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사야 1,10.16-20 마태오 23,1-12
21년 가톨릭평화신문에 ‘미카엘의 순례일기’가 연재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2월 7일에는 ‘아이스크림과 노사제의 투박한 고백’이 있었습니다.
서품 42년을 기념하면서 동창 신부님들이 성지순례를 다녀왔다고 합니다.
작은 섬에 성모승천 성당과 종탑이 있었다고 합니다. 종에 매달린 줄을 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종탑이었습니다.
종탑에서 기다리던 신부님이 친구 신부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겸손하게 살아온 동창 신부에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것이었습니다.
70이 넘은 노 사제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소원이라면
하느님께서는 잘 들어 주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십시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입니다.(마태오 복음 7장 12절)”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성지순례’를 다닐 기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갔던 때는 1995년입니다. 교구의 배려로 동창신부들과 이집트, 이스라엘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부끄럽지만 성지순례의 의미를 제대로 몰랐습니다. 마치 여행객처럼 순례를 하였습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기보다는 신부님들과 친교를 나누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지도신부를 하면서 교우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교우들은 미리 성서를 읽었고, 기도하였습니다.
성지순례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가려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길을 할 때입니다. 서로가 십자가를 지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넘어지심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을 배반했던 모습을 떠올리고 울었습니다.
5처와 6처를 묵상하면서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고자 다짐했습니다.
베로니카 성녀처럼 주님 얼굴에 흐르는 땀과 피를 닦아드리고자 다짐했습니다.
성지순례는 순례자로 갔다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교회의 지도자, 특히 성직자들이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의 말은 들으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본 받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은 하면서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색내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이에게 맡기기 때문입니다. 사제복이 특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첫 번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생각합니다. 감옥에서도 교우들을 생각하며 위로하였습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친구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 어머니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기꺼이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참된 목자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여러분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입니다.” 라는 말을 삶으로 실천하였습니다.
세상의 나이로는 26살 밖에 되지 않았고, 사제생활은 1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국의 ‘수선탁덕(首先鐸德)’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늘 부족한 제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비록 나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비록 나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며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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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사야 1,10.16-20 마태오 23,1-12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 백성에게
1)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우리라고 하며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리고 악행을 멈추라고 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
2)그리고 이어서 하느님께서 다시 예언자를 통하여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주어라.’고 하신다.
신명기계의 전형적인 가르침인 순종하면 ‘좋은 소출’을 먹겠지만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라며 축복과 저주의 양면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비판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가르치기만 하지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렇게 이르십니다.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마태오 복음 23장 4절)
그들은 모세의 자리3)에 앉아 있으며 군림하는데, 그들은 말만 잘 하고 실행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지만 그들이 실천하지 않는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4) 길게 늘어트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행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이 잔치 집에서는 윗자리,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 장터에서 인사받기,
사람들에게는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그들을 비판하십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도 스승, 아버지.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조심하고 겸손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판하시면서 마감으로 가르침의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오 복음 23장 11절-12절)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나무라시는 것은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세세하게 나누어서 복잡한 규정들을 만들면서도 정작 자신은 실행하지 않는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보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이 지워주는 율법의 멍에를 가볍게 하시고 특히 안식일 법의 정신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음식에 대한 복잡한 규정들을 풀어 주십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힘겨운 율법의 의무의 속박에서 풀어주시어 구원으로 연결시켜 주신 것입니다.
설명
1) 창세기 18- 19장에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도시 사람들의 죄악 때문에 응징하려는 의도를 아브라함에게 알리십니다.(창세기 18장 21절)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시지만 결국 그 도시에 의인 열 명도 안 된다는 하느님의 말씀에
자기의 청을 멈춥니다.(창세기 18장 33절)
대대적인 도시의 멸망의 전조가 나타나자 천사는 롯과 그 가족을 그 도시의 멸망 직전에 탈출하도록 인도하고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 도시에 유황을 퍼부시어 멸망시키십니다.(창세기 19장 15절-22장 5절)
이사야가 ‘소돔의 지도자들과 고모라의 백성’이라는 표현은 사해 부근에 존재했다 사라진 역사적인 나라 보다는
죄악을 대표하는 나라로 표현한다고 보아야 한다.
2) 구약에서 소외 된 대표적인 계층인 ‘고아와 과부’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신다.
(신명기 10장 18절, 14장 29절, 24장 17절. 19장 20절-21절, 27장 19절 / 즈카르야 예언서 7장 10절 /
이사야 예언서 1장 16절-17절 / 에제키엘 예언서 22장 7절 / 예레미야 예언서 7장 6절 /
시편 7장 6절, 10장 14절.18절, 68장 5절, 146장 9절)
3) ‘모세의 자리에(에피 테스 모위세오스 케테드라스 Ἐπὶ τῆς Μωϋσέως καθέδρας)’ 앉아 있다.”라고 말씀하신다.(마태 23.2)
여기서 자리라는 것은 모세가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갖고 있던 지도자로서의 위치, 절대적 권위를 말한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4) 현대에도 전통신앙을 고수하는 이들은 술이 달린 의복을 입고 통곡의 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왼 팔에는 긴 가죽 끈으로 감고 이마에는 성구갑을 단다.
이렇게 이마에는 성구갑을 달고 팔에는 가죽 띠를 드리는 관습은 성경(신명기 6,8)에서 유래한다.
그 뜻은 ‘하느님 말씀에 충실하게 실천한다.’라는 것이다.
성구갑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성경구절 (신명기 6장 4절-9절, 11장 13절-21절)을 적은 양피지를 넣었다.
이 성구갑 외에도 이 말씀을 문패(메주자 mezuza)에 적어 집을 나설 때나 들어 올 때 말씀을 읽고 기도한다.
심지어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이 메주자를 벽에 붙여 놓은 곳도 있다.
그 뜻은 모세의 분부대로 ‘하느님 사랑과 말씀에 충실하겠다.’는 의미를 지닌다.
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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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화요일
이사야 1,10.16-20 마태오 23,1-12
사제로서 저는 강단과 제대에 올라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은 내가 말한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가?’하는 생각이 언제나 저를 일깨웁니다.
좋은 말로 희생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눔은 좋은 것이라며 나눔의 실천을 강조하지만,
그 나눔과 자선의 결과물 속에서 나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고 있지는 않은지 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면 언제나 부끄럽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바로 저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가식과 오만을 비판하고 험담합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무엇을 하고 있냐며 따져 묻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그렇게 비판하고 지적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얼마나 부끄러워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자신의 가식과 거짓에 얼마나 분노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오만과 독선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습니까?
먼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말로만 하는 우리의 가식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우리의 오만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자랑하는 우리의 위선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 부끄러움들이 한 번 더 행동할 수 있는 힘을 줄 것입니다.
조금은 아깝고 두려운 마음이 들지라도 나누고 사랑하고 내어놓는 삶을 살아갈 용기를 줄 것입니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도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에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