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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소도문헌: 소도구역의 등장은 歷史現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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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소도문헌: 소도구역의 등장은 歷史現狀이다 - 세번째 '48시간체제'가 경과중이기에 소도측의 비밀 즉 하늘의 뜻을 전격 공개합니다 - 고려대 강사 백동현
소도구역의 등장은 歷史現.. [2015. 5주년을 맞아 재차 내보낸 자료본] 조회0 추천0 1. 서론
우리측이 자료를 내보내면서 종종 소도구역측이 '하늘의 뜻'으로 형성되었다 표방했는데, 이에 대해 오해들이 많을 듯하고 말들 또한 많으리라 보기에, 그간 미루어왔던 '하늘의 뜻'으로 표방했던 내용을 공개합니다.
더불어 우리측이 소도측의 비밀을 공개하기로 결심한 데는 지난 2010.12.30.에 시작된 소도구역에 대한 '잠정폐쇄 48시간'경과로 인하여 소도구역측 이행담화 그 일곱번째 4항의 '간주조항'이 신년 1.1. 자정에 발효되기 시작하였고, 1.3. 오늘이 세번째 '48시간체제'이기에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이 되었기에 공개에 나서게 되었음을 밝혀 둡니다.
참고로 본인은 본래 10대에는 기독교신앙을 갖고 있다 20대에는 서구사회과학을 하면서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을 갖고 있었음을 밝혀 둡니다. 20대 시기에는 서구사회과학적 전통 뿐 아니라 동양의 사회과학적 전통 즉 모택동사상과 김일성사상등에도 꽤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일정하게 사회운동에도 종사했던 바 'NL'계열로 분류되었음을 더불어 밝혀 드립니다.
대략 30대에 들어서서는 동양의 심성론등에 대해 깊이 침잠했던 바 있으며, 36-37무렵에 서구사회과학적 사유의 한계를 절감하던 시기 '단군'에 주목하고 그 무렵 '하늘사상'에 접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물이 2010년 1월초 무렵 '재세이화론에 대한 재검토'라는 글로 외화되었고, 이는 신라말 대학자였던 고운 최치원의 글에 힘입어 '재세이화론'을 표방한 것이다.이는 물론 추후 좀 더 검증절차를 거쳐야 하는 문제이기는 하나 본인은 '재세이화론'이 맞다는 입장입니다.
왜 서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우리측 얘기를 지나는 에피소드로 듣고 지나칠 인물들이 많으리라 보기에, 또 무슨 '신비주의자'는 전혀 아님을 밝혀 두기 위함입니다.
2. 소도구역 창설 전후의 상황과 특이한 몇가지 선몽들
본인이 '소도구역' 선포를 하게 된 것은 매우 필연적이며 우연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본인의 저서 <<대한제국기 민족담론과 국가구상>> 서두에서도 역사란 '필연과 우연이 조우하여 만들어낸 산물'로 평가한 바 있는데, 소도*역의 창설과정 또한 그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일련의 일들의 전개의 산물인 것입니다.
본래 '소도론' 자체는 민족대표자회의체론을 집필하던 2009년 12.12.-13. 무렵에 '민족대표자회의체론'의 일 구성부분으로 구상했던 생각입니다. 또한 민족대표자회의체의 진행을 2010년 3.1절 무렵 진행하고자 희망하여 대외에 자료를 서너차례 배포했었던 바,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 중단되었고, 2010년 상반기 내내 '통일기금의 보전조치'와 병행하여 투서문제로 야기한 모친의 인명피해등 집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통을 주로 하였습니다.
2010년 여름(7월)에는 친일재산조사위가 4년의 업무를 종료함에 따라, '통일기금의 보전'조치를 위해 본격적으로 소통에 나서던 시기였고, 그에 따라 천암함사건 이후 야기된 남북긴장상태도 심상치 않다고 파악하여 이를 '평화의 투어'로 명명하여 한달여간 전국 거리서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 8월 무렵 서프라이즈에서 소통을 시작하게 된 배경은 '투서문제'의 매듭이 '통일기금의 보전조치'등 전반에 관건이라 보았기에, 해당 사안에 대해 알만한 인물들이 있는 곳이기에 소통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후 9월 중순경부터는 소통의 주무대를 '서프라이즈 국제방'에서 진행하게 된 것입니다.
