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작은 文學
글쓰기의 외로움 때문인지 나를 위로해 주는 글이 있다. “군자저서전유구일인지지” 군자가 책을 써서 전하는 까닭은 나를 알아주는 오직 한사람을 위해서라는 다산 정약용의 글이다. 나는 이 말을 평소에도 즐겨 쓴다. 자주 썼지만, 나에겐 반복의 지루함을 넘어 내 삶을 끌고 가는 힘이었다. 배고플 때 먹는 밥이었다. 이 밥을 먹고 나면 눈앞을 가렸던 안개가 걷히고 길이 보였다. 어느 날 우편으로 온 ‘작은 文學’상반기호에 내 글 세,편이 실렸다. 보낸 곳을 확인하고 책상 위에 던져 놓았다가 늘 하던 대로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는 책을 펼쳤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편집인이나 발행인의 원고요청이 없었던 글이었다. 나는 그게 너무 신선했다. 글이 발행인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다산의 말대로 발행인은 나를 알아주는 오직 한 사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내 글을 읽으며 독자의 눈으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날 만난 작은 文學은 나 스스로 글쓰기에 자신감을 갖게 했다. 사물과 사람, 늘 가까이에서만 보던 것을 한 칸 떨어져서 보게 했다. 그것은 동양화의 여백이었다. 수필이 작가의 참신성과 솔직함 다양함이 묻어있고 글이 자기만의 색깔 자기만의 붓질이었다면 그런 수필은 사람들에게 읽힌다. 사람들에게 읽힌다는 건 좋은 수필이라는 뜻이다. 나도 그런 수필을 쓰고 싶어 한 주제를 정해놓으면 사유의 시간이 길다. 길면 길수록 글이 마음에 들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수필은 일기장이나 다름없다. 내가 보기에도 독자의 정서와 동떨어진 수필이 많은 것 같다. 말하자면 신변잡기 같은 글이다. 수필가는 사람들에게 무언가 힘이 되는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말은 쉽게 하지만 내가 10년 동안 써 보니 그런 수필쓰기가 말할 수 없이 힘이 든다. 확신하건데 글에 수필가의 삶의 내력이 얼마나 어떻게 녹아있느냐에 따라 사람들 손길이 머문다. 순전히 내 경험이다. 그렇게 쓴 글을 내가속한 문인협회 카페에 올렸을 때 방문객 숫자가 많았다. 어떤 글은 숫자가 세자리가 넘을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방문객이 일반 독자가 아니라 같은 문인이라는 생각에 없던 힘도 솟았다. 그것은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었고 내 삶을 추동(推動)하는 힘이었다. 다시 만난 작은 文學은 지쳐가는 내 삶에 등댓불이었다. 모두가 잠든 새벽 내리는 첫눈이었다. 내 마음을 포근히 감싸버렸다.
