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묘 → 남양 성모성지 → 어농성지 → 단내성지
40.6Km 78Km 8.8Km
10. 남양 성모성지
성모님의 품처럼 아늑한 남양 성지는 초대 교회 교우촌이자 처형지이며
우리 나라 유일의 성모 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서면 모세가 홍해를 건널 때 바닷길이 열렸듯이
매일 썰물 때면 육지까지 바다가 열려 길이 생기는
제부도의 신비스런 광경을 함께 감상할 수도 있어 더욱 좋다.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남양리에 위치한 남양 성모 성지는
서울에서 1시간 30분, 수원에서 3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남양 지역은 지리적으로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의 위치를 갖고 있고
중국과의 연락이 용이하기 때문에 조선 시대에
많은 교인들이 찾아 들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 백학, 활초 등 많은 교우촌이 인근에 형성돼 있었다.
옹기를 구워 팔던 백학 교우촌에서는
지금도 가마터와 그릇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 교우촌은 왕림과 큰 들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고
안양 수리산, 양지 골배마실, 안성 미리내, 진천 배티, 아산 걸매리 등과
걸어서 하루 거리에 위치해 박해 당시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남양에서 버스를 내리면 길 건너편에
'로사리오교'라는 자그마한 다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 다리를 건너면 '순교 남양 성지'라는 글자가 새겨진 맷돌이 하나 서 있고
여기가 바로 남양 성지에 들어서는 입구이다.
앞쪽에 널찍한 주차장이 마련된 성지에는 곳곳에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데
특히 구불구불하게 키가 커 올라간 소나무들이 볼 만하다.
소나무들 밑둥지에 정성스럽게 감아 놓은 새끼줄들은
성지에 담긴 후손들의 정성을 보여 주는 듯해서 흐뭇한 감을 준다.
성지를 들어서는 순례자는 마치 성모님의 품에 안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성지의 양편과 뒤쪽으로 구릉처럼 나즈막한 동산들이
성지를 감싸 안 듯이 둘러싸고 있고
그 안으로 성지가 들어앉아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둔덕을 지나가면 눈에 확 들어오는
'로사리오 성모님의 동산'은 남양 성지의 자랑이다.
원형으로 펼쳐진 성지 전체가 하나의 묵주로 꾸며져 있는데
대형 십자 고상과 성모상을 비롯해 어른 둘이 팔을 펼쳐야 겨우 안을 수 있는
커다란 돌들로 묵주알을 만들어 놓았다.
남양 성지는 성모 성지이다.
원래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무명의 신앙 선조들이 순교한
순교 성지인 남양 성지는 91년 10월 7일 정식으로 성모님께 봉헌됨으로써
한국 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마리아 순례 성지로 선포됐다.
성모 성지란 교회가 공식적으로 성모 성지로 선포한 곳을 의미한다.
현재 전 세계에 1천 7백 29곳이 있는데
그중 성모가 발현한 곳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인도네시아에 각각 두 곳,
중국과 말레이시아에 각각 한 곳이 있고,
베트남에는 네 곳, 필리핀과 인도에는 여섯 곳이 각각 있다.
남양 성지는 성모 성지로 선포된 후 지속적인 기도 운동을 벌이고 있다.
묵주 기도 고리 운동은 현재 수만 명이 넘는 회원들이
매일 자신이 약속한 시간에 15분간 5단을 바침으로써
24시간 내내 묵주 기도가 이어지게 하고 있다.
또 1년에 두 차례씩 실시되는 피크로스(PICROS) 운동은
며칠 동안 도보 성지 순례를 하면서 끊임없이 묵주의 기도를 함으로써
희생과 고통을 봉헌하는 것이다.
그 외에도 낙태죄를 속죄하기 위한 기도 모임을 매주 토요일마다 마련하고 있다.
■ 순교자
◆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1812~1868년)
김 필립보는 충청도 면천 중방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들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부친의 반대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훗날 그의 부친이 마음을 돌려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게 되면서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영세하게 되었다.
장성한 뒤 박 마리아와 혼인한 필립보는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본분을 잘 지키게 하였으며, 다른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는 이후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필립보는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수원 걸매(현 충청남도 아산시 걸매리)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에 의해 다시 회장으로 임명된 필립보는
한결같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필립보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충청도 신창 남방재로 피신하여 살았다.
1868년에 다시 박해가 성하게 되자, 필립보는 홍주 신리에 살던
사위의 집으로 피신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남양에서 파견된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남양으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의 아내 박 마리아는 필립보와 포졸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고 하면서 자원하여 따라나섰다.
이들 부부는 남양 옥에 한 달 정도 갇혀 있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고 교회 일은 하나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68년 8월 3일 부부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들 부부는 동갑으로 57세였다.
