報恩
조 흥 제
한국수필 2021년 1월호에 이석규님이 쓴 ‘탓’을 읽다보니 가슴 아프다.
자유당 말기 면장으로 있던 필자의 아버지가 면장 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그때는 같은 성씨끼리의 대결이어서 필자의 아버지는 숫자가 많은 타성 후보를 이기지 못하고 낙선하여 빚만 잔뜩 졌다. 그때 마침 필자가 대학에 갈 고 3이었는데 서울대학 시험을 보러 갈 수가 없었다. 같이 공부하던 학우는 서울대 3위로 입학하였으니 그는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그때 서울대학교는 입학금만이 아니라 등록금도 보통이 아니었다는 글을 읽었었다.
박근혜 정부 때 프레스센터에서 국민행동본부에서 주관하는 모임에 갔었다. 고마운 미군의 도움으로 서울대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중앙관서에서 정년퇴직했다는 사람이 나와서 그 사연을 책으로 만들었다고 한권씩 가져가라고 했다.
그는 6.25 사변이 일어나던 해에 오산에서 살았는데 서울대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입학금을 마련할 수 없어 형이 하던 방앗간의 발동기를 팔아 입학금을 댔다. 하지만 중간 등록금을 댈 수 없어 오산비행장에 하우스보이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하여 취직이 되었다. 미군 숙소에서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해 주는 일이었다. 그 다음 모집할 때도 응모했는데 경쟁이 심하여 떨어졌다. 실망하여 고개를 푹 숙이고 돌아서는데 중위 게급장을 단 미군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사실 얘기를 하니 학교와 소속과를 알려 달라고 했다. 며칠 후 학과장에게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궁금증을 안고 갔더니 미군이 등록금을 입금해 주었다면서 찾아가 인사하라고 했다. 학교와 학과를 대 달라던 그 미군이었다. 그는 얼마 안 있다 일본으로 발령받아 가면서 자기 부대 장병들에게 그 학생의 학비를 계속 대 주라는 부탁을 하고 갔다. 장병들은 월급에서 조금씩 떼어서 학비를 마련해 주어 무사히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정부종합청사 공무원으로 취직되어 무사히 임기를 마치고 정년퇴직했다. 그는 고마운 미군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알 수가 없었다. 조선일보에 그 사연을 적어 찾고자 한다고 했더니 독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 딸이 미국에 사는데 그 사람과 같은 모임체 회원이라고 하면서 그 미군의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전화하니 모른다고 했다. 그래서 그때 같이 찍은 사진을 동봉해 보냈더니 알아 보았다. 그는 한달음에 미국으로 달려갔다. 그 미국인은 마을 로타리클럽 회장이었다. 회원들을 모아 놓고 그 사람을 인사시켰다.
어려울 때 남의 도움을 받고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것이 세상인심 이다. 그래서 명심보감에 ‘남에게 도움를 받은 것은 잊지 말고, 남을 도와준 것은 잊어라.’는 구절이 있다. 위의 두 사람은 명심보감 내용을 모르지만 마음 속 깊이 있는 진리를 실천한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때 한국인의 도움을 받고 살아난 미군이 있다. 낙동강 전투가 한창일 때 구미 농촌에서 저녁을 먹고 바깥마당 가에 나온 농부가 풀숲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개똥벌레를 보면서 언제나 수복이 되어 자유스럽게 살까를 생각하는데 발밑에 뭐가 툭 떨어졌다. 주워 보니 돌이었다. 날아온 풀을 헤쳐보니 사람이 엎디어 있었다. 방에 데려와 보니 미군이었다. 허벅지에 총상을 입어 고름이 잔뜩 들었다. 주인은 더러운 옷을 깨끗한 옷으로 바꿔 입히고 화로에 부젓가락을 빨갛게 달구어 가지고 달려들었다. 미군은 손사래를 치면서 반항했다.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던 가 보다. 주인은 눈을 부라렸다. 그렇게 안 하면 죽는다는 암시가 들어 있었다. 미군은 될대로 되라는 듯 다리를 내 주고 눈을 꼭 감았다. 주인은 달구어진 부젓가락으로 상처를 푹찌르니 미군은 잡는 소리를 쳤다. 그렇게 하고 두 손으로 사정없이 눌러 고름을 짰더니 한 사발이 나왔다. 대개 농촌에는 상약이라는 게 있다. 상처가 아무는 풀을 갈아 상처에 붙이고 싸맸다. 매일 그렇게 했더니 한 달이 지나자 미군은 어기적어기적 걷게 되었다. 미군이 뒷곁에 갔더니 미군 비행기가 머리 위로 날아 갔다. 무전기가 있어 비행기에게 약품을 보내 달라는 연락을 했다. 이튿날 비행기에서 그 마을에 뭐를 떨어뜨려 주었다. 그것이 인민군에게 들어가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미군이 잡히면 숨겨준 사람까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주인도 큰일 났다. 주인은 미군에게 화장실 똥통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그때의 화장실은 깊이 파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매화틀을 놓고 그 위에 앉아서 일을 보던 구조였다. 미군은 못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을 주인은 또 눈을 부라렸다. 그렇게 안 하면 다 죽는다는 암시가 들어 있었다. 미군은 할수 없이 똥통에 들어가 벽에 착 붙어서 머리만 내놓고 있었다. 인민군은 화장실 문을 열어보고 냄새가 지독하여 그 속은 들여다보지 않고 갔다. 며칠 후 수복이 되었다. 미군은 쪽지를 써 주면서 군부대에 갖다 주라고 했다. 그렇게 했더니 미군 찦차가 왔다. 차에서 내린 미군들은 부상병을 얼싸안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었다. 그러더니 부상병도 훌쩍 그 차를 타고 갔다. 주인은 허망했다. 죽을 사람을 살려 주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숨겨 주었는데 갈 때는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없으니 얼마나 서운했겠는가.
얼마 후 그 미군 부상병이 찦차를 타고 왔다. 어깨에는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는 고급 장교였다. 그는 통역관을 대동하고 와서 미국 자기 집 옆에 살 집을 마련해 놓았으니 미국 가서 같이 살자고 했다. 본인은 가고싶지 않았지만 가족과 친지, 동네 사람들은 가라고 했다. 미국 가서 그 아들들이 잘되어 가끔 고향에 왔다. 이 이야기는 직장에 같이 근무했던 사람의 마을에서 일어났던 실화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남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없었던가? 도움을 준 적은 없었던가.
도움을 준 것은 기억되지 않고 받은 것은 많다고 생각된다. 못난 사람이 사회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평생 하고 싶었던 글 쓰는 꽃동산에 들어오게 된 것은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준 가족과 친지, 이웃과 동료, 선배들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크게 도움을 받았던 것이. 그것은 사촌 형에게서다.
오래 전 숙모께서 돌아가셨을 때 선산에 모셨는데 기왕이면 할아버지와 우리 부모의 묘도 같이 석물로 하자고 했다. 숙모 장례를 치르고 남은 돈으로 할아버지 산소 앞에는 큰 비석을 세우자고 했다. 하지만 내가 할 일인데 사촌형께 부담을 지워 기분이 얹잖았다. 그 후 형은 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니 영영 그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어찌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