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8년 8월 14일에 쓴 베르뇌(Berneux) 주교의 편지
『㉠ 작년에 편지를 보내드릴 시기에는 우리의 전망(前望)이 어두웠었습니다. 전반 적인 박해(迫害) 이야기가 나오고, 벌써 체포(逮捕)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한 겨울에 나라의 이곳저곳에서 신자들이 붙잡혀갔습니다. 아꼰(Acones) 주교(다 블뤼(Daveluy) 보좌주교(補佐主敎), 프랑스말로는 Acones, 라틴어로는 Episcopus A -conensis 로 불리운다) 구역에서는, 한 마을 전체가 포졸(捕卒)들의 추적을 면 하기 위해, 집과 논밭을 버리고 산골로 피신했는가 하면, 그 근방의 다른 가족 들은 살 길을 찾아 먼 곳으로 이사(移徙)를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박해(迫害)가 크게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그런데 잡혔 던 사람들이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배교(背敎)를 하지 않은 채, 석방(釋放) 되었습니다. 피신했던 사람들은 산골에서 내려오고, 역시 도피했던 보좌주교 (補佐主敎)도 자기 은신처(隱身處)로 돌아갔습니다.
몹시 슬퍼하는 이들의 위로자(慰勞者)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그렇게도 여러 번 혹독(酷毒)한 시련(試鍊)을 겪어 온 이작은 양떼에 연민(憐愍)의 눈길을 돌 리셔서, 폭풍우(暴風雨)가 별안간 가라앉았던 것입니다. 붙잡혔던 신자들은 놓 여나왔는데, 신자 가장(家長) 1백 명의 명단(名單)을 가지고 관장(官長)과 암행 어사(暗行御史)에게로 갔던, 고발자(告發者)중의 한 사람은 결박(結縛)을 당하 여 투옥(投獄)되고, 매를 흠씬 맞았습니다.
이 사건의 결과는 우리의 승리(勝利)입니다. 이 승리는 우리 신자들에게 용 기(勇氣)를 주고, 다만 공포(恐怖)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는 외교인들을 안 심(安心)시켜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멀리 이사(移徙) 를 가는 가족들은 몹시 곤궁(困窮)하게 되고, 고생(苦生)을 많이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의 시련(試鍊)을 동정(同情)하면서도 거기에서 초래(招來)될 많 은 희망(希望)으로 위로(慰勞)를 받게 됩니다. 이 이주자(移住者)들은 복음의 빛이 아직 비치지 않은 지방에 그것을 가져다주어, 거의 언제나 약간의 외교 인들을 끌어들입니다. 이것은 폭풍우(暴風雨)에 날아간 씨앗이 불모지(不毛地) 에 떨어져서, 이내 그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 성인 영세자(領洗者)의 수효가 옿에는 아마 작년 숫자에 미치지 못할 것 같습 니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 개종(改宗)하는 사람들에게 교리(敎理)를 더 배울 것과, 더 오랜 시험기간(試驗期間)을 요구하기로 결정(決定)한 데서 오는 것입 니다.
그러나 반면에 우리 예비신자의 수는 거의 3배로 증가했습니다. 내 명단(名 單)에 오른 사람이 근 1,200 명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천주께 대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온 교구(敎區) 안에서 느껴지는 움직임을 주시(注視)했습니다. 특히 서울이 많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교리(敎理)를 배우려고 놀라운 노력들을 하고, 뛰어넘어야할 장애물(障碍物)이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열성(熱誠)이 가득 차 있습니다.
신자들의 이런 움직임이 비신자들에게로 옮아가고, 서울 밖으로 넘쳐 흐릅 니다. 이 나라의 가장 큰 양반가(兩班家) 중 하나가 우리의 신앙을 받아들였습 니다. 지금의 임금님과 가까운 친척 한 분의 장인(丈人)인 이 집 가장은 겨울 동안에 세례(洗禮)를 받았습니다. 만일 이 집안이 열심해지면, 많은 개종이 이 를 뒤따를 것입니다.
