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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자료실 스크랩 비가 오면 ``릉`이 `묘`로 바뀌는 마술같은 김유신장군 묘비석
경김종보 추천 1 조회 119 12.07.30 15:0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비가 오면 ''陵'이 '墓'로 바뀌는 마술같은 김유신장군 묘비석

 

김유신장군 묘비는 비가 오면 글씨가 바뀐다

陵이 墓가 된다

 

 

 

송화산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이 좋은 구릉 위에 자리하고 있는 김유신장군묘는

지름은 30m정도이며 주위에 호석과 난간을 두른 원형분으로 호석에는 12신장상을 두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옥돌이 난다는 남산과 더불어 경주시민이 가장 즐겨 찾는 등산로이며 산책로이다.

이 묘를 거쳐 옥녀봉으로 이르는 등산로와  묘소 앞을 돌아 신라의 적석고분실, 고무신시비 등을 보면서 걷는 숲 속 길 산책로는 정말 일품이다.

 

 

김유신장군의 묘 앞에는 동서로 두 개의 비석이 마주보고 있다

김유신장군이 돌아가시자 문무왕은 예를 극진히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 유사에게 명하여 묘비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그 묘비는 전하지 않고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두 기의 묘비는 후대에 세운 비석이다

 

서쪽에 보이는 비석은 비문과 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앞면에는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 , 뒷면에는 崇禎紀元周甲後庚寅(崇禎기원주갑후경인)라고 적혀 있어 조선중엽에 세웠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 숙종36년에 당시 부윤이던 남지훈이 세웠다

동편의 묘비는 1970년대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 開國公純忠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렬흥무왕릉)라고 적혀 있다 

 

서편의 묘비

 

 

 

 

 동편의 묘비

 

장마가 시작된다는 6월 18일, 퇴근 후에 간단한 차림으로 김유신 장군묘에 올랐다

간간이 떨어지는 빗방울에 우산을 받쳐들고 묘역을 둘러보는데

앗불사!  묘비에 큼직히 씌여진 낙서!

동편의 묘비에 

누군가가 진하게 붓으로 글씨를 써 놓았다

동편에 있는 묘비의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의 '릉'자 위에 새까만 글씨로

"묘"자가 적혀 있는 것이다.

 

 

'陵'자 위에 겹쳐 드러나는 "墓"라는 글씨

 

  맑은 날의 비석

 

 먹물로 쓴듯이 새까맣게 드러나는 "묘'자가 음각으로 새겨진 '릉'자 위에 뚜렷이 나타난다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은 낙서가 아니다.

분명히 과학이다.

과학의 원리를 이용하여 조각해 놓았다.

비가 오거나 물이 묻으면 새까맣게 드러나게 만든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조작해 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맑은 날에만 다녀보았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맑은 날에는 분명히 '왕릉"으로 적혀있고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평소의 이 글씨가 물에 젖으면 아래처럼 된다 

 

 

어떻게 해서 이런 현싱이 일어날까?

자세히 살펴보았다 

  

 '陵'자 위에 까맣게 드러난 '墓'자

 

능이라는 글자가 있는 부분에 묘자를 새겨 파내고 파낸 부분에 돌가루(?) 를 때워놓았다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보자

포샵으로 만들어 보았다

 

 

 1.  본래의 비석

 

 2. '릉'자 위에  '묘'자를 쓴다

 

 3. 쓴 부분(흰부분)을 파낸다

 

 4. 돌가루를 채워 넣는다

 

 

 조각한 형태를 옆에서 보면

 

 

 

 

 

 글씨 전체를 파내었는데 '릉'자에서 오목하게 음각된 부분은 더 깊게 파서 돌가루를 채워넣었다

위의 그림에서 회색부분이 돌가루를 채워 넣은 부분이다

 

 

그럼 홈을 채워넣은 물질은 무었일까?

마른 상태에서 색깔은 대리석과 거의 흡사하여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처음엔 시멘트를 섞은 몰타르가 아닐까 했는데 자세히 보니 시멘트는 아니다. 시멘트는 물이 묻어도 이렇게 진하게 변하지는 않는다. 

아마 물에 젖으면 아주 진하게 색이 변하는 특수한 성질의 돌을 가루로 만들어 접착제와 혼합한 것으로 보인다.    