서프에서 소통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던 8월 말경 우리측에 대해 '미국간첩'으로 음해하던 인물들이 있었고. 이에 대해 매우 특이한 동향으로 파악하고는 마침 천정배등 투서범죄사건에 대한 '고소건'에 대해 항고절차가 들어가 있었던 바 이에 대해 본격대응하지 않고는 '소통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쉽지않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때마침 '2005년 5월사건'부분의 일기자료를 검찰측에 제출한 바도 있던 입장이기에 이에 대해 검찰측에 자료를 제출한 것이 9월말이었고, 10월 중순 무렵 지속적인 음해비방에 대해 근원적으로 해결하고자 위의 '2005년 5월사건'을 전격공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측이 위의 자료 공개에 나서던 10월 중순경에도 이 자료가 공개되면 다소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될 것으로 예상은 했으나 하두 음해가 지속적이고 심각하기에 전면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측이 '2005년 5월 자료'를 공개하던 전후에도 서프 국제방에서의 '특이동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음의 사항들입니다. 첫째, 서프 국제방이 지나친 친북성향이고 매우 위험한 담론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그러한 '극렬한 민족주의자'들임에도 유독 우리측 자료 즉 '2005년 5월 자료'와 '통일기금 보전조치 서명자료' 및 '천정배관련자료'에 대한 극심한 삭제행위가 지속되었다는 점입니다. 세째는 위의 두 사안을 겪으며 처음으로 천정배측과 사방사측이 연관이 있는 세력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낳게 되었고, 안그래도 '사방사측의 <<두개의 전쟁>> 12부>에 대해 매우 의아한 눈길을 보내던 상황에서 비로소 천정배측이 '미-유대자본과 관련이 있는 인물'로 바라보았던게 바로 10월말 11월초의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방사측은 미국측의 움직임의 일면'을 보여주는 인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11월 들어설 무렵 결국 천정배측과 '투서문제'를 매듭짓기 위해서는 '미국'측의 의사가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투서사안과 '민족대표자회의 창준위' 재개를 연결하고자 했던 시점이 바로 10월말 11월초였습니다.
그렇게 11월초에 접어들었는데, 그때 바로 '1차 선몽'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1) 1차 선몽과 그 우연성에 대해 11월 1일 밤 즉 11월 2일 새벽이었다고 기억되는 바, 갑작스럽게 꿈에 주위가 소란하더니(누군가 시끌시끌하더니) 선명한 숫자 여섯개가 눈에 보이더군요. 그 숫자는 다름아닌 '2, 6, 7, 11,12'라는 글자가 연달아 눈에 스치고 지나가더군요. 그 꿈을 꿀 때 누군가가 귀에 대고 뭐라 속삭이던 어수선한 상황에 이어 숫자들이 눈에 보이기에 특이하여 잠을 깨어 '숫자'를 되새겨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지요. 아마 그 때 숫자 여섯개이기에 '무슨 로또를 사라는 말이야 뭐야'라고도 잠깐 생각해 보았으나 당시 천정배측과 집안문제에 대해 뭐라 하는 중이었기에 집안문제의 해결이 11월 2-12일 사이에 종료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는 '2005년 5월문제'를 두고 유관관계자측(당시는 미,북,한,일 4개국)과 소통하려던 것을 바로 11월 2일무렵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산물이 다름아닌 11월 4일자로 내보냈던 '국제방 난동자들을 포함한 유관관계자를 위한 화두 3편'(11.4.)