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치 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진정한 배우 ＜시＞ 윤정희

[김진철]

사람들은 윤정희를 전설적인 배우라고 부른다. 연기 생활 40여 년 동안 출연한 영화만 330여 편. 그 중 325편에서 주연을 맡아 25번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무엇보다 문희, 남정임과 함께 60년대를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로 장식한 한국 영화사의 살아있는 전설. 하지만 시를 통해 윤정희는 ‘전설적인 배우’라는 이름을 지닌, 과거의 추억으로만 기억되는 배우이기를 거부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에 귀 기울이며 시를 쓰고자 하는 영화 속 미자처럼, 윤정희 역시 세월의 흐름도 지우지 못할 아름다움으로 영화를 빛내고 있다. 그렇게 전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국내외의 뜨거운 관심을 받아온 이창동 감독이지만, 다섯 번째 작품 시는 캐스팅부터 큰 화제가 됐다. 한석규, 설경구, 문소리, 전도연, 송강호 등 한국 최고의 배우들과 작업해 온 이창동 감독이 60년대를 풍미했던 윤정희와 함께 작업을 한다는 소식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지금 이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인 이창동 감독과 한국 영화사의 한 획을 그은 대배우 윤정희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기대와 궁금증을 갖게 만들었다.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만무방을 끝으로 한동안 스크린에서 만나기 힘들었던 윤정희는 그렇게 16년 만에 다시 스크린 앞에 서게 됐다.

“그동안 여러 시나리오도 받았고 출연 제의도 있었지만 배우로서 저를 아끼고 싶었어요. 정말로 제 마음에 드는 좋은 작품을 기다렸어요. 그런 기다림의 보람이 시로 이어진 것 같아요.” 작품 활동을 쉬고 있으면서도 영화제 심사위원을 비롯해 다양한 활동으로 영화계에서 단 한 번도 발을 뗀 적이 없었던 윤정희가 16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으로 이창동 감독의 작품을 선택한 데에는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믿음이 결정적이었다. 문학 작품을 읽듯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이창동 감독의 전작들은 그녀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이창동 감독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시는 더 이상 출연에 대한 고민의 여지가 없는 작품이었다.

“이창동 감독이 원하는 연출 스타일이야말로 내가 찾는 그런 것이었어요. 둘 사이에 의견 차이가 하나도 없었죠. 후배 배우들로부터 이창동 감독의 작업 방식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건 이창동 감독만의 직업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서로 나이 차이는 많이 나지만, 처음부터 서로를 믿으며 마치 친구처럼 작업을 했어요. 촬영할 때의 진실성, 그리고 자기 작품을 끝까지 완성시키려는 태도가 너무 맘에 들었죠.”

“시의 주인공 미자는 한 마디로 윤정희 선생님과 같은 인물”이라고 밝힌 이창동 감독은 물론이고, “영화를 본 지인들이 미자와 내가 닮았다고 말한다”며 그녀 스스로도 인정하는 미자를 통해 윤정희는 지난 40여 년 동안의 연기 인생에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도전을 했다. 그것은 바로 만들어진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캐릭터로 표현해내는 것이었다. 들판에 핀 작은 꽃만 봐도 더 없는 행복을 느끼고, 길 위에 떨어진 살구를 보면서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생각하는 미자처럼, 침실 창가에 떠오른 달을 보는 것을 너무나 좋아하는 윤정희는 자신의 진솔한 모습 그대로 미자를 연기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하고 싶지만, 막상 시를 쓰기 위해 주의 깊게 바라본 세상은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에 고뇌하는 60대 여인의 이야기. 시가 제목처럼 한 편의 시와 같이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영화로 완성된 것은 전적으로 윤정희의 아름다움이 빚어낸 결과였다.

“미자는 외로운 인물이에요. 주위에 친구가 한 명도 없잖아요. 그 외로움 속에서 오직 손자에게 모든 걸 바치며 살아가고 있는데 우연히 어떤 사건이 터진 거죠. 그 슬픔을 어디에 하소연하겠어요. 샤워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신은 감정이 직접적으로 폭발하는 몇 안 되는 장면이에요. 그 장면을 촬영할 때는 정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죠. 이번 영화에서는 단 한 번도 눈물을 만들기 위해 안약을 넣지 않았을 정도였으니까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하지만 시가 전하는 먹먹함이 전작들과 또 다른 감정으로 다가온다면, 그것은 단지 이창동 감독이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창동 감독이 만들어낸 세상 속에서 미자를 연기한 윤정희. 그녀의 지나간 삶이 오버랩 되며 전해지는, 가슴을 깊게 파고드는 울림 때문일 것이다.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 시의 가치를 추구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외로운 미자처럼, 전설이라는 미명하에 과거의 배우로만 기억되고 있던 윤정희가 여전히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스크린에서 마음껏 연기하는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정적인 동요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저는 욕심쟁이에요. 자신에게 만족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더 발전하고 싶어요. 시에서의 연기가 만족스럽지 않다고 느낀 건 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희망적인 의미죠.” 4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오직 연기만을 위해 살아온 윤정희가 진정 위대한 배우인 이유는 여전히 앞을 향해 나아가고픈 소박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스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카메라 앞에서는 영화배우 윤정희지만, 스튜디오를 나오면 저는 그냥 평범한 손미자니까요. 배우가 뭐예요? 배우는 삶을 재현하는 거잖아요. 그 삶의 재현이 예술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중요하고요. 삶은 운이 따르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는 급하지 않고 소리 내지 않으면서 좋은 작품으로 계속해서 연기를 하고 싶어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배우 윤정희는 그렇게 다시금 자신의 아름다움을 스크린에 새겨 넣고 있다. 더 이상 그녀는 과거의 배우가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진정한 배우로 새롭게 그리고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사진_김재윤 실장(studio Z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