 

 원 안을 자세히 보면 파내고 다른 물질을 메운 흔적이 있는데 쉽게 구분이 안된다

 

물에 젖어도 색의 변화가 적은 대리석과

물에 젖으면 색이 진하게 변하는 물체와의 오묘한 조화를 이용하여 비석을 조작한 이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왕이 아니면서 왕의 칭호를 받은 김유신장군의 업적을 비하하고 천시하려는 이의 소행임이 아닐까?

 

문화재 해설사의 말로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이렇게 만들었는데 왕이 아니기 때문에 묘로 고친것이다" 라고 하지만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이다.

이 비석은 1970년대 김유신장군묘를 정비할 때 만들어진 비석이기 때문이다.

언제 누가 이렇게 조작을 하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요즘은 장마철, 비오는 날이 많으므로 한번 찾아가 보자.

맑은 날이면 한컵의 물만 부어보아도 확연히 '墓'자가 드러나는 마술같은 비석이다.  

 

(참고)

5,60대 중후반의 어르신 중에서 어린 시절을 경주에서 보낸 분들은

"내가 어렸을 때 김유신장군묘에 가면 묘의 양쪽으로 석인상이 있었는데 지금 어디로 갔지?"하고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 석상은 일본 강점기때 만들어 세운 것으로 조각이 조잡하고 역사적 사실과 맞지않는다하여 1970년대김유신장군묘를 정비할 때에 철거를 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없다

 

 <참고로 경주시민은 김유신장군 묘소의 입장이 무료이다. 증명을 할 수 있는 신분증만 있으면 된다> 

 

 

<2008년 11월22일자 스폰지 2,0에 방송된 내용의 반론>

 

2008년 11월22일 KBS 2 방송의 '스폰지'에 위의 내용이 방송되었다.

방송에서는

"후손들이 흥무왕으로 추대된 것을 모르고 묘로 썼다가 나중에 릉으로 고쳤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석이 세워진 것은 불과 40년이 되지않는 1970년대에 세운 것이다. 지금의 후손들이 그 유명한 선대가 흥무왕이라 봉해진 것을 모를리가 있으랴...

 

필자가 보기에는 그 반대이다. 릉으로 쓰여진 것을 묘로 고친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글씨체를 살펴보면 '릉'자와 '묘'자의 글씨체가 완연히 다르다.

그 위의 글씨(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와 비교해보면 '묘'자는 완연히 다른체이며 '릉'자와 같은 글씨체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처음부터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묘'라고 썼다면 일부러 '묘'자만 다르게 썼다는 말인가?

뒤에 '릉'자로 고쳤다면 처음 비문을 쓴 사람에게 다시 '릉'자 글씨를 받았을까?

위의 글씨(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와 '릉'자는 한치의 빈틈없이 조화롭지만 '묘'자는 획이 날카로우면서 그 크기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두번째  '묘'자를 메우고 그 위에 '릉'자를 썼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릉'자의 파인 부분에도 까맣게 글씨가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뒤에 메우고 '릉'자를 새겼다면 메운 부분이 드러나지 않게 좀 더 깊이 파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세번째  '묘'를 메우려면 돌가루(어떤 성분의 돌가루인지 화학약품의 가루인지  필자는모름)를 반죽하여야 메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죽을 하였을때 벌써 지금과 같이 검은 색이 틀림없었을텐데 그대로 사용하였을까?

물이 묻을 때도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였을까?

지금의 비석은 일반 석물제작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대리석이다. 만약 '묘'라고 쓰여진 부분을 메울 생각이었다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대리석의 가루를 사용해야 함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이 가루는 젖어도 비석과 같이 젖어 차이가 나지 않을텐데......

 

누가 어떤 이유로 이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릉'자 위에 '묘'자가 쓰여진 것이 틀림이 없음을 믿는다

 

                                                                                                         <2008년 1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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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4일자 연합뉴스>

 

김유신 묘비 '陵'-'墓' 겹쳐 보이는 이유는

 

'릉(陵)과 묘(墓)가 겹치네' (경주=연합뉴스) 이승형 기자 = 사적 제21호인 경북 경주 충효동 김유신장군 묘비석 끝 글자에 릉(陵)과 묘(墓) 자가 겹쳐진 상태로 보이고 있다(왼쪽). 비석에 물이 스며들면 '묘'자는 더욱 선명해진다(오른쪽). haru@yna.co.kr


(경주=연합뉴스) 이승형 기자 = 사적 제21호인 경북 경주 충효동 김유신장군 묘비석 끝 글자에 릉(陵)과 묘(墓) 자가 겹쳐진 상태로 보여 그 이유에 대한 궁긍증을 자아내고 있다.

