼마나 굶주리며 살고 있는가 하는 느낌이 가슴 저리게 울려온다.
이렇듯 남다른 표현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 시라고 하겠다. 없는 것을 얻되 감동을 주어야 한다니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가. 시를 쓰면 누구나 다 시인 이라고 한다지만 좋은 시를 쓴다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시조의 이미지.
우리는 지금까지 시조가 갖는 리듬, 즉 가락에 대하여 이야기 해왔다.
음악적 리듬을 이야기 하는 동안에도 이미지는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것을 따로 떼어서 이야기하기로 하자
모든 글이 갖고 있는 뜻은 하나의 형상을 말하는 것이다. 시에서는 이것을 心像 이라고 한다. 시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지은이의 내면세계를 보다 정확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미지가 뚜렷해야한다. 시조에 있어서 가락과 함께 반드시 갖추어야 할 일이 뜻 깊은 이미지라고 하겠다.
넓은 의미로는 감각적 경험을 통한 모든 형상을 말한다.
보고 느끼고 들은바 모든 경험적인 일들을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가 숙성된 후에 감각적으로 다시 되살려 내는 일을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살려내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하다.
넓은 뜻으로 보자면 모든 경험이 형상 아닌 것이 있겠는가. 때문에 시에 있어서 이미지 적용 범위는 보다 축소되어 좁혀져야 한다.
자,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좁혀진 뜻으로 보는 이미지는 비유와 아주 가까운 관계를 갖는다. 시의 표현 수단은 어떻게 보면 거의 비유법에서 온다
그러나 표현의 기법으로 흔히 장황한 설명, 즉 수사학에서 말하는 감동을 유발하지도 못하면서 장식을 늘어놓는 경우가 흔하다. 시에서는 당연히 떼어내야 할 산문적 요소면서 군더더기다.
하지만 이미지가 선명한 표현은 시의 본질에 충실하고 있기 때문에 떼어낼 수가 없다. 반드시 떼어 낼 수 가 없으면서 필요한 요소가 이미지다. 때문에 ,즉 설명 과 구분 되어야 하는 것도 이미지다.
거듭 말하지만 시의 특성은 간결한 데에 있다. 간결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을 표현해야 한다. 때문에 이미지의 수법은 더욱 요청되며 그런 이미지를 선명하게 나타내는 수단으로 비유법이 동원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시조에 있어서는 가락과 함께 중요한 것이 이미지다.
누가
이
깊은 어둠
플래시를 터뜨리나
걸어 잠근
문 안까지
속수무책 촬영된다.
내 눈물
훔쳐 온 죄도
꽃밭처럼
드러날라
-신필영의 번개-
가락도 잘 살아있고 이미지가 아주 선명한 단수다.
번개가 단순히 무섭다거나 하늘을 가른다거나 천둥소리를 동반하여 시끄럽다는 등의 수사는 전연 없다. 대신 번개는 이미 속속들이 촬영 되고 있다는 종장에 가서는 숨겨둔 마음속까지 촬영 된다는 선명한 이미지로 경험적인 것이 다시 감각을 통하여 달리 표현되고 있다.
이미지는 마음이 가지고 있던 경험, 형상, 사물, 구체적인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작용 되어야 한다. 여기서 지은이의 두려움은 번개 자체의 두려움이 아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는 은밀한 비밀까지 촬영 될 수 있는 마음의 상태(心傷) 라고 하겠다. 시조는 그렇게 초, 중장에서 전개된 사항을 종장에서 반전 시켜 결구를 맺는 것이 묘미라고 하겠다.
*참고문헌: 우리가락, 시조(한국 청소년 연맹 刊)
출처: 사단법인한국시조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문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