◆ 정 필립보 (? ~ 1867)
경기도 용인의 덧옥돌에서 살았는데,
1866년 11월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붙잡혀 가혹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해 1867년 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 김홍서 토마(1830 ~ 1868)
수원 걸매리 사람으로 1868년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아내와 함께 붙잡혀 남양으로 끌려왔다.
아내는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김홍서 토마는 끝내 배교치 않고
김 필립보 부부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배교한 아내는 김홍서 토마가 순교하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순교자 김홍서 토마의 나이는 38 세였다.
남양 성지 순례를 모두 마치면 제부도로 가서
바닷길이 열리는 장관을 목격할 수도 있다.
남양면에서 사강 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20분 정도의 시간으로 제부도에 도착할 수 있다.
제부도에 갈 때에는 사전 지식이 조금 필요하다.
하루에 두 번 썰물과 밀물이 반복되는데
썰물 때에만 제부도로 들어갈 수 있다.
제부도 서편에 있는 2.5킬로미터의 모래밭과
그 뒤의 미루나무 숲이 볼 만하다.
특히 썰물 때마다 6시간씩 계속해서 열리는 바닷길은
자연의 신비를 통해 하느님의 웅장함을 보여 준다.
썰물 시간이 맞지 않을 때에는 인근 대부도를 찾아갈 수도 있다.
피서철이면 이곳들을 찾는 인파가 많아 교통 체증이 심하기 때문에
미리 적절한 시간을 고려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11. 어농성지
어농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순교한 정은 바오로(鄭? , 1804-1866년)의 묘가 모셔진
단내 성지와도 지름길을 통하면 채 6km 남짓의 거리밖에 안 되므로
두 성지를 한데 묶어 순례하는 코스가 괜찮을 듯하다.
윤유일 바오로를 포함한 파평 윤씨 온 가족이 박해의 서슬 아래 희생된 후
200여 년 동안 그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족보도 없고,
또 교회 안에서는 그 후손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1987년에 이르러서야 후손 중 하나인 윤필용 씨가 나타났고
그의 증언에 의해 이곳 선산 안에서 윤유일 바오로의 부친 윤장과
그의 동생 윤유오 야고보(尹有五, ?-1801년)의 묘를 확인했다.
이에 따라 윤유일과 그의 숙부 윤현 · 윤관수, 사촌 누이동생인
윤점혜 아가타(尹点惠, ?-1801년)와 윤운혜 루치아(尹雲惠, ?-1801년)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외국인 사제인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와
그의 입국과 사목을 돕다 순교한 지황 사바(池璜, 1767-1795년),
최인길 마티아(崔仁吉, 1765-1795년), 강완숙 골룸바(姜完淑, 1761-1801년) 등의
의묘(擬墓)를 만들었고, 1987년 6월 28일 수원 교구장
고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성역화했다.
한국 교회사 안에서 순교자 윤유일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그가 바로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성직자를 영입해
명실 공히 교회의 모습을 갖추는 데 기여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윤유일은 1779년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를 주도한
권철신 암브로시오(權哲身, 1736~1801년)의 제자였다.
이승훈(李承薰, 1756-1801년)이 북경에 들어가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1784년 한국 교회가 창설됐으나 교리에 대한 이해가 미흡했다.
그래서 성직자가 없었던 당시, 평신도가 성사 집행과 미사 봉헌을 할 수 있는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우상 숭배는 아닌가 하는 의문들이 제기되었다.
스스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던 이승훈, 권일신 등 교회 지도자들은
1789년 10월 예비자였던 윤유일을 북경의 북당(北堂) 천주교회로 파견,
북경 교구장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에게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청했다.
윤유일은 북경에 머무는 동안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견진성사까지 받고 돌아왔다.
평신도의 성무 집행은 안 된다는 회답을 구베아 주교에게 받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은
1790년 9월 재차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해 성사를 집전할 신부를
보내 달라는 간청을 했고 그에 대한 약속을 받았다.
1791년 신해박해의 회오리가 어느 정도 잦아든 1794년 말 윤유일은
지황과 함께 북경으로 길을 떠나 그해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밤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서울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목자가 없던 한국 교회에 첫 사제로 발을 디딘 주문모 신부는
서울 북촌(北村 : 지금의 계동) 최인길의 집에 머물렀고,
처음 몇 개월 동안은 아무 어려움 없이 성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한 밀고자에 의해 그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교우들의 재빠른 처신으로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했고,
최인길은 시간을 벌기 위해 자신이 신부로 위장하고 포졸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위장이 밝혀지고 주문모 신부의 입국 경위가 밝혀지면서
그의 입국을 도운 윤유일 · 지황 · 최인길 세 사람은 모두 체포되었다.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은 그들은
주문모 신부의 행방을 발설하지 않았고, 끝까지 굳은 신앙을 고백하였다.