4일 경주시에 따르면 김유신장군묘에는 정면에 1710년께 세운 비석이 있고 묘를 마주보고 오른쪽에는 1930년대 후손들이 만든 비석이 서 있는데 오른쪽 비석에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오른쪽 비석의 비문은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릉'과 '묘'라는 한자가 같은 위치에 드러나 있다.

특히 비석에 물이 스며들 경우 두 글자 가운데 '묘' 자가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문중에서는 "오래전에 비석을 세운 데다 관리도 경주시에서 하고 있어 명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면서 "그러나 김유신장군이 '흥무대왕'으로 추봉된 사실을 모르고 '묘' 자를 새겼다가 이를 바로잡기 위해 그 자리를 돌가루로 메우고 '릉'자를 다시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문중에서는 '묘' 자를 메우는데 사용된 돌가루가 비석의 돌과 다른 성분이어서 세월이 흐르면서 형태를 드러냈고 물기가 스며들면 더욱 선명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장군은 세상을 떠난 이후 흥덕왕때 '흥무대왕'으로 추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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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4일자 한국일보>

 

 

비가 오면 왕릉이 왕묘로?

 

70년대 만든 김유신 장군 묘비석 글자 변신 화제

경북 경주시 충효동 사적 제21호 김유신장군묘의 묘비석 글자가 비에 젖을 경우 왕릉(王陵)에서 왕묘(王墓)로 변해 눈길을 끌고 있다.

김유신장군묘 정면에는 조선시대 때 세운 비석이, 오른쪽에는 70년대 사적지를 정비하면서 새로 세운 비석이 서 있는 데 글자가 변하는 것은 바로 오른쪽 비석이다.

비만 오면 개국공순충렬흥무왕릉(開國公純忠烈興武王陵)이라는 비문의 끝 글자 '릉'이 검은 색의 '묘'자로 탈바꿈한다.


 

최근 김유신장군묘를 관람한 김모(41ㆍ경기 성남시)씨는 "비문을 살펴보다가 소나기가 내려 잠시 비를 피한 뒤 다시 와 보니 '릉'자가 '묘'자로 바뀌어 놀랐다"고 말했다.

비문을 살펴 본 조각가 김진헌씨는"먼저 '릉'자를 새기고, 그 위에 '묘'자를 새겼다 '묘'자 부분을 다시 돌가루로 채운 것 같다"면서 "그러나 비가 올 경우 특수 접착제가 섞인 이 돌가루가 검게 변하면서 '묘'자가 확연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지역 사학계에서는 신라 왕족이 아니면서 왕의 칭호를 받은 김유신장군을 비하하기 위해 70년대 당시 비석을 처음 만들었던 사람이나 이후에 누군가가 새겼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신라문화유산조사단 김호상 박사는"오래 전 일이어서 비문이 변조된 이유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가야왕실의 후손으로 김춘추와 함께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장군은 사망(673년) 160여년 뒤(835년)인
흥덕왕때 '흥무왕'으로 추봉돼 왕과 왕후에게만 사용하는 '릉'자를 비석에 새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주=김경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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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7.30 16:17

    첫댓글 경주에 많은 신라문화재가 사적 고찰이 부족한 상태에서 조명이 되었던 사실이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회자되는데 늦지 않은 시간에 역사가들과 후손된 종인들의 뜻으로 본래의 의미가
    살아날수 있도록 노력해야 될 것 같습니다.

  • 12.08.29 16:30

    위의 글에 약간 오류가 있는 듯.. 릉자를 먼저 새긴 것이 아니라 묘자를 새긴 후에 그것을 메꾼 후에 다시 릉자를 새긴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그래야 위와 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 묘비는 과거 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니 그 묘가 과연 김유신의 묘인지 확실하다 할 수 없다는 것. 분명한 것은 묘를 개봉해서 부장자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 그래야 누구의 묘인지 김유신의 묘인지 아니면 다른 통일신라의 왕의 릉인지 알 수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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