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네스여, 안녕!
예술을 품은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 4일 간 머물다 이제 나는 이곳을 떠난다. 한번 사랑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든 도시라고 했다. 첫날 플로리다 거리의 탱고 버스킹, 인간적 내음이 물씬 풍겼던 라보카, 극장에서 본 탱고 쇼, 한가롭고 여유가 넘치는 시가지 풍경이 그리울 것이다. 무엇보다 숙소에서 통성명도 없이 마주했던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오래 생각날 것 같다.
내가 숙식한 거처는 싸구려 여인숙 같은 집이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가난한 여행자들이 저마다 며칠씩 잠을 붙이다 떠나는 곳이었고, 헐값에 기숙하며 아르바이트로 돈을 버는 이 나라 사람이 묵는 처소였다. 끼니 때가 되면 투숙자들은 세프르 변신하여 자신이 먹을 음식을 맛나게 요리해냈다. 평범하지만 행복해 보였다. 주방에서 커피를 함께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눌 땐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닮고 싶었던 사람들이다. LA에서 온 60대 후반의 한국 이민자도 반가웠다. 재퍼니즈 아메리칸인 부인과 세계 일주 여행 중이라도 했다. ‘인생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부러웠었다. 만났을 때 그랬든 인사도 없이 하우스메이트였던 이들을 내가 먼저 떠나간다.
푸에르토이과수행 버스, 14:15 출발인데 아직 탑승 절차가 진행 중이다. 짐칸에 실은 짐에는 물론 핸드캐리하는 작은 배낭에까지 딱지를 붙인다. 좀 번거롭지만 외려 좋다. 그만큼 관리가 철저하다는 거 아닌가. 버스 승객으로 가장해 한 눈 팔고 있으면 남의 물건을 슬쩍 가지고 내리는 경우가 더러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고 누누이 들어왔다. 세미 카마형 버스다. 비행기 비즈니스석처럼 공간이 꽤 넓고 생각보다 청결하다. 커텐으로 옆 좌석을 가릴 수 있다. 와이파이가 설치됐고 전기충전도 가능하다.
두시 반이 되자 버스가 출발했다. 목적지까지 18시간 정도 걸린다니까 내일 아침 9시 무렵까지 달려갈 것이다. 밖엔 비가 대지를 촉촉이 적시고 있다. 안전 운전에 지장만 없다면 적당히 비 내리는 날 버스여행, 그리 나쁠 것이 없다. 나름 운치도 있고 낭만적일 터다. 해안가를 향해서 시내 외곽으로 길이 나 있다. 30여 분 달려왔지만 아직 시내를 빠져나오지 못했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차들이 도로에 가득하다. 한 시간 가량 달려 정거장에 왔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곳에서 손님을 더 태웠다.
양방향 6차선 고속도로, 버스는 시원스럽게 달린다. 도로 양쪽으로 가로수 녹음이 짙푸르고 멀리, 아무리 고개를 빼고 멀리 내다봐도 산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지평선만 펼처진다. 달리고 또 달려왔건만 도대체 막힘없는 평야뿐이다. 보이는 오로지 대초원이다. 이제 저 멀리에 소들이 보인다. 광활한 땅, 아르헨티나를 버스로 종단하고 있다. 페루, 볼리비아의 고산지대와 사막의 땅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러니 쇠고기 질과 가격경쟁력에서 따를 국가가 없을 것이다. 저 광대한 초지에서 플을 뜯는 소들은 누가 와서 기르고 관리할까. 주변에 집 한 채 없다. 밤이 되고 추워지면 저 소들은 어디서 잠을 자고 추위를 피할까. 분명 야생은 아닐 터. 금방 의문이 풀렸다. 마을이 나타났다. 목축하는 마을일 것이다. 하지만 저토록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들은 어떻게 겨울을 날까. 들판에 우리라고 할 만한 축사는 보이지 않는다. 혹시 풀밭 너머 나무들이 우거진 곳 어디쯤에 우리가 있나 모르겠다. 혹 가끔씩 보이는 숲이 그들의 은신처인가.
내가 남미에 와서 놀란 건 중 하나는 장거리버스 이동이 많고 이 버스들이 럭셔리한 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본 적이 없는 고급 버스들이 많았다. 수요 있는 곳에 공급이 간다는 경제학 이론이 실감나고, 환경이 문화를 창조한다는 말이 설득력 있다고 새삼 느꼈다. 남미는 지형상 산악지역이 많아 철도가 발달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장거리 이동은 비행기보다 값이 싸게 때문에, 현지인이나 가난한 여행객은 버스를 선호할 것이다. 국가 경제력에 걸맞지 않게 럭셔리한 버스가 처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당연하고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고개가 끄덕여 진다. 이젠 장거리 버스에 꽤 익숙해지고 바깥 풍경 바라보는 일도 즐겁다. "24시간 버스를 타고 이동한 적이 있는데 엉덩이가 아파 죽을 뻔했어요" 며칠 전 만난 젊은 한국 여성 여행자가 한 말이 생각났다.