결국 박해자들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한 후 비밀리에 그 시신을
살곶이다리(현 한양대학교 동쪽) 부근의 강물에 던져버렸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윤유일의 나이는 35세, 최인길은 30세, 지황은 28세였다.
이처럼 사제가 없어 미사를 봉헌할 수 없었던 불완전한 한국 교회에
신부를 처음으로 모셔와 완전한 교회로 만들었던 윤유일과 지황
그리고 최인길은 교회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한편 윤유일의 아버지 윤장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양근에서 체포되어
신안 앞바다의 먼 섬인 임자도(荏子島)로,
그의 숙부인 윤현은 강진으로 유배되었고,
또 다른 숙부인 윤관수 안드레아와 동생 윤유오는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윤유일의 사촌 누이동생이자 동정녀로 살았던 윤점혜는 양근에서,
윤운혜는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윤운혜의 남편인 정광수 바르나바(鄭光受, ?-1802년) 역시 이듬해 참수되었다.
이처럼 윤유일과 그 일가족이 모두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했고
그중에서 윤유일 · 윤유오 · 윤점혜 · 윤운혜 · 정광수는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시성이 추진되고 있다.
1987년 고 김남수 주교에 의해 축복된 어농 성지는
윤유일 일가 묘소를 중심으로 성지를 개발해
1999년 순교자 묘역 예수상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웠고,
2002년에는 사제관과 성당(강당)을 마련했다.
그 해 8월 13일 최덕기 주교에 의해
‘을묘 · 신유박해 순교자 현양성지’로 선포된 어농 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다가 치명한 을묘박해 3위 순교자와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6년 동안 조선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순교한 신유박해 순교자 14위를 현양하고 있다.
이들 17위 순교자는 현재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시성 절차가 진행되고 있다.
한편 어농 성지는 청소년들에게 선조들의 순교 영성과
성소(聖召)를 불어넣어 주는 청소년 성지로 개발하고 있다.
어농 성지가 자신을 불살라 신앙의 여명을 밝힌 순교자들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고,
성직자를 영입하고 보호하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순교자들의 삶이
사제성소의 고귀함을 알려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청소년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시행하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3일)]
12. 단내 성가정 성지
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 위치한 단내 성지는1866년 병인박해 당시
광주 유수부인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鄭? , 1804-1866년)와
그의 손자인 정 베드로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곳이다.
앞에 단천이 흐르고 뒤에 숲이 울창한 와룡산이 감싸고 있는 단내 성지는
한국 교회사에서 처음으로 성직자를 조선 땅에 영입한 주역 가운데 하나인
순교자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1760-1795년)의 묘가 있는 어농 성지와도 지척이다.
단천리는 또한 한국에 교회가 세워지던 1784년 이전부터
천주교가 들어와 있었던 유서 깊은 교우촌이기도 하다.
영동고속도로 덕평 나들목에서 나와 양 옆으로 시골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논밭 사이의 도로를 따라 7km 정도 달리면 왼편 와룡산 정상 위에서
두 팔 벌려 순례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대형 예수성심상을 만나게 된다.
주차장에서 숲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탁 트인 성가정 광장과
붉은 빛의 아름다운 성당이 한 눈에 들어온다.
광장 한편에 성가정상과 이천 지역에서 태어나거나 체포되어 순교한
5위 성인 순교비(五位聖人殉敎碑)가 자리하고 있고, 그 옆으로 계단을 오르면
말끔하게 단장된 순교자 정은 바오로와 정 베드로의 묘소가 나온다.
묘 주위에는 유난히 푸른빛을 띠고 있는 소나무들이 우거져 있어
마치 순교자의 굽히지 않는 신앙을 증언해 주고 있는 듯하다.
단내 성지가 이렇듯 말끔하게 모습을 갖춘 것은 1987년 9월 15일,
이천 지역 출신의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발족한 ‘이천 성지 개발위원회’가
수원 교구장 김남수 주교를 모시고 윤유일 순교자와 그 일가족을 기념하기 위한
어농 사적지와 함께 이곳 단내 사적지를 축성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동래 정씨로 그 조부 시절부터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서학(西學)을 접했던 정은 바오로의 집안은
이미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촌형인 정섭과 정옥이
신앙을 갖고 있었으며 순교의 모범을 보여 준 바 있다.
신유박해가 지나간 3년 후인
1804년에 태어난 정은 바오로 역시 천주교에 입교했고,
그의 어머니 허 데레사와 부인 홍 마리아 역시 입교하였다.
그들이 살던 단내 마을(단천리) 맞은편의 ‘동산 밑 마을’(동산리)은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한 명인
이문우 요한(李文祐, 1809-1840년)의 고향이기도 하다.