살다보면 하찮고 사소한 일 하나에 깨달음이 오는 경우가 있다. 불교에서는 수행승이 벼락같은 스승의 말 한 마디에 깨친 스님이 있는가 하면 밭 갈다 던진 돌멩이에 부딪힌 대나무 소리에 깨친 스님도 있다. 이렇듯 그 원인이 크고 작음이 아니라 자기와의 인연이 되고 안 됨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다시 만난 작은 文學이다. 그 인연의 줄기에서 가지가 뻗어 싹이 터고 잎이 생겨 꽃피어 열매 맺는다면 이보다 더 깊은 인연은 없다. 앞으로는 이런 인연을 더 바라지 않는다. 내 삶이 어찌될 줄 모르겠고 글 쓸 날도 얼마 안 남았다. 마음 같아선 죽는 날 까지 쓰고 싶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그럴 때마다 죽기 사흘 전에도 주해를 고쳐 썼다는 주희(朱熹)를 생각하지만 마음뿐이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나는 암환자이다 보니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많다. 보통사람에게 자기 죽음에 대해 묻는다면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나도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왜 그런지를 묻는다면 자기가 경험하지 않고서는 실제로 마음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나처럼 암에 걸리고 나면 죽음에 대해 생각지 않으려야 안할 수가 없다. 그때부터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생각해야하는 시점이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걸 알지만 코앞에서 죽음과 맞닥뜨리지 않고서는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사람이다. 메멘토 모리란 죽음을 기억하자는 말이다. 누구나 아는 이 말을 반복하는 것은 죽음을 기억하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가람은 삶의 자세부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고 사는 것과 모르고 사는 것은 삶에 질이 다르다. 내가 글 쓰며 자주 하는 말이지만, 잘 살면 잘 죽는다. 덧붙이자면 유행가 가사처럼 남이 하니 따라하는 사람과 자기 스스로 정말 죽음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길이 다르다.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그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담당의사로부터 삶에 시간이 얼마인가를 선고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도둑에게 아끼던 것을 도둑맞아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차이다. 도둑맞은 사람은 내가 왜 그랬나를 생각하게 되고 한번 도둑을 맞아본 사람은 그때부터 허술했던 자기 자신을 나무라게 되고 도둑을 대비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현관문 앞에 가본 사람과 안 가본사람은 뜨거운 쇳덩이를 손에 쥐어본 사람과 모르는 사람 차이 만큼이다. 우리가 평소에도 죽음을 기억하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천재지변이나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면 모르겠으나 집이나 병원침대에 누워 죽는다면 죽기 전 까지는 품격 있는 모습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죽어야 한다. 인정이 메마르고 각박해진 요즘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다. 묘비에다“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줄 알았다. 라고 했던 아일랜드 극작가 죠지 버나드 쇼처럼 제발 우리는 그런 말은 하지 말자.
한걸음 비켜서서
요즘 나를 편안하게 하는 일이 있다. 그게 뭔가 하면 내가 암에 걸린 게 젊었을 때가 아니라 나이 들어서라는 생각이다. 나는 그게 생각할수록 신통하다. 만약 혈기왕성하게 활동할 젊었을 때 이런 암이 걸렸더라면 정말 아무것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할 것 다 해보고 나이 들어 오늘 같은 몹쓸 암에 걸린 게 다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왜냐하면 내가 걸린 게 얼굴에 생긴 암이라 수술하고 나면 지금처럼 얼굴이 엉망이 되어버려 똑바로 살수 없기 버리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 눈감고 생각해 보면 잘못 살아 어차피 걸릴 암이라면 내 인생길에서 제길 걸을 수 있게 살짝 비껴서준 암이 신통하고 고맙다. 젊었을 때는 감당 못할 일들을 겪을 것 다 겪은 노년에 들어선 지금 나에게 그 숙제를 풀도록 했다. 어쩌면 운이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아픔이라도 젊을 때 겪는 거와 나이 들어 겪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난 뒤로 마음 깊은 곳에 생각하나가 자리 잡는다. 자기가 처한 환경이 더는 갈 수 없는 막다른 길이다 싶어도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길이 보이고 또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사람이 이기지 못할 일은 없다. 그와 함께 긍정의 힘도 믿는다. 아무리 위기에 처해있어도 자기가 된다고 생각하면 되는 법이다. 노년으로 들어선 지금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거나 한걸음 옆으로 비켜서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 항암으로 견디기 힘들 때도 그 지경을 여러 번 견딘 터라 조급한 마음에서 벗어나 언젠가 이 아픔이 지나가리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오래전 읽은 책 제목 중에 ‘바람이 너를 지나가게 하라’는 책이 있다. 주로 인디언 노인에 관한 이야기다.
읽으며 밑줄 친 글이다.“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우리가 빨리 달릴 수 없거나 멀리 걸을 수 없을 때가 온다. 삶의 여정이 끝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멀리 걸어왔고, 이제는 그 여행이 우리가 얻은 보상이요 힘이기 때문에 되돌아 볼 수 있는 삶을 갖고 있다. 우리는 지혜를 얻었다.