로 처음 '유관관계자측과의 소통에 나선 순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당시에도 제목이 그렇게 나간 것은 국제방의 난동사태와 유관관계자가 밀접한 상관이 있다고 보았기에, 자료의 제목이 '국제방의 난동자를 포함한 유관관계자를 위한 화두'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11월 7일에 '5일의 말미'를 두고 검증조치를 요구하던 순간 11월 8일(한국 시각으로는 11월 9일) '의문의 LA앞바다 미사일발사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11월 7일의 '검증조치 요구'는 11월 12일 오후 4시엔가 성명을 발표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놀라운 점은 본인은 본래 'G20행사'가 11월 10-12일이었던 것조차 이 '검증조치'를 요구했던 11월 7일까지도 몰랐다는 점입니다. 다만 11월 언젠가 열린다고만 알았지, 당시 워낙 '집안문제'에 침잠하느라 '세상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게 정답일 것입니다. 11월 7일 검증조치를 요구해놓고, 모 언론사 대표님과 통화 도중에 'G20행사도 있는데 그런 일을 벌이면 어떻하냐'는 말을 듣고 '그건 그거고 집안문제는 집안문제다'라고 대답하면서 물어보니 마침 '11월 10-12일이 G20행사기간이라'는 말을 듣고는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11월 4일 최종 화두 3편'에서 물었던 게 바로 '2005년 5월의 유보된 조치들을 하실 것인지 민족대표자회의 창준위의 재개를 허용할 것인지'를 물었던 까닭입니다. 당시와 관련하여 우리측이 '무슨 **세력도 아니고 일부러 날짜를 맞추어서 움직인게 아니라 실은 집안문제가 그때 해결되는가보다' 생각하여 험한 말을 유관관계자측에 물었던 게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이를 왜 굳이 밝히는가 하면 아마도 지금까지도 '당시의 상황'을 두고 모측들이 무슨 오해들을 하고 계실까 하여 오해들을 하시지 말라는 말을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하기에 제가 역사를 '필연과 우연'으로 얘기하며, 위의 사태의 전개를 '하늘의 뜻'으로 보는 이유인 것입니다.
어쨋든 당시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저도 그 시기의 절묘함등 '어리둥절'했던 입장이고, 게다가 'LA앞바다 미사일 사건'이 무슨 사단을 낳을까 염려하던 입장에서, 11월 20일 무렵 '소도*역 선포'를 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입장이었습니다.
2) 11월 20일의 선몽과 '소도*역' 선포 11월 20일 무렵 왜 날짜를 그렇게 잡았는지는 시일도 많이 지나 정확한 기억은 없는데, 위의 'LA앞바다 미사일발사 사건'도 있고 하여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는 점을 방치할 수 없어 '소도*역 선포'를 결심하고 있었는데, 11월 19일 밤에도 또다시 두번째 '특이한 선몽'을 하게 됩니다.
꿈에 바닷가를 거닐며 산책하던 장면인데, 갑자기 어두웠던 '바닷물'이 빨갛게 물들더니, '일출 창면'이 발생하더군요. 일출구경을 하신 분들은 아시듯이 해가 조금 올라오고는 다시 바닷물과 떨어지면 '탁 튀어오르듯이 일출'하는 바로 그 장면을 꿈에서 선몽한 것이지요.
꿈에 놀라서 깨어 11월 20일자 새벽으로 바로 준비하던 자료를 올려서 '소도*역'을 선포하게 된 것이고, 소도*역으로 '민족대표자회의 창준위'와 한반도에 새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갖게 해 준 선몽입니다.
그 이후의 사태의 전개는 예상과는 달리 혼미양상을 보이기에 우리측도 '분명 하늘의 뜻이 분명한데 왜 이러나' 약간의 의아함은 있지만 하늘의 선몽으로 소도*역 선포가 이루어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본다는 말이지요.
3) 11월 27일 항모 조지와싱턴호의 등장과 거북선 꿈 선몽 11월 20일 '소도*역'선포는 한반도 긴장고조로 이어졌고, 그 결과물이 '조지와싱턴호'의 등장으로 봅니다. 물론 애초 예정되었던 것이었는지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우리측 입장에서는 '그렇게 본다'는 말이지요. 11월 28일 조지와싱턴호의 훈련 참가를 하루 앞두고 전날밤에 '바다위에 거북선들이 서너척 왔다갔다 분주함'을 보고는 '아, 이번의 사태는 넘어가겠구나!'하고 결론을 내리고는 관련자료를 서프라이즈 국제방을 통해서도 잠깐 공개는 했는데, 자료들이 모두 삭제되고 '민족대표자회의 창준위'와 '한민족 민족회의'에는 그 날짜 자료들이 좀 남아 있습니다.