1866년 병인박해의 회오리는 이 마을에도 휘몰아쳤고,
포졸들은 정은 바오로를 붙잡기 위해 매봉에 숨어 망을 보았다.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낮이면 마을 뒷산 ‘검은 바위’ 밑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 잠을 자고 또 올라갔다.
그러나 결국 그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남한산성까지 가파른 산길로 끌려갔다.
이때 그의 형님의 손자인 정 베드로가 작은 할아버지께서
병드신 몸으로 홀로 잡혀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곁을 지켜드리고자
자진하여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함께 잡혀갔다.
한 달여를 남한산성에 갇혀 배교를 강요당했으나 이에 굴하지 않은 두 사람은
그 해 12월 27일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덮어 숨이 막히게 해 죽이는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그들이 순교한 뒤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 밖으로 시구문을 통해 던져졌는데
가족들이 몰래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했다.
그러나 정 베드로는 당시 함께 순교한
수많은 시신들 틈에 섞여 미처 찾아오지 못했다.
끝까지 작은 할아버지 곁을 지키다 순교한 정 베드로의 뜻을 기억하고자
2000년 4월 11일 남한산성 동문 밖의 흙 한 줌을 가져와
할아버지 묘 옆에 가묘를 만들어 모셨다.
또한 단천리는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 신부가 머물렀던
은이 마을과는 12km 남짓 떨어진 곳이기도 하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귀국한 이후 동산 밑 마을을 방문한 후
이웃한 단내 마을을 찾아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그런 다음 현재 정은 바오로의 묘소 앞 오방이 산모퉁이를 지나
배마실 공소를 거쳐 새벽 어스름에 은이 공소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렇듯 단내 성지는 한국에 존재하는 가장 역사가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이며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이기도 하다.
아울러 한국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이천에서 태어났거나 체포되어
순교한 5위의 성인을 기념하는 성지이다.
특별히 단내가 가정성화를 위해 순례하는 성가정 성지로 명명된 것은
성지에서 기념하는 다섯 명의 성인과 순교자 중 이문우 성인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정은 바오로와 정 베드로 순교자는 작은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
이호영 베드로(李~, 1802-1838년)와 이소사 아가타(李~, 1784-1839년)는 남매 사이,
조증이 바르바라(趙曾伊, 1782-1839년)와
남이관 세바스티아노(南履灌, 1780-1839년)는 부부이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6-1839년) 역시
순교 성인의 한 분이다.
수원교구는 1998년 4월 26일 순교자 광장에 4m 높이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성상을 안치하여 제막식을 가졌고,
5월 31일에는 십자가의 길 14처와 청소년 캠프장을 새롭게 단장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이어 2003년 7월 12일 지상 1층에 3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을 건립하여 봉헌했고,
그 해 10월 9일 5위 성인 순교비를 5m 높이의 화강석으로 제작하여 제막식을 가졌다.
또한 단체 순례객을 위한 영성관을 마련하여
가정 성화를 위해 순례하는 성가정 성지로 관리하고 있다.
또한 와룡산 정상에 설치된 예수성심상에 올라
이문우 성인의 고향인 동산리와 김대건 신부의 사목 활동 경로를 조망할 수 있다.
예수성심상에서 와룡산 계곡을 따라 20분 정도 올라가면
정은 바오로와 그 가족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생활하며 기도했던 검은 바위가 있다.
수원교구는 이 검은 바위에 성모동굴을 건립하여
묵주기도를 바치며 박해의 괴로움을 이겨냈던 그들의 신심을 본받고자 하였다.
검은 바위에서 와룡산 능선을 타고 30분 정도 가면
정은 바오로 순교자 가족들의 가산을 몰수당하고
마을에서 쫓겨나 피난생활을 했던 굴바위가 나온다.
이곳에서는 굶주림과 추위와 두려움 속에서도
신앙과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꿋꿋이 견뎌낸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2일)]
첫댓글 남양성지가 특별하네요.오늘은 성모님께 고통의 신비 5단을 바치겠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울겠습니다ㅠㅠ
안되네요.너무 아파서 못바치겠어요 ㅠ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순례를 다니시며 올려주시는 소중한 자료와 사진 감사합니다
전 대중교통으로 주말을 이용해 다니는데 한계가 있네요
다닐 수 있을 때까지 다녀보려고요
우리나라에 성모성지가 또 한군데 있더라구요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성당이라고 하더군요
지난 주일 다녀왔습니다
10시30분 미사 봉헌하고 왔어요
대중교통을 이용해 다니시는 것이 더 의미있는 순례길이지요.
많은 시간 힘들게, 묵상하면 하는~~
응원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