일본인(日本人)들이 살고 있는 읍내에는 수단 좋고 열성 가득한 예비신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최양업(崔良業) 신부의 관할구역(管轄區域)에는 교우촌(敎 友村) 8개소가 생겼고, 또 다른 7개소가 내년에 신설(新設)되리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아마 알고 계실 한 개종(改宗)은 많은 성과(成果)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가 됩니다. 왜냐하면 천주의 뜻이 거기에 분명히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 2년 전에 조선배 한 척이 폭풍(暴風)에 밀려 광동지역(廣東地域)에 이르렀습니 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허기(虛飢)로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어떤 영국선박(英國船舶)에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만이 구조(救助)될 수 있 었고, 우리의 조선학생(朝鮮學生) 들 중 한명이 있던 홍콩으로 보내졌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이 어린 학생이 건강(健康)을 회복하라고 삐낭(Pinang
)에서 홍콩으로 보내졌습니다(그의 이름은 이(李) 바울리노). 그러나 천주의 섭리 (攝理)는 한 영혼(靈魂)을 구하고, 또 그 영혼과 함께 아마도 다른 많은 영혼 을 구하시기 위해서, 그를 이용하려고 하셨습니다.
룻세이(Rousseille) 신부(파리외방전교회원(外邦傳敎會員). 홍콩외방전교회 경리부 (經理部)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후 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指導者) 및 교장(校長),
주(駐)로마 경리책임자(經理責任者) 등 요직(要職)을 거쳐, 1883년에는 홍콩의「나자 렛 집」을 창설하였다. 룻세이(Rousseille) 신부는 외방전교회를 발전시킨 주요인물중 의 하나이다. Necrologie, p. 13)의 지도(指導)아래, 이 학생에게 교리를 배운 이 난파자는 세례(洗禮)를 받았습니다(룻세이(Rousseille) 신부의 1857년 4월 14일 자 서한. (APF ⅩⅩⅠⅩ(1857), p. 402~405. 조선배가 조선의 남해안(南海岸)을 떠 난 것은 1857년 2월, 그러나 난파로 인해 6일간을 헤매다가 마침내 영국선박에 의 해, 성원(船員) 6명 중 1명만이 구조되어 홍콩의 외방전교회 경리부로 보내졌다.).
그는 다행이 금년에 조선에 돌아와 페롱(Feron) 신부와 최양업(崔良業) 신 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들은 그에게 책을 주면서 나와 연락(連絡)을 취할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이 새 신자는 제주도(濟州道) 사람인데, 영리하고 신 앙이 발랄합니다. 집안이 40명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改宗)할 것 을 의심(疑心)치 않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 겨자씨를 자라게 하여 주시기를!』
⑨ 펠릭스 ․ 베드로(『치명일기』(N.826)에 의하면, 그의 성(姓)은 김씨(金氏). 병인박해(丙 寅迫害) 때 거제도(巨濟島)에서 잡혀 순교(殉敎)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50여 세였다)
(이것이 개종자(改宗者)의 이름이다)가 1860년 말 성탄절 무렵에 성사(聖事)를 받기 위하여, 조선(朝鮮)에 돌아왔다는 것을 즉시 덧붙이기로 하자.
그는 난파(難破)했던 사람들의 친척(親戚)들에게서 많은 고통(苦痛)을 당해야 했으니, 그들은 이 사람이 동료들을 모두 암살(暗殺)했다고 고발한 것이었다. 관장(官長)은
너희들 미쳤느냐? 여섯 사람이 한 사람을 살해했다면 이해하겠다. 하지만 한 사람이 여서 사람을 살해했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고 고발자들에게 말하면서 그들의 고소(告訴)를 기각하고, 이 개종자(改宗者)를 석방하는 양식(良識)을 가졌었다.
펠릭스는 벌써 20명가량을 개종시켰는데, 대부분이 집안 식구들이었다. 그가 배 한 척을 샀었는데, 그 배의 선원(船員) 모두가 한사람만을 빼고는 예비신자 였었고, 나머지 한 사람도 나중에 개종시키기를 펠릭스는 바라고 있었다.
이 예비신자 중 고씨(高氏)라는 사람은 쁘띠니꼴라(Petitnicolas) 신부에게서 세례(洗禮)를 받았는데, 펠릭스와 마찬가지로 곧 전교회(傳敎會)에 입회(入會)하 기를 원하였다. 베르뇌(Berneux) 주교는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선교사 (宣敎師) 한 사람을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했었으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1866년 한창 박해(迫害)가 극성을 부리고 있을 때 다시 조선(朝鮮)에 돌아와, 세례 받을 준비를 다 마친 다른 개종자(改宗者) 2명을 신부에게로 데리고 왔다. 그동안 펠릭스는 난파(難破)를 당하여 일본해안(日本海岸)에 표류(漂流)했었는데, 거기에서 선교사를 만났고, 그 중에서도 교구장(敎區長) 인 쁘띠장(Petitjean) 주 교(主敎)(파리외방전교회원. 1860년 일본선교사(日本宣敎師)로 임명되어, 유구(流寇), 횡 빈(橫濱)을 거쳐 장기(長崎)에 정착, 거기에서 1865년 절지단(切支丹) 시대의 신자후손 들을 발견하였다. 1866년 이래 일본교구장(日本敎區長). Lanuary. Memorial, p. 501) 를 뵈었다.