4) 12월 2일의 특이한 꿈과 또다른 우연의 일치(미일연합훈련) 본래 11월말까지 모친의 사망과 투서문제등 집안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던 바라, 집안문제를 중심으로 소통하면서 12월에 접어들 무렵 또다시 특이한 선몽을 하게 됩니다.
12월 2일에 꿈에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던 꿈이었는데, 수학식이 대단히 복잡하고 또 그런 걸 다 잊어먹은 입장이라 끙끙대던 상황인데, "갑작스럽게 수식들이 저절로 정리되더니 '-1'이라는 답이 저절로 떨어지더군요". 듣기에 따라 대단히 우스운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이에 대해서도 또다시 '아! 집안문제가 이번에는 풀리는 구나!' 생각하여, 재차 유관관계자측들 상대로 하여 그간 진행해왔던 '이행담화 6'에서 '집안문제의 해결을 위한 우려사항 해소'를 핵심내용으로 하여 담화문을 재차 발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이행담화 6'에서도 또다시 '2005년 5월 유보되었던 조치'를 언급하며 대단히 '센글'을 내보낸 배경은 다름아닌 이번에는 '틀림없이 집안문제가 해결되나보다'고 생각하였기에, 강하게 내보낸 것입니다.(참고로 이행담화 그 1인가는 다름아닌 '거북선 담화'이고, 그 5인가에서 12월 3일을 시한으로 하여 천정배측에 집안문제를 정리하라고 요청해 놓았던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행담화 6은 '3일의 말미'를 갖고 발했던 것이고, 이번에도 '집안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의아하게 생각하던 차, 12월 9일엔가 우연히 자료검색하다 '이행담화 6을 발하던 시점이 바로 미일연합훈련이 이루어지던 시점인 12월 3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이번에도 절묘한 우연과 필연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고, 하늘의 뜻이 참 교묘한 것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본인이 무슨 맨날 '꿈이나 꾸며' 사는 사람으로 오해들을 하실텐데, 그러지는 않고 한달 한 두번 꿀까 말까합니다.
5) 2011년 연초의 꿈문제 새해 들어 어젯밤에 특이한 꿈을 꾸었고, 연초라서 그 '꿈풀이'는 이미 간단하게 내보냈으니 참조들 하기 바랍니다.
대단히 염려스럽게도 연초의 꿈에 '무리죽음'을 암시하는 '생기를 잃은 동네 600-700명의 마을 주민들'을 목격한 꿈은 대단히 예의주시해 봅니다.
현재 소도*역측이 12.30.으로 '48시간 잠정폐쇄조치'에 이어 연달아 '48시간체제'로 세번째 시기에 접어들었으니, 유관관계자측들은 깊이 생각들 해보시기 바랍니다.
3. 맺으며 '소도*역측의 비밀'이라 거창하게 말은 했으나 사실 '필연과 우연의 절묘한 교차'외에는 아니고, 그 중에 의미있는 꿈은 일출장면과 거북선 꿈, 그리고 어젯밤의 '생기를 잃은 주민들'이라 봅니다. 그러나 이미 본인에 대해 2007년 6월 치루수술 와중에 '살인멸구기도행각'까지 발생했던 입장이라, '소도*역 선포' 관련한 특이한 현상을 미리 공개하는 것은 또다른 공격이나 야기할 듯하여 잠시 미뤄왔던 것이고, 현재 '한반도 주변정세'가 매우 혼돈스런 상황이라, 유관관계자측들에게 '하늘의 뜻'이 분명히 있으니, 이제라도 '대화를 통한 해법 모색'을 촉구하자는 의미에서 개인의 사소한 일들이지만 정리하여 내보내는 바입니다. 이것으로 '세번째 48시간을 맞이한 소도측 마지막 입장이자 메시지'를 대신합니다. 2011.1.3. 소도*역 관리자측, 한민족 민족회의(http://cafe.daum.net/KNC) 집행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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