피츠로이 봉 주변을 트레킹하고 내려오는 길에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30대 초반의 미혼이라고 했다. 여상을 나와 중소업체에서 경리일을 했는데 삶이 답답하다고 느껴져 회사를 그만 두고 부모님을 어렵게 설득해 홀로 세계 각지로 여행을 다닌다고 했다. 참 대단하다고 격려성 멘트를 연신 날리면서도 내 상식으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속으로 '내가 꼰대는 꼰대구나' 싶었다. 부모 입장에서는 그리고 나이 든 사람들한테는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녀는 스페인어를 할 줄 몰라 영어로 소통한다고 했다. 생각해 보라. 말도 잘 통하지 않은 땅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치안마저 부실한 나라에서 여성 홀몸으로 여행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물론 막상 현지에 와서 경험해 보면 듣던 대로 그렇게까지 험한 일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버스 여행 중간에 식사도 제공하더라며 웃었다. 나와 여행 동선이 비슷해서 엘칼라파네 수퍼에서 마주친 적도 있다. 한 번은 버스가 취소되어 당황해하는데 다행히 다음 목적지에서 탈 버스가 같은 회사라서 시간에 맞추어 차표를 재발급받기도 했다며 만족해하는 표정이었다. 왜소한 체구의 그녀는 남미 여행을 맘껏 즐기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버스 2층 천장에 걸린 5개의 모니터에는 영화인지 드라마인지 계속해서 장면이 바뀐다.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잠이 들어 관심을 받지 못하지만 화면은 자막과 함께 열심히 흐른다. 화장실은 1층에 있는데 소변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큰건 어찌하나요? 버스는 달려만 가는데, 운전기사한테 어떻게 사정해보려 해도 말이 통해야 할 거 아닌가. CCTV도 없을 텐데 급하면 별 수 없지 않을까. 가끔씩 1층에 내려가는 사람들이 있더니 이젠 그 발길도 끊어졌다. 지도에 오른쪽 멀리에 우루과이강이 내륙에서 남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흘러간다. 아마도 그 강까지 거리가 눈대중으로 30키로 정도일 거 같다. 버스는 12번에서 14번으로 도로를 바꾸더니 쉼 없이 북으로 향한다. 드디어 밭이 나타났다. 푸른 작물이 자란다. 뭐가 자라고 있을까. 옥수수라 하기엔 키가 너 무 작다. 설마 목초는 아닐 테고, 알 수가 없어 궁금해하며 바라보는데 조금 지나자 또 깉가에 유사한 작물이 자라는 밭이 나왔다. 아무래도 옥수수 같다. 계속 달려가자 이번에는 참깨인 듯 밭에 푸른 줄기가 빼곡히 서 있다.
손님을 태우려는지 아니면 내리는 승객이 있는지 아무런 안내도 없이 버스가 또 섰다 곧 출발했다. 6시가 되어 간다. 승객 앞에 플라스틱 식판 하나씩 주어졌다. 새참을 주려는 모양이다. 서빙하는 남자는 부지런히 움직이지만 손이 모자라는지 진도는 느리다. 숨 막힐 듯 지평선의 초원. 저기 노란 빛을 띤 곳은 봄 수확을 막 끝낸 곳인가. 나무도 울울창창하다. 그런데 산이 아니라 들판에서 나무가 저렇게 우거져 자랄 수 있나. 하늘을 찌를 듯 위로 높이 솟은 나무, 키는 작아도 아래는 곧고 윗부분에 나뭇잎이 무성하게 달린 나무, 야자수 등 수종도 다양하다. 벌써 다섯 시간 버스로 달려왔건만 여전히 산은 없다. 한동안은 초원만 이어지다 이제는 나무가 빽빽한 평야가 계속 이어진다.
들판에서도 이렇게 경제림이 울창할 수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산업화 정보화 시대 이전에는 아르헨티나를 따라잡을 나라가 세계에 과연 몇 나라나 있었을까. 세계 제1의 옥토를 자랑하는 나라 아닐까. 1차 산업 시대에는 단연 세계 최고의 부국이었으리라. 지금은 우리가 더 부국이지만 1965년 한국의 영농이민단 78명이 아르헨티나 주 정부가 제공하는 황무지 400ha를 불하 받으며 이민의 첫발을 뗐다고 한다. 일몰 시간이 지나자 팜파스 초원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콘코르디아라는 곳에 차가 멈추었다. 정거장이다 불과 몇 십 미터 우측에 우루구아이와 하천 국경을 이루는데 조금 더 가면 살토라는 마을이 있단다.
밤 9시가 되었다. 저녁 식사를 주려는지 또 플라스틱 식판을 하나씩 가져다 준다. 버스를 타고 가며 식사를 한다는 게 참 색다른 경험이다. 식사를 마치고는 커텐으로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 잠을 청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잠에서 깼다. 새벽 2시, 어디쯤 왔을까. 여기가 어딜까. 스마트폰으로 구글 지도를 본다. 아직 브라질과 아르헨 국경을 따라 북으로 향하는 도로 위다. 작은 마을을 통과하는데 이 이른 새벽에 누군가가 차에서 내린다. 가로등도 지쳤는지 희미한 불빛은 아득히 제 발등만을 밝힐 뿐이다. 버스는 또 달린다.
세상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화장실에 갔다. 사탕이 놓여 있고 컵과 생수병이 있다.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다시 2층에 오르려는데 두런두런 음성이 들린다. 앞쪽으로 보아 운전사와 승무원일 것이다.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서 일부러 나누는 대화일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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