⑩ 베르뇌(Berneux) 주교의 편지는 계속된다(전게(前揭) 1858년 8월 14일 자 서한).
※ 베르뇌(Berneux) 주교의 편지
『㉠ 우리의 예비신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감동을 주는 신앙과 끈기를 보여주어서, 그중 몇 가지의 행위를 여러분에게 소개(紹介)하는 즐거움을 갖 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행위들은 여러분에게 유익(有益)할 것이고, 또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위해 기도(祈禱)하게 할 것입니다.
15세 소년이 신자가 되고 싶어서, 몇 달 동안에 기도문(祈禱文)과 교리문 답(敎理問答)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부모가 그의 결심(決心)을 알고, 갖 은 방법(方法)을 다 써서 그 결심을 꺾으려고 합니다. 발각되는 날이면 죽음 의 위협(威脅)을 받게 된다고 경고(警告)합니다. 그러나 죽음이 그에게 하늘 의 문을 열어 줄 것이므로, 그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심하게 매질 을 당합니다. 그는 잠자코 매를 맞다가, 아버지가 매질에 지치면 몸을 일으 켜가지고는 신자가 되겠다고 항변(抗辯)을 합니다. 이 소년은 아직 세례(洗 禮)를 받지 못했습니다.
㉡ 주께서는 이 신입교우들의 신앙(信仰)에 감동(感動)하시어, 이 땅에서 피를 흘려 신앙(信仰)을 용감하게 증거(證據)한 이들을 영광스럽게 하심으로써, 그들의 신앙을 굳게 하시려는 것 같습니다.
페롱(Feron) 신부가 내게 보낸 편지를 보십시오.
「강원도(江原道) 만산(망상(Mang-sang)을 만산으로 고쳤다. 최양업(崔良業) 신부 의 서한에 의하면, 이것이 산명(山名)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본고(本稿) p. 216 참조)에서 성사집행(聖事執行)을 하고 있던 중에, 태어날 때부터 불구 인 황(黃)이라는 12,3세 된 아이를 보았습니다. 이 아이는 서 있을 수가 없 어서 팔꿈치와 무릎으로 밖에는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점으로 본다면, 신심(信心)이 있고 교리(敎理)를 꽤 잘 배웠었습니 다. 그의 처지(處地)가 가엾어서 마을 사람들에게, 조선순교자들의 전구(轉 求)로, 천주께 그를 고쳐주시기를 청하라고 종용했습니다. 저의 제안은 일 종의 불신(不信)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제가 엄명한 까닭으로, 제 가 떠나던 날인 11월 30일에 9일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기억이 나는 대로 주요한 순교자(殉敎者) 40명의 명단을 주고, 9일기도가 끝나는 날인 성모의 원죄(原罪)없으신 잉태대축일(孕胎大祝日)에 미 사성제를 드리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만산 신자들의 편지에 의하면 그 아이의 병이 바로 그날 나았다고 합니다.
그가 회복된 시간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도무지 모릅니다. 제집에서 별로 멀지 않은 교우촌에서, 그 아이의 삼촌이 말한 것으로는 기도문(祈禱文)을 외우고 신자들이 일어날 때에, 그아이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병든 다리가 으드득 소리를 내며 펴졌고, 아이는 다른 사람들처럼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주교(主敎)님께서 그 원인(原因)을 조사(調査)하고 평가(評價)하실 수 있으실 한 가지 상황을 말씀 아니 드릴 수 없으니, 그 아이가 아직 지팡이를 짚고서야 걸을 수 있다는 점으로 보아, 병이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라는것입니다.」
그곳이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나는 아직 보고서(報告書)를 작성하지 못했습니다. 내 관할구역(管轄區域)에서도 같은 모양으로 병이 나 은 사실(事實)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받은 문서(文書)가 충분히 정확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그 자세한 내용(內容)을 적을 수가 없습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